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인간 관계 (욥19:1-22)
본문
사람한테는 공통된 심리가 있습니다. 편하기를 바랍니다.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무사 태평, 건강, 안일, 오늘도 무사히 오로지 안정과 평화만을 원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절대적 평화는 없습니다. 환 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재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남의 처지 부러 워할 것 못됩니다. 누구나 다 죽을 지경으로 고통을 당하고있습니다. 남의 나라에 있는 부와 안정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그들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여 기에서 우리가 또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아우성치고 뺏고 빼앗기며 야단하는 것도 다 시 간문제요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것은 매우 공평합니다. 가진 자도 못가진 자도 병든 자도 결국은 다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바라는 심리 그러나 고통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실존, 그리고 어떠한 고통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함 이 세가지는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이 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들을 지으실 때는 서로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면 서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게 되 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원초적 관계를 첫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성경 기록 그대로 살과 살 사이 요. 뼈와 뼈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 관계는 타락하면서 불 신이 생기고 배척이 생기고 살륙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적 인간관계의 단면을 여기 욥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가까운 사람도 나를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비정한 인간 관계를 비탄하는 욥의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그 첫 마디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고 외인처럼 되어버린 일이 었습니다. 여기서 욥에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란 본문에 나열되어 있는 그대로 자신의 아내, 형제들, 친척들 친구들, 동포들을 말하며 거기에는 자기의 종과 주변의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아내 형제들 친구들보다 더 가까울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강건하고 번영할 때엔 누구라도 한결같이 자기 살이라 도 다 베어 줄 듯한 친근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내가 재난에 넘어지고 나면 그들은 비정하게 나를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일은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인간관계의 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비극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대개의 인간관 계는 이해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상충되면 그에 따라 인간관 계도 망가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적 인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 으로 새롭게 된 성도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자들 도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깊은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욥은 친척과 친구들에게까지 소외를 당했습니다. 이는 마치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아울러 고난중에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 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교됩니다.
2.가까운 사람도 나를 혐의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은 스스로 교만한 태도를 가지고 욥의 허물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욥은 모든 환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찾아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은 우리도 욥이 오직 자신의 환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구하여 해결 하고자 하는 신앙에 기초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신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그러한 위기를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검을 깨닫는 것과 그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언하시는 뜻이 무엇인 가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영적 통찰력인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경험한 비정한 인간관계를 술회하면서 이런 말까지 하였습니다.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17절). 자 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자기를 외면하고 멀리할 뿐만 아니라 의심하 고 정죄하기 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 친구들로 부터 견디기 힘든 협의를 받고 있습니다. '네가 만약 죄를 저지르지 않았 다면 어찌 이런 재난을 당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욥은 아내 로부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악담을 듣기까지 하였습니다.(2:9)가까운 사람들에게 노해를 혐의를 받는 것은 현대에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 인 가족들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고 깊은 불신이 파탄으로 몰고 가는 일은 어디에서든지 쉽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헤롯 왕은 자기 왕위를 집착해서 아 내와 자식들까지 죽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불신하고 혐의하는 비극적 단 면이 여전합니다. 하물며 가족이 아닌 다름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이해가 달라도 서로를 정죄합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신뢰가 깨어지면 그 단체는 사상 누각처럼 허술해지고 무기력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반드시 서로 사이의 믿음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3.가까운 사람도 나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욥은 보다 더 비극적인 인간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 들이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19절) 물론 이런 말은 세친구들의 무자비한 공박을 두고 한 것입니다. 무 척 가까운 사이지만 언제라도 돌아서서 서로 칼을 빼어 들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내면적 실상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 동족, 게다가 같은 종 교를 가진 힌두교 청년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인디라 간대 총리 역시, 자기 경호원의 총탄에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제3공화국 대통령 이 자기 심복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였던 유다의 손에 팔 리고 만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생명을 해치는 일이 아니더 라도 우리는 모두가 그런 불행의 여지를 안고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성덕을 지 녀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고 서로 신뢰하는 사회만이 믿음을 가꾸어 갑니다. 불신자들 사이에는 의리라도 있는데 교인들은 쉽게 돌아서고 정죄 하며 편을 가르고 교회를 분열시키면서 자기를 깨끗하다고 주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하나님의 응답은 없지만 욥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부르짖으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서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18), 내 길을 가려 어둡게 하시고(18), 사방 에서 뿌리채 뽑으시고(10), 사방에서 나를 치시고(10), 내 소망을 나무 뽑 듯이 뿌리채 뽑으시고(10), 나를 원수 같이 여기시고(11), 그의 군대를 보 내사 내 집을 포위 하신다(12)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욥의 고통이 얼 마나 극심 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욥의 신앙이 결 코 환난중에라도 흔들리지 않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환난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확신하는 신앙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믿고 신뢰하도록 지어졌으나 타락의 결과로 믿음과 신뢰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도 나를 멀리할 수 있고 혐의하 거나 심지어는 대적이 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한 인간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사도 요한의 위대한 교훈을 깊이 상고하기로 합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 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믿음이란 신뢰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독점물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물 한잔, 밥 한끼도 먹을 수 없다. 약도 사먹을 수 없다. 의사에게 몸을 맡길 수도 없고 차를 탈 수도 없다. 가족과 같이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고 이발사에게 목을 내맡기고 있다. 거의 무 한수의 물리화학적 변수가 우리를 죽일 수 있는데 자연법칙을 믿고 서로 믿지 않는가 선생을 못 믿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말을 못 믿으면 언어의 의미가 없다. 성서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에게 하 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믿음이다.
