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시130:1-8)
본문
1.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생의 깊은 웅덩이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품었던 뜻이 좌절되고, 현실의 각박한 인간관계들 속에서 도무지 혜여나올 수 없는 그런 깊은 웅덩이들 속에 빠져들어 갈 경우가 많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군의 필로폰 사건으로 다 시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일말의 연민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일찍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총탄에 쓰러지는 비극을 안고 그 어린 가슴속에 파여진 깊은 웅덩이가 얼마나 컸으면, 어른이된 오늘까지도 그 충 격의 웅덩이에서 혜여나지 못하고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측은한 생각마저 금할 길 없습니다. 세월과 함께 쌓이는 우리의 삶 자체가 어쩌면 가슴에 멍들인지도 모릅니다. 보다 높은 이상(理想)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누구나 한번은 '이것이 과연 인생인가'. 고 깊은 한숨의 웅덩이 속에 빠져버릴때가 다 있다고 봅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60-70 고개를 넘어서 이제는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세 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살아온 세월의 삶의 자취마다 파 여진 생의 웅덩이들이 한편으로는 아련하게 감상으로 느껴지는 것은 누구나 예 외 일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의 시인도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 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다는 말은 인생의 비극과 고난을 얘기하는 말 입니다. 그런 비극과 고난의 웅덩이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인생은 어떻게 생각하면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고, 또한 그 고난으로 마 침내 구원을 받게 되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고통과 고난의 심연(深淵)에서라 야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고난의 웅덩이들이 파여 있습니까! 저는 아침마다 텔례비죤에서 가슴에 깊은 한(恨)과 파여진 웅덩이들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 주변에는 저들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들과 같은 사정을 가지고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슴을 헤쳐 볼 수만 있다면 가슴마다 파여진 깊은 골짜기들, 메울 수 없는 깊은 웅덩이들이 다 있을 줄 믿습니다. 어떤 이는 가난이란 것 때문에 깊은 웅덩이에서 혜여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 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식으로 인한 웅덩이들이 파여 있고, 어떤 이들은 잘못된 결혼으로, 또 어떤 이들은 건강 때문에 깊은 웅덩이에 빠 져 있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이 마음의 고통 입니다. 동물들은 생리적 고통만 있을 뿐, 저들에게는 정신적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육체적 고통도 있지만, 더 깊은 고통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 고통 외에 사회적, 심리적, 고통이 더 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나, 죄의 끈질긴 추적과 유혹들, 거기에서부터 오는 갈등의 '영적 고통'이 있습니다.
2. 그러면 이 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어디로 향하여야 하겠는가
그런데 보면 사람들은 이런 인생의 깊은 고통의 웅덩이에서 제각기 방향을 달리합니다.
1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만 닥치는가 고 불평하면서 술주정뱅이가 되어 비틀거리던가,
2 아니면 다시 혜여날 수 없는 깊은 체념의 절망으로 떨어 져 버리던가,
3 아니면 신앙의 세계로 향하던가, 이렇게 3가지 방향으로 나뉘게 됩니다. 오늘 이 시편 기자는 맨 나중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를 부르짖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깊은 수렁에서 오리려 주께 향한 마음이 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꼭 배워 할 진리의 교훈은,
