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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느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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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의 건축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밖으 로부터의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의 방해에 맞서야 하고, 내부로부터일어나는 가난한 백성들의 좌절과 원망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1. 느헤미야의 문제 진단 성벽을 재건하는데 역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나라를 잃고 외국사람들의 종이 되어 서러운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땅에 돌아왔지만 가난한 그들 을 맞아 주는 것은 동족의 종살이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 한 현실이였습니다. 돌아온 조국 땅은 흉년으로 인하여 먹고 살 기가 힘들었고, 민심은 강팍하기만 했습니다. 집조차 없이 많은 자녀를 거느린 가정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 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밭과 포도원과 집이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다 저당잡혀서 양식을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밭과 포도원을 담보로 하여 빚을 내어 세금을 물어야 했고,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세금은 인두세라 식구수대로 세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식 구수에 해당하는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종으로 넘겨야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분노했습니다. 분노했다고 하는 말을 혈기를 부 리고 분을 내는 감정의 폭발로 생각하지 마십시요.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느 5:6-7). 느헤미야는 분노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만이 사람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그의 중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힘과 능력으로서 백성과 민장과 귀인들 앞에 담대히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사람들을 우리 의 힘을 다하여 속량(贖良)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느 5:8).
느헤미 야는 이 문제를 형제라는 차원에서 설득하고 호소합니다. 형제란 무엇입니까 같은 피를 나눈 관계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보다 진한 것이 영적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왜냐구요 피는 길어야 인생 60년을 맺어 놓지만 영은 영원한 관계를 맺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왜 믿는 자들 사이에서 세상 사람 들과 다를바 없이 돌봄이 없어지고 내 배만 채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거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교만이 꽉 차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기 죽을 짓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형제임을 강조하여 이 문제를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느 5:9).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는 실현하지 않고 이기적인 득실을 따지는 장사터로 되어간다면 세상 사람들 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이 땅에 서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돌릴 수 있는 것 입니까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 라 (마 5:16). 성도는 저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 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 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행위가 간증을 파괴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의 정의라는 것은 피의 투쟁과 혁명이라 고 하는 사람의 물리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신앙과 그 분 앞에서의 절대 순종을 통한 믿음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공동체에 악한 일 을 행하는 무리들을 적으로서 간주하고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 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지고 새롭게 되어서 함께 영광의 기업을 받을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정의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는 사랑의 감동으로 개혁된 믿음이 이루어 냅니다.
2. 느헤미야의 처방 .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 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취한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하였더니 (느 5:10-11) 어떤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는 것이라면 당장에 그자리 에서부터 그쳐야 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차차 끊겠다고 미 루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부흥사는 지 옥이란 차차 차차 하다가 아차차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했습니다. 회계란 무엇입니까 잘못된 것은 당장에 끊고 돌아서는 것 입니다. 그리고 변상할 것은 변상하는 것입니다. 돌려 보낼 것은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죄를 다룹니다. 입에 발 린 말로 적당히 넘기우고 다 된 것처럼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 그 회계를 받으셨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일방적인 보 고같은 때우기가 통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죄가 얼마나 무서 운 것이길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마저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 도록 세 번씩 절규하셨겠습니까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실수하여 죄를 범하였으면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식음을 전폐했던 다윗과 같은 애통하는 부르짖음과 아픔 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철저히 댓가를 치루게 함으로서 이 육신이 죄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지니 (느 5:13).
3. 도리어 느헤미야는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무너져 있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그 집안은 아닥사스 다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나라와 민족 을 사랑했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갑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20년 부터 32년 까지 12년 동안을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祿) 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느 5:14). 이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사의 다른 총독들처럼 자기가 다스리는 땅의 백성들로부터 거 둬들인 세금으로 생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 사의 법으로 정해진 자신의 권리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특권을 포기합니다. 왜냐구요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느 5:18). 백성의 아 픔을 곧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생활이 넉넉하고 남아돌아가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매일 유다사람들과 민장들 150인과 찾아오는 손님들인 수많은 이방인들을 먹여야 했습니다 (느 5:17-18). 느헤미야는 총독이라는 지위를 특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백성을 섬기라는 종의 직분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땅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사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느헤미야는 그에게 딸린 모든 종자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버리고 백성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똑같이 하나님 의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도리어 백성들보다 더 어려운 부역을 맡아 하나님의 일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모두가 뒤질세라 애국자요, 백성의 종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정치가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찌그리 한결 같이 앞뒤가 다른 사람들 뿐인지 가슴이 답답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느헤미야의 아름다운 지도력을 사모하게 되는가 봅니다. 느헤미야의 이 아름다운 지도력은 한마디로 도리어 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역경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쯤 된다면, 성공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자신의 성공을 잘 다스릴 줄 알았던 느헤미야 !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 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 치 아니하고 (느 5:15). 또한 그는 사람에게서 댓가를 받으려하 지 않고 보상을 하나님께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가리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 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凌辱)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3-16).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 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 (느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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