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세우라 (고전14:1-19)
본문
어린아이들이 컸다는 표시는 무엇입니까 엄마 아빠에게 무엇을 선물할 때입니다. 청소년이 성장하고 있다 표시는 무엇입니까 부모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만 알아달라고 하는 것, 사실은 덜 성숙하다는 표시입니다. 말하자면 아직 진화가 덜 되 서 그렇습니다. 남편들이 나만 알아 달라고 하면, 아, 이 남자! 아직 덜 진화 돼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사실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좀 덜 진화되어 있습니다. 베풀고 주고 이해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받고 알아주길 원하고 자기것을 먼저 챙깁니다. 덜 진화 되서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나보다 남에 대해 민감합니다. 그가 성숙한 인간이냐 어린 인간이냐는 남에 대한 배려에서 찾 을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인이냐 아니냐의 판단도 남을 생각해 주 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남을 배려해 주고 타인에 대해 민 감한 것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무례하고 제 멋대로에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어린아이입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해야 자신의 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세우는 데 급급한 믿음은 아직 어린 아이의 믿음입니다. 다른 교우를, 이웃 형제를 신경 쓸 정도의 믿음이 아니면 아직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형제자매에 대해 민감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구원하고 이웃을 세우는 일은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특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 신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은 영광 중에 최고의 영광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웃 형제자매와 교회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행동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 인의 모습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고린도전서 앞 부분의 내용 전개와 관 련이 있습니다. 성의 문제, 결혼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여인 들의 수건 쓰는 문제, 성만찬의 문제 그리고 12장의 은사의 문제, 모두 덕이 기준입니다. 이 모든 것의 기준은 교회와 이웃 형 제의 구원을 위한 덕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은사의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모든 은사에 있어서 선악의 기준은 교회와 이웃 형제의 세움입니다. '덕을 세움'(오이코도메)이라는 말은 건축물을 쌓아 올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파괴가 아니라 건설이요. 세움입니다. '유익, 도움, 세움, 이익 (constructive, strong, usefull)' 이 런 뜻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덕을 세우라하면 형제에게 유익이 되도록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덕을 쌓으라'는 말은 교회 에 유익이 되는 쪽으로 실행하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교회를 건설하는 데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건설하는 데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자, 방언을 한 번 보십시다. 방언은 개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 제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방언의 은사가 공동체에 유익이 되려면 통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방언을 통역하면 메시지로 전달되기 때문에, 누 구나 알아듣고 교훈과 책망과 격려와 희맘을 받아 형제와 교회를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의 통역이나 예언을 강조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때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아직 완성 되기 전이니까요. 그래서 예배 순서는 대략 찬송시, 말씀의 가르 침, 방언과 통역, 예언 이런 순서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할 때는 순서를 지켜서 공중 앞에서 방언을 합니다. 그러면 통역하는 사람이 꼭 통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고 기도에 집중하기도 하고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는 무질서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순서가 되지 않았는 데도 막 방언을 해 댑니다. 동시에 일제히 막 방언 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배가 무질서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은혜도 좋지만 방언 통역을 하지 않으니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 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예배를 망치고 돌아갔 습니다. 더구나 초신자들은 낙담을 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 여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방언 때문에 공중예배가 무시되고 어 지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은근히 방언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부러워들 하고 있었습니다. 방언 이 외의 은사들은 무시하는 경향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예언은 공동체의 교우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으로 인 한 은혜와 교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언이 방언 보다 나은 근 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은사가 낫고 못하고의 차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는, 덕을 세우는 측면 에서는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등과 열등의 판단, 옳고 그름의 판단, 선과 악의 판단, 정당성과 부당성의 판단은 모두 '이웃의 덕'과 '교회의 덕'입니다. 이것이 실천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장 한 장에 걸친 지루한 설명 끝에 결론 삼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 절) 바울의 모든 활동의 근거는 교회와 형제들을 세움에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까 내가 어떻게 세우는 데 보탬이 될까 이것이 행동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제 한하는 유일한 이유도, 권리를 포기하는 유일한 이유도 덕을 세 우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우상제물에 관한 말씀은 이런 원칙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 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 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 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 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 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23-32)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무한 자유를 가졌습니다. 