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길(1) (히13:1-6)
본문
1.:히브리서의 문학적 특성과 수신자들, 저술의도
통념상 히브리서는 편지로 분류되어 왔고, 전통적으로 바울이 보낸 편지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약성서 안에서 바울서신들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히브리서를 바울이 쓴 편지라고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히브리서에는 편지형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서두 인사말도 없고, 단지 말미에(13,22-25) 나오는 인사말만이 편지 형식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히브리서(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도 2세기 말경의 어느 신약성서 집성자가 붙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편지가 아니다. 반면 초대교회 설교의 전형적인 형식이 이 작품에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설교에는 구약성서에 대한 상세한 주석과 권면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히브리서에서도 교리적인 내용과 목회적인 권고가 번갈아 나온다.(2,1-4;
3,7-4,16; 5, 11-6,12; 10,19-39; 12,1-13,17) 그리고 신약성서의 서신들 에서 흔히 나오는 "쓴다"라는 말 대신 설교의 전형적인 표현인 "말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2,5; 5,11; 6,9; 8,1; 9,5; 11,32). 히브리서는 편지 보다는 초대교회의 설교 형식에 가깝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말이 아니라 글을 통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들의 경험에 대한 서술들(10,32-34)에 비추어볼 때 저자는 특정한 한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수신자들의 위치로는 고대 로부터 팔레스틴,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이 유력하고, 이밖에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J.J. Wett stein) 사마리아, 안디옥, 고린도, 사이프러스, 에베 소, 비두니아, 본도, 골로새 등지가 물망에 오른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본문 내적인 증거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어떤 독자 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까 신앙고백을 지켜나가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유대적 기독교인들인가, 아니면 이방 기독교인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유대교 전통에 대한 관계가 불분명한 혼합공동체인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에 근거해서 본다면 독자들 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 언급한 2세기의 집 성자는 글의 내용상 독자가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대제사장, 제사, 그리스도와 모세의 비교, 계약 등 유대적 요소와 폭넓은 성서 인용과 주석 등이 유대인들과 맞는다고 여겨졌기 때문 이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는 일차적으로 유대 기독교인들을 대상 으로 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그들 대부분이 히브리서는 유대교로 되돌아가 려는 시도들을 막고, 유대교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이루기 위해 쓰여졌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대교로 이끌리는 경향은 성전과 제의에 대한 동경 때문 이라는 오래된 견해도 있고, 이외에 복잡한 여러가지 가정들이 있다. 아마 도 수신자들은 유대교가 향유하던 합법 종교의 안전한 위치에 대한 미련을 아직 못 버리고 있거나, 아니면 특정한 헬레니즘적 유대교 신학, 신비적이 고 소종파적인 경건이나 믿음, 할라카적인 규범들, 또는 그러한 여러 요소 들의 결합물에 끌리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해서 19세기 이후 학자들은 박해와 재림 지연, 신앙의 전반적인 약화, 의심, 권태 등 초기의 신앙적 헌신에서 벗어난 여 러가지 현상들이 수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본문 안에 나타나는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서술들을 보면 그들은 히브리서 집필 당시 이미 오 랜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교리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행과 사랑을 멀리하는 등 열성까지 식어 있었다. (5,11-14)
따라서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싫어하는 등 일종의 신 앙 권태기를 맞고 있었다.(6,4-6) 더구나 박해의 위험까지 닥치고 있어서 지치거나 낙심할 우려도 있었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 전승의 여러가지 명제들을 이용하여 속사도시대의 나 태성을 공박했다. 히브리서는 속사도시대의 한 특정한 공동체를 신앙적으 로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신학적-교의적 부분들 은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생활률적인 권면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히 브리서는 교리적인 주석과 생활률적인 권면이 잘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히브리서에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대제사장 그리스도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아들됨과 대제사장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히브
