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 (시116:3-10)
본문
시편 116편을 누가 작시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칼빈(Calvin)이나 매튜 헨리 (Matthew Henry)라고하는 주석가들은 이 시편 116편은 다윗이 지은 시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몽진(몽진)의 길에서 고통을 당할 때에 지은 시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3절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 을 만났을 때에'라는 말씀을 볼 때, 그가 불가항력적(불가항력적)인 고난을 당하 여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의 줄'이란 극심한 고통을 표현 하는 말입니다. 마치 제물을 잡을 때에 줄로 묶어서 죽이듯이 죽음의 고통에 속박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을 괴롭히는 사망의 줄이 시시각각 그를 죄어옴으로 그는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음부의 고통'이란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고통'이라는 말을 '메차레(mech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물'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 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 바다나 강에 그물을 던져서 잡듯이 다윗은 원수가 던지는 그물에 걸려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순간 순간 죽음이 다 가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냥꾼이 토끼를 사냥할 때에 좁은 길로 몰아넣어 도 망칠 수 없게 만들어 꼼짝없이 붙잡히게 하는 것처럼 다윗은 사망이라는 사냥꾼에 게 쫓기어 더이상 사망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4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 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부르짖 었습니다. 사람이 극한상황(극한상황)에 이르렀을 때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께 매어달려 부르짖는 길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 고, 신악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왜냐 그 기도만이 참된 기도요,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이요, 또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우리 주님 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누구에게 기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뿐이 심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것 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수공물에 불과하고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16장 12절에 보면 '옛날 모압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의 전당, 곧 산당에 들어가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 가 기도했는데 무효했다 응답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이 바알신을 섬기는 무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단을 쌓 아놓고 부르짖었습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오 후쯤 되어서는 창과 칼을 가치고 자기네 몸을 상하면서 피를 흘리면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었지만, 아무소리도 없었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 제단 을 쌓고, "하나님,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자 즉시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해 주셨 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 여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겁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은 은혜 로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이다'라고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줄이 그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그를 괴롭힐 때에도 "하나님, 내 가 억울함을 당하고 심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분명히 나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요, 인자하 신 분이시요, 자비로우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자 비로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얼마나 자비롭습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날 손님 한분을 초청해서 식사대접을 하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식사기도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막 먹으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화가나서 "이 못된 놈, 고약한 놈, 기도도 드리지 아니하고 감사도 드 리지 아니하고 음식을 처먹어"하고 야단을 치고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저녁시간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깨우시면서 "아브라함아, 네 집에 왔던 나그네가 어 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하나님, 그 인간 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고약한 놈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쫓아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누가 너더러 그를 심판하라 하더냐 나는 수십년 동안 그를 용서해 왔다.
그런데 너는 하룻밤도 용서할 수 없더냐 내가 네게 베푼 그 숱한 자비를 통 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느냐"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본받아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성도 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티(Peti)'라고 하는데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단순한 사람, 무슨 말이든지 믿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경험이 부족하여 무력한 자를 하나님이 도와주신 다'는 뜻입니다. 반면 이 말씀의 의미는 말씀을 거역하고 완고한 어리석은 자를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시지 만, 마음이 교만하여 말씀을 거역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용납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마음의 자세로 예배에 참예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극장에 가서 연극을 구경하는것처럼, '목사님은 연극의 주인공이고, 하나님께서는 연출을 하시고, 성도들인 우리들은 예배를 평가하는 심판자이다' 그렇 게 생각하면서 예배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참으로 은 혜로왔다", "오늘 설교는 시원찮았는데", "오늘 성가대 찬송은 왜 그렇게 시원찮 았어" 그런식으로 평가하고 심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왜 그렇게 빨랐는지 몰라, 기도가 왜 그렇게 길지 왜 그렇게 짧았지" 이런식으로 설교도 판단하고 목사님도 심판하는 그런 성도들이 더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주연배우는 성도 여러분 한분 한분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목사님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예배에 있어서 연출가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받으시는 분, 예배를 심판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보시고, "오늘 네가 드린 예배는 참으로 훌륭했다. 