1 내 인생의 깊은 웅덩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2 그 웅덩이에서 어디로 방향을 돌려야하겠는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 에게나 생의 웅덩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罪) 로 인하여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한 고난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도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시면 누가 서리 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오늘까지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 세상'이 되 었습니다.(롬8:22) 그러나 그 탄식이 소망이 없는 탄식이 아니라 오직 주께 향해 부르짖는 탄식입니다. 그 탄식의 깊은 웅덩이들이 도리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 고, 감격과 감사와 보람을 찾아 사명에서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엘 가 도 생의 깊은 웅덩이들이 항상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면면이 모두 깊은 곳에 서 주를 찾고 도리어 감격의 생을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깡패가 변해서 복음 증거자가되고, 술주정뱅이가 변해서 훌륭한 교사가 되고, 호색과 방탕 자가 변하여 성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 인생의 깊은 웅덩이들 속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비극과 고난에서 성숙되어 가고, 그 고난의 심연 속에 서 참된 인생의 결실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보면, 저도 이제야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바를 조금 느끼게 되는 것 같 습니다. 마음의 깊은 웅덩이들이 없는 한, 성숙된 인물은 못된다고 봅니다. 어느 장로님이 교회의 젊은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젊어 보지 못한 늙은이가 있는 줄 아나 그러나 늙어 본 젊은이는 없어!" 라고. 그만큼 나이 많은 분들은 가슴에 웅덩이들을 몇 개씩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도, 행동도, 깊어지고 남을 이해하는 폭(幅)도 넓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난을 통하여 성숙되고, 고난의 웅덩이들 속에서 비로소 주 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 신앙 하지만, 고난의 웅덩이들 속에 빠져 보지 않는 한, 신앙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어떤 유명한 음악 교사가 자기 문하에서 사사 받는 한 제자에 관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참으로 훌륭한 가수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노래에는 무엇인지 모 르게 한가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인생은 지금까지 그 여자에게 너무나 친절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만 하면 그 여자는 구라파에서 제일 가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상처난 가슴, 인생의 고난과 비극이 무엇인지를 안, 그 가슴에서라야 참다운 음악이나 예술이 나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석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냇물에서 돌을 치워 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 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 격언을 말씀으로 재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했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다- 이런 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의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도 부르짖을 줄 모를 때가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의 역사를 보면 숫한 외침과 내환으로 어려움을 당했 을 때. 그때마다 성도들의 울부짖은 기도가 있었습니다. 일제 36년간의 탄압과, 6.25의 전쟁 중에서, 그리고 4.19, 5.16 의 사회적 변화를 맞을 때마다, 이 나라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과거에 비하면 부르짖는 기도가 뜸해졌음을 봅니다. 그만큼 모두들 안일함에 빠져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과연 파숫군이 아침을 기 다리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느냐입니다.
3. 생의 깊은 웅덩이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 같이 '말씀'을 바라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하 겠습니다. 마음에 파여진 상처들, 도리킬수 없는 삶의 깊은 웅덩이들 속에서 그 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으로 해결할 것뿐입니다. 자신의 깊은 삶의 웅덩이들을 돈으로 해결하려 고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물질로 보상받으려고, 명예로 메우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자신의 웅덩이들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더욱더 허무해지고 허탈 해질 것뿐입니다.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게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이기네" 라는 찬송 처럼 생의 깊은 웅덩이를 메울 수 있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는것처럼 '말씀'의 약속을 바라며 기다리는 믿음뿐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오듯이 도리어 깊은 상처 속에서 하나님을 만 날 수 있는 새벽은 가까워 옵니다.
