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고뇌하며 살라는 말은 (시73:2-3)

본문

(I) 오늘날 온통 젊은이들의 함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기들의 주장을 굽힐 줄도 모르는 운동권 학생들, 분신 자살도 불사하는 파업 노조 지도부들을 보면 모두 싱싱한 젊은이들 입니다. 그들 뿐 아니라 이 땅의 거리가 좁다는 듯이 활보하고 다니는 폭주족들과 폭력 세력들, 마약 집단 그리고 향락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다 젊은이들입니다. 학원가 역시 많은 한국 젊은 재수생들이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어딜 가나 젊 은이들로 가득차 있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야구장, 명동 거리, 소주방, 호프집, 노래방‥ ‥‥ 어느 곳에나 말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중고등부 때까지는 열심히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데 중고등학교 를 졸업하고, 취업 전선이나 대학 입학 혹 재수를 하면서 서서히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 고 떠난 대부분의 청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의 말은 교회에 대한 환멸과 실망 이 란 단어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 교회 청년회의 현주소이며, 지금 우리가 고민해 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Ⅱ.) 젊은이들이 왜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가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을 텐데 첫 번째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식주의와 위선의 모습 을 들 수 있겠습니다. 교회는 그 동안 교권이나 교파의 소용돌 이 속에서 서로 싸우는데 바빴고, 건물을 짓고, 교육관을 짓는 등 ‥‥ 자체 유지나 성 장에만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감격이나 감사함 없이 남용되어 외쳐 대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함 (할렐루야! 아멘!)들이 청년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교회에 실망하게 됩니다. 특히 부흥회나 집회 때 보면 너무도 이러한 모습을 쉽게 보게 됩니다.
둘째로 집사님들과 교회 어르신들의 바리새인적 비판의 눈초리들입니다. 어느 날, 교회 학생이 보충 수업을 마치고 저녁에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나오다가 동년배 여학생을 만 나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계시는 집사님의 눈총은 왜 쟤네들이 밤에 와 서 무슨 짓 하나라는 뜨거운 시선들!! 그리고 담배, 술을 피고, 마시는 청년들을 사랑 으로 권면하기 보다는 무언(無言)으로써 청년들을 정죄하는 듯한 차디찬 시선들
셋째로 청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교회들은 청년이 얼마나 소중한데‥‥‥!! 라고들 말 하지만 일할 때만 청년들을 소중해라고 말하며 단지 젊은이들을 유년 주일학교, 성가대 등 교회 봉사의 거대한 원동력으로 삼는데 관심이 있었지 젊은이의 교육과 양육, 그리고 형제자매들간에 어색한 벽을 허물어 줄 수 있는 참신한 프로그램 개발 없이 그저 청년들 이 소중해라고 말하는 교회에 청년들은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으며 교회에 환멸을 느 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예로 크리스마스날에 교회에선 0시 예배 후의 모든 교제는 금합니다. 청년들은 교회 만큼 좋은 공간(넓다는 의미에서)이 없으므로 교회에 건의해 보지만, 낮 예배를 이유로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러나, 청년들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제를 통제해도 결국 우리는 교회 아닌 곳에서라도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 내고, 그 동안 몰랐고, 친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데 ‥‥ 어차피 교회가 반대해도 다른 곳을 찾아서라도 교제할 것이라면 교회가 이런 기쁜 날에 장소를 제공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지금 나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인 교회에서만 찾아보았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영향 또한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철학으로 인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의심과 회의!! 신앙과 학문의 합일점 은 과연 정말 가능한가라는 갈등!!‥‥ 결국 이것도 교회에서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는데 실패한 결과로써 교육(특히, 세계관 중심 으로서의 성경 공부)의 무관심에 해당됩니다. 이들은 이러한 모든 갈등을 극복해 낼 수 있는 분명한 복음과 투철한 신앙을 키움 받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적당히 방치되어 있습니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한국 교회가 교회 젊은이들에게 꿈과 Vision을 주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해 가고 권위주의적 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과격한 사회 사상이 뿌 리를 굳히고 있는 이러한 급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청년들은 어떤 이상과 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었을 것이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젊은이로서 무엇인가 하려고 할 그 때에 교회는 Vision을 심어 주고 격려하기보다는 일만 시키는 교회의 훌륭한 일군으로서만 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가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서 잘못했다는 그러한 사실이 그들이 교회의 문 밖을 나서 계속 침체하고 방황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이 글을 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이렇게 서론을 장황하게 말한 것은 이러한 문제가 젊은이들을 실망시킬 순 있어도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정당화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작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괴로움과 갈등!!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격이 없이 그저 답답함!! 바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고민이며 수많은 한국 교회 청년들의 갈등 부분이 아닙니까
(Ⅲ)
