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길(2) (히13:1-6)
본문
< 4절 > 이 구절은 결혼에서의 신실성을 다루고 있다. "모두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라는 말은 아마도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고"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본래 구약성서의 레위기적인 정결성의 관점에서는 모 든 성적인 행위를 부정하게 여긴다.(레위 15,16-18) 그래서 가령 거룩한 전쟁에 임하는 병사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가지지 못하도록 했다.-물론 전 쟁이 끝나면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내들에게로 돌아가도 되었다. 성행위 자체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관점은 "아내를 가진 자들도 마치 가 지지 않은 것처럼 살라는"(고전 7,29) 바울의 종말론적인 권면에도 그 흔 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성적인 행동이 난잡한 간음행위자들이나 결혼생활에 신실하지 못한 음란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성적으로 문란한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는 신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거룩한 신분을 들어 건전한 결혼생활과 정 결을 강조했다.(고전 5,9-11; 6,13-15; ,1-3; 데전 4,1-3) 부부의 잠자리 를 더럽히는 것은 혼외 성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지혜
3,13;14,26 참조) 음란과 간음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조차도 기독교인들과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음란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독신녀와의 음란한 행위나 성관계였다. 또 유대 율법은 간음에 대해서도 남녀간에 차 이를 두어, 기혼 남자가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이혼하지 않아도 되 었지만 여자가 간음하면 이혼당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초대 기독교는 성 관계나 결혼에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가르쳤다.(마가 10,6-9; 고전 7,4 참조) < 5-6절 > "돈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이 구절은 다른 기독교 훈계들이나 태도들 과 유사하다. 참된 기독교인은 재물에 대한 태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구 별된다.(고전 5,9-10; 6,9-10; 데전 4,3-6; 에베 5,5) 그리스도를 믿고 따 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배려하여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 고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마태 6,34;빌립 6,4; 베전 5,7 참조) 본래 이러한 태도는 대체로 공동경제와 관련되었다. 그러나 초기 유 대교와 기독교에서는 과부나 고아들,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태도가 장려되었다. 저자는 당대의 철 학을 이용하면서도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재물에 대한 욕심을 멀리하 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인들이 돈에 무관심해질 것을 권하는 말에 덧붙여서 저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구약성서의 두 구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논점을 더 강조한다. 5절의 인용문은 필로의 말인데 신명 31,6을 반영하고 있다. 6절의 인 용문은 시편 118편 6절이다.
먼저 5절은 모세와 관련된다. 모세는 죽기 직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을 얻기 위한 사업을 계속해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도중에 나타나는 적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그들보다 먼저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 이며, 그들을 배반하지도 않을 것이다."(신명 31,6) 이 경우 하나님의 임 재는 전쟁에서의 그의 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 치실 것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에 대한 확신 을 가지고 재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본문이 인용되었다. 6절의 두번째 인용문은 시편 118,6에서 나왔다. 신명 31,6에서처럼 이 시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무찌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섭 리를 신뢰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저자는 돈에 대한 관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처럼(마태 6,28-30) 기독교인들은 돈과 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려 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도우시는 분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실 경제윤리와 관련한 이러한 에토스는 신약성서 전반에서 감지된다. 산상수훈에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며(마 태 6,25) 지상에다가 보화를 쌓지 말라고 했다.(마태 6,19-21) 또한 선교 를 위해 파송된 사람들은 금화나 은화나 동전을 그들의 전대에 넣지 말고 여행용 자루도 가지지 말고, 갈아입을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마태 10,9-12) 초대교회는 지속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의 교리를 주장해왔다. 자발적인 가난에 대한 이러한 언급들 배후에는 초대 교회의 특정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순회 선교사들을 위한 접대관습과(앞 의 1-2절 주석 참조) 교회 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제도를 가지고 있 었다. 교회는 선교사들이 여행하는 중에 동료 기독교인들로부터 음식과 옷 과 다른 필요한 것들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기구인 교회가 그들을 위해 지 상에 보화를 쌓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다음 날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 었다.(마태 6,34) 물론 이 기구가 완벽하게 기능한 것은 아니고, 또 그들 중에는 선교사들에게서 등을 돌린 디오드레베같은(요삼 5-10) 사람들이 있 었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돈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있지는 않았다. 