율법도 관습도 규율도 우리를 얽매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거 리낌이나 장애없이 거침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트인 사고와 열린 행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장무애(無障無 )합니다. 위의 구절 은 우상제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요 땅과 거기 충만한 모 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까짓 우상제물 먹으면 어떻습 니까 괜찮다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 아래입니다. 그렇기에 차려 놓으면 우상제물이냐고 묻지 말고 열심히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에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고서는 또 28절에 가면 금방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합니다. 어떨 때는 먹는 것이 정당하고, 어떨 때는 먹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 합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이런 까멜레온 처럼 변신하는 변신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형제의 구원입니다. 형제의 유익입니다. 그런 까닭에 크리스챤의 행위의 기준 은 바로 이웃의 구원, 교회의 세움입니다. 이게 가장 지고지선한 상위개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아래 개념입니다. 각론을 묻지 마세요. '이럴때는 어떻게 할까요'를 묻지 마세요. 해답은 형제 의 구원입니다. 정답은 교회의 세움입니다. 이 기준이 정당성의 근거요, 오류의 기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식물이 형제를 실족케 하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 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이것이 우상제물에 대한 가르침 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남을 향한 배려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에는 자기에게 열심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도취입니다. 나의 구원, 나의 칭의, 나의 성결 전부 나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다가 성숙하고 은혜가 더 깊어지면 남에게 열심 입니다. 이웃에게 도취되는 것입니다. 전도 많이 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게 전도대상자 위주입니다. 전도 대상자가 냉면을 좋아한다고 하면 죽자 사자 냉면 집에만 가자고 합니다. 수영 좋아 한다고 하면 물공포증에 물맷돌이라도 열심히 수영장엘 들락거립니다. 구원할 사람이 미 장원엘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 매일 머리 만지러 갑니다. 왜 요 우리의 사치는 형제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상도 형제의 세움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양은 이웃의 구원을 위한 것이요, 우리의 천박함도 형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권이 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 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 아주 멋있고 중 요한 말씀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노동자 선교를 위해서 구미에 내려오기 전에 노동훈련을 1년 동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훈련원칙 중 제일 강조한 것 이 노동자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때를 전부 청소하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안 고쳐지는 것이 말투였습니다. 말 투에서 제일 걸렸어요. 또 교육하려 하고 지도하려는 습관입니다. 고질병이었습니다. 보이는 데 말을 못하게 되니까 여간 고문 이 아닌거죠. 그리고 제가 발견한 지식인의 고질병 가운데 또 하 나는 간단하고 분명한 것도, 어렵고 불분명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어쨋든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했습니다. 바로 여러 모양 되기 훈련이었습니다. 노동자에게는 노동자의 모양으로, 부 자에게는 부자의 모양으로, 지식인에게는 지식인의 모양으로 무 학자에게는 무학자의 모양으로 '모양되기 '훈련입니다. 왜요 그 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까멜레온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 주위 환경에 따라 기민하게 색 깔을 바꿔 변신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화려한 변신은 이웃 형제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화려한 변신의 정당 성은 이웃 형제의 구원과 세움에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19-21)
바울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종처럼 행세했습니다. 노예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헬라 철학에 정통한 세계적인 감 각을 가진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철 학에 대해 까막눈인 유대인처럼 행동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정통한 율법사의 문하에서 율법 훈련을 받 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율'자도 모르는 율법없는 자 처럼 행 동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담대했지만, 믿음이 아주 약한 자 와 함께 행동을 같이 했습니다. 이 모두와 같이 된 것은 그 사람 들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의 엄중함을 아십니 까 이 실천의 눈물겨움을 아십니까 왜요 구원코자합입니다. 세우고자함입니다. 힘을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바로 덕입니다. 부자들은 빈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방끈이 긴 사람은 무 식한 냄새를 풍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은 좀 못난이 흉내를 내야 합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좀 무재능 흉내 를 내야합니다. 거꾸로도 통합니다. 빈티나는 사람은 좀 부자행 세를 하면서 넉넉해야 합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전도할 수 있겠 어요 분위기 잡는 거 질색인 사람도 좀 분위기 맞춰줄 수 있어 야 합니다. 형제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멋내는 걸 증오하는 사람도 고집 부리지 말고 멋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깔끔을 떨고 주렁주렁 달 수 있어야 합니다. 왜요 그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세우고자 함입니다. 남편 구원, 아내 구원이 힘들지요 맞춰 주는 데 기민하지 못해 그 걸음이 더딘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 이니라." (고후12:19)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의 자 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제일 큰 은혜는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세심한 도움과 격려와 배려와 세움 과 용기와 위로와 인도를 받았지요. 