1,1-4) 그리스도의 아들됨과 대제사장직은 히 브리서에서는 역사와 종말론의 틀을 결정하는 운명적인 드라마이다. 그리스도론과 긴밀히 연결되는 교훈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된 기독교인이 걸어야 할 신앙의 길을 제시하며,(2,1-4;
3,1-4,11; 4,14-16; 5,11-6,20; 10,19-39; 12,1-13,17)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의 생활, 고통 중의 인내, 선행, 사랑, 공동체와 친교, 거룩한 생활 등을 그 주 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분을 본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독자들에게 가장 필요하 다고 보았다. 저자는 신앙의 권태기를 맞은 당대의 독자들을 훈계하고 격려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와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한 양심을 지녔으며(9,14, 5.26-28; 10,12)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2,15) 그리고 성령님을 받아(6,4)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으며,(10,10.14) 하나님의 좋은 말씀과 내세 의 능력을 미리 체험하였다.(6,5) 그들은 먼저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6,19-20)의 중재로 미구에 천상성 소에 들어가(10,19-20) 하나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에 참여하 고(2,10) 영원한 유산을 얻을 확고한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9,15) 그들을 이 구원에 참여케 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한번이자 영원한 효력 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완전하게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 달성되는 날까지 구원의 창시자 요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성실히 따라야 한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믿음을 굳게 간직하려면 많은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고 고통을 못이겨 낙 심하거나 쓰러져서는 안 된다.(12,5)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 녀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지이다.(12,6-7)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12,10) 비록 현재는 고통을 참 기 어렵겠지만 이를 이겨내면 멀지 않아 반드시 평화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12,11)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께서도 많은 고통을 겪 으셨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기에 지금은 하나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12,2-3;
1,3) 독자들도 신자가 된 후 초기에는 온갖 고난과 모욕과 환 난을 당하면서도 미래의 보상에 대한 약속을 굳게 신뢰함으로써 인내하였다.(10,32-36)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하여야 한다. (12,5-7)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생활을 강조하면서 독자들의 사회생활, 공동체 생활 등 실생활상의 자세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선행과 사랑의 실천이다.(6,10;10,25;13,1.16)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그네를 후대 하며(13,2) 감옥에 갇히거나 학대받는 사람들을 성실히 돌본다.(12,3) 그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고,(12,14) 형제들의 모임에 적극 참 여하여 그들과 사귀고 격려하며,(10,25)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13,16) 저자는 그밖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서의 위인 들 외에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던 죽은 지도자들(13,17)과 신자 자 신들의 과거의 열성적인 생활(6,10-12)도 상기시킨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참다운 제사를 바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하고 두려 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13,15)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제물이란 그분의 뜻을 따르고, 당신 몸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처럼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13,15-26)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면 선구 자로 하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간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6,20)께서 그 들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6,19)
2. 본문사역
1 계속하여 형제애가 머물도록 하십시오. 2 나그네들에 대한 접대를 잊지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접대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였습니다. 3 여러분은 묶인 사람들을 여러분도 함께 묶인 것처럼 기억하고, 여러분 자신도 몸을 가지고 있으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4 모두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을 멀리하는 습성을 기르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은 "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랴."