예컨대 바울과 같은 독신자에게는 가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자 신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에 건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 속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초대 기독교인 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훈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저자는 여기서 전체적인 재정을 공동체가 공 유하고 개인이 물질적인 필요에 관심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지향하는 발 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설교 메시지:공동체적인 기독교윤리의 실천 이 구절들에서 저자는 한편으로 신앙의 열성이 식고, 또한편으로는 박해 에 직면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히브리서는 대체로 80-9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당시는 도미티 안 박해 이전이지만 지역적으로 소규모적인 박해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 었다.) 제시된 네 가지의 윤리적 지침은 저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 라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해서 기술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분석에 의하면 네 가지 윤리적 권면 중 적 어도 세 가지, 즉 나그네를 접대하라는 형제애에 대한 권면과 묶인 자, 학 대받는 자에 대한 사랑,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라는 권면은 유사한 성 격을 지닌다. 그것은 박해받는 소종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지닐 수 있 었던 에토스를 각기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초대 기독교를 소종파적인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또한 당시의 신분제적인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만이 거의 유일하게 남녀노 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개방된 집단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소종파로서의 기독교는 소외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소속 장소를 제공했다. 기독교는 사람 들이 그 안에서 일반 사회에서와는 다른 가치와 이상들을 공동적으로 모색 하고 가꿀 수 있는 대안적이고 자족적인 사회였다. 5-6절의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라는 권면은 이러한 대안적인 가치와 이상의 맥락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경쟁과 물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과는 다른 원리, 즉 형제애와 공동체적인 이상이 지배하는 장소였다. 이들이 추 구하고 관심 갖는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진정한 형제애의 경험 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식의 변화이다 (베전
2,19-20;
3,3-4. 15-16. 21) 그러나 그러한 회심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암묵적으로는 조직화된 사회적 저항의 형태를 지닌다. 그러한 저항은 비록 발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저항을 불러들인다. 3절에 나타나는 묶 인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은 적대적인 사회의 반저항으로 인해 처할 수 있는 기독교 소종파의 상황을 반영한다. 바로 기독교인들 자신들 이 묶인 자들, 학대받는 자들이 될 위협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 단락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지침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상황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들이었고, 그들의 정서를 절실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가령 나그네들을 향해 형제애를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지만, 그 나그네들은 공동체 바깥의 어딘가에 있는 막연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자체가 바로 그러한 나그네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나그네들을 접 대하라는 형제애에 대한 강조는공동체 자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또한 묶인 자들,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 것 역시 그러한 어 려운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많은 공동체로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었다. 이 권면들에 나타나는 기독교적인 태도의 기본정신은 박해받는 집단 으로서 기독교의 소종파적이고 공동체적인 이상이다. 초대 기독교는 대안 적인 공동체상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사회에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수 있었다. 밑바닥 대중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 가능성을 보았다. 초대 기독교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다운, 공 동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초대 기독교 선교의 성공 은 기독교 공동체의 이러한 사회적인 특성을 전제한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초대 기독교가 했던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가 공동체적인 이상을 지향하는 윤리를 가지고 있는 가 오늘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 세력은 존재하지만, 기독교 정신은 없다. 가톨릭,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각기 100년, 200년이 지났건만 기독교 적인 문화, 기독교적인 정신, 기독교적인 윤리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아무리 이 땅에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아직 기독교 가, 예수의 복음이 한국인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이는 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 본문에 나타나는 공동체적인 이상, 윤리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거리가 멀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무 너진 공동체적인 이상과 전통을 이어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자신들이 대단히 공동체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주의 적이고 이기적인 서구인들과는 달리 정이 많고 "가슴이 따뜻한" 민족이라 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두레나 향약, 품 앗이같은 제도나 관습들은 한국인이 유구한 공동체적 전통을 지녔음을 말 해준다. 