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질하지 말라 (출20:15,엡4:28)
본문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 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성경의 엄숙한 계명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아무도 도적질에 익숙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때로는 도벽이 있는 어린이들도 있기는 하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만 스릴도 맛 보면서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인 식을 하는 사람치고 도적질을 내놓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허긴 이 놈의 세상은 온통 도적놈들의 소굴이니 세상 모든이들이 도적질을 하면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 아주 도적질을 점잖게 철저히 즐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종교인들이다. 아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인들이 도적질이나 일삼고 있다니 도대체 그런 부류들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대명천지에 일삼고 있는 신흥종교 집단들의 어처구니 없는 사기행각들 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혹세무민혹세무민 사람들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종교적 부를 축적하는 종교 사기꾼들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런 자들의 모습은 그래도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여 세인들의 지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여기서 또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래도 종교인으로서 구실을 하고자 하며 세상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도적질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자 몸 부림치며 기쁨을 누리며 소망과 믿음을 자랑하는 이들이 즐기고 있는 도적질 의 양태를 짚어보고자 함이다. 그까짓 물질이야 도적질하고 사기쳐본들 다른 장소로 잠시 관리자가 변동되는 차이 밖에는 없을 것이나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영원히 망하게 할 수도 있는 도적질이기에 그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 정도는 마음대로 도적질해도 좋다는 말을 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한 데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요구와 욕구가, 그리고 자신의 보 물이 세상에 있다는 것 만을 자증해 줄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그러한 물질이나 이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러한 상식적인 말 도 도무지 먹혀들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리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 사는 세상에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기에 물질에 마음을 빼앗긴 채 여전히 도적질을 일삼고 있는 인생들도 양태는 똑같은 것 일 뿐이다. 어떻든 이제부터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성경은 곳곳에서 도적질에 관한 경계를 기록하고 있다. 소위 유명한 십계명 중에도 제 8계명에 나타나고 있다.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 살인과 간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도적의 모습을 살펴보자. 악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에하선 네 독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 구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착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 구링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뺐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시 50:16 21). 하나님이 잠잠하시니 의례껏 하나님은 그러한 분인 줄로, 그리고 자기와 동류 이며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은 줄로 착각할 뿐더러, 한 술 더 떠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시라고 선전한다. 이 곳에 등장하고 있는 도적놈은 저 흉악무도한 고재봉과 같은 부류를 향한 꾸짖음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삶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한다는 자들을 언급하 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입에 두고 사는 자들을 말함이다. 그런자들을 향하여 "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 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라고 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이사야의 탄식을 들어보자.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 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 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사 1:21-23).
여전히 시편에서나 이사야에서도 도적질은 간음과 살인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 성경의 언급을 보면 분명 이전에는 신실하던 성읍이었다. 공평과 의리가 있 었다. 그러하던 자가 이렇게 창기가 되고 살인자와 도적놈이 되고 있다는 말 이다. 단순한 관리들의 부패를 질타하는 것에 불과한 말인가 뇌물을 사랑하 고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않고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 다 명색이 방백이라는 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 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 질하며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었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 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호 1:1-
2). 이러한 질책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막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악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귀는 듣기에 둔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막혀있다. 귀머거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 은 나와 상관이 없는 저 믿음없는 사람들의 믿음없는 행동을 말하는 것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잠깐 살펴 본 구약의 몇 구절들은 도적들에 대한 책망과 한탄이었다. 그렇다 면 이러한 도적들이 도적질하는 내용들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도 적질하고 있다고 성경이 저렇게도 야단이란 말인가. 오늘날 공공질서의 안녕 을 염려해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 아니면 진리와 하나님 나라와 관 련된 도적질이라면 그 도적질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 신 것인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행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50명을 세우니 라.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 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 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 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 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 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 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삼하 15:1-6).