그리고 목회자로 부터도 세 움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 수 많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선배와 교우들로부터도 은혜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이제는 갚을 때 가 되지 않았습니까 덕을 세우는 것은 이 은혜를 갚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받은 사람에게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갚을 새 로운 사람을 향해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세움이요, 이웃 형제의 구원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여기에 맞춥시다. 크리스챤의 모든 행 동의 초점, 중심, 질서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구원과 이웃의 세움을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 리셨으니, 우리 행동의 초점, 중심, 질서도 바로 교회와 이웃의 구원과 세움에 있어야 합니다. 옆의 교우에 대해 민감해집시다. 우리의 이웃, 형제자매에 대 해 민감해 집시다.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에 대해 민감해 집시다. 구원하십시다. 도와주고 세워줍시다. 유릭하도록 하십시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모든 은사와 재능을 활용합시다. "모든 것 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이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성령님을 선물로 가득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모든 은사에 있어서 선악의 기준은 교회와 이웃 형제의 세움입니다. '덕을 세움'(오이코도메)이라는 말은 건축물을 쌓아 올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파괴가 아니라 건설이요. 세움입니다. '유익, 도움, 세움, 이익 (constructive, strong, usefull)' 이 런 뜻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덕을 세우라하면 형제에게 유익이 되도록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덕을 쌓으라'는 말은 교회 에 유익이 되는 쪽으로 실행하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교회를 건설하는 데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건설하는 데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자, 방언을 한 번 보십시다. 방언은 개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 제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방언의 은사가 공동체에 유익이 되려면 통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방언을 통역하면 메시지로 전달되기 때문에, 누 구나 알아듣고 교훈과 책망과 격려와 희맘을 받아 형제와 교회를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의 통역이나 예언을 강조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때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아직 완성 되기 전이니까요. 그래서 예배 순서는 대략 찬송시, 말씀의 가르 침, 방언과 통역, 예언 이런 순서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할 때는 순서를 지켜서 공중 앞에서 방언을 합니다. 그러면 통역하는 사람이 꼭 통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고 기도에 집중하기도 하고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는 무질서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순서가 되지 않았는 데도 막 방언을 해 댑니다. 동시에 일제히 막 방언 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배가 무질서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은혜도 좋지만 방언 통역을 하지 않으니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 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예배를 망치고 돌아갔 습니다. 더구나 초신자들은 낙담을 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 여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방언 때문에 공중예배가 무시되고 어 지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은근히 방언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부러워들 하고 있었습니다. 방언 이 외의 은사들은 무시하는 경향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예언은 공동체의 교우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으로 인 한 은혜와 교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언이 방언 보다 나은 근 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은사가 낫고 못하고의 차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는, 덕을 세우는 측면 에서는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등과 열등의 판단, 옳고 그름의 판단, 선과 악의 판단, 정당성과 부당성의 판단은 모두 '이웃의 덕'과 '교회의 덕'입니다. 이것이 실천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장 한 장에 걸친 지루한 설명 끝에 결론 삼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 절) 바울의 모든 활동의 근거는 교회와 형제들을 세움에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까 내가 어떻게 세우는 데 보탬이 될까 이것이 행동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제 한하는 유일한 이유도, 권리를 포기하는 유일한 이유도 덕을 세 우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우상제물에 관한 말씀은 이런 원칙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 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 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 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 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 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23-32)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무한 자유를 가졌습니다. 율법도 관습도 규율도 우리를 얽매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거 리낌이나 장애없이 거침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트인 사고와 열린 행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장무애(無障無 )합니다. 위의 구절 은 우상제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요 땅과 거기 충만한 모 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까짓 우상제물 먹으면 어떻습 니까 괜찮다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 아래입니다. 그렇기에 차려 놓으면 우상제물이냐고 묻지 말고 열심히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에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고서는 또 28절에 가면 금방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합니다. 어떨 때는 먹는 것이 정당하고, 어떨 때는 먹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 합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이런 까멜레온 처럼 변신하는 변신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형제의 구원입니다. 형제의 유익입니다. 