3. 본문분석
13,1-17은 히브리서 전체를 마감하는 종합적인 교훈들로서 앞에서 말한 전체적인 내용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은 다시 기독교인의 생활과 관련되는 교훈(1-6절)과 참된 공동체 예배에 관한 교훈(7-17)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참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6절은 하나님을 기쁘게 경배하는 데(12,28) 직접 관계되는 참된 기독교인 생활을 가르치는 교훈인데 네 쌍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그 타당 성을 증명하고 있다. 네 쌍의 교훈은 형제애와(나그네 접대) 고통받는 이 에 대한 사랑(갇힌 사람, 학대받는 사람)을 보이고, 결혼생활의 정결을 지키고, 재물을 멀리하라는 내용이다. < 1-2절 > 형제애가 첫머리에 나온다. 형제애는 사람들을 자신의 형제로 대하신 예수를 본받는 것이다.(2,11-12 참조)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요구받는대로 필요한 것들을 개인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형제애를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이나 타인의 후원금에 의존하는 사람 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 형제애의 표시로 보내졌다. 아마도 형제애는 당시 소종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각각이 서로 서로에 대해 갖는 관심을 의미할 것이다. 초대 기독교가 소종파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태나 신앙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는 소종파로서의 기독교가 적대적인 세상 안 에서 살아남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윤리적 태도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유일하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이 공동체들 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다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받아들일 때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했다.(요일
3, 14) 이 경우 형제애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요구에 대한 돌봄까지도 포함했다. 물질적인 재산을 가진 구성원이 곤궁에 처한 형제자매를 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 고 주장할 수 없다.(요일
3,17) 특별히 독신 형제단 형태의 공동체의 경우 구성원들이 아플 때나 늙었을 때 돌봐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만 했다. 한편 저자는 형제애의 구체적인 한 예로 나그네에 대한 사랑을 언급한다. (2절)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아름다운 풍 습으로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손님 접대에 뛰어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창세 18장), 롯(창세19장), 삼손의 부친 마노아(판관 13장) 토비아(토비 5-7장) 등이 있다. 신약의 바울도 여행 중 인 교우나 교사, 또는 선교사들에 대한 접대를 강조하는데(로마 12,1; 16,2; 빌레 21; 디전
3,2;5,10) 오늘날과 같이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은 당대에는 손님 접대가 매우 중요했다. 이 나그네 접대는 형 제애와 직접 관계된다. 정통 유대인들 중 몇몇 집단들은 정결규정이나 음식물 예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특히 손님 접대, 나그네 접대가 중요했다. 이곳 저곳으로 여행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종파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음식 물과 깨끗한 옷, 숙소를 제공받아야 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낯선 사람 들이 왔을 때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접대해야 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동일한 규정을 준수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가옥을 더럽히지 않 기 위해서 그들을 신자들의 집에 들여서는 안되었다.
어떤 경우는 더럽혀 지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인사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요이 10-11; 1QS 5,16-17; 7,25; 8,23-24;9.8-9) 지도자들은 때때로 나그네들에게 소홀한 사람들을 꾸짖었다. 만일 접대를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도저히 이방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는 못할 것이므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요삼 5-8) 그러나 대체로 특정 집단의 소속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손님 접대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이틀 이상을 머무는 나그 네들은 거짓 예언자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경고를 받았다.(디다케 11) 많은 학자들이 이 두 구절(1.2a절)은 본래 사랑에 대한 시적인 권면이라고 본다. 13장의 편집자는 여기에 그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2b절) 어떤 사람들, 가령 아브라함과 사라(창세 18), 롯(창세 19)과 같은 사람들은 이러 한 방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했다.
그러므로 다른 곳 에서 온 기독교인에게 손님 접대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곧 천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 25, 35이하를 연상시킨다.
< 3절 > 묶인 자와 학대받는 자를 기억하는 것도 형제애에 속한다. 당대에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는 사람들이 많았는데(10,34; 로마 12,13; 고전 12,26; 빌립 4,10-11; 골로 4,18; 1클레 59,4) 이러한 사람들 외에도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이 관심과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통해서 대제사장이 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특별히 동정하시는 그리스도(5,1-10)를 본받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둘 다 로마 제국 내에서 전복적인 운동을 하는 종교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실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자주 그들의 신 분이나 행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곤 했다. 동료들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당 하거나 죽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했고,(마태 26,69-75)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함께 묶인 것처럼"이라는 말은 [쉰데데메노이] 인데,"함께 묶인"이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묶인 자들과 대단히 긴밀한 일체감을 갖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을 찾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은 묶인 사람들과 일체감을 가지며, 그들과 정치적, 종교적 견해를 함께 한다. 이러한 종류의 정체성은 이 운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 역시 형제애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3절은 이행연구 couplet 로 되어 있는데 2행이 1행과 동의적이다.
