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마와 마가와 누가의 차이 (딤후4:9-11)
본문
오늘은 능력이 특별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극도의 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능력이 없으면 자꾸만 뒤처지고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야단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조금만 뒤처지면 큰일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뛰어 놀아야 할 어린아이들이 두서너 개씩 학원을 다니느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을 해보면 이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조금 먼저 깨는 사람이 있고 조금 늦게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깨는 사람은 좀 일찍 약아지는 것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좀 늦게 깨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깨우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오늘만 보면 모릅니다. 오늘의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만을 보고 성공했다 실패했다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남들보다 조금 앞서간다고 해서 반드시 끝까지 앞서 간다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조금 뒤쳐졌다고 해서 그 인생 전체가 뒤처지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꾸준하게 노력하고 살아가면 시작은 늦지만 반드시 앞서갈 때가 오게 됩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 사람이 나옵니다. 데마와 마가와 누가입니다. 이 세 사람은 전혀 다른 사타일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 사람은 똑같이 사도 바울과 함께 사역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여기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자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모습과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비교해 보시고 지금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에 해당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 첫 번째 사람은 데마입니다. 이 사람은 퇴보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빌레몬서 1: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가장 존대한 존칭어입니다. 그때 데마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다가 감옥에도 같이 가고 고난도 같이 받고 수난도 같이 받으면서 전도를 합니다. 초창기에 데마는 이렇게 건실했고 열심히 일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를 신임해서 “나의 동역자 데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데마를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데마의 초기 모습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골로새서 4:1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나의 동역자 데마”라고 하지 않고 그냥 “데마”라고 부릅니다. “동역자 데마”와 “데마”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부른 것은 데마에게 상당히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에게서 신실한 모습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마를 동역자에서 그냥 보통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배신자로 낙인을 찍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렇게 열심 있고 유망하던 데마가 그만 타락해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길을 버리고 동역자 바울도 버리고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시작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기분으로 하고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중심을 이루는 신앙이 먼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처음에는 일찌감치 앞서갑니다. 그러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떨어져 나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참 열심히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보하고 느슨해지고 그러다가 마침내 탈락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후퇴하는 사람 데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 빨리 열심을 내는 분들이 걱정되고 위태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라톤을 보면 처음에 멀리 앞서 뛰어가는 선수는 틀림없이 얼마 못가서 뒤처집니다. 처음에 앞서 나가는 선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1등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1등이 반드시 1등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삶의 자세는 꾸준히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데마는 처음에는 잘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기대했고 사랑했고 믿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데마는 전형적인 퇴보하는 사람입니다.
2. 두 번째 사람은 마가입니다. 마가는 향상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마가는 데마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입니다. 오늘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사도행전 13:13을 보면 마가는 처음부터 실패자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때 마가는 멋도 모르고 여행 가는 기분으로 따라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마가는 며칠도 그 일을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도중에서 포기하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가는 일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낙오해 버립니다. 이 마가는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목회자였던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조카에게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일을 해보라고 권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멋모르고 따라 나섰다가 며칠도 감당을 못하고 가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잣집 아들은 신학교에 잘 안 갑니다. 혹 갔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해 중도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왜 신학교에 가겠습니까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 본 사람은 그렇게 어려운 길은 가지 못합니다. 마가가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초반부터 탈락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가다가 탈락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군대에 가 보면 간혹 이런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외아들로 자라거나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들이 군에 가면 대부분 적응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강한 훈련을 받게 되면 따라가지 못하고 열외로 쳐져 버리고 맙니다. 따라갈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을 최전방으로 보내면 두렵고 겁나서 적응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합니다. 이것은 심신이 유약해서 그렇습니다. 마가의 어머니가 아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낙오되어 돌아왔을 때 속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내 아들이 이렇게 무능하고 유약하단 말인가” 하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마가 자신은 또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하는 충격도 컸을 것입니다. 