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후에 (왕상17:17-24)
본문
제가 전도사 시절에 사역하던 교회에 어떤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 은 어릴 때 믿었던 예수님을 어른이 되어 새롭게 발견한 후 몹시 기뻐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해 갔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아주 기뻐하고 예 배 분위기를 만족해 하고 예배를 드릴때마다 마음에 평안에 있다고 고 백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후 이 분의 아 들이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차가 이 아이 위를 지나갔다고 하는데 다 행히 살아났습니다. 여러가지 후유증은 있었지만 몇차례의 수술을 받 으며 다행히 다른 장애를 입지 않고 회복이 잘되어 교통사고의 악몽으 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 자 남편을 비롯해 주위의 가족들과 사람들이 안다니던 교회를 다니니 집안에 이렇게 우환이 생기지 않느냐 하면서 이 부인을 공격하기 시작 했습니다. 시간 갈수록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무사히 퇴원을 한 이후에도 교회 출석하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이일 후에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또 왜 성도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7절에 보면 이일 후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 병들어 숨이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 이일'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밀가루가 통해서 끊어지지 아니 하고 기름이 병에서 멈추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여러달 동안 경험한 후에'라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아들의몸속에 죽을 병균이 파고 들 때 막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일부러 당하게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 아이의 몸속에 어떤 균이 파고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 균을 막을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 버려 두시고 그런 큰 은혜를 경험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비탄 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모든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답은 이 여인이, 이미 받았던 작은 은혜에 만족하고 살아사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아이와 함께 끊어지지 않는 밀가루를 먹으며 감격과 기쁨과 찬송에 가 득한 나날을 얼마동안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은 식구들과 더불어 굶지 않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생의 마지막 목표가 아님을 이 여인이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 게 때문에 하나님이 의식주를 채워주시는 정도의 은혜에 우리가 머물 러 서서 그것을 만족하고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 작은 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그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해 보여야 할 삶을 살것을 이 여인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내 식구들끼리 모여 잘 먹고 잘입고 만족할 만한 육신 적인 삶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십니다. 이 여인 이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때 친히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태복음 6장 2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먹고 마시는 의식주에 관계된 것, 우리의 육체에 관련 된 그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마6:11)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대하시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실것 있으니 만 족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크심이 내 삶을 통해 증거되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 더 영적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이 여인 이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18 절). 정말 엘리야와 이 여인이 상관이 없습니까얼마 전에 이 여인이 밀 가루 한 웅큼을 마지막으로 먹고 이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을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소망 의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 여인이 보았 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이 여인이 관계 없습니까 위기가 닥쳐오니 자신에게 그렇게 큰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연약한 모습 이 우리의 모습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라고 말합니다.내 죄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의 죄 때문에 자식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식과 어머니와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머니 때문에 자식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죄로 인해 자식이 영향 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고통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옛 죄가 생각났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기고 시돈 땅에 있는 각종 우상을 섬겼던 죄로 아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가 받는 유익중의 하나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배부르게 잘 먹고 지낼 때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죄가 뇌리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 통의 자리에서 깨닫게 되는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 김소월 선생과 박목월 선생을 우리는잘 알고 있습니다. 두분 다 시를 짓는데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김소월 선생이 쓴 시를 보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실패한 사랑으로이해 겪었 떤 고통을 시를 통해 토해 놓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들을 통해 가슴 을 찌르는 그의 아픔이 우리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김소월은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고통을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아름다운 글을 통 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박목월 선생은 좀 다릅니다. 그도 역시 자기의 고토을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좀 다른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생관을 그의 시를 통해 우리에 게 보여 주었습니다. "네 믿음이"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시에 서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극복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앓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앓음으로서 비로소 한밤에 일어나 자기 믿음을 가늠해 보고 애절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불러보고 간구한다. 병이 낫는다는 것은 당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 요는 당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 주여! 당신의 보혈이 핏줄마다 서리게 된다는 것 할렐루야! 당신 옷깃에 스치는 것만으로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저의 믿음으로 저를 구원하게 한 이 영원한 원리속에서 더욱 상쾌한 새날을 맞게 된다. 하나님을 알았던 박목월 선생은 고통의 의미를 알았고 고통의 배후 에서 그 고통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도 알았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고통을 통해서 한밤에 일어나 깊이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 습니다. 