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서론 (살전1:1-10)
본문
데살로니가 전서를 오늘부터 함께 읽으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총 주제는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현재 살로니키(Saloniki)라고 하는 곳인데 세계 1차 대전 시에 일역을 담당한 지역입니다. 이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거대한 항구 도시로 델마간 동북쪽 끝에 위치한 언덕의 비탈진 곳에 둘러 쌓인 평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라고 하는 이름은 주전 315년에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 더(Cassander)가 건설했는데 자기 아내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데르마(Therma)였습니다. 카산더 왕의 아내 이름이 바로 데살로니가였습니다. 이 데살로니가는 전 유럽을 점령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였습니다. 이 데살로니가에는 헬라인과 로마인, 그리고 유대인이 섞여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주후 52년경에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에 유럽으로 건너가 빌립보 교회 다음으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여기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9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에 바울은 실루아노 와 디모데를 데리고 데살로니가 회당에 들어가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파했다고 하 였습니다.(행17:2) 사실 3주간이라고 해야 불과 20여일 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령님이 역사 하셔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행17:4를 보니 "경건한 헬라인 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실이 있었던 반면에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바로 그 옆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베레아로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쫓기다 싶이 떠난 후 약 1년이 넘도록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지 못하 였습니다. 그저 풍문에 겨우 소식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서를 쓰게 된 동기를 한번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베레아로 쫓겨오다시피 떠나온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얼마나 그 교회 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베레아로 쫓겨왔던 바울 일행 은 그곳에서도 포악한 유대인들의 박해와 방해를 받고 또 다시 아덴을 거처서 고 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뜻밖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 데살로니가 교회 방문이 좌절됨으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두 번 씩이나 데살로니가 교회 방문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못했다고 살전 2:18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계속적으로 핍박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동역자 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2) 너무나 좋아서 감사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녀와서 바울에게 보고합니다. 그 보고가 살전1:2절 이하입니다. 교역자도 없는 상황 속에서 바울이 가르쳐 준 그 말씀을 붙들고 교회를 섬기는데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으로 인내 할 뿐만 아니라 환난 시험 중에도 신앙 을 굳게 세우고(1:6,2:14,3:7), 또 형제끼리 사랑이 충만하고(1:3,4:9),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가지는 자 기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었던 사도 바울을 사모하는 정이 그렇게 뜨거웠었기 때 문입니다.(3:6) 사실 이것이 모범적인 교회의 표상입니다. 그러면 이 데살로니가서를 언제 기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에 들어가서 3주간 성경을 가르치고 떠나 올 때가
A. D52년이므로 그후 약 1년 뒤로 보면
A. D 53-54년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데살로니가 전 서가 바울 서신으로는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이 쓰 여진 장소는 아마도 고린도 지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행18:1,5 살전3:6) 이제 다음으로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바울과 실루 아노와 디모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바울입니다.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높은 자"였습니다. 참으로 그 의 경력은 화려합니다. 딤전1:13과 행7:58, 8:1,3 9:1에 보면 그는 "훼방자요, 핍박자 요, 폭행자요, 살기가 등등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빌3:5이하에 보면 "팔일 만에 할레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동족 중에 일등이요(갈3:14), 길 리기아 다소 출신이요, 가마리엘 문하생이요,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행22:28)
여기서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으 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러한 사 울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만 위하여 살고자 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복음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소망이 충만해서 사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오늘도 다매섹에 있는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들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때가 거의 오정쯤 되었을 것입니다. 갑자 기 하늘로서 빛이 비추이면서 그와 함께 가던 사람들과 함께 바울이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때 사울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말하기를 "주여 뉘시오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가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찾 아가라! 네가 할 일을 그가 알게 해 주리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일어났지만 눈이 멀어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직가라고 하는 동네의 어떤 집에 있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을 그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안수 기도를 받고 그때 비로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 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간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다가 사도들을 만나고 본 격적인 예수의 제자로 일평생을 바치게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이후에 그 이름을 바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 뜻은 "작은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바울은 겸손해 졌습니다. 이것은 바울 뿐만이 아니라 주를 만난 이들의 한결 같은 공통점은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고전15:9에 보니 그는 "사 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엡3:8에는 그의 사역 중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고백하기를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 말기라고 할 수 있는 딤전1:15에서는 나는 죄인 중 에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신앙의 연륜과 경륜이 깊어 갈수록!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점점 더 겸손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실루아노입니다. 성경에는 실루아노라는 이름과 실라라고 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 두사람은 동 일한 인물입니다. "실루아노"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실라"라고 하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여기에 실라, 실루아노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벧전5:12에 보니 "신실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행15:23,32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행15:40에 보니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넷째, 행16:25, 17:4, 18:5에 의지해 볼 때에 동역자들과 생사 고락을 같이하는 의리의 사나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이방 전도의 공로자였습니다. 다섯째로 그는 행16:20,37에 ".로마 사람인 우리를."하고 표현 한 것을 보면 실루아노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3)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혼혈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의 어머니 사이에 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입니다.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 행 시에 루스드라 지방에서 전도할 때였습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서 돌을 맞고 쓰러진 것을 성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어린 디모데가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정신이 들 때까지 말입니다. 사도행전 14장부터 나옵니다. 그는 훗날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복음 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의 신앙 인격은 디모데 후서 1장 3절 이하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요(딤후1:3)
