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이기는 바른 신앙 (욥19:1-29)
본문
계속되는 시련과 질책 앞에서 욥은 자신의 구속자를 사모하게 됩니다(25절). 그 러면 욥이 사모한 구속자 고엘을 사모한다. 고엘이 과연 누구입니까 원래 '구속자 '라는 뜻으로서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일종의 피의 보수자를 가리킵니다. 즉 '고 엘'은 필요시에 그의 친족의 운명이나 자유와 명성을 희복시켜 주는 그 친족의 부 정함을 치료시켜 주며, 특별히 무죄한 피흘림에 대해 보복해 주는 것을 의무로 한다. 욥은 비록 이 땅에 거하는 모든 친구들과 가까운 친족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자 신의 고통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유일하고 거룩한 친족이신 천상 의 고엘은 자기를 인정해 주시고, 자신을 위해 온갖 변론과 후원을 아끼지 않으실 것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사44:6) (사44:6)"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 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우리는 자신의 구속자를 사모며 간구하는 욥의 기도를 통해 욥의 빛나는 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 욥은 어떤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까
'본론'
1. 생존하시며 역사하시는 구속자를 믿는 신앙이 절망을 이기었습니다(25절).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데 실패했으며(21-22절), 또 후대인들 다에게 걸어보는 기대도 그저 불안할 뿐이었습니다(23,24절). 이에 욥은 헛된 세상 의 소망을 버리고 자신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결심을 '내가 알기에는'(25절)이라는 말로써 시작 합니다. 이는 원문상 '그러나 나는 아노라'는 뜻이 있다. 욥은 자기의 신앙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인식과 깨달음을 기반 한 것임을 먼저 고백하였습니다. 게속해서 욥은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신다는 사실 을 확인하고 있습니다(25절). 여기서 '구속자'란 피의 복수롤 할 책임과 권리가 있는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삼하14:11)과 이미 사망한 친척의 팔거나 저당잡 힌 소유를 다시 되찾을 권리가 있거나, 혹은 죽은 친척의 뒤를 이을 자녀롤 낳도록 해 줄 책임이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신25:5-10, 룻 2:20, 3:9), 그리고 압제당하는 자를 보호하는 자(잠23:10-11)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욥이 말한 '구속자'는 결 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의 자녀들은 다 죽었고, 또 친척들은 아내를 위시하여 모두 욥을 버리고 달아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욥은 일찍부터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중보자를 희구한 적이 있고(9:32-35), 이 중보자는 결코 사람일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개 곧 하나님 자신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16:19). 어쨌든 욥은 이 땅의 허망한 데서부터 눈을 하늘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셔 서 지금도 자기를 위해 일하시며, 자기에게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고, 자기 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갚아주시며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실 구속자 곧 하나님께로 눈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신앙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것에 큰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스럽고 고퉁스러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 넘께로 시선을 고정시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후원을 기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만이 유일한 들파구요 모든 인생 문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 입니다.
2. 부활의 신앙이 절망을 이기게 하였다(26절).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같은 악창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던 욥은 인간의 육체는 썩 고 과괴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부패한 육체는 반드시 쇠하여져 마침내 그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창 3:19).
그런데 욥은 자신의 일생이 이러한 육체의 쇠멸로 모두 종결된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체가 썩어버린 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6절). 여기서 '육체 밖에서'란 원문상으로 볼 때 단지 '육체에서'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굳이 '육체 밖에서'라는 의미를 고집할 수 없고, '육체로부터' 흑은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 습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지금 지니고 있는 누더기 같은 육체는 죽음을 통해 썩어 져 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으키시는 그날 곧 영광스런 부활의 날 아침에 '육체 안에서' 다시 말하면 '신령한 부활체를 덧입고' 하나님을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었었던 것입니다(고전 15:44). 한편 신령한 부활의 몸을 덧입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선다는 것은 욥 자신의 의로움이나 도덕적 순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하나님의 주도적인 긍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완건한 포로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 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같은 부횔의 신앙을 지닌 욥이었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렇게 절망스러운 것만은 아니었고, 또 곧 임하게 될 육신의 죽음이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환경을 초월한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종말적 신앙이 절망을 이기었습니다(2
5.27절). 욥은 자신이 획신하고 신뢰하는 구속자가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25절). 여기 '후일'이란 '만물의 마지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욥이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날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하겠습니다(사 44:6). 그리고 욥은 바로 그 마지막 날에 자신이 부활하여 하나님을 친히 보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7절). 즉 욥은 어떤 신비한 이상이나 환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분 앞에 서서 실제자신의 눈으로써 직접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리라는 벅찬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기대감은 막연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초급'할 정도로 이 역사의 마지막 날 곧 그분 앞에 서는 날을 고대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는 말은 원래 '내 신장이 속에서 소모되어 버리는구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장'이란 '동경. 타오르는 욕망 용기' 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앞의 말은 '내가 내 가슴 속에서 제어할 수 없는 타 오르는 욕망 때문에 초췌해지는구나라는 뜻으로 고쳐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심령이 바싹비싹 타버릴 정도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의 마지막 날, 곧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 아침을 열망하고 또 열망하고 있었다고 하겠 습니다. 실로 욥은 비록 현실은 척박하고 절망스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 이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역사를 종결지 으실 것이며 바로 그날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임 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말에 완전한 구원을 확신하는 자는 결단코 아주좌 절하거나 영원히 절망하지 않습니다. (마19:27-29)"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본론'