그는 고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되는 경험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현장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시돈땅을 2900년 전에 지배하 고있던 그 사탄이나 오늘 이 서울 장안을 장악하고 있는 사탄이나 똑 같은 존재입니다. 그 사탄이 똑같은 권능과 힘과 궤계를 가지고 오늘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고 힘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통은 그것이 어디서 왔든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임 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무장하 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그리고 이 고통을 새로운 기회 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스스로 만족해 하는 이 기적인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히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족하게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것이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 심으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만 생각하며 사는 것은 바른 성도의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때 가족과의 관계가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부부 관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돕는 배필로 사는 삶입니다. ' 어떻게 하면 내 남편 내 아내를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흠없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섬기며 이 길을 갈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에 서 가정을 섬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 추어 양육하고 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쓸만한 사람이 되도록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가정을 다스려가는 책임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 야 이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바라보며 가정을 다스려가는 책 임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사회에 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삶을 살 것인가' '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이 섬김에 동참하면서 이 영역을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개념을 더 넘어서서 가정을 섬길 뿐 아니 라, 교회와 이웃을 힘있게 섬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 엘리야를 연단시키시는 이유 = 우리가 엘리야를 통해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 또한 사르밧 여인과 별 차이가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영적 으로 무장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강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경험한 다음 그는 더 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8 장 1절에 보면 엘리야는 아합에게 보내집니다. 그 무서운 적들에게 보 내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쳐야했고 하나님이 명령을 들고 나가 싸워야 했습니다. 그 전에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권능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무 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먼저 보아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짐작컨 대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경험했던 이 여인이 지난 몇 달 동안 엘 리야를 잘 대접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말한 그대로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는 모습을 이 여인이 보았습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엘리야를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오니 엘리야를 향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 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인생의 연약함을 보아야 했습니다. 엘리 야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약함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몇달 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놓고서도 나와 상관이 없다 고 하느냐며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아도 보통 은혜를 받았 던 것이 아니고, 축복을 받아도 보통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데 이 여 자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자신과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 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보아야 했던 것은 믿음이 있음에도 불 구하고 현실의 어려움과 죽음의 고통 앞에 선 인간들이 이렇게 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당신같은 불신앙하는 여인과는 얘기하기도 싫소'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엘리야가 그 마음에 끊어 오르는 분노와 연민과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이 여인에게 아들 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합니다. 엘리 야가 기도할 때 본문에 보면 좀 이상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어떻게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그것은 그 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야가 이 아이를 위 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엘리야가 경험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앞에 담대하게 무장하여 나갈 수 있는 담력을 새롭게 회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날 들을 보게 될 것을 믿습니까 죽음의 실체가 우리 모두를 다 갈라 놓 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새롭게 발견하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 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영워한 한 가족으로 살게 하실 것을 이 기록을 통해 믿 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마음속에 가득히 채울 때,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담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죽어서 갈 영원한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지만 죽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면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부활케 하 시는 그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땅에 들이 실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더욱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성경이 증거하는 사르밧 여인의 믿음 =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을 보면 엘리야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 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여자들이 믿음으로 자기이죽은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자들 강누데 사랑한느 사람들이 죽었을 때 부활 로 다시 돌려 받았던 여니들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기록의 순서 로 보면 죽은자가 다시 권능으로 살아나는 예는 본문이 첫번째 예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수넴 여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예수님 당시에나인성 과부으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 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엘리야 가 기도했을 때 죽은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엘리야의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약 5:17,18). 