내 가 그 예배를 열납했다." 이렇게 하나님께 열납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네가 드린 예배는 정성이 모자랐다. 내 종을 통해서 내 음성을 네게 들려주 었거늘, 그 말씀을 받는 자세가 왜 그랬느냐 내 말로 받지 아니하고 졸았지 않느 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지 않았느냐 입술로는 '아멘'하고 속으로는 '노멘'하였지 않았느냐"라고 하나님께 판단을 받는다고 하면, 그 예배는 헛 에배 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 자신이, 여러분 한분 한분이 예배의 주역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 여 예배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군대에 대신 갈 수 없고 남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대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대신 예배를 드릴 수 없고, 대신 천국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잘 믿으니까 마누라 치맛자 락만 붙잡으면 천국에 쑥 들어갈꺼다' 천만의 말씀, 대신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바쁘니까 당신이 가서 내 대신 예배를 드려주겠어' 천만의 말씀, 예배는 자신 이 드려야지 가족일지라도 대신 예배를 드려줄 순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정성을 다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물질을 드리고 그렇게 해서 신령과 진 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6절 하반절에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낮게 되 다' 이는 히브리어로 '달랄(Dalal)'이라는 말인데, '연약하다, 비틀거리다, 실패 하다, 매달리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불안정하고 위험하 며 모든 것이 고갈되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의미하는 겁니다. 다윗이 그런 상황 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 "오냐,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라 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자세로 기도를 올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구 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구하다'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아나(Ana)'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애 곡하다, 슬퍼하다, 탄식하다, 탄원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구원해 주 소서 하고 애곡하여 슬퍼하며 탄식하며 탄원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옛날 히스기야왕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당신의 수 명이 다했으니 자손들에게 유언이나 남기고 죽음의 때를 기다리라'하고 예언을 했 습니다.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벽을 향하여 세상과 단절 을 해버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탄식하며 탄원하는 기도를 올리 게 된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아나(Ana)의 기도, 탄식하는 기도, 구하는 기도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셨는데 그 수명을 15년이 나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오래전에 태풍 어빙호가 남해안을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수십척의 배가 파도에 밀려서 방파제에 부딪혀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인도양에 가서 조 업을 끝내고 부산항으로 돌아오던 배 한척도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 장이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방향을 바꾸어라! 태풍이 불어오는 쪽으로 엔진을 걸어서 전속력으로 달려가라!"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전속력으로 태풍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밤새도록 달려 나갔습니다. 아침이 되 자 풍랑이 멎었습니다. 바람이 잔잔해져서 주위환경을 바라보니까 얼마 전진하지는 못했지만 희한하게도 태풍을 향해서 전진했던 그 배는 깨어지지 않고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바람 부는대로 떠밀려 갔던 배들, 태풍을 향하지 못하고 태풍을 등 지고 태풍을 따라 밀려갔던 배들은 전부 다 방파제에 부딪혀서 깨어져 버리고 말 았던 것입니다. 위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환난과 풍파를 당했을 적에 낙심하고 좌절하여 뒤로 물러가 버리면 안됩니다. 그 환난과 풍랑을 향해서 힘차 게 믿음의 노를 저어서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앞으로 앞으로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서 승리하게 되 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다윗은 어떤 기도응답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을 상고해 보면
첫째로,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비명으로 죽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헬리콥터를 타고 영화촬영을 하다가 불쌍하 게 죽은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데모하는 학생들에 의해서 비명에 죽는 사람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끔찍하게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알살롬의 난에 의해서 몽진길에 오르는 비운을 맛보고 눈물 을 흘리며 요단강 나룻터를 건너가기는 했지마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생명을 생명싸개 안에 지켜주심으로 비운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두번째로 이 세상의 슬픈 눈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 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다윗은 슬픈 눈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을 해서 왕의 자리에 복귀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 세상의 험악한 행로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험악 한 곳입니다. 서울시내에서 날마다 400명의 어린이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100명씩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200쌍씩 결혼을 하지마는, 반면 그중에서 30쌍씩 이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해서 그렇게 이혼을 하겠습니까 이 세상이 험한 곳이어서, 사탄 마귀의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원치않는 그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험악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난과 슬픔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할 대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 목숨을 내 대고 부르짖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슬퍼하는 기도, 애원하는 기도, 탄원하는 기도를 올려서 눈물에서, 넘어짐에서 건짐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내가 서원한 바를 하나님께 갚으리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병들어 보기 전에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병상 에 누워보면 비로소 건강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지 느끼게 됩니다.