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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고 더하라 (골2:6-7)

본문

금년의 추수 감사절은 그 어느 해의 감사절보다도 뜻이 깊습니다. 예년에 없던 물 난리로 농사를 망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이만큼 풍년을 이룬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한 번 뜻 깊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본문 “(골2:7)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더할 증(增)자와 더할 가(加)자를 써서 “감사함을 增하고 加하라”는 말입니다. 옛날 번역판을 보면 그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이 말은 순수하게 오늘날의 표현대로 풀이를 해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더하고 더하라”는 말입니다. 원래 감사라는 말은 고맙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은혜를 입었으면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는 마음을 감사라고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마땅히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도리이고, 예의이고, 당연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할 것입니까 이렇게 감사하는 것도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 표현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마음속으로만 하는 것보다는 표현으로 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물론 마음으로도 감사를 해야 합니다. 속 깊은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도 뜻이 있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더욱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내 재주로 된 것이 아니고 내 능력으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전도와 봉사와 헌신으로 기쁨을 잃지 않고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운동 선수들이 경기에서 이겼을 때 그 자리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전에는 가끔 그런 모습늘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것도 보통 경기가 아니고 접전을 펼친 경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우었을 때 끓어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은 아주 감격적입니다. 처음에는 그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 좀 어색하기도 했고 거북스럽게도 보이기도 했었는데 자주 보게 되니까 오히려 대견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시안 게임 때 중구과 농구 경기를 하다가 극적으로 역전승을 했을 때 선수들이 얼싸 안고 눈물을 흘리며 끓어 앉아 기도 드리던 그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것이 표현의 감사입니다. 물론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아니해도 가사를 드릴 수는 있지만 만인 앞에서 당당하게 꿇어 앉아 기도한다는 것은 과연 멋진 감사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고백이고 간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구체저으로 표현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으로도 감사를 해야 하겠지만 나의 소중한 물질을 드려서 감사하는 것도 더욱 뜻이 있는 감사입니다.
2. 깨닫는 감사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깨달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진정한 힘은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깨닫게 될 때 힘이 나오고 자발적인 동기가 발생되고 모험과 전진이 이루어집니다. 열 명의 문등병 환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후에는 그중 한 사람만이 찾아와서 감사를 했습니다. 그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상종하기를 꺼려하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렇게도 무시하고 죄인 취급하며 짐승 취급 받고 살던 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아홉 사람은 모두 양반처럼 행세하며 교만하게 살던 유대인들입니다. 무엇이 문화인이고 양반입니까 누가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17:17)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그래서 깨닫는 감사,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후한(後漢) 나라에 광무제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호양 공주라는 혼자 된 누이 하나가 있습니다. 임금은 늘 그 누이가 걱정이 되어 개가하라고 권고를 했습니다. 호양 공주는 궁내 대신중에서 송홍이라는 사람 정도면 개가하겠다고 했습니다. 임금은 누이를 병풍 속에 감추어 놓고 송홍을 불러 의사를 떠 보았습니다. “옛부터 사람이 신분이 높아지면 친구를 바꾸라 했고, 살림이 부해지면 처를 바꾸라 했는데 그럴 생각 없는가”하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비천했을 때 얻은 아내를 버리고 유력한 집안의 딸에게 새장가를 갈 생각이 없느냐 그 말입니다. 송홍이 임금님의 의중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송홍이 대답합니다. “비천할 때 사귄 친구는 신분이 높아져도 우정을 변치 말고, 살림이 부해져도 가난했을 때 만난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어찌 쪼강 지처를 버린단 말입니까” 병풍 뒤에 숨어 있던 호양 공주가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과연 송홍이로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마음을 바꾸어 먹고 다른 곳으로 개가했다고 합니다. 송홍이 자기 처를 가리켜 조강 지처라고 말한 것은 과거를 보려고 공부할 때 부인이 남의 집에 가서 방아를 찧어 주고 품삯으로 겨를 한 되 얻어 와서는 그것을 채로 쳐서 쏟아진 싸라기로 주을 쑤어 남편을 공양하고, 자신은 겨로 개떡을 만들어 먹어 가며 남편을 장원 급제시켰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조강 지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조는 재강 糟자고, 강은 겨 糠자입니다. 즉 조강이란 말은 술 찌꺼기와 쌀겨라는 말입니다. 술 찌꺼기와 쌀겨를 먹어 가며 곤궁하고 가난할 때 고생을 같이한 아내를 조강 지처라고 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되기까지는 이 같은 아내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를 어찌 버리느냐 그 말입니다. 남존 여비 사상이 흠씬 젖어 있던 그 시대에 버리면 버렸지 못 버릴 것도 없습니다. 무식한 아내를 버리고 왕의 누이 호양 공주와 결혼만 하게 되면 그의 앞길은 훤히 트이게 되는데 그 같은 기회를 마다할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송홍은 “어찌 조강 지처를 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한마디로 왕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속담에 “사람이 사람의 은혜를 모르면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정신의 축복입니다. 깨닫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깨닫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그 마음은 더욱 값진 마음입니다.