엘라야가 죽은자를 다시 살리게 했던 권능의 기도를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엘리야가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 했던 그런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의 여인들 속에 오늘 본문의 사르밧 과부가 포함 될 수 있는가를 중요한 논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 기를 하나님 앞에 이렇게 원망이나 하고 있는 여자가 어떻게 믿음으로 자기의 자녀를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이 아이를 돌려받은 것은 엘리야의 기도의 응답이거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 지, 이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응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이나 다른 사건들과 함께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히브리서 11장 11절에 사라의 믿음에 관 한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사라 의 나이 89세되던 해에 세 천사가 방문하여 '내년 이맘때 기한이 이를 때에 너희가 아들을 안게 될 것이다'고 약속합니다. 그때 장막 안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사라가 바깥에서 아브라함과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찌 일어날 수가 있을 까 내가 나이가 89세인데' 속으로 비웃은 사라에게 천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웃느냐고 질책했습니다. 사라는 순간적으로 '웃지 않 았습니다.'라고 변명을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라는 천사를 통 해 '아니 네가 속으로 웃었느니라'는 책망을 그 순간에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사라가 믿음을 가졌다는 기록이 창세기에는 나오지않 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사라가 그 이후에 믿음을 가지고 아 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그 아들을 기다렸고 마침 내 그 아들을 얻었 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전한 마음으 로 믿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사라도 같은 믿음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 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똑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히브리서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여인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여 인이 아이에게 죽음이 찾아 왔을 때 그 갈등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으 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말지 어떻게 내 자식이 죽 어야 하는가' 하며,이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연 약한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엘리야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 이 있습니까"라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통에 차서 외마디 소리를 지를때 엘리야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 여이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부드럽게 그 아이를 내게 달라고 말합니다. 엘리야에게 아이를 내 놓으면서 이 여인이 심중에 '손해볼 것 없으니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동요하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않 게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넘겨 주었을 것입니다.엘리야가 이아이를 안고가 서 기도 할때 어쩌면 이 여인도 다락방 문까지 따라 올라갔는지 모르 겠습니다. 그가 간절하게 기도할 때 그 여인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이 여인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했 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35절이 '여자들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경험하는 이런 저런 외로움과 고통과 환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다고 하 더라도,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헤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이 여인의 한 조각 믿음을 보시고 죽은 아들도 살리셨던 이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앞서 떠나 갔던 친구들, 사랑하는 내 남편,내 아내, 내 자식들이 먼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을 부활로 받을 날이 다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시간이 길로 짧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고통이 크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사르밧 여인과 엘리야에게 함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와 우리 세대에 함께 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시련 당 하는 것을 이상해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때 이 편지를 받았던 성도들은 오늘 우리 중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었스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남편을 잃고,아내를 잃고 자녀들이 사자 밥이 되는 광경을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리 고 살곳이 없어서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베드로가 "너희를 시련하려고 너희에게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이 시련과 고통을 통해 너희가 강한 자가 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권면했을때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300년,400 년을 지하 카타콤 속에서 보내는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캄캄한 카타콤 속에 거하면서도 아이를 낳으면 유아 세례를 주고, 그 아이가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장례를 지내고, 죽은 남편의 몸을 바 로 그 카타콤의 벽장위에 눕혀있는 그런 삶을 대를 이어 살면서도 그 들이 당하는 고통 앞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 의 선배들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그런 확신 때문에 4세기경에 로마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오늘 이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죄,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그 고통 속 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고 통을 새로운 기회로 바꾸어 주실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작은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부끄럽게 천국으로 가는 그런 자가 아니라, 더 강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뻐 하시는 삶을 살다가 그 아름다운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성경
본문:눅 7:36-46 오늘 본문에서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몬, 한여인(창녀) 의 문제를 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서인데 예수에 대한 소문이 정말 옳은가라는 문제입니다. 관심에 대 한 것으로 정당하지 않고 비평하고저 하는 것입니다. 흠을 잡고 어떻게 해 서라도 주님을 해 할려는 의도였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문제를 안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1) 예수를 만난 시몬 신약에는 시몬이라는 동성동명의 인물이 많습니다. 여기에 시몬은 바리새 인으로 매우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 파, 쿰란파 등의 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들은 하나님을 잘 믿었으며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는 자로서 구별되게 자기를 높인 자입니다. 구별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과 그리고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시몬은 자기자신이 깊은 생각과 판단에서 그리고 행동에 옮겨 주님을 오시 기한 것입니다. 사람은,
(1) 신체적인 태어남과.
