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을 행하리라 (사43:14-21)
본문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벧론 포로 중에서 바벧론 제국의 장려한 광경과 풍부한 물화를 볼 때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버린 줄 생각하고 '히브리인들로서는 그 곳 이방 도시들을 대항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 여 체념하고 사는 그들이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신교의 감화 에 물들게 되어 자기들 신앙의 특색을 잊어버린 민족으로 전락할 때, 소명을 받아서 무신앙을 극복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창조적인 신앙 을 불어넣은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기의 입장을 선지자는 먼저 믿음으로 살아온 과거, 하나님 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상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회고함은 현재의 난관 타개에 힘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되었고, 그들의 원수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등불 꺼지듯이 멸망당한 사실을 회고시킴 으로써 현재의 위기에 희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 하기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고 말함으로 써 옛일을 회상시킨 직전의 자기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듯한 예언을 하였으나 그 사실은 현재의 더 영광스러우니 과거의 영광을 회고할 필 요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지자가 지적한 새 일이란, 포로에서 벗어나 우리는알 지마는, 오늘의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도 똑같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 언급된 "새일"이란 말은 대체로 장차 도래할 새시대, 주 의 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주께서 그의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새 마음과 새 영을 심어 주시고 그들을 새 읾 으로 부러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고 그리하여 이 완성을 새 노래로 높이 송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입장에서,우리가 행해야 할 새 일이란 어떤것 인가를 생각하려 합니다.
1, 율법적인 일이 아닌 복음적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대로 율법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전 생활 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도덕적,종 교적, 법률적 명령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때는 구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비친 율법의 기능은 개인의 몽학선생이요, 율법아 래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단죄 아래 있을뿐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율법 에 의해 살 수는 없고,율법은 그것을 아는 이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시대의 율법주의자들이란 율법 조항의 표면적, 형 식적 실행에 의한 자기 만족에 도취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략하자면 단죄와 형식으로 인간 자기도취와 안주, 그것이 예수로 하 여금 율법을 반대하게 한 것이고 복음을 필요로 하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쁨의 소식, 구원의 소식을 이름하는 것이니 예수가 우리위해 대신 죽으심으 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어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합니까 율법적인 신앙, 율법 적인 생각, 율법적인 행동에 도취되어서는 안됩니다. 질서를 가장하여 메마른 사랑을 합법화하고 공의를 오해하여 사랑을 망각한 행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우리의 생활이 아닌가요 어떤 이는 한국 교회의 병리가 극단적인 신비주의와 극단적인 합리주 의로 분열되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신 비주의가 부도덕하며 현실을 지나치게 경솔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면, 합리주의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차원을 혼동하여 종교를 윤리 도덕으로 격하시키고 용서와 속량을 도외시하는 현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복음은 새로운 일입니다.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권세있는 새 교훈이라고 증언한 것이 마가복음 1장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5리를 가자 하면 10리까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정신적 면에서 생각할 때 대개 두 종류의 것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타율적인 것과 또 하나는 자율적인 것입니다. 외부의 어떤 힘에 몰리어서 행하는 것과 누구의 요구나 감독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하는 행동 말입니다. 옛날 로마법으로는 군인들이 행군할 때 백성을 강제 징용하여 1마일 을 끌고 가서 다음 부락의 사람과 교대시켰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런 강제 징용을 싫어하였다고 합니다.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것을 소재로 하여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 행하라(마5:14)"고 말씀함으로 자율성과 함께 다른 이가 구하는 것보 다 더 많이 수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자율과 관용! 그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일입니다. 국민학생은 숙제가 있어야 공부하고 고등학생은 시험에 몰리어서 공부하지만 대학원생쯤 되면 숙제나 시험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아도 읽어야 할 책을 찾아서 독서의 계획을 세우고 그 한 권 한권의 책을 차례 차례로 정복해 나아 가는 것입니다. 프랑스에는 알버트(Albert)라는 성을 가진 사람으로 노벧상을 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한분은 '전락'이라는 작품으로 노벧문학상을 탄 실존주의 작가 까뮤요, 또한 사람은 평화상을 받은 의사요, 음악가 요,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슈바이쳐입니다. 까뮤는 상금으로 파리 근교 에 좋은 별장을 마련하고 자동차를 몰고 거기로 가던중 차 사고로 생 명을 잃었고, 슈바이처는 그 상급으로 아프리카 적도 선상에 나환자 수용소를 짓고 치료하다가 타계하였습니다. 두 분이 다 죽은 지금 그들이 지은 별장과 병원이 남아 있는데,그들 을 생각할 때 어쩐지 한 분의 애석하게 생각되고, 한 분은 위대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대학원생의 독서생활, 슈바이쳐의 봉사 생활이 보여주는 자율과 관 용! 이것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천국 시민의 생활의 근사치가 아 니겠습니까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 언한대로 새 일을 행하야 할 새로운 마음입니다.