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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을 해결하자 (시32:1-6)

본문

지난 주일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해방에 대하여 말씀드렸는데 오늘 은 개인의 해방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본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이 스라엘의 성군이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신아안이요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부인을 간음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사건이후로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종일 신음하므로 뼈가 마르는
(3) 고통과 주야 로 주의 손이 짓누르고 진액이 변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는
(4)" 공허 함을 느꼈습니다. 그가 왕으로 권세와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도 심적으로 그처럼 큰 고통을 느꼈다는 것은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행복이란 물질,권세,명예,지식,인기에 있는 것이 아니요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뺏아 갑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1) 중한 죄를 번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은 자 .
(2) 가벼운 죄를 범하고도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
(3) 양심의 가책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등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거나 양심에 화인을 맞아 무감각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깨우쳐 죄를 해결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또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죄책감을 해결사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에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항상 불안 속에 살게되 고 모든 생각과 행동이 부정적이 되기 쉽고 나중에는 건강을 해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이라(1,2)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1,2).
1,2절에서 허물을 사함 받은 자,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 정죄를 당치 않 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한 것은 죄없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죄의 용서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로 죄없는 사람은 당초부터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 고 내가 완전한 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실수에 절망하다면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3,5) 죄악을 숨기고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죄악의 독소가 우리를 신음하게 만듭니다. 다윗도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했다
(3)고 했습니다. 입맛 이 없어지고 잠을 못 이루고 즐거움도 뺏시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차어버립니다. 안색이 변하고 몸이 마르고 뼈에 진액이 빠지는 것 같은 무력감을 느 낍니다. 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이웃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양심의 알 고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신음하며 고통중에 있는 이유가 죄 악을 품고 있기 때문임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 리라.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5)" 음식을 먹고 체하게 되면 먹은 것을 토해내야 합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낱낱이 고백하므로 자유함 안에서 기뻐하시는 최선의 제물을 회개의 눈물이요 변화된 모습입니다. 회개하는 길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죄책감은 죄 때문에 느끼는 불안하고 불편한 감 정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죄책감을 해결됩니다. 세례 요한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첫 메세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고 예수님께서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였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 이 망하리라(눅13:5) "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해야 죄책감을 자유 할 수 있고 살길이 열립니다. 죄사함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6). 다윗은 자신의 죄가 추악하지만 모두 회개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확 신을 가집니다. 그래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판결을 받으면 누구도 그 사건을 재론할 수 없 습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면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회개한 자에게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 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 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1:9).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8:12). "회개한 다음에는 약속의 말씀을 꼭 붙잡고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가질때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회개한 다음에도 계속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 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길 원하십니다. 자식이 온통 말썽을 부리고 다녀도 부모는 몇 번이라도 용서합니다. 18세기 철학자 하이네는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직업 이 용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잊으셨는데 내가 잊지 못하고 고민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은 누구도 재론할 수 없다는 사실에 결단코 흔들리지 마시고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죄책감에서 해방된 자가 누리는 복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7). 어린이가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안정을 누리듯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받습니다(8). 인생의 길은 아무도 모릅니다. 단 한치의 앞도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요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를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립니다(10). 죄책감에 눌려 있을 때에는 옆에서 잘해줘도 귀찮고 거추장스럽습니다. 이 와같이 죄책감의 문제에서 해방되어야 참된 사랑을 깨닫고 누리게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립니다(11). 세상의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도 죄책감 아래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지난 번 8.15 특사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좋은 옷, 음식 또는 오락이 있어도 그것보다 우선된 것이 자유였을 것입니다. 육신의 해방도 그렇게 절실한대 영혼의 해방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일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지해서, 실수로 완악해서, 믿음이 약해져서 ,시험에 빠져서 등등의 이유로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회를 꼭 잡으십시외.그리고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홍수와 태풍같은 죄책감이 밀려와도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통회하는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에 차고 념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죄와 질병에서 해방 성경


