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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둘로의고소와 바울의 변증 (행24:1-27)

본문

얼마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소개된 김밥 할머니가 있었다. 내용인즉 충남대학교를 위하여 거금 50억원을 기탁한 아름다운 사건이 있었다. 한 평생 먹을것 제되로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신을것 제되로 갖추지 못하면서 모은 돈 50억원이었다.
그런데 선듯 학교육영사업을 위하여 헌납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일들을 서스럼 없이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은 세상이다. 착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그렇치 못한 사람들도 많다.

1,총독에대한 아부 "
본문 1절에 더둘로라는 말 잘하는 변호사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보아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유대의 장로들은 바울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방인 변사 더둘로 를 많은 돈으로 매수하였던 것이다. 이 이방인 더둘로가 총독 앞에서 아첨하고 있는 말을 들어 보자. 3절에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 입어 태평을 누리고."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벨릭스는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A.D.52-58 년간 통치한 총독으로 그의 원래의 출신은 노예였으며 악질적이고 탐욕스러웠다고 한다. 그런 벨릭스 앞에서 당치도 않은 말로 아첨을 떨고 있다. 26절에도 보면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이야기 하더라" 죄수에게도 돈만 바라는 악한 총독이었다.
그런데도 변사 더둘로는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있다고 아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역사가들의 결론은총독 벨릭스가 평화의 수호다가 아니라 불화의 조성자라고 했다. 이는 유대교의 장로급들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가 얼마나 정치와 유착이 되었으며 또한 얼마나 부패했나를 증명해주고도 남는다. 교권주의는 언제나 세속의 권위 아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보여줌이다. 3절에 계속해서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이는 사람이 신에게 올리는 축문과 같은 성격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올려야할 감사의 기도를 이방인인 폭군에게 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가 그리고 성도가 선정을 베푸는 정치인들에게조차 등을 돌리고 감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존경할 사람이 많다. 감사해야할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의 이익을 얻으려고 어느 특정한 정치 세력을 이용하거나 아첨을 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 교회가 세속의 권력을 의지하게 되면 세속의 권력이 불의를 행해도 그것을 지적할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은 이 변사인 더둘로의 못난 행동이다. 오늘 더둘로가 총독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임에 틀림 없다. 물론 많은 학문이 그를 뒷바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 많은 학문이며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쒸우는데 쓰지 말고 떳떳한 명분을 위하여 사용을 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겠나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교인들중에도 정치인들도 많고, 의사도 많고, 기업인들도 많고, 사업가들도 많이 있어서 주의 이름으로 귀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 반면에 불과 얼마 않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둘로처럼 자기들의 재능을 악한데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전체적으로 매도할 때가 참으로 많다. 웅덩이의 한 마리의 못난 미꾸라지 처럼. 이방인인 변사 더둘로는 돈이라면 자기 자신의 양심을 팔아 먹는데도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개인의 유익이라면 무엇이든지 저지를 못난 사람이다.