에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 11:19)"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8장 31절에는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5리를 가는 타율을 "책임 이하"라고 한다면, 10이를 가주는 자율을 "책임 이상"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 리빙스톤은 자기가 죽기 전에 "아버지여 난 한 사람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일생을 선교와 교육에 바친 그의 삶을 두고도 그렇게 기도하였다면 한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일까요를 두렵게 감탄시키는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새 일은 홍해를 통고한 제일의 탈 출(Exodous) 보다도 더 경이한 일들, 사막에 강을내어 포로된 그들이 자유롭게 마시게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새 국가를 건설한 신천신지의 모델 사업을 보여 주시겠다고 넘치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3. 휠레아(Filia)에서 아가페(Agape)로! 본문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구속자 요 거룩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구 속적 사랑입니다. 성서에는 성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나 육친의 본능적인 정애를 나타내는 스토롤게라는 단어는 일회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들은 오히려 우애나 사회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인 휠리아로 대용하였거니와,우리의 모든 일이 휠리아의 차원에서 더 승화되어 아 가페의 차원으로 옮겨져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습바니다. 흔히 들 아가페의 사랑은 종교적인 사랑 즉 사람에게 향하는 신의 사랑, 신 에게 향하는 인간의 사랑이라는 점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만 알고 있으나 그 사랑의 본원과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서는 아가페 사랑이 나타난 동기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데서부터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아가페' 확증하셨다(롬 5: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굳이 니그렌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아가페 사랑은 인간 구원을 목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사랑이야말로 휠리아, 스토로게, 에로스의 의미를 합축하지만 간혹 우리는 비인도적인라도 인간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아가페적 행위를 감행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아가페입니다. 기독교는 아가페의 실천입니다.이제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여유있는 마음과 물질을 가지고 자선하는 사랑이 아니라,내 말과 행동과 교회의 계획과 움직임 그리고 예산의 구성도 안전한 운영을 위한 예산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순간도 잊지 않는 철저한 아가페의 실천을 위하여 예산하고 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1서 2장 7절에 말씀하는 '새 계명'이라는 것이요,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고 완성된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빨리 이해하지는 못했 습니다. 자기 머리를 가리워 태양열을 막아주던 박넝쿨 하나를 그렇게 아끼면서도 "그 큰 성을 니느웨,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이만 여명의 사람과 거기에 있는 많은 육축을 구원하려고(욘4:1-14)" 죄악의 도시 로 자기를 파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는 오해하고 다시스로 도망갔 던 것입니다. 가장 정의롭다고, 공평하다고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어긋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크리스챤 개인에서 부터 여러 그룹과 교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이 인간의 구원을 목적한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만이아여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출애굽보다 더 큰 영광스러운 제2의 출애굽을 믿음으로 확 신하라는 권면으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희망찬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과거도 좋으나 과거를 현재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요리하도록 해야 합니다.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과거라는 재료로 현재를 창조하는 주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를 현재에서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며, 우리는 나 이와의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서 맡긴 일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를 배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용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우리가 그를 향한 마음의 변화와 함께 작용됩니다. 그는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며 저주를 축복으로 변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회고함은 현재의 난관 타개에 힘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되었고, 그들의 원수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등불 꺼지듯이 멸망당한 사실을 회고시킴 으로써 현재의 위기에 희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 하기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고 말함으로 써 옛일을 회상시킨 직전의 자기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듯한 예언을 하였으나 그 사실은 현재의 더 영광스러우니 과거의 영광을 회고할 필 요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지자가 지적한 새 일이란, 포로에서 벗어나 우리는알 지마는, 오늘의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도 똑같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 언급된 "새일"이란 말은 대체로 장차 도래할 새시대, 주 의 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주께서 그의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새 마음과 새 영을 심어 주시고 그들을 새 읾 으로 부러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고 그리하여 이 완성을 새 노래로 높이 송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입장에서,우리가 행해야 할 새 일이란 어떤것 인가를 생각하려 합니다.
