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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정죄에 대한 욥의 답변 (욥6:1-30)

본문

초지 일관 인과 웅보적연 관점에서 고통당하고 있던 욥을 바라보며 욥의 범죄를 고발하고 참회를 촉구했던(5장) 엘리바스의 자기 주장이 끝이 나자 이제 그 주장에 대한 욥의 답변이 소개된다. 욥은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그나마 기대했던 친구들의 위로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받게 되자 분을 못이겨 자신을 변호하며(1-13절), 자신은 절대 의롭고 진실한 존재임을 항변하였다(14-30절). 한편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자기 변호에 급급하게 되면 자칫 자기 교만과 자랑에 빠질 수 있다는 점니다. 자기 변호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먼저 하는 것 이 바로 신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고전 10:31)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본론'
1. 고난의 해결은 그 출처를 아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욥은 자기의 고난이 바로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엘리 바스의 충고에 심한 분노를 느끼면서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1-3절). 대신 욥은 자신의 고난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밝혔다(4절). 욥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두려운 적군처럼 상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솔직이 고백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고난 을 끝낼 수 었는 죽음을 주십사고 기원한다고 고백하였다(8-9절). 사실 엘리바스는 이 죽음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두려운 최후의 형벌로 이해하여 욥을 위협했으 나(4:9,20,21; 5:2), 욥은 그같은 엘리바스의 피상적이고 허탄한 주장을 무시하고, 육체의 질병으로 숨가쁘게 신음하느니 차라리 고통을 잠재우는 죽음을 갈구하였던 깃이다. 어쨌든 욥은 고난과 그 고난을 종식시킬 수 있는 죽음이 모두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진정 이것이 바로 욥의 고난을 근본적으 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였다. 정녕 죄악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이 모든 일의 시작이 요 동인이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당면한 난제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열쇠가 된다 (삼하 12:7-23).
2. 충고와 후원은 진정한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욥이 재산과 자식을 잃고 심지어 자기 몸에 악창까지 드는 참으로 절망적인 상 황에 놓였을 딪, 그의 친구들은 욥을 조문하기 위해 찾아왔었다(2:11-13). 이때 욥 은 마치 물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자처럼 심히 기뻐하며 그들의 따뜻한 위 로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읍의 기대는 산산이 무너지고 오히려 친구들의 가시돋힌 정죄와 비방을 받아야만 했다. 욥의 눈에 비친 친구들의 비정한 면모는 마치 사막 의 신기루처럼 욥의 심령을 실족시켰고 더윽 절망케 만들었다(15-23절). 진정 욥의 친구들에게 정작 요구된 것은 욥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욥에게 참사랑 을 가지고 접근하여 욥의 고난을 깊이 이해해주는 일이었다. 사실 그 어떤 거창한 일일지라도 그 밑바탕에 참사랑을 깔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헛된 노력일 수밖에 없 다(요일 3:10-14). 지금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원인규명이나 잘잘못 의 시비가 아니라, 먼저 구명 받을 밧줄이 필요하듯, 극심한 고통 중에 처한 형제 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따스한 위로와 긍휼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위로와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 인간들을 찾아오셨듯이…
3. 자기 중심의 논단보다 형제 중심의 신뢰가 필요하다(22-30절). 욥의 친구들은 모두 당시대에 뒤지지 않을 현자들이었다. 따라서 각자 나름대로의 지혜가 있었다. 엘리바스는 주로 경험에 근거했고, 빌닷은 전퉁에 근거했으며, 소발은 교리에 근거하여 자신의 변론을 피력했다. 그들의 변론은 모두 훌륭했고 탁월했다. 하지만 그들의 변론은 욥에게 아무련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욥을 더욱 짜증나게 했고, 그 감정을 자극했을 뿐이다. 무엇 때문일까 욥의 친구들 모두 자기 증심적 관점에서 읍의 재난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볼 지라도 그토록 재난당할 특별한 죄롤 지은 적이 없다고 강변하는 욥의 말을 친구들 은 묵살했다. 그리고는 모두 자신들의 입장에서 욥의 죄를 찾아내기에 바빴다.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 하지 아니하리라.내 일이 의로우니라"(28-29절)는 욥의 말을 도대체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나중에 욥은 답답한 나머지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회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16:4-5) 고 말했다. 그렇다. 역경에 몰린 상대방을 치고 그 친구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 인간들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악한 습성이 있다. 하지만 역경 중에 있는 형제의 입장에서 서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그런 만큼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성도 여러분, 고난중에 처한 형제를 보십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그 형제의 입장 에 서는가 아니면 자기 중심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정죄자가 되는가
3. 자신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엘리바스의 집요한 변론에 마음이 몹시 상했던 욥은 얼단 매우 분노한 심정으로 엘리바스의 그릇된 판단과 비난을 일축했다. 그리고 마음을 조금 가라 앉힌 후 욥 은 엘리바스가 의심하며 추궁한 바 있는 자신의 도덕적 순결성에 대해 단호히 변호 하기 시작했다(24-30절).
그런데 욥이 자신의 순결성을 주장한 데에는 지나치리 만 치 자신의 의로움과 진실함을 강조한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엘리바스나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자신의 도덕적 청결성이 돋보일런지 모르나 참신 앙인이라면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신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교만의 죄에 이르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참신앙인은 주변 형제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의와 도덕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인가를 더 욱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사 6: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 다"
'결론' 우리는 고난중에 있는 형제에게 따스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입장에서 그 형제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자기 이론으로 다가 서지 마십시요. 따스한 위로의 마음과 뜨거운 긍휼의 눈물로 다가 가십시요. 사실 알고보면 우리 성도들이 예전에 죄악의 늪 속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던 불쌍한 자였 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냉철한 정죄자로 오시지 않았고, 비판 자로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따뜻한 위로자로 찾아 오 셨고, 다정한 목자로 다가 오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살았고, 또 살 소망 을 가진 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고로 이제는 우리 성도들이 고난에 처한 형 제에게 참 위로자요 안위자로 다가 가십시다. (고후1:3-4)"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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