사실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촌락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면서 공 동체적인 문화와 생활 습관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는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산업화를 거치지 않았고, 씨족 중심 의 촌락공동체적 유산이 수천년 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문화 속 에서는 촌락이 곧 우주가 되었다. 오랜 세월 씨족 중심의 촌락에서만 살다 보니 씨족 중심의 문화는 아직도 많은 부분 남아 있지만 씨족을 벗어나서 '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공공성의 단계에서 공동체성을 수립하는 데 우리 민족은 대단히 미숙하다. 가령 가족을 위해서라면 부정입학, 답안지 빼돌 리기도 불사하며, 그것이 자식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되기까지 한다. 또한 설날이나 추석 때 피붙이와 고향을 찾아 1000만 이상의 인구가 대이동을 하는 눈물겨운 가족애를 보여주지만 그 과 정에서 시민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혈족을 찾는 끈끈한 연대의식과 새 치기, 교통 무질서 등 공공의식의 부재가 공존한다. 따라서 두레, 향약, 이웃사촌 등 우리네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는 사람들끼 리만 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촌락, 씨족 공동체 바깥의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속여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별로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기 지 않게 만드는 오랜 정신문화적 타성이 사실 우리에게는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 타성은 힘없고 '빽' 없이 국제화와 세계화의 21세기를 맞 이해야 하는 오늘 보통 한국사람들의 삶을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연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되는 일이 없지만 연줄이 있는 사람들 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한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객관적으로 신뢰 할 만한 법칙이나 상식에 따라 사회적인 삶이나 인간 관계가 운용되는 것 이 아니라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중심으로 인맥을 따라서 사회가 움직여 지기 때문에 되는 일이 없는가 하면 안 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향하는 세계는 첨단 정보 시스템 덕택에 일원화되었 으며, 동시에 세계 곳곳의 다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을 밖의 사람들'을 의식하고 이들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알 지 못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룰 줄 아는 마음가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된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도 우리의 의식은 좁은 의미의 우리의식, 옛 날 촌락이나 마을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오늘 날의 세계사적 상황에 걸맞는 공동체 의식, 공공의식으로의 발전이 무엇보 다도 필요하다. 한국에서 전반적인 공동체 의식의 파괴에 직면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며, 동시에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교회가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는 거의 다 사라지고 촌락민의 의식만 남아 있는 지금 교회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는 이제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옛 삶의 공동체적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또 다른 공동체를 찾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이 교회였다.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갑작스럽게 와해된 촌락 공동체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해 줄 수 있었다는 사회학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한국 교회는 무너져가는 한국민의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고, 뿌리깊은 집단적 개체주의(가령 지역감정같은 것)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공동체가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공동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해서 이 본문은 중요한 윤리적 지침을 준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아무 연과 상관없이 만난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아름다운 형제자매애, 이름없는 나그네들에 대한 접대는 공동체 의식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러면 오늘 우리 이웃들 가운데서 집없는 나그네들은 누구인가 오늘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나그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정치 적, 법적으로, 나아가서 인종적으로 가장 무력한 약자이다. 현재 우리나라 에는 약 10만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다.(법무 부에 신고된 사람만 총 6만 5천여명이며, 신고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약 10만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열악한 산업 환경과 주거 환경, 장시간 노 동, 임금 체불, 산업재해 보상 문제,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불법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정신적 불안감과 스트레스, 대부분의 기업주가 이들의 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신체적인 부자유 등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그 옛날 이스라엘처럼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품을 떠나 밑바닥 일을 하며 낯선 땅을 헤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집없는 나그네로서 집을 찾기를 갈망했듯이 이들도 역시 진정한 안식을 갈망한다. 