압살롬의 이러한 행각은 어떠한 동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당연히 왕이 송사를 맡아서 하여야 하는 일들을 자신이 재판관이 되고자 함이 아닌가. 뿐 만 아니라 이것은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도적질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한 탐심은 바로 이어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 다 하라 하 니라(삼하 15:10).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국 다윗을 배반하는 일이 벌어 진다. "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 갔나이다" (삼하15:13). 모든 인간들이 바로 이와 같은 유혹에 빠져 있고 사로잡혀 있다. 정작 왕이신 분의 송사를 가로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모든 일의 송사를 담당하여 사람 들의 마음을 빼앗고 결국 자신이 왕노릇 한다. 왕이 되는 것처럼 신나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이것은 땅의 일을 도모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땅 위에 있는 것을 보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삼아지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죄악인 줄 알고 범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것이 하나님께 행하는 예인 줄로 여기기 때문에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이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혀를 놀 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 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3:29-32).
어떻게 말씀을 도적질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왜인가. 말씀이 아닌 것 을 그의 말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백성을 미혹미혹하기 위함 이다. 왜 미혹하려는가. 그것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함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로부터 얻는 것은 왕이라는 칭호이다. 그것을 누리고 왕권을 휘두르고자 함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모든 행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빗대서 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지극히 당연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거나 또는 미혹하고자 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오히려 말도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그의 삶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대신해서 그들의 송사를 담당한다. 정작 참 왕이신 하나님의 송사가 그들에게 행사되지 않는다. 앞의 두 사례에 나오는 ` 도적질하다` 라는 히브리어는 bnG(가납)이다. 이 동사의 피엘형태로 쓰이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피엘동사는 강조형태이다. 예 컨데 ` 죽이다` 의 강조형태는 ` 잔인하게 죽이다` 혹은 ` 학살하다` 의 개 념이다. 이렇듯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도적질의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 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렘 23:36). 성경이 말하고 있는 도적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그 도 적질을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가. 말라기서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 그렇다.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십일조 와 헌물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것은 추후에 논하기로 하고 어떻 든 이것을 도적질한 결과,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다.
7절을 보면 "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 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 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에 대한 대 답으로 십일조 도적질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도적질의 결과는 하나님을 떠나 있음이다. 월급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떼어서 교회에 바치기만 하면 십일조를 잘한 것이 고 그 결과 떠나 있던 상태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인가. 그러한 십일조를 하 기만 하면 하나님께 돌아와 "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 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 3:17) 하는 말씀이 성취된 모습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이러한 부분을 좀 더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좀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므로 여기서는 간단한 언급으로만 지나가기로 한다.
이사야 42장 18절 이하의 말씀이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 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 셨으나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며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 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사 42:18-25). bnG(가납)과 동의어인 zzB;(바자즈,탈취하다,노략하다,늑탈하다,도적질 구)를 사용하고 있는 문장이다. 무엇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도적질당하고 탈 유영구 있는가. 거기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당신의 마땅한 소유를 노 품 하기 위한 더 크신 숨겨져 있는 역사를 볼 수 있으면이어니와 여전 눈 먼 소경으로 있으면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 누가 소경이며 귀머거 차 한탄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소경이며 귀머거리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래도 아직 굳세게 자신의 고집을 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 많은 것 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는 말씀대 로 살 것인가. 성경은 일찍이 자기 사자와 자기의 보내신 자 종들과 같은 귀머거리와 눈먼 소경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 시대에 한정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단 사설을 외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그로 인하여 신들이 도적질하며 동시에 도적질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할 일이다. 예수께서도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이는 소경되었던 자로 눈을 뜨게 하시고난 후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누가 도적이요 강도인지를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 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 십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이런 차원이다. 도무지 윤리도덕적 차원 이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많은 설교자들이 산업현장에서의 노사 관계와 관련하여 이 계명을 설명한다든지 분배문제와 관련한 적용으로 말씀을 도적질하고 있음을 우리는 가슴아파해야 한다. 분배문제가 어찌 사회의 안녕 을 위해서 중요치 않을 것이며 산업평화가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종교를 그러한 데 이용하라고 있는 것인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노사관계의 중재에 이용되는 인간의 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말씀의 용도 변경이 아닌가. 식자 기독교인들은 강변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회변혁의 역할 또는 기독교인 의 문화적 사명 등등을 말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신앙과 인격적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지, 말씀의 강제적 적용을 통해서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해방신학자들이 신을 정치 적, 경제적 해방자로 인식하고, 자유를 다분히 정치적, 경제적 자유와 관련지 어 그들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땅의 일과 관련짓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마치 베드로가 한 때 예수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 치적 메시야로 인식했던 혼돈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물론 그것들이 중요치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지상정의 차원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고 또 해결해야 될 문제들 아니겠는가.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 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1-23).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도적질하고 있는 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디에 속해서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속하여 온전한 율법이 가리워진 가르침 은 여전히 그 ` 도적질하지 말라` 고 가르치고 있는 대상을, 지금 가르치고 있는 네가 오히려 도적질하고 탐내고 간음하고 있는 죄를 서슴없이 범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도적질 당해 있기 때문이요 눈 멀고 귀 멀 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점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 철학과 헛된 속임수` , ` 그리스도를 좇음` 이라는 말씀을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무엇이 도적질이며, 노략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대충 윤곽이 잡혀질 것이다.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은 매력있는 것이요 점잖은 이들에게 매우 그럴듯한 종교생활의 양식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안에 심각한 궤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더구나 문제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그리스도를 좇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없다고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속지 말아야 할 일이 있으니 아 무리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더라도 그것은 개념만 그리스도일 뿐 그 삶의 내 용이 얼마든지 초등학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구렁텅이에 있으면서 웃음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이 애통으로 바뀔 날이 있으리라 .
