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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아가라 (창2:18-25)

본문

세상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서는 존재하거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함께 있어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하고 함게 모여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원리입니다. 전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기에는 양극과 음극이 있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불이 켜집니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하도록 만드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소리에도 센음이 있고 여린음이 있습니다. 이 센음과 여린음이 함께 어울려서 소리를 내야 그것이 음악입니다. 또 생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곤충, 동물, 식물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는 암수가 함께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성장을 하면 짝을 찾느라고 열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세워놓으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상대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함으로 상대가 존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모여서 함게 살아갑니다.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대 원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원리를 염두에 두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1.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사람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야 행복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대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요즘 독신주의자들이 많은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독신주의자는 없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떠나서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 “인”자를 보세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참 생각을 많이 해서 만들어 놓은 글자입니다. 사람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자가 지니고 있는 뜻입니다. 사람은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밖에 나갔다 왔을 때 집에 어머니가 계시면 마음이 참 좋습니다.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안 계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허전하고 쓸쓸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퇴근을 해서 집에 오면 집에 아내가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괜히 짜증이 납니다.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사라믄 친구가 있어야 하고 이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더불어 살아갈 때 평안이 있고 만족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벌 가운데 가장 큰 형벌은 혼자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수를 독방에 가두어 놓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특별 대우가 아니고 바로 가장 큰 형벌입니다. 이것이 “함께”의 신학이고 “함께”의 철학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만 싸우고 다투고 갈등하고 나누어지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늩커녕 형제간에도 등을 지고 살아갑니다. 창조의 원리를 기초부터 무시하고 살아가니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온갖 불화와 저주와 갈등과 부조화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살아가고 더불어 살아갈 때가 가장 기쁘고 행복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렇게 살라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부부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 등을 돌려 보십시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서로 공존하고 서로 섬기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2.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생활은 참 복잡합니다. 사람은 가정만 있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만 있다고 살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충만하라, 세상을 점령하라, 세상을 잘 다스리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연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휴일이면 왜 산으로 강으로 나갑니까 왜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입니까 왜 집안에서 화초를 기르고 새를 키우고 돌을 집어다 놓습니까 그것은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을 잘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연으로부터 맑은 공기를 얻고 좋은 환경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참 좋은 이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연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당하고 살아가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땅이 맑은 물을 내주질 않습니다. 오염된 물을 내뿜습니다. 계곡마다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한강물이 더러워서 마실 수가 없고 물고기들과 물새들이 자꾸만 죽어 갑니다. 이러다가 조금 있으면 마실 물이 없어서 물을 기름처럼 수입해다 먹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연을 잘 다스리질 못해서 생긴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잘 다르려라 하셨는데 사람들은 자연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독을 뿜고 더러운 물을 내 보내고 그럽니다. 동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산들이 나무가 울창해지면서 작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남지를 않습니다.
이 동물들이 자라기도 전에 사람들이 보신하는라고 덫을 놓아 잡아 먹습니다. 공원에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면 그것도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돌을 던집니다. 장난으로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맞아 죽으라고 던집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다람쥐들은 크지 않고 작습니다. 큰 수가 없습니다. 도망하기 위해서 눈치 보느라고 크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연을 학대하니까 동물들과 거리가 자꾸만 멀어 지고 자연이 썩어 가고 그래서 이 땅에 이름 모를 질병들이 자꾸 발생하는 것입니다. 곤충, 새, 짐승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들이 있어야 이 땅의 해로운 곤충들이 없어지고 그래야 인간이 동식물로부터 도움을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생존경쟁의 세상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을 상부 상조하는 세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생존 경쟁의 세상으로 보는 세계관은 한쪽에서 먹으려면 한쪽은 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쪽이 따뜻하게 입으려면 또 다른 쪽은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물고기는 중 물고기를 잡아먹고 중 물고기는 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며 유지됩니다. 