(2) 정신적인 태어남으로 사람들은 인격의 정상화가 있어야 합니다.
(3) 영적인 거듭남에서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라는 물음에서 삶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주에 관한 신비,생명,믿음,사랑,소망,의,악,멸망,죽음에 대하여 묻고 답 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떡도 먹지를 않고 포 도주를 마시지 않을때 귀신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 어 잡수시고 세리와 죄인들에게 전도를 할 때에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시몬은 자기가 예수를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니고 책잡을려는 의도가 강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생명력은 나 자신이 죄인인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 한 여인의 예수 만남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자기의 주관적인 만남인가하면 한 여인은 죄인의 신분으로 자기의 죄를 해결키 위하여 나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에 서 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씻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발을 씻은 것 입니다. 이러한 해위는 자기를 발견하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구 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배반입니다. 아담 이후에서부터 바로 발람,아간,사울,다윗,욥,가롯유다 등이 죄인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의 여인은 창녀입니다. 그가 자기의 죄를 알고 눈물로 회개할 때에 그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대낮 보다 더 밝은 예수님의 의와 거룩 앞에서 창녀는 결국 의로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던 이 여인 은 육체파의 여인으로 살았지만 예수를 만난 후에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눈물은 회개이며 기름으로 씻은 것은 죄의 용서를 바란 것입니다. 다 윗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 를 회개할 때에 요를 적시고 통회하여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창녀는 회개 할 때 주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케 한 것입니다.
3) 여인의 문제 해결 인생의 제일 무거운 죄의 짐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는데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알고 죄의 해결이 급선무입니다. 창녀를 만났을 때 시몬은 당신이 선지라면 어찌 저 여자를 만날 것입니까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 을 불러 구원시키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은 500 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 빚진 것에 대한 탕감에 대한 이 야기를 하시면서 누구가 주인의 사랑을 받았겠느냐 500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입니다 라고 할 때에 너도 이 여인과 같이 회개를 하고 죄를 사함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를 따라 처치하지를 않고 죄르 리 용서하시되 동에서 서가 먼것 같이 하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만이 구원이 있고 새 사람이 되는 참 길이 있습니다. 시몬의 초청은 결국 실패이고 창녀의 방문은 회개와 함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후 이 분의 아 들이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차가 이 아이 위를 지나갔다고 하는데 다 행히 살아났습니다. 여러가지 후유증은 있었지만 몇차례의 수술을 받 으며 다행히 다른 장애를 입지 않고 회복이 잘되어 교통사고의 악몽으 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 자 남편을 비롯해 주위의 가족들과 사람들이 안다니던 교회를 다니니 집안에 이렇게 우환이 생기지 않느냐 하면서 이 부인을 공격하기 시작 했습니다. 시간 갈수록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무사히 퇴원을 한 이후에도 교회 출석하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이일 후에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또 왜 성도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7절에 보면 이일 후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 병들어 숨이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 이일'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밀가루가 통해서 끊어지지 아니 하고 기름이 병에서 멈추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여러달 동안 경험한 후에'라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아들의몸속에 죽을 병균이 파고 들 때 막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일부러 당하게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 아이의 몸속에 어떤 균이 파고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 균을 막을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 버려 두시고 그런 큰 은혜를 경험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비탄 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모든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답은 이 여인이, 이미 받았던 작은 은혜에 만족하고 살아사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아이와 함께 끊어지지 않는 밀가루를 먹으며 감격과 기쁨과 찬송에 가 득한 나날을 얼마동안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은 식구들과 더불어 굶지 않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생의 마지막 목표가 아님을 이 여인이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 게 때문에 하나님이 의식주를 채워주시는 정도의 은혜에 우리가 머물 러 서서 그것을 만족하고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 작은 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그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해 보여야 할 삶을 살것을 이 여인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내 식구들끼리 모여 잘 먹고 잘입고 만족할 만한 육신 적인 삶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십니다. 이 여인 이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때 친히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태복음 6장 2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먹고 마시는 의식주에 관계된 것, 우리의 육체에 관련 된 그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마6:11)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대하시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실것 있으니 만 족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크심이 내 삶을 통해 증거되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 더 영적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이 여인 이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18 절). 정말 엘리야와 이 여인이 상관이 없습니까얼마 전에 이 여인이 밀 가루 한 웅큼을 마지막으로 먹고 이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을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소망 의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 여인이 보았 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이 여인이 관계 없습니까 위기가 닥쳐오니 자신에게 그렇게 큰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연약한 모습 이 우리의 모습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라고 말합니다.