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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의 목회 (살전2:1-12)

본문

아마도 오늘의 본문은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이루어 진 일이라고 봅니다. 대략
A. D50-51년 정도 됩니다. 그때의 바울의 나이는 대략 48세-49세 정도입니다. 바울은 본래 아시아로 전도 여행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결국 밤에 기도하다가 밤에 환상을 보고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교의 방향이 마게도니아,즉 유럽 지역인줄 알고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행16:6-10)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난 성이 빌립보 성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 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고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과 그 식구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빌립보 교회의 설립 멤버가 되었습니다.(행16:11-40) 그리고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옮겨가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인구는 대략 20만 명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자로서 목회자로서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I. 전도의 동기(2:1-6) 사도 바울이 전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 고 의식하고 산 전도자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주를 만난 이후 에 부르심을 받은 후로 행여 호리라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실망 시켜 드릴까 보 아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는 늘 범사에 하나님을 힘입어 무엇을 하든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능치 못함이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확신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한평생 살면서 부정적 인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그의 쓴 기록에는 보이지를 않 습니다. 때문에 그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가 전도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4)
즉 하나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거절 할 수 없이 때문에 이 일을 수행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동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 1:12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 바울은 너무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도 부탁을 하신 것에 대해서 감격하여 고백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를 알아주지 않는데! 인정하지도 않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충성되게 보시고 귀한 직분을 맡기셨으니 이것을 생각하고 너무나 감사해서 전도하는 일에 전심 전력하였던 것 입니다. 롬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전9:16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행20:24에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 라." 바울은 주 예수께서 부탁하신 전도의 사명을 이런 각오로 감당하였습니다. 이 귀 한 사명은 우리에게도 위임된 줄 알고 이것을 영광으로 아는 동시에 그 일에 충성 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선 교회는 이슬비 전도 편지를 가지고 전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권능 목사님이 전도하시던 시절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면 사람들이 예수 를 믿었지만 요즘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효과가 덜 한 것 같습니다. 때문에 관계 전도를 많이 지향하는 편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전도지 5천장을 뿌렸는 데 그것을 받아 보고 교회에 온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슬비 전도 편지는 전도 대상자를 선정하고 매주, 혹은 이주에 한번씩 사랑의 편지를 보냅니다. 이렇게 한장 두장 편지를 보내는 중 에 이슬비에 속 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 편지를 읽을 때에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녹여 주셔서 옥토 밭으로 만들어 주시고, 여리고 성과 같이 굳게 닫혔던 마음 문 이 열리게 됩니다. 그때 생명의 다리 전도지를 가지고 복음을 제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해서 전도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2,3년을 기도하면서 인내하면서 꾸준히 할 때에 결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마음을 한 마음으로 해서 열심히 몸으로 뛰어 전도하는가 하면 뒤에서 기도로 돕는가 하면, 물질로 돕는 사람! 등 함께 하려고 하는 마음을 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전도 대상자에게 내가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가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편지를 글을 쓸 줄을 몰라서 부득이 쓰지 못하시는 분들은 대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대선 교회 모두가 어찌하든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힘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부탁을 받았습니까! 동네 아이에게 부탁 을 받았습니까! 이웃집 아저씨의 부탁입니까! 그래도 부탁을 받았다면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만 왕의 왕! 하나님께서 미천한 나를 충성되게 여기시고 복음 전할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거절할 용기가 있습니까! 나는 시 간이 없어서 못합니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전도하였습니다.(4c)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4c)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울의 생애의 목표요! 삶의 목표요! 생활 신조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복된 마음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삶의 목표를 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활 신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교회의 부흥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가 아닙니다. 동기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누가복음 15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눅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잃은 아들!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잃은 것을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는 것이고,
둘째는 드디어 잃은 것을 찾고야 말았다는 것이고,
셋째는 잃은 것을 찾았을 때에 거기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기뻐하고, 본인이 기뻐하고, 주변 의 사람들이 기뻐하는 삼중 기쁨이 충만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눅10:17 이하에 보면 70인의 전도대가 돌아 와서 전도 보고를 하는 내용입니다.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기뻐서 보고합니다. 그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도 좋으셔서 "그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 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 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7-19) 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 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전도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전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고야 만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전도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신다는 것과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17,21)
Ⅱ. 전도자의 수칙.
