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자의 부르짖음 (시9:13-20)
본문
어떤 부인이 한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자신에게 인내심이 생기게 기도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그 부탁을 받고 부인을 위해 다짜고짜로 오 주여, 이분에게 고난을 내려 주옵소서! 그 부인은 펄쩍 뛰면서 내가 인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지 언제 고난을 갖다 달 라는 기도를 부탁했습니까 하면서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환난은 사실상 그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 로 주어진 것이지 원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우리 죄를 대속하신 사건을 위시로해서 수많은 성도들 이 고난을 통해 인내를 얻고 온전케 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도 고난이 주는 교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 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4). 바울 사도는 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생의 목적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 하여 그리스도를 더욱더 깊이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빌3:10 참조). 고난을 받아 본 사람은 역시 고난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그 신앙의 차원이 다릅니다. 고난을 경험한 사람은 고난을 모르는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신앙의 깊이를 갖고 있는 것 을 종종 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의 산물인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우도 불순종이라는 타락의 한 현상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난을 일부러 찾아 다닌다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기 위 해 일부러 불순종을 하라는 말은 켤코 아닙니다. 고난의 경우 우리가 일부러 찾아 다니지 않아도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사는 한 언제 어디서 우리를 엄습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시편 9편의 경우, 자기가 고난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고난을 찾아 가지는 않았으나 자 기에게 찾아온 고난을 만난 사람이 보인 반응을 히브리 시(詩)라는 장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 해 주고 있습니다. 키드너는 시편 9편에는 두 개의 클라이막스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고난을 만난 시편 기자가 보 인 두 가지 반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첫째 반응은 9장1-12절로서 모두가 긍정적인 고백뿐이었습니다. 두번재 반응은 9장 13-20절에 나타나 있는데, 고난 중에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서 고난을 당하는 모든 세대들에게 큰 위로를 받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반응인 9장 13-20 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도 세계는 고난의 장입니다. 그 고난은 먹을 것이 없어서 올 수 있습니다. 세계 인구(93년 말 현제 57억)의 절반이(29억)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 11억은 절대 빈곤에 처해 있고 그중 5억은 하루 한끼밖에 먹지 못하는 기아상태에 허덕입니다. 5억 인구가운데 1993년 말 현제 전체 아프리카 대륙에서 1억 6천 8백만 명이 만성적 영양부족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촌에서는 년간 1천3백만명, 하루 3만 5천명의 어린이가 기아, 영양부족,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숫치는 1분에 27명 꼴의 엄청난 수입니다. 또한 아프리카는 따뜻한 기후와 습기로 인하여 모든 전염병균들의 온상이 되어 있어 열악한 위생 상태와 부실한 의료체계 속에서 2억명이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고 기생충에 의한 온코썰카 이아시스 라는 질병으로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이제는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가지 합세하여 전체 에이즈 감염환자중 50%가 아프리카 사람들입니다. 또 고난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별 수모를 다 당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족 때문에 고난을 받는 수도 있습니다. 믿는 아내를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자녀를 믿지 않는 부모가, 믿는 새댁을 믿지 않는 시집 시국가 고난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포기하기 앞서서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음과 같은 보장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외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9:13,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감동 때문에 기도가 쉽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감정도 메마르고, 인간적인 안 목으로 볼 때에 아무런 소망도 없을 때, 또는 문제가 자꾸 누적될 때에 기도한다는 것은 무척 어 려운 일입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있어서 기도가 그렇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 우리는 기도를 가장 멀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 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1.고난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13절) 시편 기자는 9편1-12절에서 적을 물리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는 시리아와 암몬 연합군 을 물리친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이 적들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아직도 무서운 적들이 사망에 남 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산 넘어 산이 있는 것처럼 좌절될 수도 있었으나, 그는 이 미 자신이 체험한 바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구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처음 고난도 하나님의 긍휼로 이기게 해 주셨 지만, 그 다음 고난도 하나님의 긍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중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도 긍휼 때문입니다. 그 긍휼은 우리를 사망의 문 에서 시온의 문 으로 옮겨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망의 문 은 죽음에 임박한 위기를 의미하며, 죽음은 한 사람이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시온의 문 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예루살렘 문을 의미하며 하나님 의 백성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기쁜 곳입니다. 누구든지 고난이 자꾸 닥쳐와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메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온 인류가 영원토록 그 샘에서 마셔도 그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그에게 나와서 용기를 가지 고 또 이렇게 구하십시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2.고난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만 풍성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도 세세무궁토록 나타내 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 중 사망의 문 에서 시온의 문 으로 옮긴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 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도 맛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떤 한 면이라도 깊 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종종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더욱더 큰 고난까지 받을 자세가 되는 것을 봅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7절하). 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그 사실을 표현했습니다. 너히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4). 비록 고난을 받으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을 맛보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처럼 기도와 찬양을 함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4절) 만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선택권이 있다고 하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즉 고난이 없으나 영광도 없는 것과, 비록 때때로 의롭게 사는 것 때문에 고난이 있을 수 있으나 영광도 함께 있는 길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말입니다. 물론 주님을 위해 의롭게 산다고 항상 고난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악한 세상 가운데 주의 적들 사이에 사는 자로서 고난없이 의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을 맛보며 의롭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 으리라 (딤후3: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이를 위해 공의를 베푸십니다(9:15-18).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게서 자기 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바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 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15-18) 위 구절들은 얼핏 볼 때에 악담 같기도 하고 저주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의 대적들에 대하여 독한 말로써 정죄하고 있는 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런 깊은 원한에 쌓인 말들은 시편 중 여러 곳에 나와 있으나, 특히 시편 109편에서 가장 심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109편을 읽 으면 마치 저주 리스트를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멕코머스키 라는 한 교수는 시편에서 이런 저주스런 내용이 종종 나오는 이유를
첫째, 그 내용이 예언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제가 주님께서는 그 예언대로 성취하실 것이다.