자식을 그렇게 유약하게 키우면 좋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중도에서 탈락하여 돌아온 마가를 삼촌 바나바가 애정을 가지고 훈련시켰습니다. 또 어머니가 좀 뒤늦은 감은 있지만 아들을 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본인 자신도 좌절만 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노력을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바나바가 사도 바울에게 가서 다시 자기 조카를 천거합니다. “마가를 다시 한번 믿어 보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직도 마가를 신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사람이 한번 신임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신임을 잃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잃은 신임을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실망하지 않고 바나바는 마가를 더 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마가 자신도 더 열심히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사람이 이렇게 노력해서 자신을 잘 키우고 그릇을 준비만 해놓으면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너는 내게로 속히 오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내게 필요하니라”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마가는 다시 믿음을 회복해서 사도 바울의 아주 좋은 선교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나중에는 아주 유능한 전도자가 됩니다. 또한 후에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좋은 발전입니까 이것이 바로 향상하는 삶의 모습이고 모형입니다. 이렇게 늦게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 아이가 과연 사람 구실을 할까” 하고 염려했던 아이들이 커서는 큰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위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모두 약점이 있고 그 삶에 원만치 못한 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위인들은 그런 자신의 약점들이 있기 때문에 더 분발했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더욱 불태웠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위인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박정희 대통령도 태어났을 때는 조그맣고 새까만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임신중에 유산시키려고 간장을 그렇게 많이 마셨다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의 생긴 것이나 체구를 볼 때 사람들이 무슨 기대를 했겠습니까 누가 그 아이가 커서 대통령이 되리라고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커서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해 복제 인간 제 1호로 지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토마스 칼라일이라는 사람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쓸 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꼭 7년 동안 이 책을 썼습니다. 마지막 원고를 완성하던 날 너무나 기뻐서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자축을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가볍고 시원했겠습니까 그때 집에 있던 하인이 저녁이 되어서 난로를 피우려고 불쏘시개를 찾다가 마침 주인의 책상 위에 누렇게 퇴색한 원고 뭉치를 발견했습니다. 조이가 누렇게 바랬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그 원고지에 불을 붙여서 난로를 피웠습니다. 밤이 깊어서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7년 동안 쓴 원고지를 소중하게 묶어 두었는데 한 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책상으로 가 보니까 없습니다. 하인을 불러서 물어 보니 난로 불쏘시개로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로를 보니 그 속에서 원고지들이 한참 타고 있습니다. 그때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7년 동안 수고한 것이 그만 한순간에 모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칼라일은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7년에 걸쳐서 그태운 원고를 다시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 7년은 지난번 7년과는 달랐습니다. 마침내 7년 후에 완성된 프랑스 혁명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14년에 걸쳐서 쓰여졌기 때문에 완벽한 저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꾸준히 노력하고 힘쓰고 준비하는 사람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의 기쁨을 선사합니다. 그것이 마가의 스타일, 즉 점점 향상하는 스타일입니다.
3. 세 번째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초지일관 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누가는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습니다. 이해 타산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에 움직이지 않고 환경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종 여일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믿음직한 삶의 스타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사도 바울 곁을 모두가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다 보면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고 장래성도 없고 고달프기만 해서 모두 바울 곁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만 끝까지 그 곁에 남아 있습니다. 누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면 그도 아시아로(행 20:6),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기도 말없이 동행했고(행 21:17), 가이사랴 감옥에 갈 때도, 로마의 감옥에 갈 때도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글을 기록했고 주치의 역할도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을 쓰고 누가복음을 씁니다. 그런 누가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나의 신실한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가를 신뢰함에 있어서 만족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얼마나 신실한 관계입니까 이것이 누가의 스타일, 이를테면 한결같은 스타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자신을 놓고 볼 때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마처럼 처음에는 왕성했었는데 지금은 시들해지지는 않았습니까 마가처럼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시작을 했다가 숱한 회의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지금 한참 힘쓰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처럼 나중이나 시종 여일하게 조금도 흔들림 없이 꾸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를 다 바쳤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궁금함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자신이 하는 일에 한결같았던 사람이었다 하고 주저없이 평가를 해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를 해준다고 해도 하나님은 또 나를 어떻게 평가해 주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런 궁금함이 있기 때문에 저는 늘 긴장하면서 살아갑니다. 한날도 마음대로 멋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가처럼 시종 여일한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할 때도 늘 그런 자세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이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면 복을 받습니다. 