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1) (행10:34-43)
본문
1. 사역 사역을 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체로 기존의 번역들(공인역)이 잘 되어 있어서 사역을 하는 대신 에(시간에 쫓기거나 원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등) 본문을 여러 번 읽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또는 여러 번역들을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확성을 기하는 의미에서 사역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여다. " 나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며, 35 어떤 민족에 속해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행실을 보이는 사람은 합당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파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말씀은 이 예수가 만민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37 여러분은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땅에 걸쳐 일어난 사건, 38 즉 하나님께서 성령님과 능력으로 기름 붓듯 하신 나사렛 예수를 알 것입니다. 그는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39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맨 후 죽이기까지 했지만, 40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사흘만에 다시 살리시고 그를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41
그런데 모든 백성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증인들, 즉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그와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42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하나님께 선택된 자라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명하셨습니다. 43 모든 예언자들도 이 예수께 대하여 말하기를,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번역에 있어서의 문제점 앞에서 보인 사역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하기에 밝히려고 한다. 그 중에는 문자적인 번역을 하면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바 꾼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새롭게 번역한 것도 있다.
1) 지시대명사 [후토스]의 해석 문제 본문에는 네 번의 근칭 지시대명사인 [후토스]와 그 변화 형태들이 쓰여 지고 있다. 36절과 42절에는 가 나타나고, 40절에는 대격인 [투톤]이 나타나며, 43절에는 여격인 [투토]가 보인다. 다른 번역에서는 i) '이 사람' ⅱ)'이 분 ⅲ)'이 예수'로 번역되고 있는데 일관성은 없는 편이다. 필자는 '이 예수'로 통일하였다. 그 이유는
I)의 경우 문자적인 뜻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개어로서 이방인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고, ⅱ)의 경우 이방인 청중들 앞에서 피소개인을 높이는 것은 오히려 심리적으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거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낮추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이름 자체는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대명사 대신에 명사를 반복해서 쓰는 것이 우리말 어법에 어울리고, 설교의 분위기에도 맞는다고 생각해 ⅲ)과 같이 풀어쓰게 되었다. 성서를 번역할 때는 상황적인 면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2) 강조의 [카이]문제 39절 하반절에 보면 [혼 카이 아네일란]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접속사로 쓰인 것이 아니라 [아네일란]이라는 동사를 강조하여 수식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기까지'(밑줄 강조)라고 번역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철저한 거부 행위가 다음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과 대조되면서 더욱 부각되는 효과가 있다.
3) 주어의 문제 42절의 주어는 무엇인가 42절은 주어가 [파렝게일렌]이라는 동사의 인칭 꼬리에 있는 3인칭 단수의 대명사로만 나타나 있다. 그래서 3인칭 단수인 '그'가 예수인지 하나님인지 혼동하기가 쉽다. 공동번역이나 흠정역 KJV 은 '하나님'으로 번역했지만 다른 것들(개역, 표준새번역,RSV)은 '예수님'으로 했든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대명사 'he'로 쓰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주어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명령의 내용 중 들어 있는 [후토스] 와 어울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주어로 해야 할 것이다.