둘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인데 하나님은 죄인이 의인을 무참하게 괴 롭히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뜻이다.
셋째. 의(義)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데서 아무리 불의를 행해도 말 리는 사람조차 많지 않아 마치 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의는 건재함을 나타내고 있다.
넷째, 우리의 가장 깊은 원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원수갚을 필요가 없다. 다섯째, 하나님이 이를 통해 공의로우심을 강력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사람의 고난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외면하지 않 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불의를 행하여 고통을 주는 그 대상에 대하여서도 내어버려 두지 않습니다. 기필코 공의롭게 불의한 자들을 다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 심판하신는가
1.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국가나 사회에 대해 심판하신다(15-17절) 열방 은 자기가 지은 죄의 함정 곧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윗을 공 격하여 고난을 준 모든 열방의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계획을 좌절시키 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자신들이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십니다. 앗수르가 그랬고, 바벨론, 로마 등이 역 시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 사악한 자들은 심판만 받지 않고 음부에까지 내 려가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이것만큼 큰 형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악인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형벌을 함께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나 현대나 국가와 사회가 큰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단이 하나님의 법도 를 무시하고 의인에게 고난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침해하려 할 때에 열방 과 악인 들이 받았던 똑같은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현제 권력 잡은 자들에게 대한 심각한 경고일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은 선의의 희생자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18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공의를 배푸실 때에, 그때는 열방이 멸망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하나님을 의로하고 사는 가난한 자들이 그대로 잊혀진 상태로 방치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받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의 삶 이 부요하게 된다는 보장까지 18절에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산상수훈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 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히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6:20-23).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고난을 갖다 주는 권력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이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약자 같고 가난하게 보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의 장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롬8:17)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3:22,23). 비록 고난받는 사람들이 지금은 약하게 보이나 모든 세계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관리할 때가 올 것입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현명하다면 참된 주인을 지금부터 알아보고 고난받는 가난한 자들, 곧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운명에 대하여 문의를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관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때때로 고난을 당해도 굽히지 않고 공의를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공의 로운 심판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산상수훈에 있는 대로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도 가고,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며,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대며 선으로써 악을 이기며 살아갑니다.다.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득세를 영원히 방관만 하지 않으신다.(9:19,20).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적에 심판을 받게 하 소서 여호와여 저히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19,20절). 여호와께서 일어나시면 최소한도 다음 몇 가지를 하실 것입니다.
첫째로,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대하게 됩니다. 심판주로서 하나님을 대할 자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6:15-17). 현대적인 무기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편에 서는 것만큼 무서울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편에 속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 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 었음이니로다 (사6:5). 과연 하나님이 일어서실 때 이길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이길 나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은 잠 시 동안 사람과 나라들이 여호와께 대적하고 있지만 이런 기도 내용이 시편 기자 때에도 이루어 졌으나 앞으로 더욱더 극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생으로 인간뿐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함게 하시지 않을 때 실로 지푸 라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존엄성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이 하나님 버금가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인격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는 동 물적인 차원에서밖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물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원래 인간이 창조 된 것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대상이 없으므로 그 인생은 목적 없이 흩나리는 낙옆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생이 인생뿐임을 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는 사람들은 이제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서 악인을 승리하지 못하게 하시며 인생뿐임을 알게 하실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공산권에 사는 이들도, 회교권에서 고난받는 개종자들고, 직장 내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함으로써 고난을 받는 이들도 모두 이제 고개를 들고 속히 오리라 고 약속하신 재림주이시며, 주 중의 주요 왕중의 왕 되시는 주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받는 교훈 고난은 언제 당하든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고난으로 연단된 사람에게도 매번 고난을 당할 때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 고난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도 어 렵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직접 고난을 당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 울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고난이 우리가 성숙케 되는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고난이라면 어렵게만 느켜집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중에도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체 지을 더 잘 아시므로 우리가 감당할 고난밖에 허락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또 고난 받는 동안에 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공의를 배푸실 것과, 악인을 영원히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는 보장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뚫고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부여하여, 우리가 그 고난을 통해 마땅히 받아야 할 교훈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 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저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 라 (벧전5;10).