사람으로부터도 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복을 받습니다. 이같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을 해보면 이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조금 먼저 깨는 사람이 있고 조금 늦게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깨는 사람은 좀 일찍 약아지는 것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좀 늦게 깨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깨우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오늘만 보면 모릅니다. 오늘의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만을 보고 성공했다 실패했다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남들보다 조금 앞서간다고 해서 반드시 끝까지 앞서 간다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조금 뒤쳐졌다고 해서 그 인생 전체가 뒤처지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꾸준하게 노력하고 살아가면 시작은 늦지만 반드시 앞서갈 때가 오게 됩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 사람이 나옵니다. 데마와 마가와 누가입니다. 이 세 사람은 전혀 다른 사타일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 사람은 똑같이 사도 바울과 함께 사역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여기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자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모습과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비교해 보시고 지금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에 해당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 첫 번째 사람은 데마입니다. 이 사람은 퇴보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빌레몬서 1: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가장 존대한 존칭어입니다. 그때 데마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다가 감옥에도 같이 가고 고난도 같이 받고 수난도 같이 받으면서 전도를 합니다. 초창기에 데마는 이렇게 건실했고 열심히 일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를 신임해서 “나의 동역자 데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데마를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데마의 초기 모습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골로새서 4:1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나의 동역자 데마”라고 하지 않고 그냥 “데마”라고 부릅니다. “동역자 데마”와 “데마”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부른 것은 데마에게 상당히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에게서 신실한 모습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마를 동역자에서 그냥 보통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배신자로 낙인을 찍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렇게 열심 있고 유망하던 데마가 그만 타락해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길을 버리고 동역자 바울도 버리고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시작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기분으로 하고 열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중심을 이루는 신앙이 먼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처음에는 일찌감치 앞서갑니다. 그러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떨어져 나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참 열심히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보하고 느슨해지고 그러다가 마침내 탈락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후퇴하는 사람 데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 빨리 열심을 내는 분들이 걱정되고 위태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라톤을 보면 처음에 멀리 앞서 뛰어가는 선수는 틀림없이 얼마 못가서 뒤처집니다. 처음에 앞서 나가는 선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1등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1등이 반드시 1등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삶의 자세는 꾸준히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데마는 처음에는 잘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기대했고 사랑했고 믿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데마는 전형적인 퇴보하는 사람입니다.
2. 두 번째 사람은 마가입니다. 마가는 향상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마가는 데마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입니다. 오늘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사도행전 13:13을 보면 마가는 처음부터 실패자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때 마가는 멋도 모르고 여행 가는 기분으로 따라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마가는 며칠도 그 일을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도중에서 포기하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가는 일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낙오해 버립니다. 이 마가는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목회자였던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조카에게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일을 해보라고 권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멋모르고 따라 나섰다가 며칠도 감당을 못하고 가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잣집 아들은 신학교에 잘 안 갑니다. 혹 갔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해 중도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왜 신학교에 가겠습니까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 본 사람은 그렇게 어려운 길은 가지 못합니다. 마가가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초반부터 탈락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가다가 탈락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군대에 가 보면 간혹 이런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외아들로 자라거나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들이 군에 가면 대부분 적응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강한 훈련을 받게 되면 따라가지 못하고 열외로 쳐져 버리고 맙니다. 따라갈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을 최전방으로 보내면 두렵고 겁나서 적응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합니다. 이것은 심신이 유약해서 그렇습니다. 마가의 어머니가 아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낙오되어 돌아왔을 때 속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내 아들이 이렇게 무능하고 유약하단 말인가” 하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마가 자신은 또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하는 충격도 컸을 것입니다. 자식을 그렇게 유약하게 키우면 좋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중도에서 탈락하여 돌아온 마가를 삼촌 바나바가 애정을 가지고 훈련시켰습니다. 