4) 예언자에 대한 이해 문제 43절의 [마르투르신]을 우리말 번역에서는 모두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신약 시대 이전의 구약성서 예언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연스레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현재형 동사를 과거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언자'를 단순히 구약의 예언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예언자가 신약 예언자 또는 기독교 예언자(Christian prophets)를 의미함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자매편인 누가 복음에서 예언자들을 보내실 것이라고 예고하셨고, 사도행전 후반부 쪽으로 기독교 예언자들을 다수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예언자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로 명시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구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유대적인 표현 방식으로는 '성령님에 충만하여'라는 표현이 '예언자가 되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 뒤이어 이방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임한 첫번째 성령님 강림 사건(2:1-4)과 같은 비 중으로 이방인에게 임한 두번째 성령님 강림 사건(10:44)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하여 성령님을 특히 강조하고 있음 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에 충만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 여 활동하고 있고, 특히 이방인 선교라는 사도행전의 주요 과제를 다루기 에 앞서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적절하고 자연스럽다. 이처 럼 사도행전의 이중적 구조(유대인과 이방인 선교)와 성령님을 강조하는 특 색(기독교 예언자들을 전제)으로 하여 여기에서의 예언자를 기독교 예언자 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투르신]을 현재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3. 본문 및 문법의 문제 본문 비평이나 문법 비평은 일반 목회자에게 곡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본문의 특징이나 문제를 아는 것이 설교의 토대를 단단하게 하고 정확성을 추구하도록 할 것이라는 점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1) 10:36-38 문법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A Textual Com 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에 따르면 10:36-38은 i)접속사의 부 재 ⅱ)[아륵사메노스]의 어색함 ⅲ) 와를 동격으로 부자연스럽게 배치한 것 때문에 많은 문법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주격인를 문법적으로 맞게 대격인으로 수정한 사본이 있고(P45 L P Textus Receptus등),주격으로 그냥 두되 접속사 [가르] 를 첨가하여 로 고친 사본도 등장한다(A Dite,p 등),이렇게 부자연스런 문법의 문장이 i)아람어 원문에서 번역되어서인지 ⅱ)서로 다른 두 문장이 세련되지 못하게 하나로 합쳐져서 그런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2) 10:36 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원어에 두 가지 사본의 읽기가 나타난다. [톤 로곤 혼] 과 관계대명사가 없는 [톤 로곤]이 그것이다. 서기관이 필사할 때 의 끝 음절 ultima 인 이 과 형태적으로 같기 때문에 반복해서 썼던지 dittography 빠뜨리고 썼던지 haplography 했을 것이란 설명이 가능하다. 또 어떤 학자는 아람어에 관용적 표현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어떤 설명이 맞는다 해도 이 있는 경우가 문법적으로 어려운 읽기 difficult reading 이며 역으로 바뀐 경우를 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있는 본문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뜻에는 차이가 없으나 사도행전 저자의 문체나 원본(아람어 등)의 존재 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 하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3)10:40에 '삼일만에'라고 번역된 원어는 [엔 테 트리테 헤메라]이다. 원어에는 이 구절 앞에 [에게이렌] (일으키셨다/다시 살리셨다)이 나오기 때문에 ultima 음절의-을 반복 dittography 해서 전치사 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설명을 한다(P74 2 A B D2 33등 사본 지지함). 그러나 전치사 이 없는 사본도 나타나는데 , 그것은다음에 전치사 의 탈락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티마음절의-으로 인하여), 세번째로 전치사 대신에 [메타]를 쓴 사본이 있다. 즉 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i)마27:63 과 조화시키려고 그렇게 되었는지 ⅱ)라틴어를 반영 post teritium diem 하는 베자 사본 codex Bezae 의 특이한 표현 방식에 의한 것인지 모른다(마16:21;17:23 참조). 그러나 복음서 전체의 기록과 조화되 고 완전한 형태를 갖춘(즉 전치사 이 있는) 본문을 택하게 되었다.
4) 10:41에 "함께 먹고 마신"이란 구절이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사십 일 동안 동행했다 '는 표현이 첨 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본의 지지 수도 약하고 서방 본문 Western text 에 속하는 사본들의 일반적 경향인 '무리 없는 첨가 내지 조화의 시도'라고 보아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5) 마지막으로 10:42에 지시대명사 [후토스]가 인칭대명사 [아우토스]로 바뀐 사본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까도 가 예수를 업신여기는 태도를 묵시적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로 바뀐 것으로 본다. 만약에 가 원래의 본문이라면 그것이 로 바뀌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원래 보다는 가 쓰였을 것으로 본다.