내 죄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의 죄 때문에 자식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식과 어머니와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머니 때문에 자식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죄로 인해 자식이 영향 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고통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옛 죄가 생각났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기고 시돈 땅에 있는 각종 우상을 섬겼던 죄로 아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가 받는 유익중의 하나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배부르게 잘 먹고 지낼 때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죄가 뇌리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 통의 자리에서 깨닫게 되는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 김소월 선생과 박목월 선생을 우리는잘 알고 있습니다. 두분 다 시를 짓는데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김소월 선생이 쓴 시를 보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실패한 사랑으로이해 겪었 떤 고통을 시를 통해 토해 놓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들을 통해 가슴 을 찌르는 그의 아픔이 우리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김소월은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고통을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아름다운 글을 통 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박목월 선생은 좀 다릅니다. 그도 역시 자기의 고토을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좀 다른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생관을 그의 시를 통해 우리에 게 보여 주었습니다. "네 믿음이"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시에 서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극복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앓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앓음으로서 비로소 한밤에 일어나 자기 믿음을 가늠해 보고 애절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불러보고 간구한다. 병이 낫는다는 것은 당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 요는 당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 주여! 당신의 보혈이 핏줄마다 서리게 된다는 것 할렐루야! 당신 옷깃에 스치는 것만으로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저의 믿음으로 저를 구원하게 한 이 영원한 원리속에서 더욱 상쾌한 새날을 맞게 된다. 하나님을 알았던 박목월 선생은 고통의 의미를 알았고 고통의 배후 에서 그 고통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도 알았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고통을 통해서 한밤에 일어나 깊이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 습니다. 그는 고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되는 경험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현장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시돈땅을 2900년 전에 지배하 고있던 그 사탄이나 오늘 이 서울 장안을 장악하고 있는 사탄이나 똑 같은 존재입니다. 그 사탄이 똑같은 권능과 힘과 궤계를 가지고 오늘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고 힘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통은 그것이 어디서 왔든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임 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무장하 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그리고 이 고통을 새로운 기회 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스스로 만족해 하는 이 기적인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히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족하게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것이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 심으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만 생각하며 사는 것은 바른 성도의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때 가족과의 관계가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부부 관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돕는 배필로 사는 삶입니다. ' 어떻게 하면 내 남편 내 아내를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흠없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섬기며 이 길을 갈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에 서 가정을 섬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 추어 양육하고 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쓸만한 사람이 되도록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가정을 다스려가는 책임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 야 이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바라보며 가정을 다스려가는 책 임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사회에 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삶을 살 것인가' '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이 섬김에 동참하면서 이 영역을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개념을 더 넘어서서 가정을 섬길 뿐 아니 라, 교회와 이웃을 힘있게 섬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 엘리야를 연단시키시는 이유 = 우리가 엘리야를 통해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 또한 사르밧 여인과 별 차이가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영적 으로 무장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강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경험한 다음 그는 더 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8 장 1절에 보면 엘리야는 아합에게 보내집니다. 그 무서운 적들에게 보 내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쳐야했고 하나님이 명령을 들고 나가 싸워야 했습니다. 그 전에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권능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무 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먼저 보아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짐작컨 대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경험했던 이 여인이 지난 몇 달 동안 엘 리야를 잘 대접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말한 그대로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는 모습을 이 여인이 보았습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엘리야를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오니 엘리야를 향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 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인생의 연약함을 보아야 했습니다. 