둘째는 거짓 없는 신앙의 소유자요(딤후 1:5),
셋째는 감사하는 신앙의 소유자(딤후1:4)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예수 믿은 후에 일평생을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한 전도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사람의 공통점은 낙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심은 마귀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용기는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학 자는 바울이 목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디모데와 실라 같은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이 이런 일군들 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 교회에서 참 된 교회! 모범적인 교회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1,b)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안에"라고 하는 말이 8회 사용되고 있습니다.(2:14,3:8,4:16,5:12,18)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주장 주관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순종하는 그런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2) 성령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어 미 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소욕에 민감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마23:32)
3)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 도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요15:2) 우리 주님께 굳게 붙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 요, 바른 교회라는 것입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라고 참된 교회의 정의를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 대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교회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 연합된 교회라는 말씀 속에는 "신앙 고백이 하나된 교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3:3에 "두사람이 합의치 않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교회는 하나님을 "아 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연합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많치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쉽지 않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무소 부재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 장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무슨 관계입니까!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 운 일입니까! 부모가 어린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기르고 보호하듯이 하나님은 성령님 으로 나를 낳으시고, 나를 책임지시고, 사랑하고 보호하여 주시는 은총의 주님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 고백으로 연합된 교회가 참 교회란 말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요 천국에 가는 성도들입니다. 다음으로 문안 내용입니다. 1절 하반 절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제일 귀한 축복이 이것입니다.
1) 은혜가 있을 지어다.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호의"입니다. 사실 엄 밀하게 따져 보면 이미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빌1:29를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은혜 주신 증거가
첫째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주님을 믿으 신다면 이미 은혜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은혜 받은 성도는 고난도 함 께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고난도 은혜라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은혜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양육하여 주시겠다는 은혜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요, 경건 생활하는데 필요한 능 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이를 낳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사람으로 자라도록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역 사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기는 했는데 자라나지도 못하고, 문제만 만들고, 죄악과 싸워 이기지도 못하고, 이제는 마귀의 시험에 이길 때가 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시험에 들어 흔들리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허 약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 생활 했다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은혜 받는 일에 힘써야 하겠고, 은혜 받는데 지장 되는 것이라면 다 포기하고라도 은혜 받아야 하겠고 은혜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계속적인 은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에베소서를 공부할 때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주 예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엡6:24)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개가 있고 지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가 섬기는 주님이 변함이 없으신 분인데 어찌하여 그분을 섬기는 우리가 변덕쟁이 가 되어야 합니까! 변덕이 많은 사람은 "제주도 날씨와 같다"라고 합니다. 해가 떴 다가도 언제 그랬느냐 하고 먹구름이 낍니다. 우리 신자들이
그렇다면 안 되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은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덕이 심한 교인은 교인 노릇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 평강이 있을 지어다. 여기서 말씀하는 평강은 은혜 받은 사람이 누리는 결과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잃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찾고 누리는 결 과가 평강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제일 먼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마음이 평안해 졌습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집이 어떠하 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음식을 무엇을 막느냐 하고도 상관이 없습니다. 옷이 얼마 짜리냐 하고도 상관없습니다. 전혀 이 땅에 것과는 상관없는 평강입니다. 은혜 받 기에 힘쓰는 사람에게! 주님을 굳게 붙들고 그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님 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사26:3-4를 읽겠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 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 (만세 반석)이심이로다" 역시 은혜 받는 방법이나 동일합니다. 은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요, 평강도 심지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 주님만 의 뢰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한다고 이리 끼울 고! 저 사람이 저런다고 저리 끼울고 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겠습니까! 그런 사람 마음속에 평강이 있겠습니까! 행12:6에 보면 베드로가 헤롯의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날만 밝 으면 처형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그는 깊은 잠을 잤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은혜 받으면 가능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모신 사람은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곤고가 오고 기근이 오고 칼이 들어 와도, 질병이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평강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69장은 Cornell(코넬)이라는 사람이 쓴 시인데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울려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2.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3.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4. 