본문:시 37:25-28


본문: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태복음 8장 16-17절 말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못만을 생각하고 무능력만을 생각한 후 자신을 비하 해 절망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자꾸 자기 죄만 바라보는 사람은 죄악의 세력에 묶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의 용서와 의가 우리 심령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용서와 의에 대한 놀라운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바라봐야 합니다. 모세가 놋뱀에 해독의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죄에 대한 해독의 은총이 넘쳐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멸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습니까. 본문은'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 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은 이 십자가를 통해 넘쳐납니다. 십자가에서 넘쳐난 능력은 인간의 연약과 질병을 치유하여 인간을 강 건한 존재로 회복시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연약과 질병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연약과 질병을 바라보는 사람은 거기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감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건강을 얻기 위해 건강식품을 바라보고 건강해질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허무한 주시' 입니다. 중요한 것은 식품이나 운동보다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해도 질병을 바라보는 사람은 흑암 의 세력에 묶여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족은 오직 십자가만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변화를 받아 위대한 치유의 능력을 얻고 주를 위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도:사랑으로 저희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족을 죄와 모든 질병에서 건져 주옵소서.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습니다. 저희 가정의 모든 저주를 물리쳐 주시고 신앙의 열매가 넘쳐나게 하옵 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죄악을 태운다 성경


본문:시 30:11-12


본문: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더니(사도행전 2장2절에서 3절 말씀) 본문에 보니 불의 혀같이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령님께서 불의 혀같이 임하셨을까요 먼저 불은 어둠을 밝힙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죄악의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의 계시로 밝히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충만을 받으면 하늘나라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밝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불은 따뜻합니다. 교회는 따뜻한 사랑과 인정을 세상에 주 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관심 한 세계, 몰인정한 세계, 소외된 세계속에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얻지도 못하고 소외된 채 고통만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눈부신 경제발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몸에 병을 얻거나 불구가 되어서 음지에서 울고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불을 받아 초대교회처럼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공급처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1서 4장 16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 느니라'고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31절을 통해 친히 말씀하셨으니 한국의 1천만 성도는 뜨거운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불은 태우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고 소독합니다. 이 처럼 성령님의 불도 불의와 부정 불결을 태웁니다. 성령님 충만한 교회가 세상에 있어야 세상의 더러움을 태워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데 세상이 부정 부패로 썩어간다면 교회가 세상에 있는 목적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우리 교회때문에 죄인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돌아오 고 있습니까 교회가 말은 하지만 그말에 권세와 능력이 없고 죄악을 태우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님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불은 죄악과 불의와 미움과 원수됨을 태우고 불안과 좌절감을 태웁니다. 성령님의 불이 활활 타는 곳에는 흑암의 세력이 사라지고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족이 성령님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생활을 하게 하시며 성령님의 열매를 생활가운데 맺게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권능있는 증인이 되기 원합니다. 성령님 저희 가족을 붙들어주시고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죄가 더 많은 줄. 성경