엘리 야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약함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몇달 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놓고서도 나와 상관이 없다 고 하느냐며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아도 보통 은혜를 받았 던 것이 아니고, 축복을 받아도 보통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데 이 여 자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자신과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 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보아야 했던 것은 믿음이 있음에도 불 구하고 현실의 어려움과 죽음의 고통 앞에 선 인간들이 이렇게 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당신같은 불신앙하는 여인과는 얘기하기도 싫소'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엘리야가 그 마음에 끊어 오르는 분노와 연민과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이 여인에게 아들 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합니다. 엘리 야가 기도할 때 본문에 보면 좀 이상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어떻게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그것은 그 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야가 이 아이를 위 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엘리야가 경험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앞에 담대하게 무장하여 나갈 수 있는 담력을 새롭게 회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날 들을 보게 될 것을 믿습니까 죽음의 실체가 우리 모두를 다 갈라 놓 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새롭게 발견하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 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영워한 한 가족으로 살게 하실 것을 이 기록을 통해 믿 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마음속에 가득히 채울 때,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담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죽어서 갈 영원한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지만 죽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면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부활케 하 시는 그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땅에 들이 실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더욱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성경이 증거하는 사르밧 여인의 믿음 =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을 보면 엘리야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 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여자들이 믿음으로 자기이죽은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자들 강누데 사랑한느 사람들이 죽었을 때 부활 로 다시 돌려 받았던 여니들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기록의 순서 로 보면 죽은자가 다시 권능으로 살아나는 예는 본문이 첫번째 예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수넴 여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예수님 당시에나인성 과부으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 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엘리야 가 기도했을 때 죽은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엘리야의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약 5:17,18). 엘라야가 죽은자를 다시 살리게 했던 권능의 기도를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엘리야가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 했던 그런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의 여인들 속에 오늘 본문의 사르밧 과부가 포함 될 수 있는가를 중요한 논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 기를 하나님 앞에 이렇게 원망이나 하고 있는 여자가 어떻게 믿음으로 자기의 자녀를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이 아이를 돌려받은 것은 엘리야의 기도의 응답이거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 지, 이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응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이나 다른 사건들과 함께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히브리서 11장 11절에 사라의 믿음에 관 한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사라 의 나이 89세되던 해에 세 천사가 방문하여 '내년 이맘때 기한이 이를 때에 너희가 아들을 안게 될 것이다'고 약속합니다. 그때 장막 안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사라가 바깥에서 아브라함과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찌 일어날 수가 있을 까 내가 나이가 89세인데' 속으로 비웃은 사라에게 천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웃느냐고 질책했습니다. 사라는 순간적으로 '웃지 않 았습니다.'라고 변명을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라는 천사를 통 해 '아니 네가 속으로 웃었느니라'는 책망을 그 순간에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사라가 믿음을 가졌다는 기록이 창세기에는 나오지않 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사라가 그 이후에 믿음을 가지고 아 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그 아들을 기다렸고 마침 내 그 아들을 얻었 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전한 마음으 로 믿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사라도 같은 믿음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 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똑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히브리서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여인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여 인이 아이에게 죽음이 찾아 왔을 때 그 갈등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으 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말지 어떻게 내 자식이 죽 어야 하는가' 하며,이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연 약한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엘리야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 이 있습니까"라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통에 차서 외마디 소리를 지를때 엘리야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 여이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부드럽게 그 아이를 내게 달라고 말합니다. 엘리야에게 아이를 내 놓으면서 이 여인이 심중에 '손해볼 것 없으니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동요하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않 게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넘겨 주었을 것입니다.엘리야가 이아이를 안고가 서 기도 할때 어쩌면 이 여인도 다락방 문까지 따라 올라갔는지 모르 겠습니다. 