그러므로 "학대받는 사람들"은 "묶인 자"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신념이나 관습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몸을 가지고 있으니"라는 말은 독자들이 그들 자신을 "학대받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리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전 12,12-27; 고후 5,6; 로마 12,4-5) 이것은 구절의 병행성에 보다 강조점을 준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함께 묶인 것처럼"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통념상 히브리서는 편지로 분류되어 왔고, 전통적으로 바울이 보낸 편지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약성서 안에서 바울서신들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히브리서를 바울이 쓴 편지라고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히브리서에는 편지형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서두 인사말도 없고, 단지 말미에(13,22-25) 나오는 인사말만이 편지 형식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히브리서(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도 2세기 말경의 어느 신약성서 집성자가 붙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편지가 아니다. 반면 초대교회 설교의 전형적인 형식이 이 작품에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설교에는 구약성서에 대한 상세한 주석과 권면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히브리서에서도 교리적인 내용과 목회적인 권고가 번갈아 나온다.(2,1-4;
3,7-4,16; 5, 11-6,12; 10,19-39; 12,1-13,17) 그리고 신약성서의 서신들 에서 흔히 나오는 "쓴다"라는 말 대신 설교의 전형적인 표현인 "말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2,5; 5,11; 6,9; 8,1; 9,5; 11,32). 히브리서는 편지 보다는 초대교회의 설교 형식에 가깝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말이 아니라 글을 통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들의 경험에 대한 서술들(10,32-34)에 비추어볼 때 저자는 특정한 한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수신자들의 위치로는 고대 로부터 팔레스틴,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이 유력하고, 이밖에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J.J. Wett stein) 사마리아, 안디옥, 고린도, 사이프러스, 에베 소, 비두니아, 본도, 골로새 등지가 물망에 오른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본문 내적인 증거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어떤 독자 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까 신앙고백을 지켜나가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유대적 기독교인들인가, 아니면 이방 기독교인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유대교 전통에 대한 관계가 불분명한 혼합공동체인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에 근거해서 본다면 독자들 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 언급한 2세기의 집 성자는 글의 내용상 독자가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대제사장, 제사, 그리스도와 모세의 비교, 계약 등 유대적 요소와 폭넓은 성서 인용과 주석 등이 유대인들과 맞는다고 여겨졌기 때문 이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는 일차적으로 유대 기독교인들을 대상 으로 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그들 대부분이 히브리서는 유대교로 되돌아가 려는 시도들을 막고, 유대교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이루기 위해 쓰여졌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대교로 이끌리는 경향은 성전과 제의에 대한 동경 때문 이라는 오래된 견해도 있고, 이외에 복잡한 여러가지 가정들이 있다. 아마 도 수신자들은 유대교가 향유하던 합법 종교의 안전한 위치에 대한 미련을 아직 못 버리고 있거나, 아니면 특정한 헬레니즘적 유대교 신학, 신비적이 고 소종파적인 경건이나 믿음, 할라카적인 규범들, 또는 그러한 여러 요소 들의 결합물에 끌리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해서 19세기 이후 학자들은 박해와 재림 지연, 신앙의 전반적인 약화, 의심, 권태 등 초기의 신앙적 헌신에서 벗어난 여 러가지 현상들이 수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본문 안에 나타나는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서술들을 보면 그들은 히브리서 집필 당시 이미 오 랜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교리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행과 사랑을 멀리하는 등 열성까지 식어 있었다. (5,11-14)
따라서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싫어하는 등 일종의 신 앙 권태기를 맞고 있었다.(6,4-6) 더구나 박해의 위험까지 닥치고 있어서 지치거나 낙심할 우려도 있었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 전승의 여러가지 명제들을 이용하여 속사도시대의 나 태성을 공박했다. 히브리서는 속사도시대의 한 특정한 공동체를 신앙적으 로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신학적-교의적 부분들 은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생활률적인 권면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히 브리서는 교리적인 주석과 생활률적인 권면이 잘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히브리서에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대제사장 그리스도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아들됨과 대제사장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히브