우리의 선배 기독교인들은 떠돌이 나그네들과 동류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집없는 떠돌이 나그네로서의 자의식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이 땅의 소 외된 집없는 나그네들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류로, 형제요, 자매요, 가족 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함께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민족의 희년을 앞당기기 위해서도 외국인 노 동자들을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재물에 대한 의식, 경제윤리 역시 공동체 적인 더불어 삶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 파괴의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신 공동체적인 삶의 원리를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신 공동체적인 사회를 일구어 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성윤리(4절)와 관련된 문제이다. 성서 의 성윤리와 관련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남녀에게 동등 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는 남녀에게 적용되는 성윤리의 잣대가 각기 다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상속권과 가문계승의 목적을 위한 생식의 기능을 다함으로써 최상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혈통과 가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순결과 정절은 절대적인 의 무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반면 남성은 매춘이나 축첩을 통해 이중적인 성 생활이 허용된다. 남녀에게 이중적인, 서로 다른 성윤리의 잣대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제사회에서 결혼은 남녀의 동등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로 전락한다.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관계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형적인 결혼생활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 기며 사는 많은 기혼자들에게 결혼생활의 소중함, 부부의 잠자리의 신성함 이라는 말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한국 남성 1인당 상품화된 성(매매춘)의 사용율은 월평균 약1회이다. 이것은 성적으로 개방되고 자유 로운 서구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술 권하는 사회, 여자 권하는 사회이다. 우리나라의 향락산업은 1980년대 에 급성장해서 연간매출액이 4조원이 넘으며, GNP의 5% 이상이며, 산업구 조에마저도 영향을 끼쳐 비생산적 서비스(향락산업) 중심의 3차산업 이상 비대화 현상이 나타날 정도라고 한다. 한국기업의 접대비 지출 규모는 선 진외국의 100배 정도이고, 접대비는 한국전체기업이 1989년 벌어들인 소득 에 대해 납부한 세금총액의 36.9%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약 10배 높다고 한다. 또한 국제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시책으로 기생관광 을 육성했다. 그래서 전국에 120-150만 정도의 향락업소 종사 여성들이 있 으며, 15-29세 여성인구의 5명 중 1명이 성적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사회의 총체적인 타락, 가정의 파괴로 이어진다. 잘못된 성윤리,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인 성규범은 남녀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성의식이 타락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타락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소유되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힘을 가지며,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활력이 된다.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지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간섭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며, 상대의 소유물로 예속되는 구실을 주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적인 성과 사랑은 평등한 남녀관계에 기초하며, 남녀 상호간의 의사 소통을 풍부하게 하는 진정한 언어이다. 남녀가 모두 대등한 성과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과 사랑이 결합되고,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통합되는 성문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며, 시장의 원리가 배제된 성과 사랑의 문화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3,13;14,26 참조) 음란과 간음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조차도 기독교인들과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음란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독신녀와의 음란한 행위나 성관계였다. 또 유대 율법은 간음에 대해서도 남녀간에 차 이를 두어, 기혼 남자가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이혼하지 않아도 되 었지만 여자가 간음하면 이혼당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초대 기독교는 성 관계나 결혼에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가르쳤다.(마가 10,6-9; 고전 7,4 참조) < 5-6절 > "돈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이 구절은 다른 기독교 훈계들이나 태도들 과 유사하다. 참된 기독교인은 재물에 대한 태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구 별된다.(고전 5,9-10; 6,9-10; 데전 4,3-6; 에베 5,5) 그리스도를 믿고 따 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배려하여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 고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마태 6,34;빌립 6,4; 베전 5,7 참조) 본래 이러한 태도는 대체로 공동경제와 관련되었다. 그러나 초기 유 대교와 기독교에서는 과부나 고아들,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태도가 장려되었다. 저자는 당대의 철 학을 이용하면서도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재물에 대한 욕심을 멀리하 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인들이 돈에 무관심해질 것을 권하는 말에 덧붙여서 저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구약성서의 두 구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논점을 더 강조한다. 5절의 인용문은 필로의 말인데 신명 31,6을 반영하고 있다. 6절의 인 용문은 시편 118편 6절이다.