1. 생존하시며 역사하시는 구속자를 믿는 신앙이 절망을 이기었습니다(25절).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데 실패했으며(21-22절), 또 후대인들 다에게 걸어보는 기대도 그저 불안할 뿐이었습니다(23,24절). 이에 욥은 헛된 세상 의 소망을 버리고 자신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결심을 '내가 알기에는'(25절)이라는 말로써 시작 합니다. 이는 원문상 '그러나 나는 아노라'는 뜻이 있다. 욥은 자기의 신앙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인식과 깨달음을 기반 한 것임을 먼저 고백하였습니다. 게속해서 욥은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신다는 사실 을 확인하고 있습니다(25절). 여기서 '구속자'란 피의 복수롤 할 책임과 권리가 있는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삼하14:11)과 이미 사망한 친척의 팔거나 저당잡 힌 소유를 다시 되찾을 권리가 있거나, 혹은 죽은 친척의 뒤를 이을 자녀롤 낳도록 해 줄 책임이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신25:5-10, 룻 2:20, 3:9), 그리고 압제당하는 자를 보호하는 자(잠23:10-11)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욥이 말한 '구속자'는 결 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의 자녀들은 다 죽었고, 또 친척들은 아내를 위시하여 모두 욥을 버리고 달아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욥은 일찍부터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중보자를 희구한 적이 있고(9:32-35), 이 중보자는 결코 사람일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개 곧 하나님 자신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16:19). 어쨌든 욥은 이 땅의 허망한 데서부터 눈을 하늘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셔 서 지금도 자기를 위해 일하시며, 자기에게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고, 자기 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갚아주시며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실 구속자 곧 하나님께로 눈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신앙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것에 큰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스럽고 고퉁스러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 넘께로 시선을 고정시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후원을 기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만이 유일한 들파구요 모든 인생 문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 입니다.
2. 부활의 신앙이 절망을 이기게 하였다(26절).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같은 악창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던 욥은 인간의 육체는 썩 고 과괴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부패한 육체는 반드시 쇠하여져 마침내 그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창 3:19).
그런데 욥은 자신의 일생이 이러한 육체의 쇠멸로 모두 종결된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체가 썩어버린 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6절). 여기서 '육체 밖에서'란 원문상으로 볼 때 단지 '육체에서'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굳이 '육체 밖에서'라는 의미를 고집할 수 없고, '육체로부터' 흑은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 습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지금 지니고 있는 누더기 같은 육체는 죽음을 통해 썩어 져 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으키시는 그날 곧 영광스런 부활의 날 아침에 '육체 안에서' 다시 말하면 '신령한 부활체를 덧입고' 하나님을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었었던 것입니다(고전 15:44). 한편 신령한 부활의 몸을 덧입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선다는 것은 욥 자신의 의로움이나 도덕적 순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하나님의 주도적인 긍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완건한 포로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 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같은 부횔의 신앙을 지닌 욥이었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렇게 절망스러운 것만은 아니었고, 또 곧 임하게 될 육신의 죽음이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환경을 초월한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종말적 신앙이 절망을 이기었습니다(2
5.27절). 욥은 자신이 획신하고 신뢰하는 구속자가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25절). 여기 '후일'이란 '만물의 마지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욥이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날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하겠습니다(사 44:6). 그리고 욥은 바로 그 마지막 날에 자신이 부활하여 하나님을 친히 보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7절). 즉 욥은 어떤 신비한 이상이나 환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분 앞에 서서 실제자신의 눈으로써 직접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리라는 벅찬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기대감은 막연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초급'할 정도로 이 역사의 마지막 날 곧 그분 앞에 서는 날을 고대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는 말은 원래 '내 신장이 속에서 소모되어 버리는구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장'이란 '동경. 타오르는 욕망 용기' 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앞의 말은 '내가 내 가슴 속에서 제어할 수 없는 타 오르는 욕망 때문에 초췌해지는구나라는 뜻으로 고쳐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심령이 바싹비싹 타버릴 정도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의 마지막 날, 곧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 아침을 열망하고 또 열망하고 있었다고 하겠 습니다. 실로 욥은 비록 현실은 척박하고 절망스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 이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역사를 종결지 으실 것이며 바로 그날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임 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말에 완전한 구원을 확신하는 자는 결단코 아주좌 절하거나 영원히 절망하지 않습니다. (마19:27-29)"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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