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이상 (사2:1-4)
본문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 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 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 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을법이 시 온에서 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 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 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 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익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 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 하리라 '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펑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아담 이후 인 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참된 평화를 상실한 채. 펑화를 얻 기 위 해 피비먼내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총올 멘 미국 군인 에게 그대는 왜 총을 메었 느냐고 믈어 보십시요. 아마도 서슴없 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총을 메었노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소련군인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요. 38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 고 있는 북한군인에게 가서 물 어 보십시요. 그 대답은 아마도 대 동소이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평화에 관하여 이사야가 주는 소식을 듣고자 합니다.
첫째, 평화실현의 때는 언제입니까 본문 2절은 그 때를 '말일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말일이 라는 표현은 많은 날들의 끝날이라는 입니다. 이 표현은 넓게는 메시야시대를 가리키고, 좁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지혜는 발달하고, 생활은 윤택해 지며 과학 은 발전하나. 평화는 오지 않고 오히려 전쟁은 더 심 각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지 의 발달과 비례하여 전쟁의 수단도 발달해 왔습니다. 고대에는 칼과 창과 활을 가지 고 싸웠으나, 근대에는 총과 대포로, 현재와 미래는 핵무기로 싸우지 않을 수 없바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 미할까요 이는 평화가 문명이나 정치적 책략이나 지식의 산물이 아님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 풍부히 그 증 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는 9 장 2_6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강의 나라가 임한 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 화가 임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 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갈지 아니하니라 너회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약속도 평강이었습니다 (요20:19 21 26).
그러므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현 되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평화의 시 작에 블과합니다. 완전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 실현될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해서는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평화실현의 장소는 어디일까요 본문 2절에서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산은 넓게 그리고 공간적으로 말하 면,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좁 게 그리고 영적으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떻습니다. 교회가 곧 평 화의 전당입니다. 국회의사당이나 유엔총회가 열리는 회의 장이 평화의 산실이 아니라 바로 교회 가 평화의 산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쟁과 갈등속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시대에 처한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 구 선생님은 경찰서 대신 교회를 세우자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이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위에 뛰어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영적_도덕적인 측면에서 탁월하며. 또 그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안에 먼저 평화가 없고. 도덕 적인 차원에서 탁월 하지 못하면, 파멸은 먼저 교회에 찾아 을 것입니다. 모든 산 중 에 가장 뛰 어난 산으로 숭앙되었던 예루살렘도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먼저 파멸되는 비운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평화가 없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땋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 고받는 날 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눅 19:42-44). 예루살렘의 타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귀결되었 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해주는 것일까요 교회에 평화가 없으면 그리고 교회가 영적-도덕적으로 탁월함을 갖추지 못하 면,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셋째,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이처럼 온 인류가 염원하는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 엇일까요 월남전이 치열하던 어느 날 정오에 팝 반루어라는 퇴 역군인 한명이 국회의사당에서 노란 바탕에 붉은 줄이 간 월 남국 기를 두르고 정좌했습니다. 잠시 후 그는 가솔먼을 온 몸에 뿌리고 평화를 외치며 성냥불을 그어 댔습니다. 그가 티우대통 령, 호지명, 아내 그리고 다섯 자녀에게 보낸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져 있었습니다. '나는 월남에 평화가 돌아오기를 기원 하면서 나자신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오늘 날 월남의 상황은 어 떻습니까 그가 분신자살한 며칠 후, 월남은 잔인한 호지명군 의 군화에 짓 밟히지 않을 수 없었고 월남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살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땅에는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희생조차도 평화를 가져 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노력과 희생조차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평화를 인간의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은 하나님 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으 로써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 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 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부터 나을 것임이라.' 말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위에서 속죄사역을 완성하시고 성령님이 오순 절날에 충만하게 임한 후에 온 세상에 말씀이 선포되고 이 말씀 을 듣기 위해 세계 만민이 교회로 모여 들었습니다. 본문은 이와 같은 신 약시대의 정황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곧 평화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의 말을 들을 때 비로소 평화는 실현될 수 있습니다.
