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시는 하나님 (시139:1-24,눅15:1-10)
본문
하나님을 피하는 인간 본문인 시편에 보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 디로 피하리이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한 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고자 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 도가 허사임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는 장소는 없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시인이 다윗이라면 그가 우리야의 아내를 범한 후에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우리야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하므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한 번씩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 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범죄 하였을 때 그 동산에 숨어 하나님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 느냐"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전에는 정답던 주님 의 음성이 이제 두려워진 까닭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려할 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 게 맡겨주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여 하나님을 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 서 요나를 불러 니느웨로 보내셨을 때 그는 야훼의 낯 을 피하려고 일어나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서 하나님께 붙잡혀 다시 니느웨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책임도 벗어나려 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 받을 때도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그 소명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그 소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가운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땅 속에 묻어 놓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압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런 모든 것에서 도피하여 자유롭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걸리는 것은 우리를 지 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그의 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울 것 같은데 문제는 그에게서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하늘로 도망을 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시도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잡아 이 세상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두려 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 지 아니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천국을 이루고 자기가 하나님 노릇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더 큰 두려움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발 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사람들은 지옥으로 도망가려 합니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지옥 혹은 음부 즉 죽은 자들의 거처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기에 알맞은 장소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생각 한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이 압박하여 오는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길은 죽음이라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혹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되지못합니다. 거기에는 심 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를 탔다가 폭풍을 만난 뱃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요나를 지목하자, 그는 자신을 바다 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책임 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 속에 큰 물고 기를 준비하셨다가 요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또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과학을 발전시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온 우주를 다 정복하면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인간들은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 전할수록 살기 좋은 세계가 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가 생기고, 더 복잡한 세계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무수한 노력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 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하나님을 잊기 위하여 어둠 속으로 달아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쳐대면서 하나님 없이도 편안히 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한 그 어둠이 곧 빛으로 변하게 됨을 알 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 없이 머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 게 됩니다. 다윗왕은 자기가 지은 죄를 권력으로 은폐하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경험 을 통해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길은 없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집요(執拗)하게 도망가는 우리를 좇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우리를 하나님은 끝까지 좇아오시어 찾아내려 하십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깊이 잠들어 안심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어코 찾아내시어 그를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구원하려고 찾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까닭은 우리 를 심판하여 벌주려 하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하여 도망 다니는 인간을 찾으시려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 지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범죄한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1)고 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주로 범죄한 인간들을 책망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주므로 그들의 되를 대속(代贖)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가 나 오는데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 들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다"고 불평과 시비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인 세리와 죄인들을 책망하고 심판하기를 바랐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점이 두 가지인데 하 나는 목자나 여자가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열심히 찾으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무척 기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 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가 범 죄한 인간을 찾으러 온 것은 그들을 벌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요, 기쁨을 얻고자 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텔레비전 영화 '초원의 집'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소년이 친구와 함께 지하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선생님이 문을 여는 바람에 놀란 나머지 불붙은 곰방대를 그냥 버려둔 채 지하실에 서 도망쳐 나옵니다. 이로 인하여 불이 나서 맹아학교가 전소(全燒)되고, 그 소년의 눈먼 누이의 아기를 구하려던 한 보모와 그 아기가 함께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나중에 불탄 자리를 조사하다가 곰방대가 발견되므로 그 것이 화인(火因)임을 알게 됩니다. 이 소년은 이로 인해 고민을 합니다. 자기 누이는 아기를 잃고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누이를 기쁘게 하고 도와주려 하였 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이 소년은 집을 뛰쳐나와 도망 을 갑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이 소년의 아버지가 그를 찾아 나섭니다. 이 소년은 결사적으로 도망갑니다. 그는 자기의 죄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 음을 알고 결사적으로 도망을 갑니다. 아버지와 그 친구가 이 소년을 좇아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아들을 찾는 것은 벌 주려함이 아니라, 그를 도 우려고 함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도망을 하다가 마침 내 그 소년은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보모의 남편을 만나 용서를 받습니다. 그 후에 정신이 나갔던 그 소년의 누이가 온전해지고 불 타버린 자리에 다시 맹아학교가 세워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가 간직한 어쩔 수 없는 죄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저질러 놓은 이 무서운 전쟁의 비참과 그들이 파 괴하여 놓은 이 지구의 파멸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저질 러 놓은 이 무서운 죄악의 결과들을 보고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 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망가려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은 모든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찾으십니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이 죄악의 잔인한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도망 가지 말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결과가 너무 커서 진정 이것이 다 사함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잔인하고 처참한 현실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현대인 들은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값싸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인류가 저질러 온 모든 죄악이 용서될 수 있 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사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그 속에 받 아들여야 하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저질러지고 있는 모든 죄악의 결과들을 보면서 우리 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그 신비하고 오묘한 섭리를 우리가 다 알 지는 못하지만 겸손함으로 그에게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들 될 자격은 없고, 다만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되는 죄인들입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 일어 나고 있는 잔인한 죄악들은 우리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일어나는 이 땅 위의 비극들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의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 