그렇다면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어도 수많은 성경 공부를 하여도 감격 이 없고 답답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원인을 단순히 개인의 갈급함 부재 로만 결론 내 려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릇된 신관(神觀)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릇된 신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매우 추상적인 존재로 인식한 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일날 하나님께 늘 예배를 드리고 수요 예배도, 금요 철야는 물 론 부흥회라는 부흥회는 다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큰 감격은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추상 적인 존재로서의 신관을 가지고 있는 고로 예배는 잘 참석할 순 있을지는 몰라도 감격의 눈물은 없습니다. 결국 이런 신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침체하게 되고, 교회 다 닌다는 것에 대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와 절망의 골이 더 깊어집니다. 이는 고난의 문제가 올 때면 더욱 심화됩니다. 고난의 문제로 기도하지만 자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형태로 자신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침체하며 심하면 교회를 떠납니다. 여러분! 아마 저도 실망할 것 입니다. 저는 그릇된 신관이 가지고 있는 맹점이 기도를 했을 때에 자기가 구한 그대로 응답되지 않음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것보다 꼭 뒤따라올 수 있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내가 너희에게 이러이러 하겠다 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고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특히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응답되지 않았을 때 실망하는 것은 어쩌면 연약한 인간인 우리로선 당 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그 실망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오는 실망 이나 절망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릇된 신관의 문제들은 실망과 절망을 한다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신관에서 연유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라고 함을 강조하고 있음에 꼭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던진 우리의 물음을 푸는 key가 되는 것입니다.
(Ⅳ) 그러나 올바른 신관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pray) 란 주제를 통해 올바른 신관을 가진 사람인 바울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 들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바울이라는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너무도 쉽게 위대한 인물 , 우리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 으로서 바울을 영웅으로 도식화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은 그가 가진 강점 이면에는 필연적으로 약점 또한 있다는 평범 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고 있습니다. 때론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잊음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 말 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말입니다.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매일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려고 노 력하며 매일 기도의 골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정말 신실한 친구야! 인정하며 그를 본받으려고 합니다. 아니 혹은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옛 자아의 모습들을 어느 순간 알게 되면 우린 자주 실족합니다. 아니 저 애도 그 짓을 해! , 아니 저 장로님이‥‥!! ‥‥실족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은혜(100을 기준으로, 하나님100, 인간0의 개념)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여러 동아리 모임과 다른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더 그들보다 비도덕적, 윤리 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성숙치 못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복음의 문이 닫히 고, 세상인들에게 비판을 제일 많이 받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사형 선고(=식 물인간이란 선고)를 받은, 허물 많은 저와 여러분을 자신의 원하시는 대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이게 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교회다라고 서슴없이 정의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로 세워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다듬어지고, 성숙해져 결국 하나님의 흠없고 거룩한 사람으로(엡1:4)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물 많은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허물로 인해 실족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권면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밝 은 햇빛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필히 어두운 그림자 또한 존재한다라는 극히 평범한 진리 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어딘가 너무 아파서 하나님께 이것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바울이 세 번,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상징적인 수의 의미로서 수많 이, 빈번히, 끈질기게 기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환경은 여전히 거대한 만리장성처 럼 우뚝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족하도다 바울에게 절망입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나의 가시를 제거해 주신다면 당신의 일을 더 훌륭히, 많이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환경은 변하지 않고 게속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족하도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마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9절 이후의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정말 멋있는 고백이 아닙니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군요!! 하나는 가시를 제거해 주시는 방법과 또 하나는 가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게 하 시는 방법 말이에요! 그러나 주께선 제게 가시를 제거하는 방법 보단 그 가시 속에서도 당신의 힘으로 견뎌 내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좋습니다! 맞습니다!! 내 몸은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합니다. 