로마서 11장 32절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우도 불순종이라는 타락의 한 현상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난을 일부러 찾아 다닌다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기 위 해 일부러 불순종을 하라는 말은 켤코 아닙니다. 고난의 경우 우리가 일부러 찾아 다니지 않아도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사는 한 언제 어디서 우리를 엄습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시편 9편의 경우, 자기가 고난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고난을 찾아 가지는 않았으나 자 기에게 찾아온 고난을 만난 사람이 보인 반응을 히브리 시(詩)라는 장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 해 주고 있습니다. 키드너는 시편 9편에는 두 개의 클라이막스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고난을 만난 시편 기자가 보 인 두 가지 반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첫째 반응은 9장1-12절로서 모두가 긍정적인 고백뿐이었습니다. 두번재 반응은 9장 13-20절에 나타나 있는데, 고난 중에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서 고난을 당하는 모든 세대들에게 큰 위로를 받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반응인 9장 13-20 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도 세계는 고난의 장입니다. 그 고난은 먹을 것이 없어서 올 수 있습니다. 세계 인구(93년 말 현제 57억)의 절반이(29억)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 11억은 절대 빈곤에 처해 있고 그중 5억은 하루 한끼밖에 먹지 못하는 기아상태에 허덕입니다. 5억 인구가운데 1993년 말 현제 전체 아프리카 대륙에서 1억 6천 8백만 명이 만성적 영양부족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촌에서는 년간 1천3백만명, 하루 3만 5천명의 어린이가 기아, 영양부족,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숫치는 1분에 27명 꼴의 엄청난 수입니다. 또한 아프리카는 따뜻한 기후와 습기로 인하여 모든 전염병균들의 온상이 되어 있어 열악한 위생 상태와 부실한 의료체계 속에서 2억명이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고 기생충에 의한 온코썰카 이아시스 라는 질병으로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이제는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가지 합세하여 전체 에이즈 감염환자중 50%가 아프리카 사람들입니다. 또 고난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별 수모를 다 당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족 때문에 고난을 받는 수도 있습니다. 믿는 아내를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자녀를 믿지 않는 부모가, 믿는 새댁을 믿지 않는 시집 시국가 고난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포기하기 앞서서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음과 같은 보장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외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9:13,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감동 때문에 기도가 쉽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감정도 메마르고, 인간적인 안 목으로 볼 때에 아무런 소망도 없을 때, 또는 문제가 자꾸 누적될 때에 기도한다는 것은 무척 어 려운 일입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있어서 기도가 그렇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 우리는 기도를 가장 멀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 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1.고난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13절) 시편 기자는 9편1-12절에서 적을 물리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는 시리아와 암몬 연합군 을 물리친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이 적들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아직도 무서운 적들이 사망에 남 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산 넘어 산이 있는 것처럼 좌절될 수도 있었으나, 그는 이 미 자신이 체험한 바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구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처음 고난도 하나님의 긍휼로 이기게 해 주셨 지만, 그 다음 고난도 하나님의 긍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중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도 긍휼 때문입니다. 그 긍휼은 우리를 사망의 문 에서 시온의 문 으로 옮겨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망의 문 은 죽음에 임박한 위기를 의미하며, 죽음은 한 사람이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시온의 문 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예루살렘 문을 의미하며 하나님 의 백성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기쁜 곳입니다. 누구든지 고난이 자꾸 닥쳐와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메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온 인류가 영원토록 그 샘에서 마셔도 그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그에게 나와서 용기를 가지 고 또 이렇게 구하십시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2.고난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만 풍성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도 세세무궁토록 나타내 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 중 사망의 문 에서 시온의 문 으로 옮긴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 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도 맛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떤 한 면이라도 깊 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종종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더욱더 큰 고난까지 받을 자세가 되는 것을 봅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7절하). 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그 사실을 표현했습니다. 너히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4). 비록 고난을 받으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을 맛보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처럼 기도와 찬양을 함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4절) 만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선택권이 있다고 하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즉 고난이 없으나 영광도 없는 것과, 비록 때때로 의롭게 사는 것 때문에 고난이 있을 수 있으나 영광도 함께 있는 길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말입니다. 물론 주님을 위해 의롭게 산다고 항상 고난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악한 세상 가운데 주의 적들 사이에 사는 자로서 고난없이 의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을 맛보며 의롭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 으리라 (딤후3: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이를 위해 공의를 베푸십니다(9:15-18).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게서 자기 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바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 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15-18) 위 구절들은 얼핏 볼 때에 악담 같기도 하고 저주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의 대적들에 대하여 독한 말로써 정죄하고 있는 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런 깊은 원한에 쌓인 말들은 시편 중 여러 곳에 나와 있으나, 특히 시편 109편에서 가장 심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109편을 읽 으면 마치 저주 리스트를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멕코머스키 라는 한 교수는 시편에서 이런 저주스런 내용이 종종 나오는 이유를
첫째, 그 내용이 예언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제가 주님께서는 그 예언대로 성취하실 것이다.
