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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성전건축 (왕상8:41-43,갈1:10,눅7:1-10)

본문

오늘의 주제는 솔로몬이 첫 성전을 봉헌할 때 한 그의 기도 (왕상 8:23-53)로부터 온 것이다. 이 기도는 이 배경안에 놓여 있지만, 그것의 언어와 정신은 바벧론 포로 후 (주후 550년 경) 에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신명기적 역사(신명기-열왕기 하)의 더 넓은 배경을 반영한다. 이 역사의 주요 주지(主旨)는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자들에 대한 신앙과 격려의 메시지로, 즉 다윗에게 한 약속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는 것이 성취될 것이고, 야웨께서 성전과 왕의 도시 예루살 렘에 계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 2성전을 위해서 돌아 오는 민족의 희망이 솔로몬이 제 1성전을 봉헌할 때 솔로몬의 입 술로 옷입혀진 것이다. 솔로몬은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를 경외하게 하 옵소서"라고 기도한다 (41-43절). 이 우주적인 희망은 포로기와 포로후기 문학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들면 이사야 40-55 장, 요나서, 스가랴 8:20-23). "이방인이 올 때" (41절):이방인 은 그의 권리가 이스라엘 안에서 율법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는 "거주하는 외국인"이 아니라(민 15:14 이하) 완전히 이스라엘의 영향권 밖에 있는 자들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41절):이방인 은 우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에 매혹되어서 온다. 구약에서 "이름"은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본질과 품성 (특징;character)을 의미한다 (신 12:5-21, 왕상 8:27-30 참조, 또한 오순절 후 첫째 주일, 즉 삼위일체 주일에 있는 설교를 위한 해석 참조). "이름", "영광", "얼굴"과 같은 용어에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근(遠近)을 표현했다. 주님은 성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 라, 그의 구원하시는 현존이 거기에 있다. "주의 능한 손과 펴신 팔"(42절):능한 손과 펴신 팔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부터 구원 해 내심을 서술하는 고전적인 표현이다(출 3:19, 6:1, 6, 13:3, 9, 16, 15:6, 12, 신 4:34, 6:21, 7:19, 9:29 참조).
그러므로 이방인이 오는 둘째 이유는 그들이 출애굽 해방의 구원하시는 주 님을 듣는 것이다.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를 경외 하게 하옵시며" (43절) 이방인이 오는 것은 만국을 지배하는 이 스라엘의 주님의 통치에 대한 전주곡이다. 주님에 대한 경외 (fear)는 심리학적인 놀라움이 아니라 경외하는 자가 거룩한 자 앞에서 경험하는 것이다(출 3:6 참조). 복음서 주제와 이 주제의 연관은 명백하다. 둘의 경우 모두 다, 주님의 현존과 구원하시는 능력에 매혹되어서 이방인이 몰려 온다. 제 2주제:갈라디아서 1:1-10 다음 여섯 주일 동안은 서신에서 갈라디아서가 본문으로 채택 된다. 이 서신은 종종 그리스도인 자유의 대헌장(Magna Charta) 이라고 불려졌고, 루터는 이것을 "내가 약혼한 나의 서신"이라고 부렀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적대자들과 투쟁하면서 그의 "복음" 의 주요 주제들을 다듬어 결론 짓고 있다. 이 주제들은 로마서에 서 확대되고 재조명되어 취급되고 있다(갈 2:15-21은 실질적으로 로마서 1-8장의 윤곽이다). 이 서신은 어투가 논증적이다. 즉 일 반적인 감사 대신에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1:6)로 대치된 것:"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릇되게 하는" 자들에 대한 관계 (1:7);"어리석은 자" (3:1)로서의 갈라디아인의 특징 등이다. 적대자들의 정확한 정체 (正體)는 불분명하다. 한편 그들은 사도라고 하는 바울의 권리를 공격하고(1:11-16), 바울에 의해 개심한 자들에게 유대주의적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려 하는(2:12-3:5, 4:9-10, 5:2) "유대주의화된 자들"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바울은 그들에 의해 자유가 잘못 사용되어지는 경향성을 비판한다(5:13 이하). 적대자들이 유대주의화된 자들이든 영지주의의 색채를 띤 지역의 파당적 집단이든 바울이 그의 신앙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 적 문제와 함께 생생한 대화로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에 대해 가 장 강력하고 깊이 있는 반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다. 이 서신은 서론(1:1-9),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의 복음에 대한 바울의 주장(1:10-2:21),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성서적 증명(3:1-4:31), 그리스도 인의 자유 안에서 이 의롭게 된자의 결과(5:1-6:10), 그리고 결론(6:11-18; 핏츠마이어의 제롬 성서 주석
II권 238페이지 참조 'Fitzmyer, Jerome-Bibical Commentary, II,238'으로 분류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 후서, 골로새서에서 자기 자신을 사도로서 지칭하면서 소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서 단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자격을 덧붙인다. 이 당시의 언어에서는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 즉 일정한 일 (법적, 예언자적, 혹은 선교적 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충분한 권위를 가진 더 높은 권력자에 의해서 파송된 대리인(대표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바울은 그의 복음과 그것을 선포하는 권 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다 뿌리를 둔다(갈1:12, 고 전15:8). "은혜와 평강" (3절):이것은 메시야시대의 미덕에 대 한 바울의 표준적인 공식이다(갈6:15-16 참조, 삼위일체 주일의 제 1주제와 오순절 후 일곱째 주일의 복음서 주제 참조).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4절):이것은 이 서신의 탁월한 주제, 즉 예수님의 자기 자신의 내어 줌, 곧 비워 놓음(emptying)을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 (갈2:20, 빌2:7-8참조).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교사로서 자기 자신을 보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의 십자가의 사건을 놓치지 않는다(갈 6:14). 