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 (빌2:1-4)
본문
교회란 무엇입니까 더불어 사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문명인과 야만인, 동양인과 서양인이 함께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함께 사는 곳입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이, 죄인과 의인이 함께 사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영국의 버트란드 럿셀은 말하기를,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언제나 반비례한다”고 했습니다. 즉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정신문명이 떨어지고 정신문명이 발달하면 물질문명이 뒤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처럼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된 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정신문명이 저하되고 동시에 기독교신앙도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공익사상보다는 나만이 잘 살아야겠다는 개인적 이권사상이 팽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빌립보서 2:1-4의 본문 말씀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원리를 몇 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더불어 사는 삶의
첫째 비결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2:2에 ‘한마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같은 마음을 뜻하며 같은 마음이란 같은 믿음의 지식이란 뜻입니다. 같은 믿음의 지식이란 교리적으로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즉 같은 교리를 신봉할 때 사람마다 서로 얼굴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자라난 성장 배경이 다르고 교육 수준이 다르고 출신지방이 다르고 국적이 다를지라도 언제나 ‘한마음’, 즉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믿음의 일치를 고백하는 순서로 사도신경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교회에 두 종교나 두 신앙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로 마음이 같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한마음’이란 같은 사랑을 가질 때 생겨난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있으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사랑이고 속죄의 사랑이며,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은 이해할 수가 없고 사랑의 한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는 짐승처럼 사랑하다가 맹수처럼 싸우는 것을 볼 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사람들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특히 서양인들의 사랑은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신호대기하는 중에도 키스하다가 서로 수가 틀리면 비참하게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랑이란 서로 편애하지 않는 피차 사랑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불행한 사랑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가정의 경우,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사랑하다가 가정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더불어 살려면 편애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을 그렇게 심하게 미워하기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무조건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사랑이 있나 없나를 시험해 보던 중,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의해 보았는데, 사랑이란 관대함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게 사랑이 있나 없나는 관대함이 있나 없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관대함입니다. 유엔에서는 1995년도를 ‘관용의 해’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더불어 살려면 같은 뜻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같은 뜻이란 ‘의지일치(意志一致)’를 의미합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이인삼각(二人三脚)이라는 재미있는 경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다리씩 묶어서 다리 셋을 만들어 가지고 달리는 경기입니다.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지 때문에 구호를 붙이며 ‘하나 둘 하나 둘’하면서 서로 마음을 맞추며 달려갑니다.
2. 더불어 사는 두 번째 비결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역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입니다. 사람은 대개 약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가지고 있으나 자기보다 나은 자에 대해서는 도전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3에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려면 세 가지 일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무 일에나 다툼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툼으로 하지 말라는 말은 이기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은 이기심을 버리는 삶입니다. 이기심을 버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심과 욕심이 없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 평안한 가정입니다.
둘째로, 무슨 일을 하든지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허영’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헬라어로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α)입니다. 이 말은 ‘자만심이 강한’,‘허영심이 강한’을 의미하는 형용사 ‘케노독소스’(κενδοξο)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그 뜻은 ‘헛된 영광’과 ‘자만’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케노스(κεν)는 ‘빈’, ‘텅빈’, ‘거짓된’, ‘공허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허영심으로 쓸데없는 일에 욕심을 부리면 더불어 사는 일에 큰 지장이 있습니다.
셋째로, 더불어 사는 삶이란 겸손한 삶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나옵니다. 그는 얼마나 도도하고 오만한 자였습니까 목동 다윗을 향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에게 말하기를,“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주머니 속의 돌을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쳤습니다. 교만한 골리앗은 겸손한 다윗에게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욕심만 부린다면 그들은 더불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저는 40년 목회생활 중 지금 가장 마음이 평안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우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처럼 욕심이 없고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이 마태복음 7:12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겸손한 자가 어디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때, 우리들은 더불어 살 수가 있습니다.