1,1-4) 그리스도의 아들됨과 대제사장직은 히 브리서에서는 역사와 종말론의 틀을 결정하는 운명적인 드라마이다. 그리스도론과 긴밀히 연결되는 교훈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된 기독교인이 걸어야 할 신앙의 길을 제시하며,(2,1-4;
3,1-4,11; 4,14-16; 5,11-6,20; 10,19-39; 12,1-13,17)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의 생활, 고통 중의 인내, 선행, 사랑, 공동체와 친교, 거룩한 생활 등을 그 주 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분을 본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독자들에게 가장 필요하 다고 보았다. 저자는 신앙의 권태기를 맞은 당대의 독자들을 훈계하고 격려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와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한 양심을 지녔으며(9,14, 5.26-28; 10,12)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2,15) 그리고 성령님을 받아(6,4)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으며,(10,10.14) 하나님의 좋은 말씀과 내세 의 능력을 미리 체험하였다.(6,5) 그들은 먼저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6,19-20)의 중재로 미구에 천상성 소에 들어가(10,19-20) 하나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에 참여하 고(2,10) 영원한 유산을 얻을 확고한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9,15) 그들을 이 구원에 참여케 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한번이자 영원한 효력 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완전하게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 달성되는 날까지 구원의 창시자 요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성실히 따라야 한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믿음을 굳게 간직하려면 많은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고 고통을 못이겨 낙 심하거나 쓰러져서는 안 된다.(12,5)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 녀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지이다.(12,6-7)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12,10) 비록 현재는 고통을 참 기 어렵겠지만 이를 이겨내면 멀지 않아 반드시 평화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12,11)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께서도 많은 고통을 겪 으셨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기에 지금은 하나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12,2-3;
1,3) 독자들도 신자가 된 후 초기에는 온갖 고난과 모욕과 환 난을 당하면서도 미래의 보상에 대한 약속을 굳게 신뢰함으로써 인내하였다.(10,32-36)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하여야 한다. (12,5-7)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생활을 강조하면서 독자들의 사회생활, 공동체 생활 등 실생활상의 자세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선행과 사랑의 실천이다.(6,10;10,25;13,1.16)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그네를 후대 하며(13,2) 감옥에 갇히거나 학대받는 사람들을 성실히 돌본다.(12,3) 그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고,(12,14) 형제들의 모임에 적극 참 여하여 그들과 사귀고 격려하며,(10,25)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13,16) 저자는 그밖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서의 위인 들 외에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던 죽은 지도자들(13,17)과 신자 자 신들의 과거의 열성적인 생활(6,10-12)도 상기시킨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참다운 제사를 바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하고 두려 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13,15)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제물이란 그분의 뜻을 따르고, 당신 몸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처럼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13,15-26)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면 선구 자로 하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간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6,20)께서 그 들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6,19)
2. 본문사역
1 계속하여 형제애가 머물도록 하십시오. 2 나그네들에 대한 접대를 잊지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접대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였습니다. 3 여러분은 묶인 사람들을 여러분도 함께 묶인 것처럼 기억하고, 여러분 자신도 몸을 가지고 있으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4 모두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을 멀리하는 습성을 기르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은 "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랴."
