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신앙생활 (욥18:1-4)
본문
수하 사람 빌닷은 8장에 이어서 두번째로 책망합니다.
그런데 처음 충고 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등의 위 로가 있었으나 두번째에는 가혹하리만치 악인의 비참한 최후 상태를 말 하면서 욥을 정죄하는 책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빌닷은 욥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격한 감정으로 책망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욥에게 중간에서 말을 가로채면서 말을 길게 하는 자라고 비난합니다. 그 리고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책망하고, 거만한 멸시자라고 말합니다. 사실 빌닷은 욥이 자기들을 짐승같이 생각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여김에 대하여 분노를 터트린 것입니다. 빌닷은 욥 스스로가 분노에 사로잡혀 고통 당하 고 있다고 꾸짖습니다. 어느 성인에게 제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한 사람입 니까" 그러자 성인은 "그야 뻔한 일 아니야. 스스로 천한 짓을 하는 자 가 천한 사람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전 봉건제도(封建制度) 사 회에서는 천한 사람이 따로 태어나는 것으로 착각되어지기도 했지만, 사실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한 짓을 하는 사람이 천한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빌닷의 말을 들어보면 욥과의 감정 싸 움의 결과로 나온 것이긴 했지만 정말 천한 짓이 무엇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본문에 빌닷의 변론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면에서 그말 자 체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비추어 어떤 일이 과연 천한 짓인가를 살펴봅시다.
1.말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빌닷은 욥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2절)고 힐난 하였습니다.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당신들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 을 참이요'라고 번역함으로써 자기 동료들에게 하는 말처럼 되어 있지만 이를 '자네는 언제 입을 다물 참인가'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욥이 말만 앞세웠던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말만 앞세우는 태도야말로 천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에 있어서나 부지런히 말만 주워대는 자는 아무것도 이루는 것이 없고 결국 자기의 말 자랑밖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 유창할수록 실상 그 안에는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일은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더욱 공허한 들립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 게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시33:7) 라고 경성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향하여 자기 말 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한다고 깨 우쳐 주었습니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말보다는 심중에서 배어나오는 진실한 실천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말을 했으면 꼭 지키고 말만 앞세우지 말고 핸동으로 옮기는 지혜로 운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남을 천대(賤待)하는 것입니다. 빌닷은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3절)고 힐 난하였습니다. 물론 욥이 자기를 찾아온 세 친구들을 짐승처럼 여긴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친구들을 '눈먼 우매자'(17:4)라고 말하자 홧김에 자기 들을 짐승처럼 취급한다고 공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욥이 정말 다 른 사람들을 짐승대하듯이 했다면 그것은 정말 천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짐승처럼 대하는 사람치고 그 마음이 짐승 같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성인의 눈에는 성인만 보인다'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우매무지(愚昧無知)한 자기를 책망하기 위하여 주 앞에서 자신을 짐승 같다고 한 것은 겸양(謙讓)에 속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남을 짐승처럼 여 기면 그것은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욕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 인한 욕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보다도 남을 낫게 여기는 진지한 자세를 일생토록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예화'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 더 대왕의 일화입니다. 승전의 기쁨으로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중,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알렉산더대왕은 소꿉 친구인 자기가 거느린 유능한 장군에게 "이봐, 겁장이 친구"하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많은 부하 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낀 친구는 "내가 왜 겁장이야, 내가 치열한 전장에 서 네 목숨을 구해준 것도 기억못하느냐"면서 아무도 모르는 알렉산더의 약점을 폭로하였습니다. 순간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창을 빼어 그 친구를 향해 던졌고 그 친구는 심장에 창을 맞고 죽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절친했던 사랑하는 친구를 죽임으로써 심한 죄책감 에 빠진 알렉산더대왕은 자신의 칼로 목을 찌르려고 하였으나 옆에 있던 부하들이 말려서 미수에 그쳤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자 부하들이 겨우 구슬러 3일 만에 방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수치심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죽였던 알렉산더 대왕 과 자신의 논리가 공격당하자 위로가 필요한 친구에게 보복하려고 심한 말 을 퍼부었던 빌닷. 이들은 모두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빌닷은 잠언 기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사연을 듣기 전 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언18:13).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상대의 형편과 일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에게도 이런 오류가 적지않게 있습니다. 나의 느끼는 감정이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상대의 말을 듣고 형편을 헤아려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하게 배우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 돕는 성숙 한 섬김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자기를 학대(虐待)하는 것입니다. = 빌닷은 또 욥을 향하여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여! 너를 위하여 땅 이 버림을 당하겠느냐"(4절)고 공격하였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를 찢고 있다고 비난하며 탄식한 것은 사실 스스로 자기를 찢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가지고 욥을 비루(鄙陋)한 자로 매도하면 안 되지만 스 스로를 찢는다는 것은 자기 학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리켜 지 극히 천한 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거라사 지역에 살던 청년이 귀신들려서 쇠고랑을 찬 채, 무 덤 사이를 돌아 다니면서 자기 몸을 돌로 찍고 상처를 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마5:5) 아무리 사정이 딱하더라도 자기를 학대하면 귀신들 린 청년처럼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학(自虐)은 하나님 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또 다른 파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에서 자기를 비하하고 절망하여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인내하고 견딤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형편에 처해 보아야만 한 사람의 인간 됨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어떤 곤경에 처하여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천한 자로 변신 되기 쉽고 경우에 따라서는 추악한 자로 떨어지거나 인격 파탄자로 변모되 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말만 주어 대는 일, 남을 천대하는 일, 자기를 찢는 일 등도 다 그런 결과에서 생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별히 조심하여서 이러한 비천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 충고 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등의 위 로가 있었으나 두번째에는 가혹하리만치 악인의 비참한 최후 상태를 말 하면서 욥을 정죄하는 책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빌닷은 욥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격한 감정으로 책망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욥에게 중간에서 말을 가로채면서 말을 길게 하는 자라고 비난합니다. 그 리고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책망하고, 거만한 멸시자라고 말합니다. 사실 빌닷은 욥이 자기들을 짐승같이 생각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여김에 대하여 분노를 터트린 것입니다. 빌닷은 욥 스스로가 분노에 사로잡혀 고통 당하 고 있다고 꾸짖습니다. 어느 성인에게 제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한 사람입 니까" 그러자 성인은 "그야 뻔한 일 아니야. 스스로 천한 짓을 하는 자 가 천한 사람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전 봉건제도(封建制度) 사 회에서는 천한 사람이 따로 태어나는 것으로 착각되어지기도 했지만, 사실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한 짓을 하는 사람이 천한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빌닷의 말을 들어보면 욥과의 감정 싸 움의 결과로 나온 것이긴 했지만 정말 천한 짓이 무엇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본문에 빌닷의 변론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면에서 그말 자 체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비추어 어떤 일이 과연 천한 짓인가를 살펴봅시다.
