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과 신앙 (시104:27-35롬8:18-25)
본문
자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요 인간은 그것을 잘관리함으로 더 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자연을 연구하고 학문을 체계화하여 창조주의 신묘막칙한 창조질서를 깨닫기 보다는 인류문명의 도구로 자연을 마구 파괴하여 창조질서가 깨어지고 인간이 결국피해를 당하고 지구자체가 파멸하고 말것인가 하는 두려움 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보면서 오늘 주일은 자연과학과 신앙의 사이를 건너 보면서 우리가 갖는 신앙의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들은 우리 주위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인 두세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에도 사람의 눈에 보이는 빛과 보이지 않는 적외선이나 혹은 자외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빛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음향에 있어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와 사람의 귀에는 들을 수 없는 우주에서 진동하는 소리가 있다. 이와같이 오관(오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전체 우주에서 지극히 적은 부분밖에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오관을 통하여서 깨닫고 세계를 보이는 세계라고 하며 영의 힘으로 깨닫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두 세계를 이해 하려면 영의 지식과 육신의 지식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잘 조화가 될때에 비로서 만족한 세상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런고로 보이는 세계를 대표하는 자연과학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표 하는 신앙은 언제나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종래의 과학자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학설이나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모조리 그럴수가 없다고 부정을 하며 자기의 학 설로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학자들도 적지 않았 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학설로서 증명할 수 없는 신앙생활같은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웃는 학자도 있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모든 경 험으로부터 법칙의 단편을 진리의 전부라고 하면서 보이는 세계에 붙 들리어 다른 방면의 위대하고도 보이지 아니하는 광대한 천지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실이 자연과학자의 가장 빠지기 쉬운 폐단이다.
저 유명한 만류인력의 법칙만 가지고 무엇이나 만능이었던 뉴톤 (Newton, lssac)의 법칙이라 할지라도 실상은 그의 위대한 것은 아니 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것은 지구표면상에서만이 성립될 수 있는 이론이었지 지구 표면이상의 세계에 까지 응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뉴 톤이 죽은후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에 의해서 정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래의 화학계에서는 원소가 90여개가 만들어졌다고 하였으나 근래 에와서는 100여개 이상의 원소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도 더 어떻게 변동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식이 좀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무엇이든 철저한 해결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보이지 아니한데서 믿음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아 나가지 않고서는 알길이 없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교훈에 의하면 우주는 언제든지 2개의 것으로 창조된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음과 양(남과 여)등. 이와같이 두요소로서 평균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빛을 알때 어두움을 알고 어두움을 경험할 때 강한 빛을 인식한 것처럼 2개 요소는 서로 상대성관계를 가지고 있 다고 하겠다.(Einstein) 그런고로 상대성을 가지고 서로 통하는 곳에 참된 조화와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대성은 곧 과학 과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상대적 조화를 가짐으로서 인류생활에 발전과 향상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우주의 참의미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과학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 연과학은 자연계의 물체를 정확한 수학적 원리를 체계있는 법칙으로서 세상만물에 대한 것을 경험하는 학문을 의미한다면 신앙은 사람자신을 공부하는 것이며 참된 생애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 을 찾아가는 진리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아니하는 정신의 세계에서 인생의 생애로 진리로 체험하는 힘이 곧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생의 내부를 말하는 것이며 신앙은 과학의 모체가 된다. 과학의 모체가 신앙이라 함은 수리공식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지식을 얻을 수가 없는 까닭이며 창조주의 비밀을 알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힘이 아니고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 계의 소식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져 볼 수도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신앙하는 생활을 비웃는 과학자들은 실로 불쌍하 다 아니할 수 없으며 과학의 진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자연과학이 뒤떨어진 이유는 모두 보이는 세계에서만 이 무엇을 얻어보려고 갈팡질팡하는 마치 캄캄한 밤중에 빛을 찾는 것 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유형과 무형 그리고 영과 육으 로서 구성된 상대성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므로 유형의 물체만을 경험하고 있는 고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세계의 문을 개방할만한 열쇠 를 갖지 못한 과학인 까닭이라 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세계의 위대한 발명가나 과학자들은 대부분 열렬한 신앙 을 가진 자나 또는 성경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신비의 세계를 개발하 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이면 '물'(H2O)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물에는 3개의 형상이 있다.