이 땅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여러분 주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평강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평안은 하늘 위에서 내려 온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이 어려운 시기를 만났지만, 시험도 많고 유혹도 만치만 마귀에 게 속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우리 주님을 굳게 의지하고 의뢰하여 서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라고 하는 이름은 주전 315년에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 더(Cassander)가 건설했는데 자기 아내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데르마(Therma)였습니다. 카산더 왕의 아내 이름이 바로 데살로니가였습니다. 이 데살로니가는 전 유럽을 점령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였습니다. 이 데살로니가에는 헬라인과 로마인, 그리고 유대인이 섞여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주후 52년경에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에 유럽으로 건너가 빌립보 교회 다음으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여기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9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에 바울은 실루아노 와 디모데를 데리고 데살로니가 회당에 들어가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파했다고 하 였습니다.(행17:2) 사실 3주간이라고 해야 불과 20여일 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령님이 역사 하셔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행17:4를 보니 "경건한 헬라인 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실이 있었던 반면에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바로 그 옆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베레아로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쫓기다 싶이 떠난 후 약 1년이 넘도록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지 못하 였습니다. 그저 풍문에 겨우 소식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서를 쓰게 된 동기를 한번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베레아로 쫓겨오다시피 떠나온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얼마나 그 교회 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베레아로 쫓겨왔던 바울 일행 은 그곳에서도 포악한 유대인들의 박해와 방해를 받고 또 다시 아덴을 거처서 고 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뜻밖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 데살로니가 교회 방문이 좌절됨으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두 번 씩이나 데살로니가 교회 방문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못했다고 살전 2:18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계속적으로 핍박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동역자 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2) 너무나 좋아서 감사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녀와서 바울에게 보고합니다. 그 보고가 살전1:2절 이하입니다. 교역자도 없는 상황 속에서 바울이 가르쳐 준 그 말씀을 붙들고 교회를 섬기는데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으로 인내 할 뿐만 아니라 환난 시험 중에도 신앙 을 굳게 세우고(1:6,2:14,3:7), 또 형제끼리 사랑이 충만하고(1:3,4:9),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가지는 자 기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었던 사도 바울을 사모하는 정이 그렇게 뜨거웠었기 때 문입니다.(3:6) 사실 이것이 모범적인 교회의 표상입니다. 그러면 이 데살로니가서를 언제 기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에 들어가서 3주간 성경을 가르치고 떠나 올 때가
A. D52년이므로 그후 약 1년 뒤로 보면
A. D 53-54년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데살로니가 전 서가 바울 서신으로는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이 쓰 여진 장소는 아마도 고린도 지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행18:1,5 살전3:6) 이제 다음으로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바울과 실루 아노와 디모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바울입니다.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높은 자"였습니다. 참으로 그 의 경력은 화려합니다. 딤전1:13과 행7:58, 8:1,3 9:1에 보면 그는 "훼방자요, 핍박자 요, 폭행자요, 살기가 등등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빌3:5이하에 보면 "팔일 만에 할레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동족 중에 일등이요(갈3:14), 길 리기아 다소 출신이요, 가마리엘 문하생이요,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행22:28)
여기서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으 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러한 사 울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만 위하여 살고자 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복음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소망이 충만해서 사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오늘도 다매섹에 있는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들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때가 거의 오정쯤 되었을 것입니다. 갑자 기 하늘로서 빛이 비추이면서 그와 함께 가던 사람들과 함께 바울이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때 사울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말하기를 "주여 뉘시오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가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찾 아가라! 네가 할 일을 그가 알게 해 주리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일어났지만 눈이 멀어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직가라고 하는 동네의 어떤 집에 있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을 그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안수 기도를 받고 그때 비로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 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간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다가 사도들을 만나고 본 격적인 예수의 제자로 일평생을 바치게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이후에 그 이름을 바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 뜻은 "작은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바울은 겸손해 졌습니다. 이것은 바울 뿐만이 아니라 주를 만난 이들의 한결 같은 공통점은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고전15:9에 보니 그는 "사 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엡3:8에는 그의 사역 중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고백하기를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 말기라고 할 수 있는 딤전1:15에서는 나는 죄인 중 에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신앙의 연륜과 경륜이 깊어 갈수록!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점점 더 겸손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실루아노입니다. 성경에는 실루아노라는 이름과 실라라고 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 두사람은 동 일한 인물입니다. "실루아노"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실라"라고 하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여기에 실라, 실루아노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벧전5:12에 보니 "신실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행15:23,32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행15:40에 보니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넷째, 행16:25, 17:4, 18:5에 의지해 볼 때에 동역자들과 생사 고락을 같이하는 의리의 사나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이방 전도의 공로자였습니다. 다섯째로 그는 행16:20,37에 ".로마 사람인 우리를."하고 표현 한 것을 보면 실루아노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3)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혼혈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의 어머니 사이에 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입니다.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 행 시에 루스드라 지방에서 전도할 때였습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서 돌을 맞고 쓰러진 것을 성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어린 디모데가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정신이 들 때까지 말입니다. 사도행전 14장부터 나옵니다. 그는 훗날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복음 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의 신앙 인격은 디모데 후서 1장 3절 이하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요(딤후1:3)