2,바울에대한 위증 "
1),바울을 전염병자로
4절에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괸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더둘로의 아첨의 진위가 무엇인지를 털어 놓는다. 5절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자요"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전염병 중에도 그 무서운 염병 환자로 몰아세웠다. 염병이라함은 Pestilence 를 말한다. 지극히 악하고 빨리 전염이 되는 무서운 병을 말한다. 얼마나 잘못된 위증인가 어찌하여 선량한 한 사람 바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면서 바울의 반대 입장이 되어서 엉터리로 생사람을 잡고 있는 더둘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너무나도 위대하시다 엉터리 변사 더둘로의 말을 잘 되새겨 보면 그 말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내포되 있다. 그게 뭔고 하면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능력은 삽시간에 온 유대는 물론 전 아시아를 뒤덮고 있었다. 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처음으로 이방인의 입으로 증명하는 결과를 우리들은 듣고 있음이다. 그렇다 복음의 전염성은 염병과도 같은 것이다.
(1),맹열함 전염병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복음도 .
(2),지배력 전염병은 일단 번지면 그 개인은 물론이고 그 지방 전체를 황폐케 만든다. 복음도 인간의 영혼을 장악하고 생활 전체를 변화시킨다. 황폐케함이 아니라 영원히 새롭게하는 쪽으로 확산시킨다. 더둘로 자신이 인정한 이 확산의 능력을 좀더 자세히 알아 보았더라면 그도 바울처럼 유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텐데. 물질을 더밝히다가 무고한 사람 힘 없는 사람들을 해하는 못난 사람이 되고 말았다.
2),이단으로 몰았다.
5절을 다시 본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1),나사렛 나사렛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 에수라고 부른데서 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더둘로가 쓰고 있는"나사렛"이란 말의 뜻은 유대나라 전체적인 것이 아니고 보잘것 없는 작은 시골 동내의 이름 없는 천한 상것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 우주적인 기독교를 말 한마디로 말살하려는 음모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그 발생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동양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유교는 더욱더 그렇다. 회회교는 중동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라고 떠벌리는 굳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를 벗어나질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보시라. 이는 실로 전 우주적이다. 이젠 지역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한 기독교를 더둘로는 자기의 조그만한 혓바닥을 가지고 말살하려는 못된 말을 하고 있다. 이런 무리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기독교는 모든 민족을 포용했고 모든 주의 극복한다. 그리고 국가간의 장벽을 없이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기독교인이 된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본다. 나사렛이란 지명을 정확하게 씀으로서 기독교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 있다. 요18장에보면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왔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묻는다. 그때 저들이 "나사렛 에수라"고 하자 주님께서 "내로라"하시면서 친히 자신이 나사렛 예수로 불려지시기를 즐겨 하시었던 주님이시었다. 또 있다. 막16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새벽미명에 무덤에 달려가 보니 무덤의 돌문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은 보이질 않았다. 무덤안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있었다. 여인들이 청년을 보고 놀라자 그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서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하늘의 천사도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불렀다.
그렇다면 더둘로의 이 말이야말로 예수님의 역사성을 능히 증명하고 남는것이된다.
2),이단의 괴수
정말 저 더둘로의 말대로 바울이 이단이 확실하면 바울을 베릭스에게 고소할 이유가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겐 이단에 괸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단의 시비는 종교가들의 문제일 뿐이다. 바울을 제되로 알지도 못한데 원인이 있기도하지만 이들의 고소 내용이 전적으로 바울을 없이하기 위한 음이라는 것만을 나타내 주고 있다.
3),성전을 더럽게하는자
6절에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아오니" 이 말이말로 위증 중에 위증이다. 바울이 성전을 더렵혔다는 증거가 없다. 또 바울이 성전을 더렵힌 것도 아니다. 더둘로의 말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 이것이야 말로 생사람을 잡는 것이다. 행21;26절에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튼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사도 바울은 철저한 성전청결주의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들의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자. 또 행여나 세상이 더둘로 같이 우리들을 모함하더라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가야할 길만을 가자. 장로들이 동원되고 제사장들이 동원되고 말 잘하는 변사까지 동원되었지만 저들은 저들 스스로가 위증임을 증명하고 있질 않은가 바울의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시다. 바울을 도우셨던 하나님게서 여러분도 도우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전진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돈 바꾸며 또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강도의 굴혈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가 실지로 성전 성결의 문제라면저들이 바울을 고소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저들을 고소해야한다. 예수님에게도 그랬고 스데반에게도 그랬듯이 유대인들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누명을 뒤집어 쒸워서 일처리하는데 프로들이었다. 예수님과 스데반에게 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이제는 사도 바울을 고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다행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들인가 어떻게 감히 천한 바울이 로마의 총독 베릭스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증거키 위하여 말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전진이 되도록 주선한 장본인들이 누구인가 사도 바울이 로바의 총독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일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아닌가 저들이 로마의 총독에게 고소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울이 이런 곳이 올 수 있었겠나 어떻게 이런 좋은 기회를 장만할 수 있었겠나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교 교훈인것이다. 일은 사람들이 떠벌리지만 결말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베릭스 총독 앞에서 그 누구의 제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가하고 싶었던 평소의 소원을 낱낱히 증거할 수 있었다.

