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날 잃은 일군 (왕하6:6-7)
본문
엘리사에게 사사했던 선지자 후보생들은 그들을 수용하고 있는 시설이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요단으로 옮겨 새로운 교사를 자력으로 신축하기로 합의하고 스승의 허락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답답한 일입니다. 선지자 후보생들은 도끼마저 남의 것을 빌려야 할 정도로 가난한 처지였으니 신축의 큰 역사를 어떻게 해낼 것인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빈 주먹으로 큰 역사를 시작해야 하는 선지자 후보생들의 심정은 칼 한자루 없이 격전장으로 나가야 하는 용사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나마 작업도중에 한 후보생의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물에 잠겨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도끼는 빌어온 것으로 다 쓴 후에는 그 주인에게 반환해야 합디다. 그러나 그 도끼날이 깊은 물속에 빠져 버렸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궁한 것은 이제부터 입니다. 남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자기만 편안히 앉아 있자니 미안하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작업을 계속하자니 도끼가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현대인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격없는 교육, 철학없는 고소득, 신의없는 정치, 양심없는 과학, 아무리 휘둘러 보아도 이것은 빈자루 뿐이어서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개인은 양심을, 사회는 신의를, 종교는 영력을, 경제는 철학을 다시 찾을 때 새 역사의 건설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교훈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선교사업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성령의 권능을 잃은 날 없는 도끼로 일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배로운 쟁기를 어디서 잃었습니까
1. 성경을 게을리 보는 데서 성경은 신앙생활의 음식이요, 영적 성장의 자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가 음식을 요구하는 것 같이 우리의 영혼은 성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보다 더 달고 금보다 더 귀하다는 체험을 노래했습니다. 성경이 보기 싫다면 이는 벌써 그 마음이 성령의 감화에서 떠난 증거요 성경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는 벌써 영명이 시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성령의 통로를 막아 그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2. 기도를 게을리하는 자리에서 신약 원어의 기도는 자세나 음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이 신께 나아가는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당한 위치를 보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도, 우리의 마음이 등질 때에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원리는 하나님께 귀합하는 노력이요, 우리의 마음을 그의 뜻에 합하게 하려는 운동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요구를 잘 아시고, 우리 마음의 형태와 부족을 잘 아시며,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될지 그 진로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있어야 할 것을 보충하시며, 나아가야 할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요구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신은 기도하는 인간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롬 8:26-27에 기록된대로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무언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성령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뜻대로인 기도입니다. 사랑인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넘치게 주실 것이요, 지(智)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이상의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는 분임을 신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최선의 일이므로 최상의 기도는 신뢰, 봉헌, 복종입니다. 주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겟세마네의 최후 기도에 있어서도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신 비장한 복종은 그리스도 정신의 절정이요, 기도의 궁극적 진정의 발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기도하지 않고는 위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성령이 함께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자는 바로 호흡이 끊긴 자입니다.