1.말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빌닷은 욥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2절)고 힐난 하였습니다.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당신들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 을 참이요'라고 번역함으로써 자기 동료들에게 하는 말처럼 되어 있지만 이를 '자네는 언제 입을 다물 참인가'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욥이 말만 앞세웠던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말만 앞세우는 태도야말로 천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에 있어서나 부지런히 말만 주워대는 자는 아무것도 이루는 것이 없고 결국 자기의 말 자랑밖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 유창할수록 실상 그 안에는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일은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더욱 공허한 들립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 게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시33:7) 라고 경성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향하여 자기 말 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한다고 깨 우쳐 주었습니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말보다는 심중에서 배어나오는 진실한 실천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말을 했으면 꼭 지키고 말만 앞세우지 말고 핸동으로 옮기는 지혜로 운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남을 천대(賤待)하는 것입니다. 빌닷은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3절)고 힐 난하였습니다. 물론 욥이 자기를 찾아온 세 친구들을 짐승처럼 여긴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친구들을 '눈먼 우매자'(17:4)라고 말하자 홧김에 자기 들을 짐승처럼 취급한다고 공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욥이 정말 다 른 사람들을 짐승대하듯이 했다면 그것은 정말 천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짐승처럼 대하는 사람치고 그 마음이 짐승 같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성인의 눈에는 성인만 보인다'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우매무지(愚昧無知)한 자기를 책망하기 위하여 주 앞에서 자신을 짐승 같다고 한 것은 겸양(謙讓)에 속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남을 짐승처럼 여 기면 그것은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욕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 인한 욕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보다도 남을 낫게 여기는 진지한 자세를 일생토록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예화'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 더 대왕의 일화입니다. 승전의 기쁨으로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중,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알렉산더대왕은 소꿉 친구인 자기가 거느린 유능한 장군에게 "이봐, 겁장이 친구"하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많은 부하 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낀 친구는 "내가 왜 겁장이야, 내가 치열한 전장에 서 네 목숨을 구해준 것도 기억못하느냐"면서 아무도 모르는 알렉산더의 약점을 폭로하였습니다. 순간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창을 빼어 그 친구를 향해 던졌고 그 친구는 심장에 창을 맞고 죽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절친했던 사랑하는 친구를 죽임으로써 심한 죄책감 에 빠진 알렉산더대왕은 자신의 칼로 목을 찌르려고 하였으나 옆에 있던 부하들이 말려서 미수에 그쳤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자 부하들이 겨우 구슬러 3일 만에 방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수치심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죽였던 알렉산더 대왕 과 자신의 논리가 공격당하자 위로가 필요한 친구에게 보복하려고 심한 말 을 퍼부었던 빌닷. 이들은 모두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빌닷은 잠언 기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사연을 듣기 전 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언18:13).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상대의 형편과 일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에게도 이런 오류가 적지않게 있습니다. 나의 느끼는 감정이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상대의 말을 듣고 형편을 헤아려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하게 배우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 돕는 성숙 한 섬김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자기를 학대(虐待)하는 것입니다. = 빌닷은 또 욥을 향하여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여! 너를 위하여 땅 이 버림을 당하겠느냐"(4절)고 공격하였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를 찢고 있다고 비난하며 탄식한 것은 사실 스스로 자기를 찢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가지고 욥을 비루(鄙陋)한 자로 매도하면 안 되지만 스 스로를 찢는다는 것은 자기 학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리켜 지 극히 천한 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거라사 지역에 살던 청년이 귀신들려서 쇠고랑을 찬 채, 무 덤 사이를 돌아 다니면서 자기 몸을 돌로 찍고 상처를 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마5:5) 아무리 사정이 딱하더라도 자기를 학대하면 귀신들 린 청년처럼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학(自虐)은 하나님 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또 다른 파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에서 자기를 비하하고 절망하여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인내하고 견딤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형편에 처해 보아야만 한 사람의 인간 됨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어떤 곤경에 처하여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천한 자로 변신 되기 쉽고 경우에 따라서는 추악한 자로 떨어지거나 인격 파탄자로 변모되 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말만 주어 대는 일, 남을 천대하는 일, 자기를 찢는 일 등도 다 그런 결과에서 생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별히 조심하여서 이러한 비천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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