1)고체형상(어름)
2)액체형상(물)
3)기체형상(증기). 여기에서 누구나 취할 수 있는 것은 고체형상과 액체형상인 것이다. 만일 이같이 2개의 법칙만 알고 있 다면 구름이 생기는 이유와 비가 내리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반드시 보이지 아니하는 수증기로서 되는 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름과 눈(설), 안개, 비(우)로서 모든 형상을 알게 된다. 또 이 법칙을 응용하면 곧 증기기관을 만들수 있 고, 기차, 기선이 왕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이론으로 설명 할 수 없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반대할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생활로서 영계의 소식과 우리들이 체험할 수 있으며 동시 에 하나님의 계획하신 것을 깨달아 지상의 사물을 통찰하는데 큰 교훈 을 받을 수 있으며 영의 눈이 밝아지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를 알 게 될 수 있다. 고로 자연과학은 신앙의 입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참된 과학자가 되려면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다. 또하나의 실례를 들면 성서의 욥기 28:11을 보면 '냇물을 막아 흐르지 않게 하고 감추었던 것 을 빛으로 나타나게 하도다' 이와같이 신비의 세계를 운전하시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수력전기의 원리가 되는 지혜를 구약의 욥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성경에 이미 명시한바 있으니 보이는 세계에서만이 수 리적 공식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자연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 날 수도 없고 그의 신비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 미각국에 훌륭한 과학자나 문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예술가 그리고 실 업가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곧 성경의 말씀을 신앙하는 사람 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문명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개화되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은 자연의 창조는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진화로 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낸 세계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 고 신앙은 과학의 모체요, 과학은 신앙의 입문이요 자연계의 만물은 하나님의 산기록이다. 모든 자연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 창조의 목적이다. 뜻과 목적은 같아 그 가치를 이룬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이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달은 서쪽에 서 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별은 창공에 빛나고 구름은 흘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푸른 풀은 생명의 향기를 품 고 붉은 꽃은 아른다운 미를 나타내고 과실은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 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공중에 나는 새, 물속에 뛰노는 고기, 춤추는 나비, 노래하는 꾀꼬리 모두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에 기인한다. 잔듸밭의 한포기 작은 풀도 봄이 되면 싹이나고 여름이 되 면 잎이 피고 가을이 되면 씨가 영글어 자기 몸을 다한다. 모든 자연 이 창조질서의 순리대로 움직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다만 사람 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존재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거스리고 성령님 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자기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하였다. 참 옳은 말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갈망한다. 죄를 짓는 것도 행복의 일면 에 이끌리어 범하는 것이다. 자살도 고통을 피하려는 수단이다. 무서 운 고행을 하며 내몸을 일부러 괴롭게 하는 것도 그것을 통하여 더 좋 은 행복을 얻으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지능과 자유의지는 다른 동물 에게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본질이다. 이같이 행복을 갈구하는 본능은 인간이 타고난 본능에서 나온것이다.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 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어느 무엇가지고도 채울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좁으면서도 욕심의 한계는 끝이 없다. 왜 그런가 그 참만족을 채울 곳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가 말하기를 '사람의 욕망 은 헛됨에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을 만드신이가 되지 않을 일을 갈망 하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목이 갈하매 물이 있고, 주리매 밥이 있고, 눈이 있으매 빛이 있고, 귀가 있으매 소리가 있다. 쓸데없 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늙지말고, 병들지 말고, 죽지 말았으 면 하는 인간의 욕구는 반드시 그것이 원하는대로 성취될 곳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다.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은 하나님의 순 리를 찾아가야 행복과 만족이 있다. 이것이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우리가 당신에게서 쉴때까지는 우리마음이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인생욕구의 만족함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 게 만드시고 땅고 사람을 축복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창조질서를 파 괴하고 그 아름다움을 상실한체 병들고 찌들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8:22-23의 피조물의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 으므로 성령님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과 자연 그것은 고 통을 함께 걸머지고 함께 신음할 수 밖에 없는 연대성의 존재요 인간 은 주체요 자연은 객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본래 서로에게 의존하고 연결되어 있는 이 연대 성과 유기체적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본질이다. 