3. 자만심에서 이 자만심은 우리 교역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기도에 힘쓰고 영적생활에 가까운 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이러한 과오를 범하는 일이 더 많은 것입니다. 교만은 부정당한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이에 대하여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의 입장과 부족한 가치를 잘 인식하는 정당한 생각을 하는 자니,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께 가납될 마음입니다. 약 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주께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을 화합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신 후 사람의 몸을 가지시고 죽는 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이같이 겸손과 순종이 하나님과 사랑의 장벽을 헐어버리는 큰 공능(功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분리되었다는 과장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의 덕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중한 것이며 교만의 죄가 하나님 여호와 앞에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교만이 생길 때 권능은 이미 떠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4.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함에서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햇빛은 선인과 악인에게 다 비쳐주시고, 비를 의인과 불의한 사람에게 같이 내리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날 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형제로 더불어 틈이 있어 그 허물이나 죄가를 용서치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는 마음이니, 그 마음에는 벌써 결렬이 생기고 상혼이 있게 되는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께 “사람이 만약 나에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일곱 번을 일흔 번씩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종교와 도덕률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의 종교임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마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자기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최후를 보내시며, “아버지여 이 무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볼 수 없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신이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 실행하여야 그의 안에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외우는 주기도문 중에 마 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였으니다른 사람을 용서치 못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 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롬 12:18-19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될 수 있는대로 뭇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마 18: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마 18:32-34에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내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주님의 말씀은 무섭고 떨리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형제의 허물을 용서치 않고 감히 그를 쳐다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무제한으로 할 것이요, 용서를 미명적으로 남용할 것도 아닙니다. 용서의 진의는 그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자각의 감동을 주어 진정 회복케 함에 있는 것입니다. 마 18:15-17에 “너와 홀로 있을 때 책하라”고 하였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거든 경우를 따라 행할 것을 말하였으니 즉 그 본위는 그 사람을 바르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배로운 쟁기를 어디서 잃었습니까
1. 성경을 게을리 보는 데서 성경은 신앙생활의 음식이요, 영적 성장의 자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가 음식을 요구하는 것 같이 우리의 영혼은 성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보다 더 달고 금보다 더 귀하다는 체험을 노래했습니다. 성경이 보기 싫다면 이는 벌써 그 마음이 성령의 감화에서 떠난 증거요 성경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는 벌써 영명이 시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성령의 통로를 막아 그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2. 기도를 게을리하는 자리에서 신약 원어의 기도는 자세나 음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이 신께 나아가는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당한 위치를 보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도, 우리의 마음이 등질 때에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원리는 하나님께 귀합하는 노력이요, 우리의 마음을 그의 뜻에 합하게 하려는 운동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요구를 잘 아시고, 우리 마음의 형태와 부족을 잘 아시며,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될지 그 진로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있어야 할 것을 보충하시며, 나아가야 할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요구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신은 기도하는 인간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롬 8:26-27에 기록된대로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무언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성령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뜻대로인 기도입니다. 사랑인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넘치게 주실 것이요, 지(智)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이상의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는 분임을 신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최선의 일이므로 최상의 기도는 신뢰, 봉헌, 복종입니다. 주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겟세마네의 최후 기도에 있어서도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신 비장한 복종은 그리스도 정신의 절정이요, 기도의 궁극적 진정의 발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기도하지 않고는 위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성령이 함께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자는 바로 호흡이 끊긴 자입니다.
3. 자만심에서 이 자만심은 우리 교역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기도에 힘쓰고 영적생활에 가까운 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이러한 과오를 범하는 일이 더 많은 것입니다. 교만은 부정당한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이에 대하여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의 입장과 부족한 가치를 잘 인식하는 정당한 생각을 하는 자니,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께 가납될 마음입니다. 약 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주께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을 화합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신 후 사람의 몸을 가지시고 죽는 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이같이 겸손과 순종이 하나님과 사랑의 장벽을 헐어버리는 큰 공능(功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분리되었다는 과장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의 덕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중한 것이며 교만의 죄가 하나님 여호와 앞에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교만이 생길 때 권능은 이미 떠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4.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함에서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햇빛은 선인과 악인에게 다 비쳐주시고, 비를 의인과 불의한 사람에게 같이 내리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날 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형제로 더불어 틈이 있어 그 허물이나 죄가를 용서치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는 마음이니, 그 마음에는 벌써 결렬이 생기고 상혼이 있게 되는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께 “사람이 만약 나에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일곱 번을 일흔 번씩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종교와 도덕률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의 종교임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마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자기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최후를 보내시며, “아버지여 이 무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볼 수 없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신이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 실행하여야 그의 안에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외우는 주기도문 중에 마 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였으니다른 사람을 용서치 못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 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롬 12:18-19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될 수 있는대로 뭇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마 18: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마 18:32-34에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내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주님의 말씀은 무섭고 떨리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형제의 허물을 용서치 않고 감히 그를 쳐다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무제한으로 할 것이요, 용서를 미명적으로 남용할 것도 아닙니다. 용서의 진의는 그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자각의 감동을 주어 진정 회복케 함에 있는 것입니다. 마 18:15-17에 “너와 홀로 있을 때 책하라”고 하였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거든 경우를 따라 행할 것을 말하였으니 즉 그 본위는 그 사람을 바르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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