본문:눅 13:1-9 어느 방파제 위에서 낚시질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낚시꾼은 고기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줄자로 그 크기를 재어 보더랍니다. 그리고는 작은 물고기만을 그릇에 집어 놓고 25cm이상 되는 고 기를 다시 물속으로 집어넣어 풀어 주곤 합니다. 하루종일 이런 일이 되풀 이 되자 그 낚시꾼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낚시꾼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작은 고기는 잡아 두고 큰 물고기는 다시 물 속에 던져버리다니요!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 낚시꾼은 옆의 사람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 합니다. "저의 프라이팬의 지름은 불과 25cm 밖에 되지 안거든요. 그러니 그 이상이 되는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지요." 때로 우리는 자신의 偏見이나 思考에 사로잡혀 모든 일을 偏狹하게 생각 합니다. 이는 회당장처럼 너무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좀더 크게, 그리고 깊게 생각하자.
1.본문의 구성 1-3절) 神殿에서 학살된 갈릴리 사람들 4-5절) 실로암 망대 6-9절) 포도원에 심겨진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2.상황전개 유대인들이 비극적인 소식을 가지고 예수에게 달려 왔습니다. 이들 유대 인들은 고통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을 무법자들로 업신여기는 터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이 주님께 갈릴리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피에 자기들의 피를 섞게 된 소식을 애통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신바람이 나서 알려 드린 것이 분명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인들인가를 드러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 하면 어떤 유월절에는 유대임들이 짐습처럼 학살되었는데
3,000명 또는 20,000명이 당하기도 하였답니다. 이들은 빌라도의 악독함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는 죄값으로 죽었다고 교리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런 비극을 당했다고 하여 살육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이 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혹여 당신과 내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당신은 죽고 나는 화를 모면했다고 하여 이것으로써 당신은 악하고 나는 선 하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은 예수님은 이들도 희생을 당한 사람들 못지 않은 죄인임을 명백히 해 주셨습니다. 또 이 유대인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말씀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어 가노라면 불행한 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은 진실과 오류 혹은 진실과 반진실이 교묘하게 뒤섞인 확신을 가지 고 있던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본 론
1. 유대인들의 잘못된 확신 = 유대인들은 '죄는 언제나 고통을 가져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제반 사건들을 인과론에 귀착시켜 자신의 입장을 합 리화하려는 모든 시도의 저변에는 다분히 율법적이며 근본적인 색체가 짙게 깔려있고 내포되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인들 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줄 알 라"(민32:23) 이 말씀을 우리도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은 옛적에도 옳았던 말씀이었고 현대의 과학시대에서도 옳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 구나 자기 그림자를 피할 수 없듯이 이 댓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너의 죄가 정년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잘못을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 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찾아내지 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 께서 죄인을 노하시며 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법이 지배하는 세계 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 대로 거두리라"(갈6:7)는 법입니다. 이 말씀은 주로 우리가 죄인들을 채찍 질하여 순종하게 하려고 할 때 사용하던 엄숙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오늘 저 녁이나 내일 저녁에 인생의 끝날에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거두게 될 수 확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경건한 마음으 로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예화) 심은 대로 거두는 이 법칙을 못마땅히 여기고 "우연히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싶다"고 외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꿈을 가진 사람 이 어느 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齒苞을 앓았습니다. 치통 을 앓게 된 그는 뜨거운 커피를 한 남비 끓여 이 아픈 것을 해결하려 하였 습니다. 그러나 그가 뜨거운 커피라고 생각하였던 것을 입에 넣었을 때 그는 커피가 얼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나서 마시던 커피를 내뱉으면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별게 아니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커피를 불 위에 올려 놓 으면 어떤 때에는 불이 커피를 끓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불이 커피를 얼어 붙게 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사는 세상은 바로 이런 세상입니다."그는 끔찍히 후회하고 자신이 살아왔던 질서 있는 세계로 되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이 세상이야 말로 그가 살 만한 유일한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이 '질서 있는 세계'라는 사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산광없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변함없이 작용합니다. (이야기) 어느 부인이 그 아들에게 중고 자동차를 한대 사주었습니다. 막 십대에 들어선 이 젊은이는 부레이크를 잡을 때나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를 듣기 위하여 커브를 돌 때 고속으로 달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 느 날 아침 이 청년이 즐기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에 그의 차는 미끌어져 전화대를 들이받았습니다. 그의 몸은 자동차 바람막이 유리 밖으로 튀어나 와 전화대에 부딪쳤습니다. 앰블런스가 달려와 그를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절규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합니까그렇지만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그의 묻는 말에 마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하였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이번 사고 로 하여 하나님을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아들이 난폭하 게 운전할 때 전화대를 치우셨다면 내가 조심스럽게 운전할 때 내 앞에 전 화대를 세워 놓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우리는 한 사람도 옳게 운전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 말은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전화 대를 찾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중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잘못된 선택에 서 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잘못이 없는 경우에도 어느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성서에는 아주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너무나도 포악한 말씀같이 여겨지 기도 합니다. "아비의 죄를 그 자녀 삼사 대까지 갚으리라."(출34:7)이 얼마나 부당한 처사냐고 항의 할 수도 있습니다. '아비의 죄가 어떻게 나에게 이른단 말인 가' 나와는 상관 없는 자의 방탕하고 비뚤어진 생활로 인하여 내가 불리한 처우를 받는 것이 어떻게 공평한 일이라 할 수 있는가 깨끗하게 그리스도 를 닮은 생활을 하였던 조상들로 인하여 내가 혜택을 입게 되는 이치와 같 은 것입니다. 조상들의 죄가 나에게 이르는 것과 같이 조상들의 믿음과 선 과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도 나에게 이르게 됩니다. 내가 어긋난 생활을 함 으로써 내 자식에게 불행을 물려 줄수 있듯이 내가 바른 생활을 함으로써 내 자식에게 사망의 골짜기를 넘어 안정되고 고상하게 사는 삶을 물려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일원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2.하나님의 공평하신 섭리 죄는 고통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해
1) 의는 언제나 고통을 피한다고 주장하는 잘못-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에 대하여 말한 시편 1편의 귀절을 "그 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고 해석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악한 사람은 언제나 실패하고 선한 사람은 언제나 상을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번성한다고 믿었 습니다. 이 믿음에도 일면의 진리는 있습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신체적 건강을 누릴 가능성이 많은 것은 확실합니다. 선한 사람은 또한 물질적으로도 번성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름 있는 어떤 민간 단체는 "최선의 봉사를 하는 사람이 최대의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세속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선이 반드 시 성공의 비결인 것은 아닙니다. 악한 자들은 모두 파산하고 모든 성도들 은 부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일이란 언제나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가 했 던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곧 "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형통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의 은행이 파산할 수도 있 고 그의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고 그의 건강이 나빠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형통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의인이 언제나 성공한다는 믿음은 반은 옳지만 반 은 그릇것입니다.