오늘 시대가 경험하는 반 생명의 공해현실, 인류전체를 파괴의 위기 로 몰아넣는 창조질서의 파괴현실 또한 이러한 죄악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왜 이러한 현실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신앙으로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자연을 연구하고 학문을 체계화하여 창조주의 신묘막칙한 창조질서를 깨닫기 보다는 인류문명의 도구로 자연을 마구 파괴하여 창조질서가 깨어지고 인간이 결국피해를 당하고 지구자체가 파멸하고 말것인가 하는 두려움 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보면서 오늘 주일은 자연과학과 신앙의 사이를 건너 보면서 우리가 갖는 신앙의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들은 우리 주위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인 두세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에도 사람의 눈에 보이는 빛과 보이지 않는 적외선이나 혹은 자외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빛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음향에 있어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와 사람의 귀에는 들을 수 없는 우주에서 진동하는 소리가 있다. 이와같이 오관(오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전체 우주에서 지극히 적은 부분밖에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오관을 통하여서 깨닫고 세계를 보이는 세계라고 하며 영의 힘으로 깨닫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두 세계를 이해 하려면 영의 지식과 육신의 지식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잘 조화가 될때에 비로서 만족한 세상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런고로 보이는 세계를 대표하는 자연과학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표 하는 신앙은 언제나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종래의 과학자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학설이나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모조리 그럴수가 없다고 부정을 하며 자기의 학 설로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학자들도 적지 않았 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학설로서 증명할 수 없는 신앙생활같은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웃는 학자도 있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모든 경 험으로부터 법칙의 단편을 진리의 전부라고 하면서 보이는 세계에 붙 들리어 다른 방면의 위대하고도 보이지 아니하는 광대한 천지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실이 자연과학자의 가장 빠지기 쉬운 폐단이다.
저 유명한 만류인력의 법칙만 가지고 무엇이나 만능이었던 뉴톤 (Newton, lssac)의 법칙이라 할지라도 실상은 그의 위대한 것은 아니 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것은 지구표면상에서만이 성립될 수 있는 이론이었지 지구 표면이상의 세계에 까지 응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뉴 톤이 죽은후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에 의해서 정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래의 화학계에서는 원소가 90여개가 만들어졌다고 하였으나 근래 에와서는 100여개 이상의 원소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도 더 어떻게 변동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식이 좀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무엇이든 철저한 해결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보이지 아니한데서 믿음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아 나가지 않고서는 알길이 없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교훈에 의하면 우주는 언제든지 2개의 것으로 창조된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음과 양(남과 여)등. 이와같이 두요소로서 평균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빛을 알때 어두움을 알고 어두움을 경험할 때 강한 빛을 인식한 것처럼 2개 요소는 서로 상대성관계를 가지고 있 다고 하겠다.(Einstein) 그런고로 상대성을 가지고 서로 통하는 곳에 참된 조화와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대성은 곧 과학 과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상대적 조화를 가짐으로서 인류생활에 발전과 향상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우주의 참의미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과학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 연과학은 자연계의 물체를 정확한 수학적 원리를 체계있는 법칙으로서 세상만물에 대한 것을 경험하는 학문을 의미한다면 신앙은 사람자신을 공부하는 것이며 참된 생애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 을 찾아가는 진리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아니하는 정신의 세계에서 인생의 생애로 진리로 체험하는 힘이 곧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생의 내부를 말하는 것이며 신앙은 과학의 모체가 된다. 과학의 모체가 신앙이라 함은 수리공식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지식을 얻을 수가 없는 까닭이며 창조주의 비밀을 알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힘이 아니고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 계의 소식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져 볼 수도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신앙하는 생활을 비웃는 과학자들은 실로 불쌍하 다 아니할 수 없으며 과학의 진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자연과학이 뒤떨어진 이유는 모두 보이는 세계에서만 이 무엇을 얻어보려고 갈팡질팡하는 마치 캄캄한 밤중에 빛을 찾는 것 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유형과 무형 그리고 영과 육으 로서 구성된 상대성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므로 유형의 물체만을 경험하고 있는 고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세계의 문을 개방할만한 열쇠 를 갖지 못한 과학인 까닭이라 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세계의 위대한 발명가나 과학자들은 대부분 열렬한 신앙 을 가진 자나 또는 성경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신비의 세계를 개발하 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이면 '물'(H2O)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물에는 3개의 형상이 있다.