고로 가시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할지라도 주께서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만 제게 허락하신다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모든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당신의 강함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가시를 제거하시는 방법보다는 가시의 문제로 자신 에게 찾아야 자신과 함께 교제하면서 그 가시 중에서도 능히 견뎌 내는 방법을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더 자주 사용하심을 깨달았고 스바냐 선지자가 말했던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습 3:17) 에서 잠잠히 사랑하시며 의 깊은 뜻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잠잠 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에 너무 쉽게 넘어져 다치고 어디가 깨지고 웁니다. 아니! 내가 12년씩이나 기도했는데‥‥ 이 꼬락서니가 뭐야!! 흐흑!!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한 결과가 자신을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 기도가 고통의 아픔을 결코 풀어 주지 못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어기셨다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지금 스바냐는 그런 자들에게 이 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 그러나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잠잠히‥ ‥‥. 하나님은 고통을 제거하는 기술(skill)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심히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도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맛보여 줌으로써, 이겨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결국 스바냐는 이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멋있는 사랑 표현을 너는 잠잠히 사랑하시며 라고 지필했던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 던 것입니다
(Ⅴ)
그렇다면 올바른 神관을 가진 바울의 깨달음을 가능케 했던 원인자는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곧 그릇된 神관과 올바른 神관을 분별하는 주된 시금석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일맥 상통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제 이 중요한 의문을 가지고 본문 시편 73편의 한 영혼을 통해 살펴보십시다.
(Ⅵ)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2절) 지금 시편 기자는 어떠한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그의 고 민과 갈등이 심한지 자신이 실족하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뭐 때문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지금 우린 시편 기자 가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기도)하는 태도(모습)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의 고백의 내용은 2절에서부터 14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불만을 가진 말투로(14-15절) 하나님 앞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허락하심에 대해 따지고 있습니다. 우린 가끔 하나님의 방식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진리)이 바로 우리를 고통의 자리로 이끌어 냅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사랑 표현조차도 우리 인간의 걸림돌이 됩니다. 시편 기자도 아마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불만이 아주 아주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 죠 4절에서 14절까지의 시편 기자의 고민 내용은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였습니다. 보십시오! 이들은 악인입니다. 그가 경건치 못함은 저 뿐만이 아니라 천하가 다 아는 사실(fact)입니다!!
그런데, 그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죽을 때에는 고통이 없고, 매임 또한 전혀 없습니다. 또 그들의 모습은 거만과 속임수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습입니다. (6-8절) 그러나, 여러분! 정작 다윗이 괴로웠던 것은 단순히 악인의 형통함 의 현실 자체가 아 니였습니다. 그가 정작 그렇게 그렇게 괴롭고 고민한 것은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거 룩하고 의롭고 진실하시며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시며 사랑의 배려와 놀라운 언약으로 당신의 백성을 감싸고 계시는 분임을 믿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의 난제는 그 모든 진리(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롭다)와 자기를 둘러 싼 주위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저곳 커피 같은 따스한 차(tea)를 마시면서 생각 하고 고민하고 또 생각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얼마나 심화되었는지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경건한 삶을 살려는 몸부림이 실로 헛되다 라고 말까지 하려 합니다. 그는 갑자기 시험받았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시험(13-14절)을 받게 되었고, 그 시험의 갈등의 강도는 너무 커서 거의 균형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 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며, 무슨 뜻입니까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을 control하는 방식 인 것입니다. 그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고민만 했고 결국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열심히 경건의 삶을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야! 너희들 이 악인 들을 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살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가졌 으나 그는 끝내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정말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로 인해 난 이제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시점에까지 왔으나 나는 말하지 않겠다. 만일 내가 말한다면 하나님의 백성 에게 해를 끼치리라.