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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 (수20:1-9)

본문

18-19장의 말씀은 전에 땅 나누는 원리를 설교할 때 포함시켜 설교했으므로 더 이상 설교하지 않고 오늘은 20장을 설교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같은 뜻을 가진 하나님의 계시라는 뜻이요,
둘째는 옛날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그 뜻을 이제는 아들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오늘 말씀도 충분히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은 도피성 곧 피난처에 대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예수님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도피성에 대하여서는 민수기 34:9-34, 신19:1-13에서 설교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일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에 그 살인자가 죽음을 당한 자의 친족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여 놓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도피성 또는 피난처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피난처라고 고백되고 있는 것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습니다(시91:2,9; 14:6; 11:1; 46:1; 61:3; 62:7,8; 91:2; 142:5).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도피성이란 단순히 땅에 만들어 놓은 피난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피난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도피성을 만들도록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바로 도피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도록 하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모세와 여호수아 때에 말씀하신 도피성은 또한 예수님과도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피성이라면 예수님도 도피성이 되신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은 또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모세와 여호수아 때의 도피성이 어떻게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도피성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지정하셨습니다. 본문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택정하셨다는 말이 선택하여 지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선택하여 세웠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속죄자로 선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세우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영원히 하나님과 아들 관계인데 어떻게 선택하여 세우심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이지만 속죄자로서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선택하여 세우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이스라엘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1:31)고 했습니다.
둘째, 도피성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의 유일한 피난처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 역시 죄인의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피난처는 구약 가나안 땅의 유일한 피난처요 그리스도는 신약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그러므로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도피성이 높은 산지와 광야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20:7절에 나오는 도피성은 모두가 산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라고 했습니다. 7절에 나오는 도피성은 모두가 높은 산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는 "또 여리고 동 요단 저편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택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8절에는 르우변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에 베셀이 있습니다. 베셀이란 이름은 요새를 뜻합니다. 아마도 베셀이라는 이름은 광야에 있는 요새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길르앗라못'이란 길르앗에 있는 라못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하나의 고유명사로서 읽을 것이 아니라 길르앗이라는 지역에 있는 라못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길르앗도 숲이 많은 산지인데 그 중에서도 라못은 고지를 뜻하니 아마도 길르앗에 있던 라못은 산지 길르앗 중에서도 높은 곳을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산 골란 역시 바산 지역에 있는 골란을 말합니다. 바산은 기름지고 열매 풍성하고 돌 없는 평지를 말합니다. 옥이 지배하던 요단 강 동부의 북쪽입니다. 길르앗 북쪽 즉 야르묵 강에서부터 북쪽으로 헤르몬 산까지 지역을 두고 바산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있는 골란을 두고 오늘 8절에는 바산 골란이라고 했습니다. 골란이란 말은 '기쁨, 환희'를 뜻한다고 하기도 하고 '마음(뜻)을 바꾼다', '두려워 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의미를 가진 명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산에 있는 골란 외에 나머지 피난처들은 모두가 산지에 있고 혹은 광야 요새에 있는 샘입니다. 이것은 도피성의 안전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높은 곳과 요새는 바로 안전함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도피성의 이러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여호와를 피난처라고 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만큼 안전한 곳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높은 곳을 말할 때는 여호와 안에서 안전함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3: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했고, 신명기 32:13절에도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33:29절에서도 역시 높은 곳이 안전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 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피난처가 예수님을 예시해 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안전한 피난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성령님 안에서 영생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도피성은 어디서나 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도피성은 어디서나 갈 수 있는 적당한 장소에 배치되어 있었고 또 가기에 편리하도록 길을 닦아 두었기 때문입니다(신19:3).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도는 명백하여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지 믿음의 도리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고 따를 마음만 있으면 명백하게 이해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다섯째, '도피성 안에 있는 한' 살인자가 안전한 것 같이(수20;5,9)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죄인은 안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여섯째, 도피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음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일곱째,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죽음으로 죄인이 해방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인이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모든 요소들은 도피성이 구약의 여호와를 보여주는 것이요 또 신약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게 되고 또 장차 올 메시야가 줄 위대한 용서의 시대를 바라보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전한 도피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피성이 암시해 주었던 완전한 용서와 사죄의 시대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님 안에서 새 생명을 호흡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전함이 있다면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흔히 믿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할 때 우리가 가진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보호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안전은 이러한 안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러한 안전을 말한다면 주님 자신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고난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전은 이 세상의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잃어버려도 좋은 안전입니다. 기독신자의 안전은 이 세상의 것에 의해서 제한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과는 상관이 없는 안전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설교를 자세히 들을 분들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우리의 안전은 이 세상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전은 그리스도 자신이요 또 그리스도의 생명이신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님 안에 있는 자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이런 자를 세상이 망하게 하고 또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영원히 망하지도, 영원히 죽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다 잃은 후에도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안전이란 이러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 싸개 안에 감추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빼앗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46: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위협과 빼앗김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또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신자는 흙에서 난 사람이지만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는 육에서 난 사람이지만 더 이상 육이 아닙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영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죄에 매이지 마십시오. 죄에 끌려가지 말고 죄를 거부하고 던져 버리십시오. 어떤 죄도 신자를 맬 수 없습니다. 죄악의 기억과 아픔 등을 던져버리고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십시오. 신자는 더 이상 과거의 전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피난처인 성령님 안에 있는 자유자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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