그러므로 생의 깊은 곳에서 주를 찾고 부르짖 어야 하겠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 속에서 빠져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깊은데서 아뢰는 기도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의 변두리에서 아뢰지 말고 깊은 곳에서 주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경중 베드로에 대하여 언제나 친근감이 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완 벽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완벽하면 친근감보다는 자연히 멀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 습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생활 수단을 삼았던 어부였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지식도 갖지 못하고, 배운 것도 없이 그저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드리우며 그 날그날 살아가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후, 그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3년동 안 주님을 가장 가깝게 따라다녔고, 또 제일 앞장서서 주님께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께서 붙잡혀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는 그런 위기를 당하였을 때 그만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가 맹세코 주님을 부인할 때 곧 닭이 울었습니다. 닭우는 소리에 그만 주님 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성경을 보면 '밖에 나가 심히 통곡 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더라' 고 한 것을 보면, 베드로 의 흘린 눈물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 속에 모든 것이 다 해결 된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얕은 곳에서, 얄팍한 기도들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좀더 깊은 자리에서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깊은 자리란 바로 깊은 웅 덩이들입니다. 멍들고 파여진 상처받은 가슴속에서, 도리어 자기 부정을 통한 기도가 깊어졌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는 여유가 있는 기도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박한 자리에서 깊은데서 부르짖는 기도들 속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1 때로는 다른 길로 응답 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시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다른 길로 이루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때로는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응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토록 간구했으나 사라에게 잉태의 기회를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삭을 받치라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겠지만, 이미 하나님은 모리아산에 양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을 들으십니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신앙으로 응답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은 헛된 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약속을 어기지도 아니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현재도 하나님은 깊은데서 아뢰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적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다는 말은 인생의 비극과 고난을 얘기하는 말 입니다. 그런 비극과 고난의 웅덩이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인생은 어떻게 생각하면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고, 또한 그 고난으로 마 침내 구원을 받게 되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고통과 고난의 심연(深淵)에서라 야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고난의 웅덩이들이 파여 있습니까! 저는 아침마다 텔례비죤에서 가슴에 깊은 한(恨)과 파여진 웅덩이들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 주변에는 저들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들과 같은 사정을 가지고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슴을 헤쳐 볼 수만 있다면 가슴마다 파여진 깊은 골짜기들, 메울 수 없는 깊은 웅덩이들이 다 있을 줄 믿습니다. 어떤 이는 가난이란 것 때문에 깊은 웅덩이에서 혜여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 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식으로 인한 웅덩이들이 파여 있고, 어떤 이들은 잘못된 결혼으로, 또 어떤 이들은 건강 때문에 깊은 웅덩이에 빠 져 있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이 마음의 고통 입니다. 동물들은 생리적 고통만 있을 뿐, 저들에게는 정신적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육체적 고통도 있지만, 더 깊은 고통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 고통 외에 사회적, 심리적, 고통이 더 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나, 죄의 끈질긴 추적과 유혹들, 거기에서부터 오는 갈등의 '영적 고통'이 있습니다.
2. 그러면 이 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어디로 향하여야 하겠는가
그런데 보면 사람들은 이런 인생의 깊은 고통의 웅덩이에서 제각기 방향을 달리합니다.
1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만 닥치는가 고 불평하면서 술주정뱅이가 되어 비틀거리던가,
2 아니면 다시 혜여날 수 없는 깊은 체념의 절망으로 떨어 져 버리던가,
3 아니면 신앙의 세계로 향하던가, 이렇게 3가지 방향으로 나뉘게 됩니다. 오늘 이 시편 기자는 맨 나중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를 부르짖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깊은 수렁에서 오리려 주께 향한 마음이 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꼭 배워 할 진리의 교훈은,
1 내 인생의 깊은 웅덩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2 그 웅덩이에서 어디로 방향을 돌려야하겠는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 에게나 생의 웅덩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罪) 로 인하여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한 고난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도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시면 누가 서리 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오늘까지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 세상'이 되 었습니다.(롬8:22) 그러나 그 탄식이 소망이 없는 탄식이 아니라 오직 주께 향해 부르짖는 탄식입니다. 그 탄식의 깊은 웅덩이들이 도리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 고, 감격과 감사와 보람을 찾아 사명에서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엘 가 도 생의 깊은 웅덩이들이 항상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면면이 모두 깊은 곳에 서 주를 찾고 도리어 감격의 생을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깡패가 변해서 복음 증거자가되고, 술주정뱅이가 변해서 훌륭한 교사가 되고, 호색과 방탕 자가 변하여 성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 인생의 깊은 웅덩이들 속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비극과 고난에서 성숙되어 가고, 그 고난의 심연 속에 서 참된 인생의 결실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보면, 저도 이제야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바를 조금 느끼게 되는 것 같 습니다. 