그리스도는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게 하거나 혹은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함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의 상태는 바로 이와같은 것이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유혹한 다해도 빼앗기지 아니하며 지옥을 가지고 협박을 한다해도 위협당하지 않는다 . 그래서 그리스도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 너희에게 땅 위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있는 보물을 쌓아두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땅 위의 보물은 언제든지 좀과 동록으로 말미암아 해를 입으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해 가는 것이지만, 그래서 시시 때때 로 불행을 느끼지만 하늘의 보물은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 위엣 것을 보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땅 위엣 것을 하나님의 이름 으로 선전 선동하므로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할 뿐 아니라 자신도 결국 도적질 당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심판 가운데 여전히 거하고 있다.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9:21) 회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 의 전부인데 그것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다는 말인가. 종교는 참으로 무섭다. 오늘날 종교집단은 그래서 모두 도적놈의 소굴로 바뀌 고 있다. 그것도 어줍잖게 단순한 물질 정도를 사기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문 화를 이끌고 간다는 미명아래 사람들의 물질은 물론이요 영혼을 약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탈취해 와 자기의 소 유와 백성으로 삼으시고 십일조로 받으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더이상 도적질하거나, 도적질 당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만들기를 원하시기에
그런데 여기 아주 도적질을 점잖게 철저히 즐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종교인들이다. 아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인들이 도적질이나 일삼고 있다니 도대체 그런 부류들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대명천지에 일삼고 있는 신흥종교 집단들의 어처구니 없는 사기행각들 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혹세무민혹세무민 사람들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종교적 부를 축적하는 종교 사기꾼들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런 자들의 모습은 그래도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여 세인들의 지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여기서 또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래도 종교인으로서 구실을 하고자 하며 세상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도적질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자 몸 부림치며 기쁨을 누리며 소망과 믿음을 자랑하는 이들이 즐기고 있는 도적질 의 양태를 짚어보고자 함이다. 그까짓 물질이야 도적질하고 사기쳐본들 다른 장소로 잠시 관리자가 변동되는 차이 밖에는 없을 것이나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영원히 망하게 할 수도 있는 도적질이기에 그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 정도는 마음대로 도적질해도 좋다는 말을 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한 데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요구와 욕구가, 그리고 자신의 보 물이 세상에 있다는 것 만을 자증해 줄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그러한 물질이나 이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러한 상식적인 말 도 도무지 먹혀들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리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 사는 세상에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기에 물질에 마음을 빼앗긴 채 여전히 도적질을 일삼고 있는 인생들도 양태는 똑같은 것 일 뿐이다. 어떻든 이제부터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성경은 곳곳에서 도적질에 관한 경계를 기록하고 있다. 소위 유명한 십계명 중에도 제 8계명에 나타나고 있다.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 살인과 간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도적의 모습을 살펴보자. 악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에하선 네 독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 구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착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 구링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뺐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시 50:16 21). 하나님이 잠잠하시니 의례껏 하나님은 그러한 분인 줄로, 그리고 자기와 동류 이며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은 줄로 착각할 뿐더러, 한 술 더 떠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시라고 선전한다. 이 곳에 등장하고 있는 도적놈은 저 흉악무도한 고재봉과 같은 부류를 향한 꾸짖음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삶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한다는 자들을 언급하 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입에 두고 사는 자들을 말함이다. 그런자들을 향하여 "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 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라고 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이사야의 탄식을 들어보자.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 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 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사 1:21-23).