넷째,평화를 궁극적으로 이루시는분은 '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 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 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 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 치 아니하리라.' 본문이 말하는 열 방을 다스리는 왕은 세상 나라의 군주나 수상이 아니요, 대통령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며 섭 리자 이시며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본문이 약속하고 있는 꿈과도 같은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사람을 찌르고 베고 죽이기 위하여 준비한 칼이 보습으로 바뀌 고, 창이 낫으로 바뀌며 도처에는 평화의 촌락이 형성될 것입니다. 었습니다. 꽹이와 호미를 거두어다가는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가정에서 쓰는 수저와 밥그릇을 가져다가 총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일본의 평화와 안전이 보장 되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일본은 비참한 파멸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정부는 교회의 종을 가져다가 무기를 만들 우리는 본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 여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됨니다. 여호와의 다 스리심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지혜의 다스림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시대든지 뛰 어난 천재들의 이론 과 의견을 의지하여 평화의 길을 모색하여 왔으나 한번도 전쟁 의 소용돌이 를 벗어나 본 일이 없었슘니다. 오늘날 세계도처에는 전쟁이 이지 않고 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온 세계의 인류 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결혼한 부 부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낳을 경우 그 아이들이 틀림없이 핵전쟁 의 회생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노 력을 통해서 또는 철 학이나 도덕교육을 통해서 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R습니까 절대로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일은 오직 여호와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유엔총회가 하나님의 율법 에 근거해서 세 계문제들을 논의하고, 백 악관과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 종할 때 비로소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가는 분 명해졌습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t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오랫동안 국 경문제로 갈등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침내는 전쟁으로까 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끝낸 데는 1900년 부활절 아침 어느 아르헨티나의 목사가 외치는 평화의 호소가 결정적으 로 기여했습니다. 두 나라에서는 국경 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녹여서 그리스도의 상을 만들어 국경지대에서 가장 높은 산위에 세웠습니다. 1904년 3월 13일 두 나라 국민들은 이 산정에 모여 동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아르헨티나 인들은 칠레인들의 천막 에 초대되었고 칠레인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천막에 초대되었 습니다. 동 상 제막식 테이프를 끊기 전 양국 국민들은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상에는 이와 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의 발밑에서 영원히 지키자고 맺 은 언약을 두 나라가 깨뜨리면 즉시 산들이 무너질 것이다.'그 이후 두 나라는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포, 하나님이 평화를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o . 3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 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 라.' 하나님이 이처럼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시는 이유는 도 대체 무엇일까요 왜 한쪽에서는 평화의 왕이라고 말해 놓고 다른 쪽에서는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양면을 동시에 보 지 않으면 안니다. 이 본문은 사실 상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곧 평화가 오기에 서 서 갈등과 싸움이 있게 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은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이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는 데, 그것이 곧 평화를 해치는 죄악의 요소들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발꿈치를 무는 뱀의 머리를 짓밟고난 뒤에 비로소 평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 떻 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예수님은 건설자이기 에 앞서서 위대한 파괴자였습니다. 러스킨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평 화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K습니다. '평화는 문명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죄와 수치를 정복함으로 써 그것을 얻는다. 분열과 부패를 이김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항상 싸움 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항상 유대주의자 들 이 나타나 그의 복음전도를 방해했습니다. 그들과의 싸움을 거치지 않고는 복음을 소개할 수 없었 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일 행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비 난의 뜻은 가는 곳마다 싸움을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요 한도 하나님의 우주적인 참된 평화가 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 주적인 대전쟁이 있어야 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리 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 _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뚜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회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 에서 이한 검이 나 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고 그 옷과 그 다 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 19 ;11-16).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전쟁과 싸움이 이지 않는 이 유는 하나떰이 참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한 전 단계로 악을 파괴 시키는 작업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은 마음 속에 어떤 평화의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 이든 진정하고 참된 평화는 평화의 왕, 만왕의 왕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평화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 고 있으며 세상 끝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이상은 완성 될 것 입니다.
첫째, 평화실현의 때는 언제입니까 본문 2절은 그 때를 '말일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말일이 라는 표현은 많은 날들의 끝날이라는 입니다. 이 표현은 넓게는 메시야시대를 가리키고, 좁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지혜는 발달하고, 생활은 윤택해 지며 과학 은 발전하나. 평화는 오지 않고 오히려 전쟁은 더 심 각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지 의 발달과 비례하여 전쟁의 수단도 발달해 왔습니다. 고대에는 칼과 창과 활을 가지 고 싸웠으나, 근대에는 총과 대포로, 현재와 미래는 핵무기로 싸우지 않을 수 없바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 미할까요 이는 평화가 문명이나 정치적 책략이나 지식의 산물이 아님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 풍부히 그 증 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는 9 장 2_6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강의 나라가 임한 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 화가 임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 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갈지 아니하니라 너회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약속도 평강이었습니다 (요20:19 21 26).
그러므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현 되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평화의 시 작에 블과합니다. 완전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 실현될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해서는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평화실현의 장소는 어디일까요 본문 2절에서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산은 넓게 그리고 공간적으로 말하 면,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좁 게 그리고 영적으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떻습니다. 교회가 곧 평 화의 전당입니다. 국회의사당이나 유엔총회가 열리는 회의 장이 평화의 산실이 아니라 바로 교회 가 평화의 산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쟁과 갈등속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시대에 처한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 구 선생님은 경찰서 대신 교회를 세우자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이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위에 뛰어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영적_도덕적인 측면에서 탁월하며. 또 그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안에 먼저 평화가 없고. 도덕 적인 차원에서 탁월 하지 못하면, 파멸은 먼저 교회에 찾아 을 것입니다. 모든 산 중 에 가장 뛰 어난 산으로 숭앙되었던 예루살렘도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먼저 파멸되는 비운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평화가 없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땋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 고받는 날 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눅 19:42-44). 예루살렘의 타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귀결되었 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해주는 것일까요 교회에 평화가 없으면 그리고 교회가 영적-도덕적으로 탁월함을 갖추지 못하 면,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셋째,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이처럼 온 인류가 염원하는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 엇일까요 월남전이 치열하던 어느 날 정오에 팝 반루어라는 퇴 역군인 한명이 국회의사당에서 노란 바탕에 붉은 줄이 간 월 남국 기를 두르고 정좌했습니다. 잠시 후 그는 가솔먼을 온 몸에 뿌리고 평화를 외치며 성냥불을 그어 댔습니다. 그가 티우대통 령, 호지명, 아내 그리고 다섯 자녀에게 보낸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져 있었습니다. '나는 월남에 평화가 돌아오기를 기원 하면서 나자신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오늘 날 월남의 상황은 어 떻습니까 그가 분신자살한 며칠 후, 월남은 잔인한 호지명군 의 군화에 짓 밟히지 않을 수 없었고 월남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살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땅에는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희생조차도 평화를 가져 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노력과 희생조차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평화를 인간의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은 하나님 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으 로써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 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 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부터 나을 것임이라.' 말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위에서 속죄사역을 완성하시고 성령님이 오순 절날에 충만하게 임한 후에 온 세상에 말씀이 선포되고 이 말씀 을 듣기 위해 세계 만민이 교회로 모여 들었습니다. 본문은 이와 같은 신 약시대의 정황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곧 평화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의 말을 들을 때 비로소 평화는 실현될 수 있습니다.