서론의 마지막 귀절들에게 (10절은 전환하는 귀절이다)바울은 오직 하나의 진정한 복음이 있을 뿐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자들 (9절)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서술함으로써 전(全)서신 의 어조를 결정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선포하는 행 위(빌4:15, 고후2:12, 8:18)인 동시에 선포의 내용, 즉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는 그의 권리와 선포의 내용 둘 다를 옹호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둘 다 예수님의 능력있는 행위(이적들) 가 광범위한 설교(마태복음5-7장, 누가복음6:20-49) 뒤에 따라온다. 복음서의 이적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현존과 세시대의 시작을 지적하는 표적들이다(눅 4:16-30, 오순 절 후 세째 주일의 복음서 주제의 주석과 설교를 위한 해석 참 조).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는 마태와 누가복음에 공통된 자료로 부터 온 것으로(Q), 각 설화에서 상당한 변형이 있지만-누가복음 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백부장에게 말하지 않는다. 또한 누가는 유대인들에 대한 준엄한 말을 생략한다(마 8:11-12)-두 복음서 기자 모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7:9, 마 8:10)라는 말로서 이 설 화의 높은 면을 본다. 이 설화는 매우 오래된 전승을 나타내며 요한 복음 4장 46-54절(신하의 아들의 치유)은 같은 전승의 변형 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3절):열왕기 상 8장 41절 이하의 이방인처럼 백부장(이방인 관리)이 예수님에 대해서 "듣는다." 사철단이 치유해 달라는 간청을 가지고 간다. 예수님께서 집을 향해서 출발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사절단이 백 부장의 반응을 가지고 온다:"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것은 단지 겸손에 의한 거절일 뿐만 아 니라,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백부장의 민감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7절).이스라엘 중에 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9절):이 설화의 핵 심은 이 귀절들에서 발견된다. 복음서의 치유 기적들의 거 은 이 믿음과 치유의 결함에 있다(중풍병자, 막 2:5, 마 9:2, 눅 5:20; 예수님의 옷을 만진 여인, 막 5:34, 마 9:22, 눅 8:48; 야 이로의 딸, 막 5:36, 눅 8:50; 두 소경, 마 9:29; 소경 바디매 오, 막 10:52, 눅 18:42; 간질병 아이, 막 9:24; 가나안 여자의 딸, 마 15:28, 열 문둥병자, 눅 17:19). 이 결합은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믿음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믿음을 제시한다. 이 믿음은 하나의 "듣는 것"이다(7:3) ;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실뢰이며 (7:7), 하나님의 도움 을 꽉 붙잡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힘들 로부터 그를 해방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 거리에서 의"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 에 대한 믿음의 표본 (paradigm)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이번 주일 본문들의 주제는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계속 적인 뻗어나감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설교를 위해 밖으로 나 가는 공동체이다. 그것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포괄적이다. 그 것은 특정적이 아니라, 우주적이다. 성서의 귀절들을 우리는 종 족의 신 (tribal god)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속한 한 분이신 하나님 (One)을 예배한다 라고 명백히 나타낸다. 이 점은 특수한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각 단화(單話, pericope)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제 1주제에서 그것은 이방인 에 대한 유대인의 관계이다. 제 2주제에서 그것은 유대인 그리스도교인과 이방인에 대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그것은 이교도에 대한 예수님의 관계성이다. 각 경우에 있어서 메시지는 명백하다. 즉 하나님은 어떤 집단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민이 그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제 1주제 솔로몬의 기도는 최소한 펼쳐서 설명한 가치가 있는 두개의 주 요 사상을 나타낸다.
첫째, 오늘날의 주요 주제와 일치하여 그 기도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무엇을 말한다. 야웨는 단지 이스 라엘 백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땅의 만민을 위한 하나님도 또한 되신다. 즉 "이방인들"도 그를 부를 것이라는 것이다. 포괄성과 배타성-보편구원설(universalism)과 특수은총설(particularism)-사이의 다툼은 일찍부터 있었고, 끊임없이 대대로 물려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시며, 어떤 일부의 사람이나 집단에 제한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성서적 종교의 검증표(hallmark)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실제적으 로 결코 우리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재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의 것이고, 또한 모든 사람들도 그의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항상 "이방인들"을 환영해야 한다는 것 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이든, 우리 주위 에 있는 소수민족이든, 지위가 없는 사람이든 이 모든 사람들은 교회에 속하고 교회는 그들에게 속한다. 다른 사상은 성전 자체를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오늘날의 주제를 골라내는 다른 한 방법이다. 성전-혹은 교회-은, 예배하는 공동체가 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본질을 선포하기 위해 서 모이는 장소이다. 이것은 거기에서 행해지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며, 그것은 만민이 초청되어지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공통된 우상숭배의 하나는 교회는 배타적인 크럽으로서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예배할 목적으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들의 집단에게 속한다는 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께 속하고 모든 사람들은 거기에서 환영되어 진다. 제 2 주제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자유(freedom)를 취급한다.