둘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인데 하나님은 죄인이 의인을 무참하게 괴 롭히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뜻이다.
셋째. 의(義)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데서 아무리 불의를 행해도 말 리는 사람조차 많지 않아 마치 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의는 건재함을 나타내고 있다.
넷째, 우리의 가장 깊은 원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원수갚을 필요가 없다. 다섯째, 하나님이 이를 통해 공의로우심을 강력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사람의 고난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외면하지 않 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불의를 행하여 고통을 주는 그 대상에 대하여서도 내어버려 두지 않습니다. 기필코 공의롭게 불의한 자들을 다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 심판하신는가
1.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국가나 사회에 대해 심판하신다(15-17절) 열방 은 자기가 지은 죄의 함정 곧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윗을 공 격하여 고난을 준 모든 열방의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계획을 좌절시키 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자신들이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십니다. 앗수르가 그랬고, 바벨론, 로마 등이 역 시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 사악한 자들은 심판만 받지 않고 음부에까지 내 려가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이것만큼 큰 형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악인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형벌을 함께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나 현대나 국가와 사회가 큰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단이 하나님의 법도 를 무시하고 의인에게 고난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침해하려 할 때에 열방 과 악인 들이 받았던 똑같은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현제 권력 잡은 자들에게 대한 심각한 경고일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은 선의의 희생자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18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공의를 배푸실 때에, 그때는 열방이 멸망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하나님을 의로하고 사는 가난한 자들이 그대로 잊혀진 상태로 방치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받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의 삶 이 부요하게 된다는 보장까지 18절에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산상수훈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 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히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6:20-23).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고난을 갖다 주는 권력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이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약자 같고 가난하게 보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의 장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롬8:17)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3:22,23). 비록 고난받는 사람들이 지금은 약하게 보이나 모든 세계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관리할 때가 올 것입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현명하다면 참된 주인을 지금부터 알아보고 고난받는 가난한 자들, 곧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운명에 대하여 문의를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관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때때로 고난을 당해도 굽히지 않고 공의를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공의 로운 심판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산상수훈에 있는 대로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도 가고,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며,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대며 선으로써 악을 이기며 살아갑니다.다.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득세를 영원히 방관만 하지 않으신다.(9:19,20).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적에 심판을 받게 하 소서 여호와여 저히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19,20절). 여호와께서 일어나시면 최소한도 다음 몇 가지를 하실 것입니다.
첫째로,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대하게 됩니다. 심판주로서 하나님을 대할 자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6:15-17). 현대적인 무기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편에 서는 것만큼 무서울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편에 속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 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 었음이니로다 (사6:5). 과연 하나님이 일어서실 때 이길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이길 나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은 잠 시 동안 사람과 나라들이 여호와께 대적하고 있지만 이런 기도 내용이 시편 기자 때에도 이루어 졌으나 앞으로 더욱더 극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생으로 인간뿐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함게 하시지 않을 때 실로 지푸 라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존엄성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이 하나님 버금가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인격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는 동 물적인 차원에서밖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물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원래 인간이 창조 된 것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대상이 없으므로 그 인생은 목적 없이 흩나리는 낙옆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생이 인생뿐임을 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는 사람들은 이제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서 악인을 승리하지 못하게 하시며 인생뿐임을 알게 하실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공산권에 사는 이들도, 회교권에서 고난받는 개종자들고, 직장 내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함으로써 고난을 받는 이들도 모두 이제 고개를 들고 속히 오리라 고 약속하신 재림주이시며, 주 중의 주요 왕중의 왕 되시는 주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받는 교훈 고난은 언제 당하든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고난으로 연단된 사람에게도 매번 고난을 당할 때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 고난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도 어 렵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직접 고난을 당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 울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고난이 우리가 성숙케 되는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고난이라면 어렵게만 느켜집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중에도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체 지을 더 잘 아시므로 우리가 감당할 고난밖에 허락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또 고난 받는 동안에 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공의를 배푸실 것과, 악인을 영원히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는 보장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뚫고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부여하여, 우리가 그 고난을 통해 마땅히 받아야 할 교훈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 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저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 라 (벧전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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