3. 본문분석
13,1-17은 히브리서 전체를 마감하는 종합적인 교훈들로서 앞에서 말한 전체적인 내용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은 다시 기독교인의 생활과 관련되는 교훈(1-6절)과 참된 공동체 예배에 관한 교훈(7-17)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참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6절은 하나님을 기쁘게 경배하는 데(12,28) 직접 관계되는 참된 기독교인 생활을 가르치는 교훈인데 네 쌍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그 타당 성을 증명하고 있다. 네 쌍의 교훈은 형제애와(나그네 접대) 고통받는 이 에 대한 사랑(갇힌 사람, 학대받는 사람)을 보이고, 결혼생활의 정결을 지키고, 재물을 멀리하라는 내용이다. < 1-2절 > 형제애가 첫머리에 나온다. 형제애는 사람들을 자신의 형제로 대하신 예수를 본받는 것이다.(2,11-12 참조)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요구받는대로 필요한 것들을 개인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형제애를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이나 타인의 후원금에 의존하는 사람 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 형제애의 표시로 보내졌다. 아마도 형제애는 당시 소종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각각이 서로 서로에 대해 갖는 관심을 의미할 것이다. 초대 기독교가 소종파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태나 신앙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는 소종파로서의 기독교가 적대적인 세상 안 에서 살아남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윤리적 태도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유일하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이 공동체들 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다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받아들일 때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했다.(요일
3, 14) 이 경우 형제애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요구에 대한 돌봄까지도 포함했다. 물질적인 재산을 가진 구성원이 곤궁에 처한 형제자매를 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 고 주장할 수 없다.(요일
3,17) 특별히 독신 형제단 형태의 공동체의 경우 구성원들이 아플 때나 늙었을 때 돌봐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만 했다. 한편 저자는 형제애의 구체적인 한 예로 나그네에 대한 사랑을 언급한다. (2절)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아름다운 풍 습으로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손님 접대에 뛰어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창세 18장), 롯(창세19장), 삼손의 부친 마노아(판관 13장) 토비아(토비 5-7장) 등이 있다. 신약의 바울도 여행 중 인 교우나 교사, 또는 선교사들에 대한 접대를 강조하는데(로마 12,1; 16,2; 빌레 21; 디전
3,2;5,10) 오늘날과 같이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은 당대에는 손님 접대가 매우 중요했다. 이 나그네 접대는 형 제애와 직접 관계된다. 정통 유대인들 중 몇몇 집단들은 정결규정이나 음식물 예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특히 손님 접대, 나그네 접대가 중요했다. 이곳 저곳으로 여행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종파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음식 물과 깨끗한 옷, 숙소를 제공받아야 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낯선 사람 들이 왔을 때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접대해야 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동일한 규정을 준수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가옥을 더럽히지 않 기 위해서 그들을 신자들의 집에 들여서는 안되었다.
어떤 경우는 더럽혀 지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인사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요이 10-11; 1QS 5,16-17; 7,25; 8,23-24;9.8-9) 지도자들은 때때로 나그네들에게 소홀한 사람들을 꾸짖었다. 만일 접대를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도저히 이방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는 못할 것이므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요삼 5-8) 그러나 대체로 특정 집단의 소속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손님 접대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이틀 이상을 머무는 나그 네들은 거짓 예언자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경고를 받았다.(디다케 11) 많은 학자들이 이 두 구절(1.2a절)은 본래 사랑에 대한 시적인 권면이라고 본다. 13장의 편집자는 여기에 그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2b절) 어떤 사람들, 가령 아브라함과 사라(창세 18), 롯(창세 19)과 같은 사람들은 이러 한 방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했다.
그러므로 다른 곳 에서 온 기독교인에게 손님 접대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곧 천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 25, 35이하를 연상시킨다.
< 3절 > 묶인 자와 학대받는 자를 기억하는 것도 형제애에 속한다. 당대에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는 사람들이 많았는데(10,34; 로마 12,13; 고전 12,26; 빌립 4,10-11; 골로 4,18; 1클레 59,4) 이러한 사람들 외에도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이 관심과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통해서 대제사장이 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특별히 동정하시는 그리스도(5,1-10)를 본받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둘 다 로마 제국 내에서 전복적인 운동을 하는 종교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실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자주 그들의 신 분이나 행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곤 했다. 동료들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당 하거나 죽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했고,(마태 26,69-75)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함께 묶인 것처럼"이라는 말은 [쉰데데메노이] 인데,"함께 묶인"이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묶인 자들과 대단히 긴밀한 일체감을 갖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을 찾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은 묶인 사람들과 일체감을 가지며, 그들과 정치적, 종교적 견해를 함께 한다. 이러한 종류의 정체성은 이 운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 역시 형제애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3절은 이행연구 couplet 로 되어 있는데 2행이 1행과 동의적이다.
그러므로 "학대받는 사람들"은 "묶인 자"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신념이나 관습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몸을 가지고 있으니"라는 말은 독자들이 그들 자신을 "학대받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리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전 12,12-27; 고후 5,6; 로마 12,4-5) 이것은 구절의 병행성에 보다 강조점을 준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함께 묶인 것처럼"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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