4. 본문의 문맥 및 구조
1) 문맥 사도행전은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선교(1-12장)와 바울 중심의 이방인 선 교(13-28장)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방인에 대한 선교 자체는 이 미 이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빌립의 선교(8:26-39)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 의 고넬료 집안에 대한 선교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본문은 바울 에 의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를 이끌어 주고 있는 기능을 하며, 바울의 회상(9장)과 선교(13장 이후)사이에 놓여져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관한 한 서로 밀접한 연대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 인 베드로가 바울에 앞서 이방인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묘한 섭리에 속한다고 하겠다. 본문(10:34-43)은 베드로와 고넬료에 얽힌 전체 이야기(10:1-11:18)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보다 광범한 문맥(the larger context) 뿐만 아니라 인접한 문맥(the immediate context)은 더욱 중요하다. 인접한 문맥을 보면 먼저 고넬료에 대한 소개와 그가 본 환상(10:1-8)이 소개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환상이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고자 하나(10:9-16), 고넬료가 보낸 사자들 messengers 을 만나게 되고서야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10:17-23a), 고넬료를 방문하기 위하여 가이사랴로 가게 되고 거기서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정성껏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10:23b-33). 본문(10:34-43)에서 베드로는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God-fearers 에 대한 차별없는 구원을 선포한다. 베드로의 설교에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강림하게 되고, 그들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10:44-48). 이방인들의 구원을 용납하지 못하고 탐탁치 않게 여기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Jewish Christians 에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자신의 행위를 변명한다(11:1-18). 이처럼 본문은 고넬료 사건을 다룬 전체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 본문은 사도행전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들어 있다.
2) 본문의 구조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러 설교들은 어휘나 문체에 있어서 설교자(베드로나 바울 등)의 특색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 저자의 문체로 단일하게 쓰여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공통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의 설교는 i) 새로운 시대의 선언, ⅱ)예수의 생애 내지 사역의 진술, ⅲ)증거 본문으로서의 구약성서의 인용, ⅳ)회개에의 촉구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본문도 ⅱ에 해당하는 케리그마(36-41절)와 ⅲ에 해당되는 성서적 증거(43a)및 ⅳ에 해당되는 회개 촉구(42,43b)를 가지고 있다. 또한 본문은 바울의 설교와도 비슷한데, 특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13:16-41)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도 본문의 베드로 설교의 특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단순한 설교의 구조를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된다. 10:34-35 설교의 서론(주제의 제시) 10:36-41 설교의 본론(케리그마 선포) 10:42-43 설교의 결론(증언의 촉구) 본문의 설교는 이례적으로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설교의 본론으로서 케리그마의 선포는 39절에 "우리는 … 모든 일에 증인입니다"라는 증언 부분이 삽입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케리그마의 핵심을 잘 포함하 고 있다. 결론부에서 '우리'와 '모든 예언자들'이 믿음과 죄사함에 대하여 증거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에로 결단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백성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증인들, 즉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그와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42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하나님께 선택된 자라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명하셨습니다. 43 모든 예언자들도 이 예수께 대하여 말하기를,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번역에 있어서의 문제점 앞에서 보인 사역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하기에 밝히려고 한다. 그 중에는 문자적인 번역을 하면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바 꾼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새롭게 번역한 것도 있다.
1) 지시대명사 [후토스]의 해석 문제 본문에는 네 번의 근칭 지시대명사인 [후토스]와 그 변화 형태들이 쓰여 지고 있다. 36절과 42절에는 가 나타나고, 40절에는 대격인 [투톤]이 나타나며, 43절에는 여격인 [투토]가 보인다. 다른 번역에서는 i) '이 사람' ⅱ)'이 분 ⅲ)'이 예수'로 번역되고 있는데 일관성은 없는 편이다. 필자는 '이 예수'로 통일하였다. 그 이유는
I)의 경우 문자적인 뜻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개어로서 이방인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고, ⅱ)의 경우 이방인 청중들 앞에서 피소개인을 높이는 것은 오히려 심리적으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거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낮추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이름 자체는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대명사 대신에 명사를 반복해서 쓰는 것이 우리말 어법에 어울리고, 설교의 분위기에도 맞는다고 생각해 ⅲ)과 같이 풀어쓰게 되었다. 성서를 번역할 때는 상황적인 면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2) 강조의 [카이]문제 39절 하반절에 보면 [혼 카이 아네일란]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접속사로 쓰인 것이 아니라 [아네일란]이라는 동사를 강조하여 수식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기까지'(밑줄 강조)라고 번역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철저한 거부 행위가 다음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과 대조되면서 더욱 부각되는 효과가 있다.