1)고체형상(어름)
2)액체형상(물)
3)기체형상(증기). 여기에서 누구나 취할 수 있는 것은 고체형상과 액체형상인 것이다. 만일 이같이 2개의 법칙만 알고 있 다면 구름이 생기는 이유와 비가 내리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반드시 보이지 아니하는 수증기로서 되는 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름과 눈(설), 안개, 비(우)로서 모든 형상을 알게 된다. 또 이 법칙을 응용하면 곧 증기기관을 만들수 있 고, 기차, 기선이 왕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이론으로 설명 할 수 없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반대할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생활로서 영계의 소식과 우리들이 체험할 수 있으며 동시 에 하나님의 계획하신 것을 깨달아 지상의 사물을 통찰하는데 큰 교훈 을 받을 수 있으며 영의 눈이 밝아지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를 알 게 될 수 있다. 고로 자연과학은 신앙의 입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참된 과학자가 되려면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다. 또하나의 실례를 들면 성서의 욥기 28:11을 보면 '냇물을 막아 흐르지 않게 하고 감추었던 것 을 빛으로 나타나게 하도다' 이와같이 신비의 세계를 운전하시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수력전기의 원리가 되는 지혜를 구약의 욥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성경에 이미 명시한바 있으니 보이는 세계에서만이 수 리적 공식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자연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 날 수도 없고 그의 신비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 미각국에 훌륭한 과학자나 문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예술가 그리고 실 업가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곧 성경의 말씀을 신앙하는 사람 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문명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개화되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은 자연의 창조는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진화로 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낸 세계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 고 신앙은 과학의 모체요, 과학은 신앙의 입문이요 자연계의 만물은 하나님의 산기록이다. 모든 자연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 창조의 목적이다. 뜻과 목적은 같아 그 가치를 이룬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이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달은 서쪽에 서 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별은 창공에 빛나고 구름은 흘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푸른 풀은 생명의 향기를 품 고 붉은 꽃은 아른다운 미를 나타내고 과실은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 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공중에 나는 새, 물속에 뛰노는 고기, 춤추는 나비, 노래하는 꾀꼬리 모두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에 기인한다. 잔듸밭의 한포기 작은 풀도 봄이 되면 싹이나고 여름이 되 면 잎이 피고 가을이 되면 씨가 영글어 자기 몸을 다한다. 모든 자연 이 창조질서의 순리대로 움직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다만 사람 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존재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거스리고 성령님 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자기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하였다. 참 옳은 말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갈망한다. 죄를 짓는 것도 행복의 일면 에 이끌리어 범하는 것이다. 자살도 고통을 피하려는 수단이다. 무서 운 고행을 하며 내몸을 일부러 괴롭게 하는 것도 그것을 통하여 더 좋 은 행복을 얻으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지능과 자유의지는 다른 동물 에게는 없고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본질이다. 이같이 행복을 갈구하는 본능은 인간이 타고난 본능에서 나온것이다.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 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어느 무엇가지고도 채울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좁으면서도 욕심의 한계는 끝이 없다. 왜 그런가 그 참만족을 채울 곳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가 말하기를 '사람의 욕망 은 헛됨에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을 만드신이가 되지 않을 일을 갈망 하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목이 갈하매 물이 있고, 주리매 밥이 있고, 눈이 있으매 빛이 있고, 귀가 있으매 소리가 있다. 쓸데없 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늙지말고, 병들지 말고, 죽지 말았으 면 하는 인간의 욕구는 반드시 그것이 원하는대로 성취될 곳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다.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은 하나님의 순 리를 찾아가야 행복과 만족이 있다. 이것이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우리가 당신에게서 쉴때까지는 우리마음이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인생욕구의 만족함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 게 만드시고 땅고 사람을 축복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창조질서를 파 괴하고 그 아름다움을 상실한체 병들고 찌들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8:22-23의 피조물의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 으므로 성령님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과 자연 그것은 고 통을 함께 걸머지고 함께 신음할 수 밖에 없는 연대성의 존재요 인간 은 주체요 자연은 객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본래 서로에게 의존하고 연결되어 있는 이 연대 성과 유기체적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본질이다. 오늘 시대가 경험하는 반 생명의 공해현실, 인류전체를 파괴의 위기 로 몰아넣는 창조질서의 파괴현실 또한 이러한 죄악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왜 이러한 현실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신앙으로 고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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