둘째는 거짓 없는 신앙의 소유자요(딤후 1:5),
셋째는 감사하는 신앙의 소유자(딤후1:4)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예수 믿은 후에 일평생을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한 전도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사람의 공통점은 낙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심은 마귀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용기는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학 자는 바울이 목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디모데와 실라 같은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이 이런 일군들 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 교회에서 참 된 교회! 모범적인 교회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1,b)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안에"라고 하는 말이 8회 사용되고 있습니다.(2:14,3:8,4:16,5:12,18)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주장 주관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순종하는 그런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2) 성령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어 미 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소욕에 민감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마23:32)
3)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 도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요15:2) 우리 주님께 굳게 붙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 요, 바른 교회라는 것입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라고 참된 교회의 정의를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 대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교회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 연합된 교회라는 말씀 속에는 "신앙 고백이 하나된 교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3:3에 "두사람이 합의치 않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교회는 하나님을 "아 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연합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많치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쉽지 않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무소 부재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 장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무슨 관계입니까!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 운 일입니까! 부모가 어린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기르고 보호하듯이 하나님은 성령님 으로 나를 낳으시고, 나를 책임지시고, 사랑하고 보호하여 주시는 은총의 주님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 고백으로 연합된 교회가 참 교회란 말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요 천국에 가는 성도들입니다. 다음으로 문안 내용입니다. 1절 하반 절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제일 귀한 축복이 이것입니다.
1) 은혜가 있을 지어다.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호의"입니다. 사실 엄 밀하게 따져 보면 이미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빌1:29를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은혜 주신 증거가
첫째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주님을 믿으 신다면 이미 은혜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은혜 받은 성도는 고난도 함 께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고난도 은혜라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은혜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양육하여 주시겠다는 은혜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요, 경건 생활하는데 필요한 능 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이를 낳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사람으로 자라도록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역 사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기는 했는데 자라나지도 못하고, 문제만 만들고, 죄악과 싸워 이기지도 못하고, 이제는 마귀의 시험에 이길 때가 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시험에 들어 흔들리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허 약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 생활 했다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은혜 받는 일에 힘써야 하겠고, 은혜 받는데 지장 되는 것이라면 다 포기하고라도 은혜 받아야 하겠고 은혜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계속적인 은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에베소서를 공부할 때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주 예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엡6:24)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개가 있고 지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가 섬기는 주님이 변함이 없으신 분인데 어찌하여 그분을 섬기는 우리가 변덕쟁이 가 되어야 합니까! 변덕이 많은 사람은 "제주도 날씨와 같다"라고 합니다. 해가 떴 다가도 언제 그랬느냐 하고 먹구름이 낍니다. 우리 신자들이
그렇다면 안 되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은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덕이 심한 교인은 교인 노릇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 평강이 있을 지어다. 여기서 말씀하는 평강은 은혜 받은 사람이 누리는 결과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잃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찾고 누리는 결 과가 평강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제일 먼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마음이 평안해 졌습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집이 어떠하 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음식을 무엇을 막느냐 하고도 상관이 없습니다. 옷이 얼마 짜리냐 하고도 상관없습니다. 전혀 이 땅에 것과는 상관없는 평강입니다. 은혜 받 기에 힘쓰는 사람에게! 주님을 굳게 붙들고 그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님 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사26:3-4를 읽겠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 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 (만세 반석)이심이로다" 역시 은혜 받는 방법이나 동일합니다. 은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요, 평강도 심지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 주님만 의 뢰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한다고 이리 끼울 고! 저 사람이 저런다고 저리 끼울고 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겠습니까! 그런 사람 마음속에 평강이 있겠습니까! 행12:6에 보면 베드로가 헤롯의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날만 밝 으면 처형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그는 깊은 잠을 잤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은혜 받으면 가능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모신 사람은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곤고가 오고 기근이 오고 칼이 들어 와도, 질병이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평강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69장은 Cornell(코넬)이라는 사람이 쓴 시인데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울려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2.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3.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4. 이 땅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여러분 주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평강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평안은 하늘 위에서 내려 온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이 어려운 시기를 만났지만, 시험도 많고 유혹도 만치만 마귀에 게 속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우리 주님을 굳게 의지하고 의뢰하여 서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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