그가 간절하게 기도할 때 그 여인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이 여인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했 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35절이 '여자들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경험하는 이런 저런 외로움과 고통과 환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다고 하 더라도,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헤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이 여인의 한 조각 믿음을 보시고 죽은 아들도 살리셨던 이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앞서 떠나 갔던 친구들, 사랑하는 내 남편,내 아내, 내 자식들이 먼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을 부활로 받을 날이 다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시간이 길로 짧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고통이 크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사르밧 여인과 엘리야에게 함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와 우리 세대에 함께 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시련 당 하는 것을 이상해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때 이 편지를 받았던 성도들은 오늘 우리 중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었스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남편을 잃고,아내를 잃고 자녀들이 사자 밥이 되는 광경을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리 고 살곳이 없어서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베드로가 "너희를 시련하려고 너희에게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이 시련과 고통을 통해 너희가 강한 자가 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권면했을때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300년,400 년을 지하 카타콤 속에서 보내는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캄캄한 카타콤 속에 거하면서도 아이를 낳으면 유아 세례를 주고, 그 아이가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장례를 지내고, 죽은 남편의 몸을 바 로 그 카타콤의 벽장위에 눕혀있는 그런 삶을 대를 이어 살면서도 그 들이 당하는 고통 앞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 의 선배들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그런 확신 때문에 4세기경에 로마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오늘 이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죄,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그 고통 속 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고 통을 새로운 기회로 바꾸어 주실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작은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부끄럽게 천국으로 가는 그런 자가 아니라, 더 강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뻐 하시는 삶을 살다가 그 아름다운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성경
본문:눅 7:36-46 오늘 본문에서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몬, 한여인(창녀) 의 문제를 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서인데 예수에 대한 소문이 정말 옳은가라는 문제입니다. 관심에 대 한 것으로 정당하지 않고 비평하고저 하는 것입니다. 흠을 잡고 어떻게 해 서라도 주님을 해 할려는 의도였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문제를 안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1) 예수를 만난 시몬 신약에는 시몬이라는 동성동명의 인물이 많습니다. 여기에 시몬은 바리새 인으로 매우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 파, 쿰란파 등의 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들은 하나님을 잘 믿었으며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는 자로서 구별되게 자기를 높인 자입니다. 구별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과 그리고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시몬은 자기자신이 깊은 생각과 판단에서 그리고 행동에 옮겨 주님을 오시 기한 것입니다. 사람은,
(1) 신체적인 태어남과.
(2) 정신적인 태어남으로 사람들은 인격의 정상화가 있어야 합니다.
(3) 영적인 거듭남에서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라는 물음에서 삶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주에 관한 신비,생명,믿음,사랑,소망,의,악,멸망,죽음에 대하여 묻고 답 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떡도 먹지를 않고 포 도주를 마시지 않을때 귀신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 어 잡수시고 세리와 죄인들에게 전도를 할 때에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시몬은 자기가 예수를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니고 책잡을려는 의도가 강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생명력은 나 자신이 죄인인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 한 여인의 예수 만남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자기의 주관적인 만남인가하면 한 여인은 죄인의 신분으로 자기의 죄를 해결키 위하여 나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에 서 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씻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발을 씻은 것 입니다. 이러한 해위는 자기를 발견하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구 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배반입니다. 아담 이후에서부터 바로 발람,아간,사울,다윗,욥,가롯유다 등이 죄인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의 여인은 창녀입니다. 그가 자기의 죄를 알고 눈물로 회개할 때에 그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대낮 보다 더 밝은 예수님의 의와 거룩 앞에서 창녀는 결국 의로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던 이 여인 은 육체파의 여인으로 살았지만 예수를 만난 후에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눈물은 회개이며 기름으로 씻은 것은 죄의 용서를 바란 것입니다. 다 윗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 를 회개할 때에 요를 적시고 통회하여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창녀는 회개 할 때 주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케 한 것입니다.
3) 여인의 문제 해결 인생의 제일 무거운 죄의 짐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는데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알고 죄의 해결이 급선무입니다. 창녀를 만났을 때 시몬은 당신이 선지라면 어찌 저 여자를 만날 것입니까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 을 불러 구원시키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은 500 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 빚진 것에 대한 탕감에 대한 이 야기를 하시면서 누구가 주인의 사랑을 받았겠느냐 500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입니다 라고 할 때에 너도 이 여인과 같이 회개를 하고 죄를 사함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를 따라 처치하지를 않고 죄르 리 용서하시되 동에서 서가 먼것 같이 하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만이 구원이 있고 새 사람이 되는 참 길이 있습니다. 시몬의 초청은 결국 실패이고 창녀의 방문은 회개와 함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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