여전히 시편에서나 이사야에서도 도적질은 간음과 살인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 성경의 언급을 보면 분명 이전에는 신실하던 성읍이었다. 공평과 의리가 있 었다. 그러하던 자가 이렇게 창기가 되고 살인자와 도적놈이 되고 있다는 말 이다. 단순한 관리들의 부패를 질타하는 것에 불과한 말인가 뇌물을 사랑하 고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않고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 다 명색이 방백이라는 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 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 질하며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었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 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호 1:1-
2). 이러한 질책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막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악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귀는 듣기에 둔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막혀있다. 귀머거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 은 나와 상관이 없는 저 믿음없는 사람들의 믿음없는 행동을 말하는 것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잠깐 살펴 본 구약의 몇 구절들은 도적들에 대한 책망과 한탄이었다. 그렇다 면 이러한 도적들이 도적질하는 내용들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도 적질하고 있다고 성경이 저렇게도 야단이란 말인가. 오늘날 공공질서의 안녕 을 염려해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 아니면 진리와 하나님 나라와 관 련된 도적질이라면 그 도적질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 신 것인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행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50명을 세우니 라.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 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 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 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 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 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 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삼하 15:1-6).
압살롬의 이러한 행각은 어떠한 동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당연히 왕이 송사를 맡아서 하여야 하는 일들을 자신이 재판관이 되고자 함이 아닌가. 뿐 만 아니라 이것은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도적질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한 탐심은 바로 이어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 다 하라 하 니라(삼하 15:10).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국 다윗을 배반하는 일이 벌어 진다. "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 갔나이다" (삼하15:13). 모든 인간들이 바로 이와 같은 유혹에 빠져 있고 사로잡혀 있다. 정작 왕이신 분의 송사를 가로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모든 일의 송사를 담당하여 사람 들의 마음을 빼앗고 결국 자신이 왕노릇 한다. 왕이 되는 것처럼 신나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이것은 땅의 일을 도모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땅 위에 있는 것을 보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삼아지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죄악인 줄 알고 범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것이 하나님께 행하는 예인 줄로 여기기 때문에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이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혀를 놀 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 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3:29-32).
어떻게 말씀을 도적질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왜인가. 말씀이 아닌 것 을 그의 말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백성을 미혹미혹하기 위함 이다. 왜 미혹하려는가. 그것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함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로부터 얻는 것은 왕이라는 칭호이다. 그것을 누리고 왕권을 휘두르고자 함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모든 행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빗대서 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지극히 당연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거나 또는 미혹하고자 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오히려 말도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그의 삶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대신해서 그들의 송사를 담당한다. 정작 참 왕이신 하나님의 송사가 그들에게 행사되지 않는다. 앞의 두 사례에 나오는 ` 도적질하다` 라는 히브리어는 bnG(가납)이다. 이 동사의 피엘형태로 쓰이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피엘동사는 강조형태이다. 예 컨데 ` 죽이다` 의 강조형태는 ` 잔인하게 죽이다` 혹은 ` 학살하다` 의 개 념이다. 이렇듯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도적질의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 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렘 23:36). 성경이 말하고 있는 도적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그 도 적질을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가. 말라기서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 그렇다.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십일조 와 헌물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것은 추후에 논하기로 하고 어떻 든 이것을 도적질한 결과,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다.
7절을 보면 "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 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 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에 대한 대 답으로 십일조 도적질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도적질의 결과는 하나님을 떠나 있음이다. 월급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떼어서 교회에 바치기만 하면 십일조를 잘한 것이 고 그 결과 떠나 있던 상태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인가. 그러한 십일조를 하 기만 하면 하나님께 돌아와 "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 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 3:17) 하는 말씀이 성취된 모습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이러한 부분을 좀 더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좀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므로 여기서는 간단한 언급으로만 지나가기로 한다.