그런데 여 기에서 우리가 또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아우성치고 뺏고 빼앗기며 야단하는 것도 다 시 간문제요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것은 매우 공평합니다. 가진 자도 못가진 자도 병든 자도 결국은 다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바라는 심리 그러나 고통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실존, 그리고 어떠한 고통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함 이 세가지는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이 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들을 지으실 때는 서로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면 서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게 되 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원초적 관계를 첫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성경 기록 그대로 살과 살 사이 요. 뼈와 뼈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 관계는 타락하면서 불 신이 생기고 배척이 생기고 살륙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적 인간관계의 단면을 여기 욥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가까운 사람도 나를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비정한 인간 관계를 비탄하는 욥의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그 첫 마디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고 외인처럼 되어버린 일이 었습니다. 여기서 욥에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란 본문에 나열되어 있는 그대로 자신의 아내, 형제들, 친척들 친구들, 동포들을 말하며 거기에는 자기의 종과 주변의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아내 형제들 친구들보다 더 가까울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강건하고 번영할 때엔 누구라도 한결같이 자기 살이라 도 다 베어 줄 듯한 친근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내가 재난에 넘어지고 나면 그들은 비정하게 나를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일은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인간관계의 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비극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대개의 인간관 계는 이해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상충되면 그에 따라 인간관 계도 망가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적 인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 으로 새롭게 된 성도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자들 도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깊은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욥은 친척과 친구들에게까지 소외를 당했습니다. 이는 마치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아울러 고난중에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 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교됩니다.
2.가까운 사람도 나를 혐의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은 스스로 교만한 태도를 가지고 욥의 허물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욥은 모든 환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찾아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은 우리도 욥이 오직 자신의 환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구하여 해결 하고자 하는 신앙에 기초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신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그러한 위기를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검을 깨닫는 것과 그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언하시는 뜻이 무엇인 가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영적 통찰력인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경험한 비정한 인간관계를 술회하면서 이런 말까지 하였습니다.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17절). 자 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자기를 외면하고 멀리할 뿐만 아니라 의심하 고 정죄하기 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 친구들로 부터 견디기 힘든 협의를 받고 있습니다. '네가 만약 죄를 저지르지 않았 다면 어찌 이런 재난을 당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욥은 아내 로부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악담을 듣기까지 하였습니다.(2:9)가까운 사람들에게 노해를 혐의를 받는 것은 현대에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 인 가족들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고 깊은 불신이 파탄으로 몰고 가는 일은 어디에서든지 쉽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헤롯 왕은 자기 왕위를 집착해서 아 내와 자식들까지 죽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불신하고 혐의하는 비극적 단 면이 여전합니다. 하물며 가족이 아닌 다름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이해가 달라도 서로를 정죄합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신뢰가 깨어지면 그 단체는 사상 누각처럼 허술해지고 무기력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반드시 서로 사이의 믿음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3.가까운 사람도 나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욥은 보다 더 비극적인 인간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 들이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19절) 물론 이런 말은 세친구들의 무자비한 공박을 두고 한 것입니다. 무 척 가까운 사이지만 언제라도 돌아서서 서로 칼을 빼어 들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내면적 실상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 동족, 게다가 같은 종 교를 가진 힌두교 청년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인디라 간대 총리 역시, 자기 경호원의 총탄에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제3공화국 대통령 이 자기 심복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였던 유다의 손에 팔 리고 만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생명을 해치는 일이 아니더 라도 우리는 모두가 그런 불행의 여지를 안고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성덕을 지 녀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고 서로 신뢰하는 사회만이 믿음을 가꾸어 갑니다. 불신자들 사이에는 의리라도 있는데 교인들은 쉽게 돌아서고 정죄 하며 편을 가르고 교회를 분열시키면서 자기를 깨끗하다고 주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하나님의 응답은 없지만 욥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부르짖으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서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18), 내 길을 가려 어둡게 하시고(18), 사방 에서 뿌리채 뽑으시고(10), 사방에서 나를 치시고(10), 내 소망을 나무 뽑 듯이 뿌리채 뽑으시고(10), 나를 원수 같이 여기시고(11), 그의 군대를 보 내사 내 집을 포위 하신다(12)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욥의 고통이 얼 마나 극심 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욥의 신앙이 결 코 환난중에라도 흔들리지 않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환난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확신하는 신앙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믿고 신뢰하도록 지어졌으나 타락의 결과로 믿음과 신뢰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도 나를 멀리할 수 있고 혐의하 거나 심지어는 대적이 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한 인간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사도 요한의 위대한 교훈을 깊이 상고하기로 합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 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믿음이란 신뢰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독점물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물 한잔, 밥 한끼도 먹을 수 없다. 약도 사먹을 수 없다. 의사에게 몸을 맡길 수도 없고 차를 탈 수도 없다. 가족과 같이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고 이발사에게 목을 내맡기고 있다. 거의 무 한수의 물리화학적 변수가 우리를 죽일 수 있는데 자연법칙을 믿고 서로 믿지 않는가 선생을 못 믿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말을 못 믿으면 언어의 의미가 없다. 성서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에게 하 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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