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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위대한 기적 (눅17:11-19)

본문

우리가 잘 아는 열 명의 문둥병자 기사가 본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문둥병의 치유보다 위대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기적은 흔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에 기적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 자가 예수님을 만나 깨끗하게 치료를 받는 것도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열 명 모두에게 나타났습니다. 열 사람 모두 주님의 보편 은총에 참여하였습니다 . 다시 말하면 이 사건에서는 열 명의 문둥병자가 치료받은 일을 기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진정한 기적은 무엇입니까 흔하지 않게 일어났던 기적, 그것은 치유의 사건이 아니라 감사의 사건입니다. 감사가 더욱 위대한 기적이었습니다. 치료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서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성경은 감사 그 자체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감사했 던 그 독특한 상황과 감사의 성격을 중요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우선적 결단이다
1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을 따라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제사장 에게 그 몸을 보이러 가던 도중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하였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감사를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신 그분의 은혜를 당장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혼자 가던 길을 되돌아왔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그 다음에 감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사라고 생각 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들을 치료하시면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한 것은 정결 의례상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단순한 종교 기능만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정치 면에서도 지 도자였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일반 사회에서 살 권리가 없었습니다. 모두 성 밖으로 쫓겨나 어두운 동굴 등지에서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된,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사회로 돌아와 다른 사람과 어울려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몸이 깨끗해졌음을 선언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자들의 일생 소원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깨끗함을 얻은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자신의 몸이 정상이 되었음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 감사를 우선으로 여겨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태도로 감사를 첫번째 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를 하게 되면 첫 열매를 주께 바쳐야 합니다.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흠 없고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감사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삶을 가 장 중요시해야 합니다. 예수께 돌아온 문둥병자는 감사하다는 마음 이 들자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성령님의 감동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한 그 순간, 지체하지 아니하고 즉시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 문둥병자의 소중한 마음을 본받 아야겠습니다.
감사는 겸손한 결단이다
겸손하지 않고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이 문둥병자는 큰 소리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혹시 당신은 이웃에 게 도움을 주었는데, 그가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모른 척하고 살 아가는 모습을 보며 심히 속상했던 기억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에 게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사는 이들은 누구 에게 도움을 받고 산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하는 자존심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에게도 자존심의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 감사했던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16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8절).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천시하고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라고 무시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은혜를 은혜로 알 수 있는 안목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의 처 지가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다면 이방인인 사실이 그에게 축복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자존심, 병든 자존심 때문에 은혜를 받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 를 우리 주위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설교가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은혜에 반응하는 모습은 비루한 사람, 평범한 사람, 고상한 사람, 이 세 부류로 나뉜다고 했 습니다.
첫째, 비루한 사람이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고,
둘째, 평범 사람이란 은혜를 망각하는 사람,
셋째, 고상한 사람은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속상하여, 그 열등감과 자 존심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 것을 당연한 일로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도운 사람을 비방하는 못된 심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마침내 이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받은 은혜를 즉각적으로 감사하기 원했던 사람,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지기 전에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한 결단입니다. 겸손은 그가 감사했다는 사실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미덕입니다. 당신이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혹시 의식의 밑바닥에 이 치사한 자존 심의 뿌리가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감사는 고독한 결단이다
