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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주의할 일 (욥13:20-28)

본문

욥은 2가지를 하나님께 소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손 을 대지 마시고 두려움을 제하시며,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게 해달라는 것(21,22)과, 두번째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3). 어찌하여 하나님은 낙엽과 마른 검불같이 무가치한 자신을(25) 대적 으로 여기시고 이같은 고난을 당하게 하느냐고 호소합니다. 지금의 자신의 처지는 어릴 때의 죄과로 인하여 착고에 채워져있고(27) 썩은 물건처럼 후 패하고 좀먹은 의복과 같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련은 육체 적 고통이나 친구들의 비방보다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을찌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속단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담대하고 성숙한 신앙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여류 문인 가운데 유수한 분 하나가 단 하나 밖에 없는 젊은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죽고 나자 그때까지 잘 섬겨 왔던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 같은 엉터리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무섭게 항변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들 하나만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을 어머니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싸늘한 시체가 된 아들이 안겨 졌을 때 참담한 배신감이 들 만도 했을 것입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본문도 하나님을 향한 욥의 항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정황들을 우리는 충분히 동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항 변 가운데서 마땅히 경계해야 할 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살펴봄으로 써 어떤 최악의 경우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께 욕을 끼치는 일이 없도 록 해야 하겠습니다.
1.따지려 들면 안 됩니다. = 욥은 고난이 자신에게 왜 임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자 감히 하나님 께 따지려 하였습니다.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은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22절)라고 한 것입니다. 입이 있으면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에 게 어떤 참담한 일이 주어졌더라도 그런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려 들면 절대 안됩니다. 우선 그런 일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사이에는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 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하신 일도 사람에게는 커다란 손해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질책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이 사람아 네게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2.자신을 대적한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 감정이 극도로 격해진 욥은 하나님께 따지더니 이번에는 엉뚱한 말을 토 하였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 시나이까"(24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대적으로 여기시다니 게다가 당 대에 의인으로 널리 알려진 당신의 사람을 대적으로 여기시다니, 생각하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판단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힘겨워 하나님을 향해 '왜 나를 대적하느냐' 고 항변하면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 니까 불신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대적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단밖에 대적이 없습니다. 전에 어떤 신학생 하나가 "나는 하나님이 우리 집을 원수로 여기고 망하 게 하셨기 때문에 도대체 그분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려고 신학교에 지원 했다"고 말했다가 그만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학교 당국은 그 말의 오 염을 방지하려고 단호하게 조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 성도를 사랑하시되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3.그 분의 일을 속단하면 안됩니다. = 한번 빗나간 욥의 말은 다음에서도 또 빗나갔습니다.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26절) 욥은 자기의 잘못을 찾아내기가 어렵 자 그런 속단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허물과 죄를 그 대로 갚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시103:10)하는 말씀이 이를 잘 반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한번 자녀로 부르신 자를 어찌 어렸을 적의 죄까지 들추어 다시 벌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하 시는 일을 두고서 너무나 분수 넘는 속단을 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이 때문에 남을 쉽게 정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일을 헤아리면 안 되며 더구나 성급한 속단은 금물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커다란 곤경을 만나면 당황하기가 마련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일도 있고 그분의 일을 두고서 속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때 일수록 이성을 잃지 말고 하나님께 불경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약1:12) '예화' 어느 마을에 군대가 주둔하더니 이내 그곳엔 위안소(매춘부들 의 집) 한 채가 들어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위안소 맞은 편에는 카톨 릭 수도원이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수녀들도 여자인지라 늘 강한 호기 심을 가지고 수도원 문틈으로 건너편 집의 동정을 살폈다. 이 일은 어느새 수녀들에게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어느 날 프로텐스탄 트 목사가 주위를 살피면서 위안소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수녀들이 빈정거리 며 수군거렸다. "그렇지 뭐, 프로테스탄트들은 겉으로는 그럴 듯한 말만 하 고 저 모양이라니까."며칠 후 이번에는 유대교의 랍비가 주위를 살피더 니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본 수녀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지독한 것들이 랍비라고 뭐 다르겠어 별 수 없지!" 라고 비난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카톨릭 신부가 역시 주위를 살피더 니 위안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지켜본 수녀들은 놀라는 기색도 않 고 "분명 저 집에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거야"라고 입모아 말했다. 성도 여러분! 들은 이야기라고 해서 다 할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 일이라 해서 본 것을 다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 자신의 귀와 눈과 입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거칠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궁지에 빠지고 맙니다. 현명한 사람은 남 의 욕설이나 비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또 남의 단점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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