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유스럽게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는 것,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은 아파보기 전에는 그 은혜가 얼마 나 감사하고 큰 것임을 모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큰 은혜들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 를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이요, 또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우리 주님 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누구에게 기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뿐이 심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것 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수공물에 불과하고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16장 12절에 보면 '옛날 모압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의 전당, 곧 산당에 들어가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 가 기도했는데 무효했다 응답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이 바알신을 섬기는 무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단을 쌓 아놓고 부르짖었습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오 후쯤 되어서는 창과 칼을 가치고 자기네 몸을 상하면서 피를 흘리면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었지만, 아무소리도 없었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 제단 을 쌓고, "하나님,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자 즉시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해 주셨 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 여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겁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은 은혜 로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이다'라고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줄이 그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그를 괴롭힐 때에도 "하나님, 내 가 억울함을 당하고 심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분명히 나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요, 인자하 신 분이시요, 자비로우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자 비로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얼마나 자비롭습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날 손님 한분을 초청해서 식사대접을 하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식사기도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막 먹으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화가나서 "이 못된 놈, 고약한 놈, 기도도 드리지 아니하고 감사도 드 리지 아니하고 음식을 처먹어"하고 야단을 치고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저녁시간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깨우시면서 "아브라함아, 네 집에 왔던 나그네가 어 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하나님, 그 인간 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고약한 놈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쫓아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누가 너더러 그를 심판하라 하더냐 나는 수십년 동안 그를 용서해 왔다.
그런데 너는 하룻밤도 용서할 수 없더냐 내가 네게 베푼 그 숱한 자비를 통 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느냐"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본받아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성도 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티(Peti)'라고 하는데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단순한 사람, 무슨 말이든지 믿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경험이 부족하여 무력한 자를 하나님이 도와주신 다'는 뜻입니다. 반면 이 말씀의 의미는 말씀을 거역하고 완고한 어리석은 자를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시지 만, 마음이 교만하여 말씀을 거역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용납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마음의 자세로 예배에 참예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극장에 가서 연극을 구경하는것처럼, '목사님은 연극의 주인공이고, 하나님께서는 연출을 하시고, 성도들인 우리들은 예배를 평가하는 심판자이다' 그렇 게 생각하면서 예배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참으로 은 혜로왔다", "오늘 설교는 시원찮았는데", "오늘 성가대 찬송은 왜 그렇게 시원찮 았어" 그런식으로 평가하고 심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왜 그렇게 빨랐는지 몰라, 기도가 왜 그렇게 길지 왜 그렇게 짧았지" 이런식으로 설교도 판단하고 목사님도 심판하는 그런 성도들이 더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주연배우는 성도 여러분 한분 한분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목사님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예배에 있어서 연출가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받으시는 분, 예배를 심판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보시고, "오늘 네가 드린 예배는 참으로 훌륭했다. 내 가 그 예배를 열납했다." 이렇게 하나님께 열납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네가 드린 예배는 정성이 모자랐다. 