이사야 42장 18절 이하의 말씀이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 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 셨으나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며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 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사 42:18-25). bnG(가납)과 동의어인 zzB;(바자즈,탈취하다,노략하다,늑탈하다,도적질 구)를 사용하고 있는 문장이다. 무엇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도적질당하고 탈 유영구 있는가. 거기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당신의 마땅한 소유를 노 품 하기 위한 더 크신 숨겨져 있는 역사를 볼 수 있으면이어니와 여전 눈 먼 소경으로 있으면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 누가 소경이며 귀머거 차 한탄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소경이며 귀머거리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래도 아직 굳세게 자신의 고집을 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 많은 것 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는 말씀대 로 살 것인가. 성경은 일찍이 자기 사자와 자기의 보내신 자 종들과 같은 귀머거리와 눈먼 소경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 시대에 한정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단 사설을 외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그로 인하여 신들이 도적질하며 동시에 도적질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할 일이다. 예수께서도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이는 소경되었던 자로 눈을 뜨게 하시고난 후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누가 도적이요 강도인지를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 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 십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이런 차원이다. 도무지 윤리도덕적 차원 이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많은 설교자들이 산업현장에서의 노사 관계와 관련하여 이 계명을 설명한다든지 분배문제와 관련한 적용으로 말씀을 도적질하고 있음을 우리는 가슴아파해야 한다. 분배문제가 어찌 사회의 안녕 을 위해서 중요치 않을 것이며 산업평화가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종교를 그러한 데 이용하라고 있는 것인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노사관계의 중재에 이용되는 인간의 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말씀의 용도 변경이 아닌가. 식자 기독교인들은 강변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회변혁의 역할 또는 기독교인 의 문화적 사명 등등을 말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신앙과 인격적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지, 말씀의 강제적 적용을 통해서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해방신학자들이 신을 정치 적, 경제적 해방자로 인식하고, 자유를 다분히 정치적, 경제적 자유와 관련지 어 그들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땅의 일과 관련짓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마치 베드로가 한 때 예수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 치적 메시야로 인식했던 혼돈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물론 그것들이 중요치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지상정의 차원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고 또 해결해야 될 문제들 아니겠는가.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 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1-23).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도적질하고 있는 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디에 속해서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속하여 온전한 율법이 가리워진 가르침 은 여전히 그 ` 도적질하지 말라` 고 가르치고 있는 대상을, 지금 가르치고 있는 네가 오히려 도적질하고 탐내고 간음하고 있는 죄를 서슴없이 범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도적질 당해 있기 때문이요 눈 멀고 귀 멀 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점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 철학과 헛된 속임수` , ` 그리스도를 좇음` 이라는 말씀을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무엇이 도적질이며, 노략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대충 윤곽이 잡혀질 것이다.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은 매력있는 것이요 점잖은 이들에게 매우 그럴듯한 종교생활의 양식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안에 심각한 궤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더구나 문제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그리스도를 좇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없다고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속지 말아야 할 일이 있으니 아 무리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더라도 그것은 개념만 그리스도일 뿐 그 삶의 내 용이 얼마든지 초등학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구렁텅이에 있으면서 웃음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이 애통으로 바뀔 날이 있으리라 .
그리스도는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게 하거나 혹은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함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의 상태는 바로 이와같은 것이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유혹한 다해도 빼앗기지 아니하며 지옥을 가지고 협박을 한다해도 위협당하지 않는다 . 그래서 그리스도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 너희에게 땅 위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있는 보물을 쌓아두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땅 위의 보물은 언제든지 좀과 동록으로 말미암아 해를 입으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해 가는 것이지만, 그래서 시시 때때 로 불행을 느끼지만 하늘의 보물은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 위엣 것을 보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땅 위엣 것을 하나님의 이름 으로 선전 선동하므로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할 뿐 아니라 자신도 결국 도적질 당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심판 가운데 여전히 거하고 있다.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9:21) 회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 의 전부인데 그것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다는 말인가. 종교는 참으로 무섭다. 오늘날 종교집단은 그래서 모두 도적놈의 소굴로 바뀌 고 있다. 그것도 어줍잖게 단순한 물질 정도를 사기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문 화를 이끌고 간다는 미명아래 사람들의 물질은 물론이요 영혼을 약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탈취해 와 자기의 소 유와 백성으로 삼으시고 십일조로 받으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더이상 도적질하거나, 도적질 당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만들기를 원하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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