이를테면 생존 경쟁의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쪽에서는 놀고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일을 죽도록 하면서도 굶습니다. 그래서 일을 해야 먹는 사회를 이룩하려면 놀고 먹는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는 이론이 생겼고 이것이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혁명 이론입니다. 장사하시는 분들, 내가 이익을 많이 남긴 날은 누국가 손해를 본 날입니다. 내가 오늘 재수가 좋았다 하는 날 누군가는 재수가 없었던 날입니다. 오늘 내가 기뻐서 많이 웃었다 하면 모두가 함께 웃을 수가 없는 세상이니까 누군가는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밥을 먹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죽었습니까 오늘 아침 멸치들이 나 때문에 많이 죽었습니다. 채소들이 나 때문에 소금에 절구어져서 죽었습니다. 소들도 나 때문에 죽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죽고 죽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생존 경쟁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이 희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생존 경쟁의 세상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적인 세계관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이 세상은 상부 상조하는 세상이라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서로 협동해서 조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간다는 세계관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벌과 꽃의 관계와 같습니다. 벌이 꽃을 찾아갑니다. 가서 꿀을 따갑니다. 벌들이 도적입니까 아닙니다. 벌은 꽃술에 앉아서 부지런히 꽃가루를 옮겨서 수정시켜 줍니다. 그리고 일한 만큼 꿀을 가져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상부 상조의 세상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벌들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꽃들은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상부 상조가 되질 않으면 이 세상도 엄청난 재앙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해인가 가물어서 농약을 많이 쳤던 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벌들이 다 죽었습니다. “벌들이 죽었다” 이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벌들이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식물들이 수정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식물들과 과일 나무들이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 해는 큰 흉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오묘한 세상입니다. 서로 상부 상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곤충도, 벌레도, 동물들도 인간과 함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3.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유의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볼펜이 있습니다. 이 볼펜은 혼자서는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이 펜이 구실을 하려면 반드시 사람의 손에 잡혀야 합니다. 공장에서 볼펜을 만들어 낼 때 혼자서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공장에서 만들 때부터 이 볼펜은 사람의 손에 쥐어져서 사용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볼펜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이 볼펜은 사람을 떠나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사람도 창조될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고 자연가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지어졌습니다. 사람은 그때 비로소 인간 구실을 하고 평화를 누리고 만족함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 볼펜은 500원밖에 하지 않습니다. 별로 값 나가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볼펜이 유명한 작가의 손에 잡히면 세계 명작을 만들어 냅니다. 그 명작을 값으로 따질 수 있습니까 또 이 볼펜이 재별의 손에 잡혀 보십시오. 재벌이 이 볼펜을 잡고 수표에 몇 자만 적어 보십시오. 재벌이 쓰기에 따라서 엄청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볼펜은 이렇게 엄청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펜이 사람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 보십시오. 그때 이 펜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볼펜은 사람의 손에 붙잡혀야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고 나면 볼펜의 신세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모세의 왕궁 생활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그때는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마른 막대기 신세가 되어서 살인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어 광야에 40년 동안 버려지지 않습니까 그러다 40년이 지나 하나님이 그를 다시 잡으시니 세도 있던 바로가 떱니다. 홍해가 육지같이 갈라집니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옵니다. 하늘을 가리키면 우박이 떨어집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해가 빛을 잃고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책망 한마디에 땅이 갈라집니다. 권능이 있습니다. 권위가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버려지면 그날로 초라한 인생이 되고 다시 붙잡히면 하루아침에 능력자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저는 신앙 안에서 죽어진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두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를 사울처럼 버리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만은 정말 두렵습니다. 때로 저 자신이 나태해질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가 잔꾀를 부리게 될 때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버리시면 버려지는 것이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저도 때로는 “적당히 일하며 살자”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살자”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버려진 볼펜”입니다. 볼펜이 잉크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불량하면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별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워서 게을러질 수가 없고 요령 부릴 수가 없고 세상을 적당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이 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 모두를 얻고도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당하면 무얼 합니까 그러면 끝장입니다. 정말 겁없이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겁없이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버림을 받고 던짐받아 보아야 정신이 날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다면 좀 적당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좀 쉽게 적당히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버림을 받았듯이, 아합이 버림을 받았듯이, 유다가 버림을 받았듯이, 저도 그렇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 이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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