3) 주어의 문제 42절의 주어는 무엇인가 42절은 주어가 [파렝게일렌]이라는 동사의 인칭 꼬리에 있는 3인칭 단수의 대명사로만 나타나 있다. 그래서 3인칭 단수인 '그'가 예수인지 하나님인지 혼동하기가 쉽다. 공동번역이나 흠정역 KJV 은 '하나님'으로 번역했지만 다른 것들(개역, 표준새번역,RSV)은 '예수님'으로 했든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대명사 'he'로 쓰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주어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명령의 내용 중 들어 있는 [후토스] 와 어울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주어로 해야 할 것이다.
4) 예언자에 대한 이해 문제 43절의 [마르투르신]을 우리말 번역에서는 모두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신약 시대 이전의 구약성서 예언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연스레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현재형 동사를 과거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언자'를 단순히 구약의 예언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예언자가 신약 예언자 또는 기독교 예언자(Christian prophets)를 의미함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자매편인 누가 복음에서 예언자들을 보내실 것이라고 예고하셨고, 사도행전 후반부 쪽으로 기독교 예언자들을 다수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예언자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로 명시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구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유대적인 표현 방식으로는 '성령님에 충만하여'라는 표현이 '예언자가 되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 뒤이어 이방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임한 첫번째 성령님 강림 사건(2:1-4)과 같은 비 중으로 이방인에게 임한 두번째 성령님 강림 사건(10:44)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하여 성령님을 특히 강조하고 있음 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에 충만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 여 활동하고 있고, 특히 이방인 선교라는 사도행전의 주요 과제를 다루기 에 앞서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적절하고 자연스럽다. 이처 럼 사도행전의 이중적 구조(유대인과 이방인 선교)와 성령님을 강조하는 특 색(기독교 예언자들을 전제)으로 하여 여기에서의 예언자를 기독교 예언자 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투르신]을 현재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3. 본문 및 문법의 문제 본문 비평이나 문법 비평은 일반 목회자에게 곡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본문의 특징이나 문제를 아는 것이 설교의 토대를 단단하게 하고 정확성을 추구하도록 할 것이라는 점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1) 10:36-38 문법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A Textual Com 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에 따르면 10:36-38은 i)접속사의 부 재 ⅱ)[아륵사메노스]의 어색함 ⅲ) 와를 동격으로 부자연스럽게 배치한 것 때문에 많은 문법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주격인를 문법적으로 맞게 대격인으로 수정한 사본이 있고(P45 L P Textus Receptus등),주격으로 그냥 두되 접속사 [가르] 를 첨가하여 로 고친 사본도 등장한다(A Dite,p 등),이렇게 부자연스런 문법의 문장이 i)아람어 원문에서 번역되어서인지 ⅱ)서로 다른 두 문장이 세련되지 못하게 하나로 합쳐져서 그런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2) 10:36 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원어에 두 가지 사본의 읽기가 나타난다. [톤 로곤 혼] 과 관계대명사가 없는 [톤 로곤]이 그것이다. 서기관이 필사할 때 의 끝 음절 ultima 인 이 과 형태적으로 같기 때문에 반복해서 썼던지 dittography 빠뜨리고 썼던지 haplography 했을 것이란 설명이 가능하다. 또 어떤 학자는 아람어에 관용적 표현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어떤 설명이 맞는다 해도 이 있는 경우가 문법적으로 어려운 읽기 difficult reading 이며 역으로 바뀐 경우를 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있는 본문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뜻에는 차이가 없으나 사도행전 저자의 문체나 원본(아람어 등)의 존재 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 하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3)10:40에 '삼일만에'라고 번역된 원어는 [엔 테 트리테 헤메라]이다. 원어에는 이 구절 앞에 [에게이렌] (일으키셨다/다시 살리셨다)이 나오기 때문에 ultima 음절의-을 반복 dittography 해서 전치사 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설명을 한다(P74 2 A B D2 33등 사본 지지함). 그러나 전치사 이 없는 사본도 나타나는데 , 그것은다음에 전치사 의 탈락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티마음절의-으로 인하여), 세번째로 전치사 대신에 [메타]를 쓴 사본이 있다. 즉 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i)마27:63 과 조화시키려고 그렇게 되었는지 ⅱ)라틴어를 반영 post teritium diem 하는 베자 사본 codex Bezae 의 특이한 표현 방식에 의한 것인지 모른다(마16:21;17:23 참조). 그러나 복음서 전체의 기록과 조화되 고 완전한 형태를 갖춘(즉 전치사 이 있는) 본문을 택하게 되었다.