이 특별한 귀절에서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간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자들에게 선교한 것처럼 오늘날을 위한 주제가 펼쳐 진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덧붙여서 그리스도 인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확신을 가졌던 유대주의화된 그리스도인들의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바울이 취급한 문제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가라는 것이었다. 여기 에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의 주제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국외 자", 즉 지금 이방인의 가치에 대한 강조를 본다. 배타성의 위험성에 대한 주제들의 반복되는 강조와는 별 문제 를 하고, 설교자는 "다른 복음"에 대한 현대의 상응하는 것들을 생각할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다른 복음들은 어떤 것일까 많은 것들이 마음에 떠오르겠지만 확실히 인종차별보다 우리 시대에 더 유력시되는 것은 없다. 어떤 이단(異端)들이 인종의 장벽을 지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장되어져 왔는가 그렇지 않으면 시민의 종교를 살펴 보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의 위장 하에 있는 국가와 결합시키려고 시도했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의 종파가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회상시켰던 것처럼 이 메시지는 우리가 세속적인 이설(異說)에 의해서 잘못된 길로 유혹을 받을 때 우리에게 명백한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자체 안에서까지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보 다 더 율법을 오히려 강조하는 복음의 변질들이 있다. 의식, 예 식규정, 교리, 규칙들이 포괄적이고 우주적이라기보다는 배타적 이고 특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의 숙고를 위한 두 개의 다른 가능성들이 이 귀절들 안 에 있다. 하나는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다루는 것이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처럼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온 것 이 아니라고 강열하게 강조하고자 한다. 다른 서신들에 있는 비 슷한 귀절들과의 비교는 사도적 권위에 대한 바울의 위임권한의 본질을 지적해 줄 것이다. 사람이 성직자의 수임에 대해서 설교 의 취급을 위해서만 이것을 정당하게 간주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인사말 밑에 있는 근본 주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 효하다. 이 귀절에 있는 다른 주목할 만한 사항은 바울이 그는 그리스도의 노예, 즉 종이라고 지적하는 결론이 귀절이다(1:10). 매우 좋고, 명백하기 때문에 이 두 용어는 우리 시대에 의심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 사상은 너무나 강열하 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거부한다면, 설교자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헌신의 명령을 구체화할 필요성을 볼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완전히 헌신할 자 들에게 제자직이 치루어야 할 희생에 대한 유일한 하나의 현대적 표본이다. 복음서 주제 예수님은 끊임없이 "국외자"(outsiders)와 어울리셨다.
그는 버림받은 자, 창녀, 이방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종교적인 기존 권위 체제의 분노와 부딪쳤다. 이 귀절에서 그는 이교도인 백부장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군인은 유대인들에게 동정적이 었고, 그들의 지역 회당을 짓는 데 도와주었지만, 그렇지만 그는 비신앙인이었다. (이 귀절에서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께서 논쟁 하셨던 산헤드린의 회원과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람들은 단지 유대공동체의 지역 지도자 들이었다.) 오늘날의 주제, 즉 다른 사람에게 손을 펼치는 것이 다시 한번 강조되어진다. 예수님은 그의 전 사역을 통하여 비신 앙인과 교제하셨고,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셨다. 누가복음 5장에 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가 되도록 불렀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도전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여전히 그 하시고, 의인들은 여전히 당황하고 있다. "국외자"의 신앙, 신앙이 없는 신자, 혹은 칼 라너(Karl Rahner)가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으로 서술한 것은 이 귀절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교 설교의 풍부한 광 맥이다. 그 군인과의 짧은 만남은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그의 권위의 범위를 극적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백부장은 접촉점 (point of contact)으로서 자기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한다. 복음 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의 권위는 종종 믿음밖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인정되기 전까지도 있다. 우물가의 여인, 치유받은 문둥 병자, 마귀에 사로잡힌 자들, 이 모든 자들은 그들이 신앙인의 공동체 밖에 있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증명했다. 이 단화(單話) 안에 있는 다른 실마리는 아들의 치유와 관계 되어 있는 믿음의 본질이다(믿음과 치유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 을 보라. 설교자는 오늘날 믿음의 치유 능력에 대해 조명해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백부장에게서는 비신앙인의 믿음을 본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서는 어떤 신앙의 징조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들 자신의 믿음이 없거나, 그들의 치유는 가능 케하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 없거나, 그들의 치유를 가능케하는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존되어 있는 자에게까지도 있었다. 거의 믿음이 없거나 전혀 없는 자에게까지도 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안에서 강력하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사랑의 포괄적인 본질을 강조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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