3,바울의 변증들.
1),믿음에 관하여
근거, 14절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이 말은 바울이 다른 이상한 것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믿는바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 것이다. 바울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범위, 14절 "다 믿으며" 율법중에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제쳐두고가 아니고 다 믿었다. 믿음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3),행위, 14절 "믿으며" 믿는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믿는다는 것은 실제적인 행함이 따라야함을 말한다. 믿음은 적극적이고 강력하며 확고하게 역사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항들이 필요하다. 0
1,믿는 것에 대한 온전한 훈육과 지식이 필요하다. 요일4;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먼저 알고 믿을 때 바르게 성숙한다. 0
2,배운바에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한다. (요6;69. 17;8) 눅1;4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하려 함이로라" 0
3,실제적인 신뢰와 의롸함이 필요하다. 고후5;7절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04,알고 믿는 바를 적용해야한다. 약2;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2),소망에 관하여
15절 "저희가 기라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바울은 믿음을 말하다가 소망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망은 믿음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에관한 내용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말은 소망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것이 못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15절에서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부활이라 했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 지금 믿고 또 지금까지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바로 성도들의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소망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들 즉 거듭난 사람들의 결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
3) 다음은 우리들의 소망은 연단으로 성숙된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일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4,5) 바울을 고소한 자들도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글의 내용인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고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고소를 당한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4,변증하는 바울의 태도 " 그래서 바울은 16절에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 선한 양심
베릭스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증거하는 바울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들 앞에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따라 변증함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 선한 양심은 믿음과 소망이 있는 자들의 것이다. 믿음과 소망이 있으면 선한 양심을 가진다. 딤전1;5절에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하거늘." 믿이 있는 곳에 선한 양심은 함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믿음과 소망에의한 선한 양심으로 변증하고 있음이다.
2),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는 바울
바울의 이 말들 속에는 진실함이 있다. 바울의 이 말들 속에는 공손함이 있다. 바울의 이 말들 속에는 부드러움이 있다. 바울은 변증을 할때 변사 더둘로처럼 유창하게 아첨의 말로 하지 않았다. 바울은 변증을 할때 유대인들처럼 과격하지 않았다. 바울의 변증에 진실함이 엿보이고 있는 것은 바울의 변증은 누구를 모함하거나 해하려함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소망함을 따라 양심에 꺼리낌이 없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지속적인 삶의 노출
16절 하반절에 ". 항상 . 힘쓰노라"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나 사람에 대하여나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항상힘써 왔음을 변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을 하면서도 상대방으로하여금 무엇을 기대하여야 할지를 알지 못하게 마음에 굴곡이 심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것은 양심이 아니다. 양심은 믿음에서 그리고 소망에서 오는 것이기에 언제나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랬다 저랬다 함은 양심이 아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기에 바울은 누구에게나 꺼리낌이 없는 것이다. 17절에서 21절까지 상세하게 사건을 열거하면서 변증을 하고 있다. 한가지도 보태지도 아니하고 한가지를 더하지도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를 다 양심을 따라 변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다.
4),순종 끊임 없이 힘쓰고 있는 바울의 순종을 본다. 믿음으로 소망을 따라 선한 양심으로 힘스고 있는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순종을 보라! "순종'이란 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치를 못하다. 순종이 뭔지를 몰라서 순종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게된다. 우리들은 흔히 순종이라면 상대에대한 어떤 복종같은 것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때는 순종을 하면서 즐겁지를 못할 때가 매우 많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옳바른 순종이 아니다. 순종이란 말의 원래의 뜻은 "내가 나를 위하여 설득함"을 말함이다. 내가 나를 위한 설득이 된 상태라면 절대로 거기엔 기쁨만이 있지 비굴함이나 굴종감 같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순종은 믿음의 목적이자 믿음의 결실인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많은데 순종도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를 못한 것 같으다. 바울은 믿음의 결실이 그리고 소망의 결실이 순종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힘써서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지금 베릭스 앞에서 변증하고 있는 냉용들이 다 자신이 순종하면서 살아 온 오늘날까지의 삶의 자취들을 양심을 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믿음이 있으면서 소망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으면서 순종이 없는 사람도 되지 말자. 순종으로 그것도 온전한 순종으로 우리들의 믿음과 우리들의 소망이 온전한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사도 바울처럼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힘쓰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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