또 어머니가 좀 뒤늦은 감은 있지만 아들을 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본인 자신도 좌절만 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노력을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바나바가 사도 바울에게 가서 다시 자기 조카를 천거합니다. “마가를 다시 한번 믿어 보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직도 마가를 신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사람이 한번 신임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신임을 잃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잃은 신임을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실망하지 않고 바나바는 마가를 더 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마가 자신도 더 열심히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사람이 이렇게 노력해서 자신을 잘 키우고 그릇을 준비만 해놓으면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너는 내게로 속히 오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내게 필요하니라”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마가는 다시 믿음을 회복해서 사도 바울의 아주 좋은 선교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나중에는 아주 유능한 전도자가 됩니다. 또한 후에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좋은 발전입니까 이것이 바로 향상하는 삶의 모습이고 모형입니다. 이렇게 늦게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 아이가 과연 사람 구실을 할까” 하고 염려했던 아이들이 커서는 큰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위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모두 약점이 있고 그 삶에 원만치 못한 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위인들은 그런 자신의 약점들이 있기 때문에 더 분발했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더욱 불태웠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위인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박정희 대통령도 태어났을 때는 조그맣고 새까만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임신중에 유산시키려고 간장을 그렇게 많이 마셨다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의 생긴 것이나 체구를 볼 때 사람들이 무슨 기대를 했겠습니까 누가 그 아이가 커서 대통령이 되리라고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커서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해 복제 인간 제 1호로 지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토마스 칼라일이라는 사람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쓸 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꼭 7년 동안 이 책을 썼습니다. 마지막 원고를 완성하던 날 너무나 기뻐서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자축을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가볍고 시원했겠습니까 그때 집에 있던 하인이 저녁이 되어서 난로를 피우려고 불쏘시개를 찾다가 마침 주인의 책상 위에 누렇게 퇴색한 원고 뭉치를 발견했습니다. 조이가 누렇게 바랬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그 원고지에 불을 붙여서 난로를 피웠습니다. 밤이 깊어서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7년 동안 쓴 원고지를 소중하게 묶어 두었는데 한 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책상으로 가 보니까 없습니다. 하인을 불러서 물어 보니 난로 불쏘시개로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로를 보니 그 속에서 원고지들이 한참 타고 있습니다. 그때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7년 동안 수고한 것이 그만 한순간에 모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칼라일은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7년에 걸쳐서 그태운 원고를 다시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 7년은 지난번 7년과는 달랐습니다. 마침내 7년 후에 완성된 프랑스 혁명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14년에 걸쳐서 쓰여졌기 때문에 완벽한 저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꾸준히 노력하고 힘쓰고 준비하는 사람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의 기쁨을 선사합니다. 그것이 마가의 스타일, 즉 점점 향상하는 스타일입니다.
3. 세 번째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초지일관 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누가는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습니다. 이해 타산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에 움직이지 않고 환경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종 여일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믿음직한 삶의 스타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사도 바울 곁을 모두가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다 보면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고 장래성도 없고 고달프기만 해서 모두 바울 곁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만 끝까지 그 곁에 남아 있습니다. 누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면 그도 아시아로(행 20:6),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기도 말없이 동행했고(행 21:17), 가이사랴 감옥에 갈 때도, 로마의 감옥에 갈 때도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글을 기록했고 주치의 역할도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을 쓰고 누가복음을 씁니다. 그런 누가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나의 신실한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가를 신뢰함에 있어서 만족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얼마나 신실한 관계입니까 이것이 누가의 스타일, 이를테면 한결같은 스타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자신을 놓고 볼 때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마처럼 처음에는 왕성했었는데 지금은 시들해지지는 않았습니까 마가처럼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시작을 했다가 숱한 회의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지금 한참 힘쓰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처럼 나중이나 시종 여일하게 조금도 흔들림 없이 꾸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를 다 바쳤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궁금함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자신이 하는 일에 한결같았던 사람이었다 하고 주저없이 평가를 해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를 해준다고 해도 하나님은 또 나를 어떻게 평가해 주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런 궁금함이 있기 때문에 저는 늘 긴장하면서 살아갑니다. 한날도 마음대로 멋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가처럼 시종 여일한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할 때도 늘 그런 자세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이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면 복을 받습니다. 사람으로부터도 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복을 받습니다. 이같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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