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는 단순한 진리, 우리도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가 아니냐며 고 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시편 기자와 저와 여러분의 영혼에 사활이 걸 린 주요한, 하지만 너무도 평범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한 지체임을 잊지 않았 고 결국 자신의 이러한 영적 침체의 파장은 내 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절대 해서는, 말해서는 안되는 자신이 정한(성경을 통해) 절대율 을 못박아 고정시켜 놓고선 자기 자신을 control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그 난제로 자기 스스로를 실족하게 됨을, 침체하게 됨을 더이상 허용치 않음을 도와줄 그 무엇인가를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지체 라는 사실을 붙잡았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없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묶여져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넘어지거나, 실족하거나 하나님께 대한 나쁜 언사를 한다면 나 자신만이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와 한 지 체, 한 지체들 모두가 다함께 넘어지는 것이다. (고전 12:12) 이 고백은 정말 멋있고 귀한 고백이며 우리가 부러워 해야 할 시각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실족하고 실망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리 주위 에 잠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었던 친구들의 이상한 말들! 계속 교회에 있다가 예배 드릴 시간만 되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을 보면서 실족할 수 있습니다. 또, 임역원 회의 때 의견 충돌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계속 신앙이 침체의 곡선을 그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수련회 때 좋지 못한 한 마디 말을 들음으로써 그 수련회 기간을 엉망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엇이든지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붙잡으십시오. 계속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치는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장로이십니까, 집사이십니까, 목사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실을 붙잡고 일어서십시오. 여러분이 문화 부장입니까 회장입니까 총무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부장 이라는 감투를 붙잡고 일어서십시오. 여러분이 집안에서 혼자 신앙 생활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외에 신앙생활 하지 않는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 동생, 누나 를 생각하시고 그 사실을 붙잡고 일어서십시오. 어느 날, 철수가 예배를 함께 드리자고 영철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영철이는 무슨 나쁜 일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계속해서 뭐! 드려야겠지. 라는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드 릴까말까 망설이다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래!! 그래!! 예배드려야지. 내가 총무요, 교회 장로님 외아들인데‥‥. 여러분!! 물론 철수와 그의 친구들이 예배의 동기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드려져서는 안돼. 넌 어쩌면 그럴 수 있니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영철이는 총무라는, 장로님 의 아들이라는 수준 낮은 것이라도 붙잡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벼랑에서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틈이라도 여러분의 발을 비집어 넣으십시오. 아무리 좁은 턱이라도 거기에 여러분들의 발을 의지하십시오.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여러분의 영혼을 지탱시켜 줄 수 있고 멈추게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붙잡으십시오. 시편 기자의 영혼이 미끄러지는 것을 멈춘 것은 아주 작은 발디딜 틈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발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주는 권면의 말(자기 control 방식)에 귀를 기울인다면 여러분이 낭떠러지로 더 이상 떨어지지 않으려고 비록 낮은 신앙의 수준이였지만 찾았던 그 조그마한 발디딤돌이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결국 시편 기자처럼(시편 73:17,22,23,25)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전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특강을 하겠습니다.)
(Ⅷ) 우린 지금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감격할 수 있음을 가능케 한 초석이 무엇이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15절) 그럼 이제, 우리의 주된 물음!! 올바른 神관과 그릇된 神관을 구별하는 시금석을 찾음으 로써 시편 기자가 감격할 수 있었던 원인자를 찾아보십시다. 저는 그릇된 神관의 주된 특징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절대자 로 인식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제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고 여러분에게 힘주어 말하려 하는 것은 시편 기 자는 자기에 관한 진실을 서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이해 못하겠노라고 토로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께 자기가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자기 걸음이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음을 아무 구애 없이 밝히고 나중에 가서(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17절))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 에서 무지몽매하며 어리석었는지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 이러 한 하나님 앞에서의 고뇌하는 삶!!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젊은 청년들에게 성경이 시편 기자로 하여금 던져 주는 위대한 메시지이자 가치이며 그릇된 神관과 참되고 올바른 神관을 분별하는 참된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Ⅸ) 그릇된 神관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늘 어떤 이상적이고 완벽한 진리만을 붙 잡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도와주신다. 라는 자신의 체험과 상반될 수도 있을 진리를 붙잡고 늘 살아갑니다. 시편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니.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완벽한, 완 전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나 기도 응답의 형태는 우리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이 완전하고 이상적인 진리가 우리의 직접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올 때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완전한 진리가 저것 이거나 잘못된 것처럼 굴곡 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릇된 神관을 가진 그리스도 뿐만이 아니라 시편 기자나 올바른 神관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됩니다. 고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는 그러 한 존재들입니다.(그리스도인들은 늘 고뇌하는 존재로서 한 시대 앞에 서야 한다-프랑 시스 쉐퍼-)