먼저 5절은 모세와 관련된다. 모세는 죽기 직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을 얻기 위한 사업을 계속해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도중에 나타나는 적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그들보다 먼저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 이며, 그들을 배반하지도 않을 것이다."(신명 31,6) 이 경우 하나님의 임 재는 전쟁에서의 그의 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 치실 것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에 대한 확신 을 가지고 재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본문이 인용되었다. 6절의 두번째 인용문은 시편 118,6에서 나왔다. 신명 31,6에서처럼 이 시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무찌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섭 리를 신뢰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저자는 돈에 대한 관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처럼(마태 6,28-30) 기독교인들은 돈과 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려 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도우시는 분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실 경제윤리와 관련한 이러한 에토스는 신약성서 전반에서 감지된다. 산상수훈에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며(마 태 6,25) 지상에다가 보화를 쌓지 말라고 했다.(마태 6,19-21) 또한 선교 를 위해 파송된 사람들은 금화나 은화나 동전을 그들의 전대에 넣지 말고 여행용 자루도 가지지 말고, 갈아입을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마태 10,9-12) 초대교회는 지속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의 교리를 주장해왔다. 자발적인 가난에 대한 이러한 언급들 배후에는 초대 교회의 특정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순회 선교사들을 위한 접대관습과(앞 의 1-2절 주석 참조) 교회 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제도를 가지고 있 었다. 교회는 선교사들이 여행하는 중에 동료 기독교인들로부터 음식과 옷 과 다른 필요한 것들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기구인 교회가 그들을 위해 지 상에 보화를 쌓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다음 날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 었다.(마태 6,34) 물론 이 기구가 완벽하게 기능한 것은 아니고, 또 그들 중에는 선교사들에게서 등을 돌린 디오드레베같은(요삼 5-10) 사람들이 있 었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돈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있지는 않았다. 예컨대 바울과 같은 독신자에게는 가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자 신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에 건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 속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초대 기독교인 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훈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저자는 여기서 전체적인 재정을 공동체가 공 유하고 개인이 물질적인 필요에 관심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지향하는 발 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설교 메시지:공동체적인 기독교윤리의 실천 이 구절들에서 저자는 한편으로 신앙의 열성이 식고, 또한편으로는 박해 에 직면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히브리서는 대체로 80-9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당시는 도미티 안 박해 이전이지만 지역적으로 소규모적인 박해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 었다.) 제시된 네 가지의 윤리적 지침은 저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 라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해서 기술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분석에 의하면 네 가지 윤리적 권면 중 적 어도 세 가지, 즉 나그네를 접대하라는 형제애에 대한 권면과 묶인 자, 학 대받는 자에 대한 사랑,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라는 권면은 유사한 성 격을 지닌다. 그것은 박해받는 소종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지닐 수 있 었던 에토스를 각기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초대 기독교를 소종파적인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또한 당시의 신분제적인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만이 거의 유일하게 남녀노 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개방된 집단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소종파로서의 기독교는 소외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소속 장소를 제공했다. 기독교는 사람 들이 그 안에서 일반 사회에서와는 다른 가치와 이상들을 공동적으로 모색 하고 가꿀 수 있는 대안적이고 자족적인 사회였다. 5-6절의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라는 권면은 이러한 대안적인 가치와 이상의 맥락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경쟁과 물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과는 다른 원리, 즉 형제애와 공동체적인 이상이 지배하는 장소였다. 이들이 추 구하고 관심 갖는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진정한 형제애의 경험 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식의 변화이다 (베전
2,19-20;