픔을 극복하고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 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픔을 알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겸손 함으로 나갑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며, 우리를 주의 참된 자녀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1:18-20)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범죄 하였을 때 그 동산에 숨어 하나님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 느냐"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전에는 정답던 주님 의 음성이 이제 두려워진 까닭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려할 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 게 맡겨주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여 하나님을 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 서 요나를 불러 니느웨로 보내셨을 때 그는 야훼의 낯 을 피하려고 일어나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서 하나님께 붙잡혀 다시 니느웨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책임도 벗어나려 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 받을 때도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그 소명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그 소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가운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땅 속에 묻어 놓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압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런 모든 것에서 도피하여 자유롭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걸리는 것은 우리를 지 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그의 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울 것 같은데 문제는 그에게서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하늘로 도망을 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시도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잡아 이 세상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두려 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 지 아니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천국을 이루고 자기가 하나님 노릇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더 큰 두려움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발 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사람들은 지옥으로 도망가려 합니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지옥 혹은 음부 즉 죽은 자들의 거처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기에 알맞은 장소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생각 한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이 압박하여 오는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길은 죽음이라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혹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되지못합니다. 거기에는 심 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를 탔다가 폭풍을 만난 뱃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요나를 지목하자, 그는 자신을 바다 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책임 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 속에 큰 물고 기를 준비하셨다가 요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또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과학을 발전시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온 우주를 다 정복하면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인간들은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 전할수록 살기 좋은 세계가 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가 생기고, 더 복잡한 세계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무수한 노력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 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하나님을 잊기 위하여 어둠 속으로 달아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쳐대면서 하나님 없이도 편안히 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한 그 어둠이 곧 빛으로 변하게 됨을 알 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 없이 머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 게 됩니다. 다윗왕은 자기가 지은 죄를 권력으로 은폐하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경험 을 통해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길은 없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집요(執拗)하게 도망가는 우리를 좇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우리를 하나님은 끝까지 좇아오시어 찾아내려 하십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깊이 잠들어 안심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어코 찾아내시어 그를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구원하려고 찾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까닭은 우리 를 심판하여 벌주려 하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하여 도망 다니는 인간을 찾으시려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 지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범죄한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1)고 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주로 범죄한 인간들을 책망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주므로 그들의 되를 대속(代贖)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가 나 오는데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 들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다"고 불평과 시비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인 세리와 죄인들을 책망하고 심판하기를 바랐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점이 두 가지인데 하 나는 목자나 여자가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열심히 찾으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무척 기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 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가 범 죄한 인간을 찾으러 온 것은 그들을 벌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요, 기쁨을 얻고자 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텔레비전 영화 '초원의 집'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소년이 친구와 함께 지하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선생님이 문을 여는 바람에 놀란 나머지 불붙은 곰방대를 그냥 버려둔 채 지하실에 서 도망쳐 나옵니다. 이로 인하여 불이 나서 맹아학교가 전소(全燒)되고, 그 소년의 눈먼 누이의 아기를 구하려던 한 보모와 그 아기가 함께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나중에 불탄 자리를 조사하다가 곰방대가 발견되므로 그 것이 화인(火因)임을 알게 됩니다. 이 소년은 이로 인해 고민을 합니다. 자기 누이는 아기를 잃고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누이를 기쁘게 하고 도와주려 하였 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이 소년은 집을 뛰쳐나와 도망 을 갑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이 소년의 아버지가 그를 찾아 나섭니다. 이 소년은 결사적으로 도망갑니다. 그는 자기의 죄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 음을 알고 결사적으로 도망을 갑니다. 아버지와 그 친구가 이 소년을 좇아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아들을 찾는 것은 벌 주려함이 아니라, 그를 도 우려고 함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도망을 하다가 마침 내 그 소년은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보모의 남편을 만나 용서를 받습니다. 그 후에 정신이 나갔던 그 소년의 누이가 온전해지고 불 타버린 자리에 다시 맹아학교가 세워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가 간직한 어쩔 수 없는 죄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저질러 놓은 이 무서운 전쟁의 비참과 그들이 파 괴하여 놓은 이 지구의 파멸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저질 러 놓은 이 무서운 죄악의 결과들을 보고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 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망가려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은 모든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찾으십니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이 죄악의 잔인한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도망 가지 말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결과가 너무 커서 진정 이것이 다 사함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잔인하고 처참한 현실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현대인 들은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값싸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인류가 저질러 온 모든 죄악이 용서될 수 있 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사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그 속에 받 아들여야 하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저질러지고 있는 모든 죄악의 결과들을 보면서 우리 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그 신비하고 오묘한 섭리를 우리가 다 알 지는 못하지만 겸손함으로 그에게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들 될 자격은 없고, 다만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되는 죄인들입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 일어 나고 있는 잔인한 죄악들은 우리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일어나는 이 땅 위의 비극들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의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 픔을 극복하고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 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픔을 알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겸손 함으로 나갑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며, 우리를 주의 참된 자녀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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