그런데 그릇된 神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맹점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반응으로 그저 운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닙니다. 흐흐흑!! 하나님, 그럴 수 있습니까 흐흐 흑! 흐느끼며 웁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시편 기자나 모든 그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마틴 루터, 조지 윗 필 드, 칼뱅, 리챠드 백스터‥‥)을 보십시오. 그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대율로 고정시키고(시편 73:1), 2절에서부터 17절, 하나님의 성소(성경)에 들 어갈 때까지 하나님께 계속해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고민했습니다. 그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과 똑같이 흐흐흑 거리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하면서 하나님께 마크를 정 직하게 서슴없이 던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귀하게 보는 부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자신의 인격과의 교제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神관을 가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 고 그저 왜 우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저 울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전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그들의 神관을 추상적인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Ⅹ) 여러분! 그릇된 神관과 올바른 神관을 분별하는 최고의 시금석은 간단합니다. 즉 하나님 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난제로 고민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토로하 지 않은 채 그저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사활이 걸린 신앙의 핵 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기계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그에게 마크를 내던지십시오. 1950년 대를 전후로 교회에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문하지 말고 믿기만 해! 무조건 믿으면 은혜가 되는 거야!! 정말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 참된 자유 를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8장 32절을 보면서 판단해 보십시다. 교회에서, 기독교 안에서만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언제부터인가 청소년들과 청년들 사이에선 왜 기독교 안에 참된 자유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반발이 생겼습니다. 성경만 믿으라는 것은 지적 구속이고 가요, 술, 담배 등의 유흥 문화를 금하는 것은 문 화적, 사회적 구속이 아닌가 이러한 젊은이들의 질문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그들 의 말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그들의 말 중 성경은 무오하며 진리다 라는 면에선 100% 맞는 말이지만 무조건 믿으라는 부분에 대해선 기독교를 광적인 지적자살집단으 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옛날 한국 교회 내에선 성경을 보면서 질문하면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었으므로 성경에 숨겨진 더 귀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더 큰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고민하시고, 고뇌하십시오.
주님께 던져야 할 수많은 마크를 울음으 로 승화시키지만 말고 그 분에게 정직히 내던지십시오!! 힘든 가정 생활을 하면서 공부해야 할 자신이 청년 회장을 맡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불평하기 시작하려고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까 일단 불평하지 마시고 고민 먼저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고민하고 또 고민한 후 불평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왜 여러 괜찮은 친구들도 많은데 이런 어려운 상태에 있는 내게 하나님께서 왜 굳이 당신의 일을 시키는가 왜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십시오. 정 억울하면 하나님께 따져 보십시오!! 단순히 모태 신앙이 가지고 있는 -는 -이니깐! , -는 -가 아니니깐! 이라는 식의 현실주의에 빠지지 말고는 보여지는 일들에, 늘 해 오던 일들에 대해 수많은 마크 를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하나님! 왜 일하게 하십니까 왜 고난을 주십시까 왜 제자신의 신앙이 늘 제자리 걸음입니까 왜 ‥‥ 합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고민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진면목입니다. 하나님께 고민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으면서 그저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 라는 완전한 진리를 가진 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자신이 가진 완전한 진리 에 실족할 것입니다. 결론 짓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무한한 사랑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하시기에 그 가 가지고 있는 100짜리의 완벽한 진리만을 붙잡고 있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전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고민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17절) 여러분이 기도의 골방에서 던진 수없이 많은 마크를 하나님께 던질 때 주께서 여러분에게 성경 공부를 통해, 선배를 통해, 공적 예배를 통해, 아니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감격의 ! 마크를 내리 솟아 부어 주실 것이고, 그렇게 고민하고 고뇌하던 우리에게 주 께서 주신 감격의 ! 마크로 저와 여러분 입에는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맛 나는 일이야!! 라는 감격스런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며, 그 감격의 ! 마크가 여러분의 침체의 사양길에서 감격의 확-!트인 고속도로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고뇌하는 자!! 바로 그들만이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이 주시는 감격의 ! 를 맛볼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26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