한 문화 비평가는 오늘의 문화를 군중 심리의 문화라고 지적했 습니다. 개성이 없고 소신이 없고 확신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방송 매체의 영향일 것입니다. 자기의 삶이 없습니다. 남이 살아가는 대로 삽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잘못되는 가장 큰 원인도 나쁜 친구 들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는 데 있습니다. 본문의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감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께 돌아가자면 시간 낭비도 될 뿐더러 빈 손으로 갈 수도 없을 테고 , 또 우리가 나을 때가 되어서 회복된 것인지 몰라라고 합의를 보았던 모양입니다. 감사하지 않은 아홉 명이 볼 때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자기만 알 고 물질 위주인 사회에서 이 사람의 감사는 전혀 의미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자기 삶의 중요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는 홀로 자기가 가야 할 삶을 살기로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이 안 하는 일이라고 해서 같이 게으름 피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 생활이 형편없으니까 덩달아 대충대충 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 을 요구하시는가가 더 중요해야 합니다. 내 신앙의 모습이 어 떠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둥병자는 자기의 삶이 확고했던 사람이고 자기 삶에 성실했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고 물으셨을 때 저 같으면 이런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 녀석들은 감사도 잊어버리고 저희들끼리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성실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자기의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 눈치 보면서 체면 때문에 이런 저런 행동을 합니다. 신앙 생활도 체면 유지 용으로 겨우 교회만 다닙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생깁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삶이 새로워졌습니다. 이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행동이 지나치게 광신적이라고 평가받을까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점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지하게 설 수 있느냐입니다. 본문의 이방인 문둥병자는 자기가 해야 할 도리를 성실히 수행하였 습니다. 이것은 고독한 결단이었습니다. 다른 아홉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나 혼자 과단성 있게 행동하였습니다. 초대 교부(敎父) 가운데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헌신은 대단히 철저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와서 크 리소스톰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네. 온 세상이 그대 를 저버릴 걸세. 이때 크리소스톰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한다고 좋아. 그러면 내가 온 세상을 반 대하기로 하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롬 12:
2).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 앞에 신실한 자세를 취하는 고독한 결단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둥병자의 감사는 평범한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감사는 예배의 결단이다
문둥병자의 감사는 예배라는 결단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6절 ). 유대인들이 엎드리는 것은 인사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는 감사를 예배로 표시했습니다. 누군가가 예배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피조물의 응답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이 worship의 어근은 worth, 즉 가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광경을 묘사한 말씀 가운 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 오니(worthy)(계 4:11).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 예배입니다. 그 응답은 바로 감사이고, 그 감사가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의 초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가장 잘못된 예배는 설교 들으러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초점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유익을 얻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 은 예배받으시는 그분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 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문둥병자가 표현한 것은 자신의 삶의 중 심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근본 차이를 묻자, 그는 감사라고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처럼 감사 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서 뿐만 아니라 비 바람 치는 어두운 하늘 아래서도 감사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 삶의 주관자임을 인정하고 긍정하면서 영광과 찬미를 하나님 께 돌려 드리고 있습니까 미국의 체스픽 베이라는 강에서 수영을 하다 전신 불구가 된 조니 에릭슨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조니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신체 기관은 입술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간증이 미국 사람들 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온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조니 가 하나님, 제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 습니까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그 마음 속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녀는 움직일 수 있는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조니는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 작했습니다. 수백 장, 수천 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녀가 그 린 그림에는 어느 그림에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떤 사람이 조니에게 이 비극을 통해서 무엇을 감사할 수 있느냐 고 물었습니다. 조니는 이 비극을 통해서 감사의 의미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더욱 하나님 앞에 소중히 여겨야 할 자기 생명과 삶의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입술로 자기의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그녀는 누 구보다도 알차고 보람 있게 살고 있습니다. 이는 예배를 통해 나 타난 아름다운 결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의 결과
이 문둥병자의 감사는 다음 두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로, 문둥병자의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18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신의 삶의 목적이요 이 유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에서 유감 없이 고백되어야 할 고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는 진실로 삶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요 본분인 주(主) 앞에 영광을 돌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멋지게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과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삶의 초점이 자기 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원천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변의 잔잔하고 소중한 행복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둘째로, 문둥병자의 감사는 구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 시더라(19절). 그는 육체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갖게 되어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감사는 더 위대한 행복을 창조했습니다. 감사는 더 놀라운 복을 누리게 했습니다. 주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받은 자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한 이 사람의 감사의 모범 을 우리도 따라야겠습니다. 저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무척 좋아합니다. 오 하나님,저를 축복하심을 감사합니다.그러나 저에게 어떤 축복보다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더욱 주시옵소서. 많은 복을 받고도 마음에 짜증과 불평과 불만뿐이라면 그가 받은 복은 모두 헛것입니다. 감사는 진정한 축복의 열쇠입니다. 감사는 더욱 위대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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