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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주자 (마5:38-42)

본문

오늘 아침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하는 것에 대한 소위 보상법에 대해서 대조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있는 내용르로 38-42절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이 마 5:38-42말씀을 기독교의 박애주의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들을 하고, 혼자들은 이 본문 말씀속에서 기독교가 무저항주의라고 하는 이런 무저항주의의 종교를 이야기합니다. 유명한 간디같은 사람은 이 본문말씀을 자기인생의 철학으로 삼고 위기에 저한 인도를 건지는 무저항주의자가 되어서 나라를 건지게 되어진 유명한 성경귀절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1.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는 여기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지금도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행을하는 종교가 있으니 우리가 잘 아는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바로 그런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가끔 뉴스를 통해서 보면 유대사람들은 그 복수 작전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을 아랍나라들이 공격을 했다. 그러면 반드시 보복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드시 보복을 합니다. 지난 걸프전때도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할 때에 제일 세계가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을 만약 이란이 공격을 한다면 이스라엘은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는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복을 할 터인데 이렇게 되면 세계전쟁이 일어날 것이 아니냐. 사실상 미국이 이스라엘을 달래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습니까 심심치 않게 이 피해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소속한 아랍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도 대낮에도 서로의 좋지 못한 감정의 충돌이 많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스라엘사람들은 보복을 합니다. 틀립없이 보복을 합니다. 또 이슬람교도 그렇습니다. 도둑질 한 사람은 그 손을 자르는 처형을 한다든지 이런 덧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눈은 눈으로 이는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이 네 눈을 찔러 소경이 되게 했으면 그 사람의 눈도 찔러서 소경이 되게 하고 어떤 사람이 네 손을 잘랐으면 너도 그 사람의 손을 자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잘못가르친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21:24,신19:18)에 나타난 이 말씀은 재판장이 쓰는 법입니다. 재판할 때 죄를 지은 것 만큼 갚아 주고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인 교훈은 그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분명히:“원수를 사랑하라”(레19:18)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사랑의 법은 가르치지 않고 재판할 때 쓰는 법을 일상생활법으로 잘못 가르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보복하는 생활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약의 본 뜻을 바르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고요하고 평온한 심령으로 항상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하며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영이 날마다 살아나아가는 생활을 하면 악한 자라도 대적하지 않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게 됩니다.
2.악한자 대적하지 말라.(요12:32,롬12:17)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롬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오른편 뺨 치면 왼편 돌려되라.(39) 오른편 뺨을 맞았더라도 평안한 마음으로 외편도 돌려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손해를 보지 않고 마음에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통을 유지할 수 있가 있습니다. 오른뺨을 맞는 것은 인격적으로 볼 때 모욕을 당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도 내 속에 있는 생명있는 신앙 즉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영적 생활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떠한 일을 당할지라도 이 영적 생활만 빼앗기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약자의 도덕이 아니고 강자의 도덕입니다. 결국 약해서가 아니라 강해서 참는 것입니다.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은 좀처럼 주먹을 쓰지 않습니다.
2.오리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가라.(41)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것은 억지로 일을 시키어 인권을 유린하는 인권문제입니다. 자기의 인권이 유힌당하는 한이 있었도 생명있는 신앙생활(즉,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며 성경을 입어 나가는 생활)이 더 중요하므로 그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약자의 도가 아니고 강자의 도인 것입니다. 적은 것을 희생하고 더 귀하고 크고 영원한 것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약자가 아니라 강자라는 사실입니다. 일시적인 육신의 것을 빼앗겨도 신령하고 영원한 영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다면 얼마나 지혜있고 강한 자입니까 자기의 인권을 유린당하여도 영적인 생활이 계속되어 나간다면 유익이 많습니다. 믿는 일이 중요하고 자기 영이 생명의 길을 걷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3.행한 대로 갚지 말라.(38-39) 남들이 행한대로 다 보복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3.거절하지 말라.(욥31:16-22)
1.속옷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 주라.(40) 누가복은 6:29에는 옷을 빼앗는 자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가 와서 송사하여 속옷을 빼앗으려고 할 때에 같이 싸우면 마음의 화평과 신령한 영적 생활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는 성공한 것이고 나는 실패한 것입니다. 속옷과 겉옷은 물질문제입니다. 즉 속옷과 겉옷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이며 자기 몸을 가리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라도 내어 놓을찌어정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생명의 역사는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영적인 생명의 역사가 그 곳에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도 더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삭이 우물을판 다음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빼앗으려고 할 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또 와서 빼앗으려고 하므로 다시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세 번째 판 우물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백 배나 더 주었습니다. 악한 자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가 있습니다. 무한정으로 빼앗지는 못합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서로 싸우고 다투고 물고 찢어서는 안됩니다. 물고 찢으면 피차가 다 망합니다. (갈5:15)
2.구하는 자에게 주라.(42)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는 자는 항상 주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행20:35)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는 물질면이나 육신적으로는 희생을 당하여도 영적인 면과 영원히 누릴 내세의 것, 즉 그 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3.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2)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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