3,3-4. 15-16. 21) 그러나 그러한 회심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암묵적으로는 조직화된 사회적 저항의 형태를 지닌다. 그러한 저항은 비록 발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저항을 불러들인다. 3절에 나타나는 묶 인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은 적대적인 사회의 반저항으로 인해 처할 수 있는 기독교 소종파의 상황을 반영한다. 바로 기독교인들 자신들 이 묶인 자들, 학대받는 자들이 될 위협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 단락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지침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상황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들이었고, 그들의 정서를 절실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가령 나그네들을 향해 형제애를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지만, 그 나그네들은 공동체 바깥의 어딘가에 있는 막연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자체가 바로 그러한 나그네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나그네들을 접 대하라는 형제애에 대한 강조는공동체 자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또한 묶인 자들,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 것 역시 그러한 어 려운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많은 공동체로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었다. 이 권면들에 나타나는 기독교적인 태도의 기본정신은 박해받는 집단 으로서 기독교의 소종파적이고 공동체적인 이상이다. 초대 기독교는 대안 적인 공동체상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사회에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수 있었다. 밑바닥 대중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 가능성을 보았다. 초대 기독교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다운, 공 동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초대 기독교 선교의 성공 은 기독교 공동체의 이러한 사회적인 특성을 전제한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초대 기독교가 했던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가 공동체적인 이상을 지향하는 윤리를 가지고 있는 가 오늘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 세력은 존재하지만, 기독교 정신은 없다. 가톨릭,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각기 100년, 200년이 지났건만 기독교 적인 문화, 기독교적인 정신, 기독교적인 윤리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아무리 이 땅에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아직 기독교 가, 예수의 복음이 한국인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이는 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 본문에 나타나는 공동체적인 이상, 윤리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거리가 멀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무 너진 공동체적인 이상과 전통을 이어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자신들이 대단히 공동체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주의 적이고 이기적인 서구인들과는 달리 정이 많고 "가슴이 따뜻한" 민족이라 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두레나 향약, 품 앗이같은 제도나 관습들은 한국인이 유구한 공동체적 전통을 지녔음을 말 해준다. 사실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촌락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면서 공 동체적인 문화와 생활 습관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는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산업화를 거치지 않았고, 씨족 중심 의 촌락공동체적 유산이 수천년 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문화 속 에서는 촌락이 곧 우주가 되었다. 오랜 세월 씨족 중심의 촌락에서만 살다 보니 씨족 중심의 문화는 아직도 많은 부분 남아 있지만 씨족을 벗어나서 '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공공성의 단계에서 공동체성을 수립하는 데 우리 민족은 대단히 미숙하다. 가령 가족을 위해서라면 부정입학, 답안지 빼돌 리기도 불사하며, 그것이 자식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되기까지 한다. 또한 설날이나 추석 때 피붙이와 고향을 찾아 1000만 이상의 인구가 대이동을 하는 눈물겨운 가족애를 보여주지만 그 과 정에서 시민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혈족을 찾는 끈끈한 연대의식과 새 치기, 교통 무질서 등 공공의식의 부재가 공존한다. 따라서 두레, 향약, 이웃사촌 등 우리네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는 사람들끼 리만 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촌락, 씨족 공동체 바깥의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속여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별로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기 지 않게 만드는 오랜 정신문화적 타성이 사실 우리에게는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 타성은 힘없고 '빽' 없이 국제화와 세계화의 21세기를 맞 이해야 하는 오늘 보통 한국사람들의 삶을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연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되는 일이 없지만 연줄이 있는 사람들 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한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객관적으로 신뢰 할 만한 법칙이나 상식에 따라 사회적인 삶이나 인간 관계가 운용되는 것 이 아니라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중심으로 인맥을 따라서 사회가 움직여 지기 때문에 되는 일이 없는가 하면 안 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향하는 세계는 첨단 정보 시스템 덕택에 일원화되었 으며, 동시에 세계 곳곳의 다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을 밖의 사람들'을 의식하고 이들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알 지 못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룰 줄 아는 마음가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된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도 우리의 의식은 좁은 의미의 우리의식, 옛 날 촌락이나 마을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오늘 날의 세계사적 상황에 걸맞는 공동체 의식, 공공의식으로의 발전이 무엇보 다도 필요하다. 한국에서 전반적인 공동체 의식의 파괴에 직면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며, 동시에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교회가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는 거의 다 사라지고 촌락민의 의식만 남아 있는 지금 교회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는 이제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옛 삶의 공동체적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또 다른 공동체를 찾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이 교회였다.