3. 향상하는 감사입니다. 본문에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더하고 더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성장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성장하고 향상하듯이, 믿음이 커지면 감사하는 마음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해의 감사보다 더 성숙된 감사를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0년 전의 감사 자세와 오늘의 감사 자세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향상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후퇴하고 퇴보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성장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활이 향상되고, 신앙이 성숙해 가고, 생각이 여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생각이나 마음이 구태 의연하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사업의 규모가 작을 때, 그리고 월급의 액수가 적을 때 십일조 헌금을 잘하다가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수입이 많아지니까 헌금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 금액이 많아지니까 반으로 줄이고, 그래도 전보다 많아졌다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의 염려하는 말을 유념해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아들은 월급이 적었을 때는 십일조 헌금을 잘하더니 월급이 많아지니까 잘 하려고 안해요. 아마도 그 아이는 월급이 적어야만 십일조 생활을 잘할 아이인가 봐요.” 여러분, 지위가 낮고 월급의 액수가 적어야 십일조 생활을 잘할 것입니까 지위가 높아지고 수입이 전보다 많아지면 적당히 할 것입니까 그런 분들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월급을 줄여 놓으시는 방법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이상으로 향상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향상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향상하려고 하는 욕망도, 용기도, 꿈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남께서 생활을 향상시켜 주시면 그만큼 믿음도 향상되고, 감사도 향상되고, 생각도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멈추지 않고 향상되어 가는 것입니다.
4. 믿음의 감사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은 감사하는 생활을 보면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감사를 말할 때는 북미 대륙에 건너갔던 청교도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1607년 영국의 제임스 국왕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영국의 국교로 선포를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공회라는 종교입니다. 모든 영국인은 성공회를 믿으라고 선포했고, 개신교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때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박해를 피해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곳에서 11년 동안 살아 보았지만 그 곳에서도 진정한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운 12월 21일 180톤 급의 배에 102명을 싣고 3천 4백 마일을 63일 동안 항해해서 오늘의 미국 동부 연안에 도착했습니다. 그 해 겨울에 44명이 얼어 죽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그 지역은 4년 전에 전염병으로 인디언들이 전멸한 곳입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참혹한 추위와 반이 죽어 넘어지는 고뇌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씨를 심고 가꾸어서 그 해 10월 추수를 합니다. 그들은 그 보잘것없는 곡식으로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고기도 없고, 새를 잡으로 갔던 사람들은 새는 잡지 못하고 그 대신 칠면조를 잡아 온 것이 오늘 추수 감사절에 칠면조가 등장하게 된 동기입니다. 그 추운 날 이들은 60여 명의 죽은 영혼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감사입니다. 이 같은 전통이 오늘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햅쌀이 나오면 젯밥을 올리고 귀신에게 굿을 하면서 바치지만 서양인들은 하나님께 먼저 예배하고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정신의 양면 모습입니까 우리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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