3. 더불어 사는 삶의 세 번째 비결은 자기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초대교회 중 문제가 가장 많았던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전혀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형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끼리 차별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18-22). 더불어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서로가 돌보는 이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차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합니다. “나의 기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 한정된 기쁨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기쁨을 전제한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슬픔과 기쁨을 나눕니다. 한 사람의 기쁨을 함께 나눌 때 기쁨은 배가 됩니다. 슬픔을 나누면 그 슬픔이 줄어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괴로움을 전 교우가 분담하면 1/10, 1/100로 줄어들고, 한 사람의 즐거움을 전 교우가 나누면 열 배, 백 배로 증가됩니다. 교회란 각각 다른 숲 속에 사는 파랑새, 노랑새가 한 곳에 모여 보금자리를 만들고 노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입니다. 요즈음 가장 돈벌이가 잘되는 곳이 가라오케 노래방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가라오케라는 말을 가짜 오케스트라라고 하는데 교회는 그런 가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진짜 오케스트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래방에 가면 가짜 재미가 있겠지만 교회에 오면 진실로 기쁨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인간의 최대의 사업 성취는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것이며 사람이 사람을 얻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최대의 사업 성취를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사는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처럼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된 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정신문명이 저하되고 동시에 기독교신앙도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공익사상보다는 나만이 잘 살아야겠다는 개인적 이권사상이 팽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빌립보서 2:1-4의 본문 말씀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원리를 몇 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더불어 사는 삶의
첫째 비결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2:2에 ‘한마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같은 마음을 뜻하며 같은 마음이란 같은 믿음의 지식이란 뜻입니다. 같은 믿음의 지식이란 교리적으로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즉 같은 교리를 신봉할 때 사람마다 서로 얼굴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자라난 성장 배경이 다르고 교육 수준이 다르고 출신지방이 다르고 국적이 다를지라도 언제나 ‘한마음’, 즉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믿음의 일치를 고백하는 순서로 사도신경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교회에 두 종교나 두 신앙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로 마음이 같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한마음’이란 같은 사랑을 가질 때 생겨난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있으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사랑이고 속죄의 사랑이며,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은 이해할 수가 없고 사랑의 한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는 짐승처럼 사랑하다가 맹수처럼 싸우는 것을 볼 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사람들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특히 서양인들의 사랑은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신호대기하는 중에도 키스하다가 서로 수가 틀리면 비참하게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랑이란 서로 편애하지 않는 피차 사랑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불행한 사랑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가정의 경우,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사랑하다가 가정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더불어 살려면 편애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을 그렇게 심하게 미워하기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무조건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사랑이 있나 없나를 시험해 보던 중,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의해 보았는데, 사랑이란 관대함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게 사랑이 있나 없나는 관대함이 있나 없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관대함입니다. 유엔에서는 1995년도를 ‘관용의 해’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더불어 살려면 같은 뜻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같은 뜻이란 ‘의지일치(意志一致)’를 의미합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이인삼각(二人三脚)이라는 재미있는 경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다리씩 묶어서 다리 셋을 만들어 가지고 달리는 경기입니다.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지 때문에 구호를 붙이며 ‘하나 둘 하나 둘’하면서 서로 마음을 맞추며 달려갑니다.
2. 더불어 사는 두 번째 비결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역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입니다. 사람은 대개 약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가지고 있으나 자기보다 나은 자에 대해서는 도전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3에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려면 세 가지 일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무 일에나 다툼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툼으로 하지 말라는 말은 이기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은 이기심을 버리는 삶입니다. 이기심을 버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심과 욕심이 없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 평안한 가정입니다.
둘째로, 무슨 일을 하든지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허영’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헬라어로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α)입니다. 이 말은 ‘자만심이 강한’,‘허영심이 강한’을 의미하는 형용사 ‘케노독소스’(κενδοξο)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그 뜻은 ‘헛된 영광’과 ‘자만’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케노스(κεν)는 ‘빈’, ‘텅빈’, ‘거짓된’, ‘공허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허영심으로 쓸데없는 일에 욕심을 부리면 더불어 사는 일에 큰 지장이 있습니다.
셋째로, 더불어 사는 삶이란 겸손한 삶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나옵니다. 그는 얼마나 도도하고 오만한 자였습니까 목동 다윗을 향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에게 말하기를,“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주머니 속의 돌을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쳤습니다. 교만한 골리앗은 겸손한 다윗에게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욕심만 부린다면 그들은 더불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저는 40년 목회생활 중 지금 가장 마음이 평안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우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처럼 욕심이 없고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이 마태복음 7:12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겸손한 자가 어디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때, 우리들은 더불어 살 수가 있습니다.
3. 더불어 사는 삶의 세 번째 비결은 자기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초대교회 중 문제가 가장 많았던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전혀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형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끼리 차별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18-22). 더불어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서로가 돌보는 이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차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합니다. “나의 기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 한정된 기쁨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기쁨을 전제한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슬픔과 기쁨을 나눕니다. 한 사람의 기쁨을 함께 나눌 때 기쁨은 배가 됩니다. 슬픔을 나누면 그 슬픔이 줄어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괴로움을 전 교우가 분담하면 1/10, 1/100로 줄어들고, 한 사람의 즐거움을 전 교우가 나누면 열 배, 백 배로 증가됩니다. 교회란 각각 다른 숲 속에 사는 파랑새, 노랑새가 한 곳에 모여 보금자리를 만들고 노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입니다. 요즈음 가장 돈벌이가 잘되는 곳이 가라오케 노래방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가라오케라는 말을 가짜 오케스트라라고 하는데 교회는 그런 가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진짜 오케스트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래방에 가면 가짜 재미가 있겠지만 교회에 오면 진실로 기쁨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인간의 최대의 사업 성취는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것이며 사람이 사람을 얻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최대의 사업 성취를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사는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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