마10:5 이하에 보면 전도자의 수칙이 나옵니다. 거기 5절에 보면 전도 대상자와 전도 순서가 나오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이요, 즉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이방인이요, 즉 불신자요
셋째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즉 세계 선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차적인 것이지 지리적인 순서는 아닙니다. 마치 행 1:8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리적인 순서에 의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모두가 다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8절에 보니 "거저 받 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9절-10절을 보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양식을 짊어지고 지갑에 돈을 잔득 넣어 가지고 철철이 갈아입을 옷을 배낭에 꾸리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베트남에 가서 사역하시는 장요나 선교사님과 같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교 준비중에 가장 중요한 준비는 마음 준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영 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나의 마음에 소명감이 있는가! 지금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그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급한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준비가 끝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언어는 현 지에 가서 배우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서툴게 배운 언어 습관은 나중에 교정하기도 어려워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반 절에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안을 빌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만일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빌었으니 평안을 빌면 서 다음 기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 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님께서 무슨 말할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리고 끝으로 21이하에 "핍박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전도자의 수칙을 주님 께서 주셨습니다. 그럼 오늘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였던 바울의 전도 수칙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아첨의 말을 버려야 합니다.(5) 아첨이라는 말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꾀어서 떡을 빼앗아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가 호떡을 먹고 있습니다. 그 호떡을 어떤 어른이 빼앗아 먹는데 "내가 별떡 만들어 줄까!"하면서 떡을 뜯어먹습니다. "달떡 만들어 줄까!"하면서 또 뜯어먹습니다. 감언이설로 자기의 유 익을 챙기고, 남을 긍지로 몰아넣습니다.
2) 탐심이 없어야 합니다.(5c) "탐심의 말을 쓰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것을 하나님이 증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탐심의 탈" 이란 음흉하게 자기 이권과 유익을 위한 수단 방법입니다. 이런 양상을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난 거짓 선지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탐심으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탐심으로 봉사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때에도 탐심이 없어야 합니다. 도와주곤 잊어 버려야 합니다. "내가 옛날 에 이렇게 하였는데!"라고 한 것은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을 도와 주는 방법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 게 하라"는 것입니다. 도와 준 사람도 누가 도와주었는지도 모르고 도움 받은 사람도 누가 도와주었는지도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 할 수 없게! 그래서 다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때에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으로 신앙 인격으로 양심에 꺼림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절 하반 절에 하나님을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얼마나 많이 했느냐 를 물으시지 않으시고 어떻게 했느냐를 따져 묻게될 것입니다. 그때 밝히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영광의 욕망이 없어야 합니다.(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 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 까! 그리스도의 사도의 직은 존중받아 마땅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 의 직분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직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직분은 사람 을 살리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중한 영혼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불신 자들은 이 직분을 범상히 여겨도 예수님은 이 직분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스스로 그 영광을 구하지도 아니하고 사람에게 어떠한 보상을 요구하지도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동일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고 어떤 대우를 바 라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목회자들이 물질이 탐이 나 서 목회를 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철부지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 이요,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사실 바울은 그가 사도로써 권위를 내세워 영광을 받을 수도 있고 그들 위에 군 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욕망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 른 사람들을 위해 유익된 일을 했으나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는 생각이나 칭 송을 기대하지도 않고 풍부해지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상 받 을 것만 기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기대할 뿐이었습니다.
요5:44을 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기에 영광이 두 번 나오지 않습니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하는 영광 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 영광은 취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칭찬 받는 일! 대접받는 일! 높임 받는 일! 알아주는 일로는 영광을 취하기를 원하는데 장차 우리가 가서 누릴 천국의 영광은 사모하지 않고 우리 주님께서 영광의 면류관 씌워 주실 것은 그리 기대하지 않고, 의를 위 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 복은 복으로 알지 않고, 장차 상주 실 것이라는데 그것 보다 현세에서 무엇을 얻는 것을 더 큰 축복으로 생각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영광 받으 려고 하는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기대하며 바라는 자들이 되 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정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혼 구원도 이루고 주님의 교회를 섬겨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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