그런 까닭에 크리스챤의 행위의 기준 은 바로 이웃의 구원, 교회의 세움입니다. 이게 가장 지고지선한 상위개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아래 개념입니다. 각론을 묻지 마세요. '이럴때는 어떻게 할까요'를 묻지 마세요. 해답은 형제 의 구원입니다. 정답은 교회의 세움입니다. 이 기준이 정당성의 근거요, 오류의 기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식물이 형제를 실족케 하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 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이것이 우상제물에 대한 가르침 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남을 향한 배려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에는 자기에게 열심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도취입니다. 나의 구원, 나의 칭의, 나의 성결 전부 나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다가 성숙하고 은혜가 더 깊어지면 남에게 열심 입니다. 이웃에게 도취되는 것입니다. 전도 많이 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게 전도대상자 위주입니다. 전도 대상자가 냉면을 좋아한다고 하면 죽자 사자 냉면 집에만 가자고 합니다. 수영 좋아 한다고 하면 물공포증에 물맷돌이라도 열심히 수영장엘 들락거립니다. 구원할 사람이 미 장원엘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 매일 머리 만지러 갑니다. 왜 요 우리의 사치는 형제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상도 형제의 세움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양은 이웃의 구원을 위한 것이요, 우리의 천박함도 형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권이 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 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 아주 멋있고 중 요한 말씀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노동자 선교를 위해서 구미에 내려오기 전에 노동훈련을 1년 동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훈련원칙 중 제일 강조한 것 이 노동자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때를 전부 청소하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안 고쳐지는 것이 말투였습니다. 말 투에서 제일 걸렸어요. 또 교육하려 하고 지도하려는 습관입니다. 고질병이었습니다. 보이는 데 말을 못하게 되니까 여간 고문 이 아닌거죠. 그리고 제가 발견한 지식인의 고질병 가운데 또 하 나는 간단하고 분명한 것도, 어렵고 불분명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어쨋든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했습니다. 바로 여러 모양 되기 훈련이었습니다. 노동자에게는 노동자의 모양으로, 부 자에게는 부자의 모양으로, 지식인에게는 지식인의 모양으로 무 학자에게는 무학자의 모양으로 '모양되기 '훈련입니다. 왜요 그 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까멜레온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 주위 환경에 따라 기민하게 색 깔을 바꿔 변신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화려한 변신은 이웃 형제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화려한 변신의 정당 성은 이웃 형제의 구원과 세움에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19-21)
바울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종처럼 행세했습니다. 노예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헬라 철학에 정통한 세계적인 감 각을 가진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철 학에 대해 까막눈인 유대인처럼 행동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정통한 율법사의 문하에서 율법 훈련을 받 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율'자도 모르는 율법없는 자 처럼 행 동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담대했지만, 믿음이 아주 약한 자 와 함께 행동을 같이 했습니다. 이 모두와 같이 된 것은 그 사람 들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의 엄중함을 아십니 까 이 실천의 눈물겨움을 아십니까 왜요 구원코자합입니다. 세우고자함입니다. 힘을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바로 덕입니다. 부자들은 빈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방끈이 긴 사람은 무 식한 냄새를 풍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은 좀 못난이 흉내를 내야 합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좀 무재능 흉내 를 내야합니다. 거꾸로도 통합니다. 빈티나는 사람은 좀 부자행 세를 하면서 넉넉해야 합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전도할 수 있겠 어요 분위기 잡는 거 질색인 사람도 좀 분위기 맞춰줄 수 있어 야 합니다. 형제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멋내는 걸 증오하는 사람도 고집 부리지 말고 멋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깔끔을 떨고 주렁주렁 달 수 있어야 합니다. 왜요 그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세우고자 함입니다. 남편 구원, 아내 구원이 힘들지요 맞춰 주는 데 기민하지 못해 그 걸음이 더딘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 이니라." (고후12:19)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의 자 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제일 큰 은혜는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세심한 도움과 격려와 배려와 세움 과 용기와 위로와 인도를 받았지요. 그리고 목회자로 부터도 세 움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 수 많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선배와 교우들로부터도 은혜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이제는 갚을 때 가 되지 않았습니까 덕을 세우는 것은 이 은혜를 갚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받은 사람에게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갚을 새 로운 사람을 향해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세움이요, 이웃 형제의 구원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여기에 맞춥시다. 크리스챤의 모든 행 동의 초점, 중심, 질서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구원과 이웃의 세움을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 리셨으니, 우리 행동의 초점, 중심, 질서도 바로 교회와 이웃의 구원과 세움에 있어야 합니다. 옆의 교우에 대해 민감해집시다. 우리의 이웃, 형제자매에 대 해 민감해 집시다.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에 대해 민감해 집시다. 구원하십시다. 도와주고 세워줍시다. 유릭하도록 하십시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모든 은사와 재능을 활용합시다. "모든 것 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이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성령님을 선물로 가득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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