1, 율법적인 일이 아닌 복음적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대로 율법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전 생활 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도덕적,종 교적, 법률적 명령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때는 구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비친 율법의 기능은 개인의 몽학선생이요, 율법아 래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단죄 아래 있을뿐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율법 에 의해 살 수는 없고,율법은 그것을 아는 이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시대의 율법주의자들이란 율법 조항의 표면적, 형 식적 실행에 의한 자기 만족에 도취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략하자면 단죄와 형식으로 인간 자기도취와 안주, 그것이 예수로 하 여금 율법을 반대하게 한 것이고 복음을 필요로 하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쁨의 소식, 구원의 소식을 이름하는 것이니 예수가 우리위해 대신 죽으심으 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어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합니까 율법적인 신앙, 율법 적인 생각, 율법적인 행동에 도취되어서는 안됩니다. 질서를 가장하여 메마른 사랑을 합법화하고 공의를 오해하여 사랑을 망각한 행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우리의 생활이 아닌가요 어떤 이는 한국 교회의 병리가 극단적인 신비주의와 극단적인 합리주 의로 분열되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신 비주의가 부도덕하며 현실을 지나치게 경솔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면, 합리주의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차원을 혼동하여 종교를 윤리 도덕으로 격하시키고 용서와 속량을 도외시하는 현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복음은 새로운 일입니다.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권세있는 새 교훈이라고 증언한 것이 마가복음 1장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5리를 가자 하면 10리까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정신적 면에서 생각할 때 대개 두 종류의 것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타율적인 것과 또 하나는 자율적인 것입니다. 외부의 어떤 힘에 몰리어서 행하는 것과 누구의 요구나 감독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하는 행동 말입니다. 옛날 로마법으로는 군인들이 행군할 때 백성을 강제 징용하여 1마일 을 끌고 가서 다음 부락의 사람과 교대시켰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런 강제 징용을 싫어하였다고 합니다.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것을 소재로 하여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 행하라(마5:14)"고 말씀함으로 자율성과 함께 다른 이가 구하는 것보 다 더 많이 수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자율과 관용! 그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일입니다. 국민학생은 숙제가 있어야 공부하고 고등학생은 시험에 몰리어서 공부하지만 대학원생쯤 되면 숙제나 시험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아도 읽어야 할 책을 찾아서 독서의 계획을 세우고 그 한 권 한권의 책을 차례 차례로 정복해 나아 가는 것입니다. 프랑스에는 알버트(Albert)라는 성을 가진 사람으로 노벧상을 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한분은 '전락'이라는 작품으로 노벧문학상을 탄 실존주의 작가 까뮤요, 또한 사람은 평화상을 받은 의사요, 음악가 요,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슈바이쳐입니다. 까뮤는 상금으로 파리 근교 에 좋은 별장을 마련하고 자동차를 몰고 거기로 가던중 차 사고로 생 명을 잃었고, 슈바이처는 그 상급으로 아프리카 적도 선상에 나환자 수용소를 짓고 치료하다가 타계하였습니다. 두 분이 다 죽은 지금 그들이 지은 별장과 병원이 남아 있는데,그들 을 생각할 때 어쩐지 한 분의 애석하게 생각되고, 한 분은 위대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대학원생의 독서생활, 슈바이쳐의 봉사 생활이 보여주는 자율과 관 용! 이것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천국 시민의 생활의 근사치가 아 니겠습니까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 언한대로 새 일을 행하야 할 새로운 마음입니다.에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 11:19)"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8장 31절에는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5리를 가는 타율을 "책임 이하"라고 한다면, 10이를 가주는 자율을 "책임 이상"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 리빙스톤은 자기가 죽기 전에 "아버지여 난 한 사람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일생을 선교와 교육에 바친 그의 삶을 두고도 그렇게 기도하였다면 한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일까요를 두렵게 감탄시키는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새 일은 홍해를 통고한 제일의 탈 출(Exodous) 보다도 더 경이한 일들, 사막에 강을내어 포로된 그들이 자유롭게 마시게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새 국가를 건설한 신천신지의 모델 사업을 보여 주시겠다고 넘치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3. 휠레아(Filia)에서 아가페(Agape)로! 본문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구속자 요 거룩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구 속적 사랑입니다. 성서에는 성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나 육친의 본능적인 정애를 나타내는 스토롤게라는 단어는 일회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들은 오히려 우애나 사회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인 휠리아로 대용하였거니와,우리의 모든 일이 휠리아의 차원에서 더 승화되어 아 가페의 차원으로 옮겨져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습바니다. 흔히 들 아가페의 사랑은 종교적인 사랑 즉 사람에게 향하는 신의 사랑, 신 에게 향하는 인간의 사랑이라는 점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만 알고 있으나 그 사랑의 본원과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서는 아가페 사랑이 나타난 동기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데서부터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아가페' 확증하셨다(롬 5: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굳이 니그렌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아가페 사랑은 인간 구원을 목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사랑이야말로 휠리아, 스토로게, 에로스의 의미를 합축하지만 간혹 우리는 비인도적인라도 인간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아가페적 행위를 감행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아가페입니다. 기독교는 아가페의 실천입니다.이제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여유있는 마음과 물질을 가지고 자선하는 사랑이 아니라,내 말과 행동과 교회의 계획과 움직임 그리고 예산의 구성도 안전한 운영을 위한 예산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순간도 잊지 않는 철저한 아가페의 실천을 위하여 예산하고 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1서 2장 7절에 말씀하는 '새 계명'이라는 것이요,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고 완성된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빨리 이해하지는 못했 습니다. 자기 머리를 가리워 태양열을 막아주던 박넝쿨 하나를 그렇게 아끼면서도 "그 큰 성을 니느웨,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이만 여명의 사람과 거기에 있는 많은 육축을 구원하려고(욘4:1-14)" 죄악의 도시 로 자기를 파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는 오해하고 다시스로 도망갔 던 것입니다. 가장 정의롭다고, 공평하다고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어긋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크리스챤 개인에서 부터 여러 그룹과 교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이 인간의 구원을 목적한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만이아여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출애굽보다 더 큰 영광스러운 제2의 출애굽을 믿음으로 확 신하라는 권면으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희망찬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과거도 좋으나 과거를 현재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요리하도록 해야 합니다.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과거라는 재료로 현재를 창조하는 주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를 현재에서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며, 우리는 나 이와의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서 맡긴 일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를 배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용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우리가 그를 향한 마음의 변화와 함께 작용됩니다. 그는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며 저주를 축복으로 변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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