마음의 깊은 웅덩이들이 없는 한, 성숙된 인물은 못된다고 봅니다. 어느 장로님이 교회의 젊은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젊어 보지 못한 늙은이가 있는 줄 아나 그러나 늙어 본 젊은이는 없어!" 라고. 그만큼 나이 많은 분들은 가슴에 웅덩이들을 몇 개씩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도, 행동도, 깊어지고 남을 이해하는 폭(幅)도 넓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난을 통하여 성숙되고, 고난의 웅덩이들 속에서 비로소 주 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 신앙 하지만, 고난의 웅덩이들 속에 빠져 보지 않는 한, 신앙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어떤 유명한 음악 교사가 자기 문하에서 사사 받는 한 제자에 관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참으로 훌륭한 가수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노래에는 무엇인지 모 르게 한가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인생은 지금까지 그 여자에게 너무나 친절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만 하면 그 여자는 구라파에서 제일 가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상처난 가슴, 인생의 고난과 비극이 무엇인지를 안, 그 가슴에서라야 참다운 음악이나 예술이 나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석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냇물에서 돌을 치워 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 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 격언을 말씀으로 재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했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다- 이런 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의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도 부르짖을 줄 모를 때가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의 역사를 보면 숫한 외침과 내환으로 어려움을 당했 을 때. 그때마다 성도들의 울부짖은 기도가 있었습니다. 일제 36년간의 탄압과, 6.25의 전쟁 중에서, 그리고 4.19, 5.16 의 사회적 변화를 맞을 때마다, 이 나라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과거에 비하면 부르짖는 기도가 뜸해졌음을 봅니다. 그만큼 모두들 안일함에 빠져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과연 파숫군이 아침을 기 다리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느냐입니다.
3. 생의 깊은 웅덩이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 같이 '말씀'을 바라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하 겠습니다. 마음에 파여진 상처들, 도리킬수 없는 삶의 깊은 웅덩이들 속에서 그 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으로 해결할 것뿐입니다. 자신의 깊은 삶의 웅덩이들을 돈으로 해결하려 고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물질로 보상받으려고, 명예로 메우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자신의 웅덩이들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더욱더 허무해지고 허탈 해질 것뿐입니다.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게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이기네" 라는 찬송 처럼 생의 깊은 웅덩이를 메울 수 있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는것처럼 '말씀'의 약속을 바라며 기다리는 믿음뿐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오듯이 도리어 깊은 상처 속에서 하나님을 만 날 수 있는 새벽은 가까워 옵니다.
그러므로 생의 깊은 곳에서 주를 찾고 부르짖 어야 하겠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 속에서 빠져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깊은데서 아뢰는 기도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의 변두리에서 아뢰지 말고 깊은 곳에서 주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경중 베드로에 대하여 언제나 친근감이 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완 벽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완벽하면 친근감보다는 자연히 멀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 습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생활 수단을 삼았던 어부였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지식도 갖지 못하고, 배운 것도 없이 그저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드리우며 그 날그날 살아가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후, 그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3년동 안 주님을 가장 가깝게 따라다녔고, 또 제일 앞장서서 주님께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께서 붙잡혀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는 그런 위기를 당하였을 때 그만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가 맹세코 주님을 부인할 때 곧 닭이 울었습니다. 닭우는 소리에 그만 주님 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성경을 보면 '밖에 나가 심히 통곡 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더라' 고 한 것을 보면, 베드로 의 흘린 눈물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 속에 모든 것이 다 해결 된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얕은 곳에서, 얄팍한 기도들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좀더 깊은 자리에서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깊은 자리란 바로 깊은 웅 덩이들입니다. 멍들고 파여진 상처받은 가슴속에서, 도리어 자기 부정을 통한 기도가 깊어졌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는 여유가 있는 기도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박한 자리에서 깊은데서 부르짖는 기도들 속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1 때로는 다른 길로 응답 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시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다른 길로 이루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때로는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응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토록 간구했으나 사라에게 잉태의 기회를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삭을 받치라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겠지만, 이미 하나님은 모리아산에 양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생의 깊은 웅덩이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을 들으십니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신앙으로 응답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은 헛된 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약속을 어기지도 아니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현재도 하나님은 깊은데서 아뢰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적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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