4) 10:41에 "함께 먹고 마신"이란 구절이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사십 일 동안 동행했다 '는 표현이 첨 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본의 지지 수도 약하고 서방 본문 Western text 에 속하는 사본들의 일반적 경향인 '무리 없는 첨가 내지 조화의 시도'라고 보아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5) 마지막으로 10:42에 지시대명사 [후토스]가 인칭대명사 [아우토스]로 바뀐 사본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까도 가 예수를 업신여기는 태도를 묵시적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로 바뀐 것으로 본다. 만약에 가 원래의 본문이라면 그것이 로 바뀌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원래 보다는 가 쓰였을 것으로 본다.
4. 본문의 문맥 및 구조
1) 문맥 사도행전은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선교(1-12장)와 바울 중심의 이방인 선 교(13-28장)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방인에 대한 선교 자체는 이 미 이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빌립의 선교(8:26-39)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 의 고넬료 집안에 대한 선교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본문은 바울 에 의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를 이끌어 주고 있는 기능을 하며, 바울의 회상(9장)과 선교(13장 이후)사이에 놓여져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관한 한 서로 밀접한 연대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 인 베드로가 바울에 앞서 이방인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묘한 섭리에 속한다고 하겠다. 본문(10:34-43)은 베드로와 고넬료에 얽힌 전체 이야기(10:1-11:18)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보다 광범한 문맥(the larger context) 뿐만 아니라 인접한 문맥(the immediate context)은 더욱 중요하다. 인접한 문맥을 보면 먼저 고넬료에 대한 소개와 그가 본 환상(10:1-8)이 소개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환상이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고자 하나(10:9-16), 고넬료가 보낸 사자들 messengers 을 만나게 되고서야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10:17-23a), 고넬료를 방문하기 위하여 가이사랴로 가게 되고 거기서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정성껏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10:23b-33). 본문(10:34-43)에서 베드로는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God-fearers 에 대한 차별없는 구원을 선포한다. 베드로의 설교에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강림하게 되고, 그들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10:44-48). 이방인들의 구원을 용납하지 못하고 탐탁치 않게 여기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Jewish Christians 에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자신의 행위를 변명한다(11:1-18). 이처럼 본문은 고넬료 사건을 다룬 전체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 본문은 사도행전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들어 있다.
2) 본문의 구조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러 설교들은 어휘나 문체에 있어서 설교자(베드로나 바울 등)의 특색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 저자의 문체로 단일하게 쓰여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공통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의 설교는 i) 새로운 시대의 선언, ⅱ)예수의 생애 내지 사역의 진술, ⅲ)증거 본문으로서의 구약성서의 인용, ⅳ)회개에의 촉구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본문도 ⅱ에 해당하는 케리그마(36-41절)와 ⅲ에 해당되는 성서적 증거(43a)및 ⅳ에 해당되는 회개 촉구(42,43b)를 가지고 있다. 또한 본문은 바울의 설교와도 비슷한데, 특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13:16-41)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도 본문의 베드로 설교의 특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단순한 설교의 구조를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된다. 10:34-35 설교의 서론(주제의 제시) 10:36-41 설교의 본론(케리그마 선포) 10:42-43 설교의 결론(증언의 촉구) 본문의 설교는 이례적으로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설교의 본론으로서 케리그마의 선포는 39절에 "우리는 … 모든 일에 증인입니다"라는 증언 부분이 삽입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케리그마의 핵심을 잘 포함하 고 있다. 결론부에서 '우리'와 '모든 예언자들'이 믿음과 죄사함에 대하여 증거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에로 결단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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