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갑작스럽게 와해된 촌락 공동체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해 줄 수 있었다는 사회학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한국 교회는 무너져가는 한국민의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고, 뿌리깊은 집단적 개체주의(가령 지역감정같은 것)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공동체가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공동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해서 이 본문은 중요한 윤리적 지침을 준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아무 연과 상관없이 만난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아름다운 형제자매애, 이름없는 나그네들에 대한 접대는 공동체 의식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러면 오늘 우리 이웃들 가운데서 집없는 나그네들은 누구인가 오늘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나그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정치 적, 법적으로, 나아가서 인종적으로 가장 무력한 약자이다. 현재 우리나라 에는 약 10만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다.(법무 부에 신고된 사람만 총 6만 5천여명이며, 신고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약 10만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열악한 산업 환경과 주거 환경, 장시간 노 동, 임금 체불, 산업재해 보상 문제,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불법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정신적 불안감과 스트레스, 대부분의 기업주가 이들의 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신체적인 부자유 등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그 옛날 이스라엘처럼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품을 떠나 밑바닥 일을 하며 낯선 땅을 헤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집없는 나그네로서 집을 찾기를 갈망했듯이 이들도 역시 진정한 안식을 갈망한다. 우리의 선배 기독교인들은 떠돌이 나그네들과 동류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집없는 떠돌이 나그네로서의 자의식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이 땅의 소 외된 집없는 나그네들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류로, 형제요, 자매요, 가족 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함께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민족의 희년을 앞당기기 위해서도 외국인 노 동자들을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재물에 대한 의식, 경제윤리 역시 공동체 적인 더불어 삶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 파괴의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신 공동체적인 삶의 원리를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신 공동체적인 사회를 일구어 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성윤리(4절)와 관련된 문제이다. 성서 의 성윤리와 관련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남녀에게 동등 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는 남녀에게 적용되는 성윤리의 잣대가 각기 다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상속권과 가문계승의 목적을 위한 생식의 기능을 다함으로써 최상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혈통과 가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순결과 정절은 절대적인 의 무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반면 남성은 매춘이나 축첩을 통해 이중적인 성 생활이 허용된다. 남녀에게 이중적인, 서로 다른 성윤리의 잣대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제사회에서 결혼은 남녀의 동등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로 전락한다.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관계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형적인 결혼생활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 기며 사는 많은 기혼자들에게 결혼생활의 소중함, 부부의 잠자리의 신성함 이라는 말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한국 남성 1인당 상품화된 성(매매춘)의 사용율은 월평균 약1회이다. 이것은 성적으로 개방되고 자유 로운 서구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술 권하는 사회, 여자 권하는 사회이다. 우리나라의 향락산업은 1980년대 에 급성장해서 연간매출액이 4조원이 넘으며, GNP의 5% 이상이며, 산업구 조에마저도 영향을 끼쳐 비생산적 서비스(향락산업) 중심의 3차산업 이상 비대화 현상이 나타날 정도라고 한다. 한국기업의 접대비 지출 규모는 선 진외국의 100배 정도이고, 접대비는 한국전체기업이 1989년 벌어들인 소득 에 대해 납부한 세금총액의 36.9%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약 10배 높다고 한다. 또한 국제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시책으로 기생관광 을 육성했다. 그래서 전국에 120-150만 정도의 향락업소 종사 여성들이 있 으며, 15-29세 여성인구의 5명 중 1명이 성적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사회의 총체적인 타락, 가정의 파괴로 이어진다. 잘못된 성윤리,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인 성규범은 남녀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성의식이 타락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타락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소유되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힘을 가지며,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활력이 된다.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지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간섭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며, 상대의 소유물로 예속되는 구실을 주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적인 성과 사랑은 평등한 남녀관계에 기초하며, 남녀 상호간의 의사 소통을 풍부하게 하는 진정한 언어이다. 남녀가 모두 대등한 성과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과 사랑이 결합되고,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통합되는 성문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며, 시장의 원리가 배제된 성과 사랑의 문화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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