2)고통받은 사람은 지은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고 믿는 잘못-우리 모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영혼과 몸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 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날 기쁨으로 육체의 씨를 뿌리는 많은 사람 들이 쓰디쓴 고통과 눈물로 그 수확을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고 있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욥이 그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그이 사랑하는 식구들을 다 잃 어버리고 그의 온 몸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세 친구들이 그를 위로 하러 왔으나 도리어 그에게 고통을 더해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고통 당하는 있는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인 욥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욥이 죄를 지은 결과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욥에게 "무죄한 사람이 망하는 것을 보았느냐"따졌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셨던 분입니다.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고 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듯이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받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댓 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3)자신들이 고통을 받고 있지 않으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잘못된 결론-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아 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빌라도에게 살육 당하였던 비참한 사람들만큼 자신 들은 많은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이런 그릇된 확신은 도움 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들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1)그릇된 확신이 교만과 자기 의로 이끌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불 쌍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던들 우리도 이 같은 일을 당하였을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들이 우리와 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면 그 같은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 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불행을 당한 이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과 경멸하는 눈초리로 이들을 반대하였습니다.
(2)상당한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그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살아 가고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간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변함없이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 세계의 법칙이 이들에게는 전 혀 맞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조작하여 가시나무에 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딸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웠습니다. 이 리하여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이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도덕적으로는 色盲이 되었습니다. 죄는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처럼 보일 때만큼 그렇게 치명적인 경우가 없습니다. 죄는 언제나 비극을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와 더불어서도 무사히 살아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만큼 죄가 엄청난 비극을 부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3.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교훈 주님은 이들에게 '悔改'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들이 회개할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 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질적인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롬3:1-12)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 에 접해있고 기혼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 였습니다. 그곳을 지키기 위하여 세워 놓은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대에 그 사건으로 죽은 사람을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여론도 있었습니다. 이 이유로는 '수로공사' 비용이 빌 라도가, 성전에 바쳤던 헌금을 빼앗아서 사용한 것이므로 그 노임은 성전에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돌려 주지 않았기 대문에 죽었다는 것 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한다"(5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들도 빌라도에게 살육을 당했던 사람들 못지 않은 죄인들이었 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차이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모두가 똑같 은 정도로 죄를 지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예화) 어느 농장에 두 개의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중의 한 나무는 별로 가시가 없는데 비하여 다른 한 나무는 가시가 수없이 많았 습니다. 그러나 거의 가시가 없는 나무가 이를 근거로 삼아 가시가 많은 나 무에게 "너는 가시나무이지만 나는 수양버들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시나무이기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 도 죄인이었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약을 처방하셨습니다. 회개란 우리 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 이상이며 죄를 슬퍼하는 것 이상의 그 무 엇입니다. 흐느낌으로 목이 메이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끈적끈적한 생활에서 돌아서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회개의 뉘우침은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향한 만큼 철저한 것이어 야합니다. 탕자는 돼지 우리를 떠나 그의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까지 회개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회개가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약인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1)회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않게 막아주기 때문에 고통에서 구해줍니다.-회개를 한다고 하여 저지른 잘못에서 오는 결과를 피하지는 못합니다. 만일 잘못을 저지르는데 따라 오게 마련인 고통으로부터 회개하여야 합니다 에서가 그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판 이후 자기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에 대하 여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 주시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아낌없이 완전히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에서의 눈물이 소용이 없었던 까닭은 그가 뒤늦게 한 회개로는 그가 지날 날 젊었을 시절에 내팽개쳤던 기회를 자기 손에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만일 자신 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의 형벌을 면하게 하고자 한다면 죄를 짓기 전에 회개하여야 합니다.
2)회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여 고통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됩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롬 8:28)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에게 순종함으로써 그와 협력하게 되는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얻은 것으 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자연의 경우도 때로는 조개의 상처를 이용하여 진주로 변화시키듯이 하나님께서도 어떤 원인으로 생겨진 우리의 상처를 이 용하여 말할 수 없이 값진 보석으로 변화시키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하나님의 뜻안에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 토질 좋은 포도원 밭에 심겨진 무호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율법 논쟁이나 하고 자리나 차지하면 찍어 버린다는 단호한 의지의 말슴을 귀담 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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