내 종을 통해서 내 음성을 네게 들려주 었거늘, 그 말씀을 받는 자세가 왜 그랬느냐 내 말로 받지 아니하고 졸았지 않느 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지 않았느냐 입술로는 '아멘'하고 속으로는 '노멘'하였지 않았느냐"라고 하나님께 판단을 받는다고 하면, 그 예배는 헛 에배 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 자신이, 여러분 한분 한분이 예배의 주역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 여 예배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군대에 대신 갈 수 없고 남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대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대신 예배를 드릴 수 없고, 대신 천국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잘 믿으니까 마누라 치맛자 락만 붙잡으면 천국에 쑥 들어갈꺼다' 천만의 말씀, 대신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바쁘니까 당신이 가서 내 대신 예배를 드려주겠어' 천만의 말씀, 예배는 자신 이 드려야지 가족일지라도 대신 예배를 드려줄 순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정성을 다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물질을 드리고 그렇게 해서 신령과 진 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6절 하반절에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낮게 되 다' 이는 히브리어로 '달랄(Dalal)'이라는 말인데, '연약하다, 비틀거리다, 실패 하다, 매달리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불안정하고 위험하 며 모든 것이 고갈되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의미하는 겁니다. 다윗이 그런 상황 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 "오냐,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라 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자세로 기도를 올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구 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구하다'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아나(Ana)'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애 곡하다, 슬퍼하다, 탄식하다, 탄원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구원해 주 소서 하고 애곡하여 슬퍼하며 탄식하며 탄원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옛날 히스기야왕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당신의 수 명이 다했으니 자손들에게 유언이나 남기고 죽음의 때를 기다리라'하고 예언을 했 습니다.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벽을 향하여 세상과 단절 을 해버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탄식하며 탄원하는 기도를 올리 게 된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아나(Ana)의 기도, 탄식하는 기도, 구하는 기도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셨는데 그 수명을 15년이 나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오래전에 태풍 어빙호가 남해안을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수십척의 배가 파도에 밀려서 방파제에 부딪혀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인도양에 가서 조 업을 끝내고 부산항으로 돌아오던 배 한척도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 장이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방향을 바꾸어라! 태풍이 불어오는 쪽으로 엔진을 걸어서 전속력으로 달려가라!"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전속력으로 태풍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밤새도록 달려 나갔습니다. 아침이 되 자 풍랑이 멎었습니다. 바람이 잔잔해져서 주위환경을 바라보니까 얼마 전진하지는 못했지만 희한하게도 태풍을 향해서 전진했던 그 배는 깨어지지 않고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바람 부는대로 떠밀려 갔던 배들, 태풍을 향하지 못하고 태풍을 등 지고 태풍을 따라 밀려갔던 배들은 전부 다 방파제에 부딪혀서 깨어져 버리고 말 았던 것입니다. 위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환난과 풍파를 당했을 적에 낙심하고 좌절하여 뒤로 물러가 버리면 안됩니다. 그 환난과 풍랑을 향해서 힘차 게 믿음의 노를 저어서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앞으로 앞으로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서 승리하게 되 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다윗은 어떤 기도응답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을 상고해 보면
첫째로,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비명으로 죽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헬리콥터를 타고 영화촬영을 하다가 불쌍하 게 죽은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데모하는 학생들에 의해서 비명에 죽는 사람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끔찍하게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알살롬의 난에 의해서 몽진길에 오르는 비운을 맛보고 눈물 을 흘리며 요단강 나룻터를 건너가기는 했지마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생명을 생명싸개 안에 지켜주심으로 비운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두번째로 이 세상의 슬픈 눈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 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다윗은 슬픈 눈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을 해서 왕의 자리에 복귀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 세상의 험악한 행로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험악 한 곳입니다. 서울시내에서 날마다 400명의 어린이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100명씩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200쌍씩 결혼을 하지마는, 반면 그중에서 30쌍씩 이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해서 그렇게 이혼을 하겠습니까 이 세상이 험한 곳이어서, 사탄 마귀의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원치않는 그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험악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난과 슬픔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할 대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 목숨을 내 대고 부르짖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슬퍼하는 기도, 애원하는 기도, 탄원하는 기도를 올려서 눈물에서, 넘어짐에서 건짐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내가 서원한 바를 하나님께 갚으리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병들어 보기 전에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병상 에 누워보면 비로소 건강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지 느끼게 됩니다.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유스럽게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는 것,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은 아파보기 전에는 그 은혜가 얼마 나 감사하고 큰 것임을 모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큰 은혜들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 를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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