넷째,평화를 궁극적으로 이루시는분은 '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 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 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 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 치 아니하리라.' 본문이 말하는 열 방을 다스리는 왕은 세상 나라의 군주나 수상이 아니요, 대통령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며 섭 리자 이시며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본문이 약속하고 있는 꿈과도 같은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사람을 찌르고 베고 죽이기 위하여 준비한 칼이 보습으로 바뀌 고, 창이 낫으로 바뀌며 도처에는 평화의 촌락이 형성될 것입니다. 었습니다. 꽹이와 호미를 거두어다가는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가정에서 쓰는 수저와 밥그릇을 가져다가 총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일본의 평화와 안전이 보장 되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일본은 비참한 파멸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정부는 교회의 종을 가져다가 무기를 만들 우리는 본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 여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됨니다. 여호와의 다 스리심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지혜의 다스림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시대든지 뛰 어난 천재들의 이론 과 의견을 의지하여 평화의 길을 모색하여 왔으나 한번도 전쟁 의 소용돌이 를 벗어나 본 일이 없었슘니다. 오늘날 세계도처에는 전쟁이 이지 않고 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온 세계의 인류 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결혼한 부 부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낳을 경우 그 아이들이 틀림없이 핵전쟁 의 회생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노 력을 통해서 또는 철 학이나 도덕교육을 통해서 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R습니까 절대로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일은 오직 여호와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유엔총회가 하나님의 율법 에 근거해서 세 계문제들을 논의하고, 백 악관과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 종할 때 비로소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가는 분 명해졌습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t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오랫동안 국 경문제로 갈등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침내는 전쟁으로까 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끝낸 데는 1900년 부활절 아침 어느 아르헨티나의 목사가 외치는 평화의 호소가 결정적으 로 기여했습니다. 두 나라에서는 국경 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녹여서 그리스도의 상을 만들어 국경지대에서 가장 높은 산위에 세웠습니다. 1904년 3월 13일 두 나라 국민들은 이 산정에 모여 동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아르헨티나 인들은 칠레인들의 천막 에 초대되었고 칠레인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천막에 초대되었 습니다. 동 상 제막식 테이프를 끊기 전 양국 국민들은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상에는 이와 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의 발밑에서 영원히 지키자고 맺 은 언약을 두 나라가 깨뜨리면 즉시 산들이 무너질 것이다.'그 이후 두 나라는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포, 하나님이 평화를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o . 3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 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 라.' 하나님이 이처럼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시는 이유는 도 대체 무엇일까요 왜 한쪽에서는 평화의 왕이라고 말해 놓고 다른 쪽에서는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양면을 동시에 보 지 않으면 안니다. 이 본문은 사실 상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곧 평화가 오기에 서 서 갈등과 싸움이 있게 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은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이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는 데, 그것이 곧 평화를 해치는 죄악의 요소들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발꿈치를 무는 뱀의 머리를 짓밟고난 뒤에 비로소 평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 떻 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예수님은 건설자이기 에 앞서서 위대한 파괴자였습니다. 러스킨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평 화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K습니다. '평화는 문명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죄와 수치를 정복함으로 써 그것을 얻는다. 분열과 부패를 이김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항상 싸움 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항상 유대주의자 들 이 나타나 그의 복음전도를 방해했습니다. 그들과의 싸움을 거치지 않고는 복음을 소개할 수 없었 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일 행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비 난의 뜻은 가는 곳마다 싸움을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요 한도 하나님의 우주적인 참된 평화가 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 주적인 대전쟁이 있어야 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리 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 _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뚜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회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 에서 이한 검이 나 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고 그 옷과 그 다 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 19 ;11-16).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전쟁과 싸움이 이지 않는 이 유는 하나떰이 참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한 전 단계로 악을 파괴 시키는 작업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은 마음 속에 어떤 평화의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 이든 진정하고 참된 평화는 평화의 왕, 만왕의 왕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평화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 고 있으며 세상 끝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이상은 완성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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