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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없다 (삼상24:1-22,마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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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독일이 전쟁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독일군이 적군과 접전하게 되어 포탄으로 패 인 구덩이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는 거기 엎드려 있는 영국 군인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잠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칼로 찌를까 하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자세 히 보니 영국 군인은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 상처가 독일 군인의 마음을 녹 였 습니다. 그는 그 부상당한 영국 군인에게 자기 물병을 꺼내어 물을 마시게 하였고, 부상병은 그 에게 감사의 눈짓을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에 영국 군인은 그에게 자기 윗주머니를 열어 달 라 고 손짓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의 가족 사진이 나왔습니다. 그는 자기 가 족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영국 군인이 죽기 바로 전 순간 독인군은 그에게 가족 사진을 들어 보여 주었습니다. 처음 독일군이 상대방을 발견하였을 때는 영국 군복을 입은 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상당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가족 사진을 보았을 때 상대방은 적이 아니라 아내와 자녀와 부모의 사랑을 받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 순간 한 평 범한 인간의 실체를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사무엘서의 이야기에 보면,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 쫓겨 도 망 다니다가 우연히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를 죽여버리면 도 망 다니지 않아도 되고 또 왕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윗은 사울을,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로 보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빼었던 칼을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3천 명이라는 엄청난 군대를 거느린 사울 왕에게 쫓기는 몸이었지만, 그런 급박 한 순간에서도 그를 하나님의 기름 부은 사람으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 왕 은 끝까지 원수나 적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 부은 받은 자였습니다. 다윗은 그 후에도 계속 쫓 겨 다녔지만 결코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 를 위해 애도하였고, 그 자손들까지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 왕은 결코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원수나 적은 누구일까요 신약성경에서 원수에 대해 사용된 고대 희랍어 용어가 "미운 "이란 형용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계명은 실제로는 "네가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원수나 적은 다분히 내 감정에 좌우된다는 말 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란 다분히 주관적 견지에서만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라는 무슨 특 정한 유기적인 실체가 무슨 생물의 종이 존재하듯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원수도 되고 친구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처음 다윗을 보았을 때는 어린 소년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때려 눕 혔 을 때 그를 사랑해서 자기의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는 순간, 사울의 생각은 갑자기 바뀌어 다윗 이 자기의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경쟁자 내지는 원수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기회만 있으면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해서 적대감 을 갖지 않았는데 사울 왕은 그를 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 반 대 였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신과 경쟁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 이 다윗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가장 친한 친구로 그들은 늘 만났던 것 입니다. 생각에 따라 다윗은 사울 가족들에게 있어 원수도 되고 친구도 되었던 것입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핑퐁 외교를 통 해 서 중공과 외교관계를 열기 전에는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들의 관 계 를 적대적인 관계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즈음 공산권과 경제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우리 의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소련 축구 선수가 우리가 주최하는 국제 축구대 회 에 참가해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달라졌습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 가 된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우리의 생각 속에 적으로 남아 있던 나라들이 오늘은 이웃으로 바뀌 어 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언제 또 우리의 적으로 바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렇게 적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며 주관적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나 국가를 막론하고 자신의 입장을 보다 유리한 입장에 놓기 위해 자기가 적이라고 생각한 상대방 을 객관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만의 적이 아니고 모두의 적임을 증명하려고 애 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적들을 비인간화시킵니다. 저들은 야만적이며, 무자비하며, 마귀의 화 신이라는 인식을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심어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갖는 태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북한의 소식이란, 저들이 저지른 온갖 나쁜 행위에 관한 것뿐입니다. 우리 정부는 기회가 있는 대로 그런 소식을 널리 국민들에게 알려서 반공의식 을 투철하게 갖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대감을 날마다 더 날카롭게 갖도록 만드는 것 입니다. 이런 상황은 북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한은 거지떼들로만 가득찬 곳으로 그 곳 주민들에게 인식을 심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적대감은 아주 극단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들은 도저히 대화할 수 없는 악독 한 종자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전쟁 중에 있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적을 비인간화시켜야 하며, 만일 그렇 지 않다면 여러분은 살인자가 될 것이다." 상대방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내가 나쁜 놈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들추어내어 상대방을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러 나 요즈음 신문에 가끔 실리는 북한 소식란에 보면 저들의 문화 소식, 사회 소식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북한에도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또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인간적인 면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조금씩 알게 되면 북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니까 정부는 이제까지 북한에 대한 정보를 봉쇄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정부가 전해 주는 것 이외의 것은 알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적대 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들의 공통적인 정책입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뉴스 또는 문화적 교환을 고의적으로 또는 사실상 금지 당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장 알 수 있게 되는 실제적인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북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사회가 더욱 폐쇄적인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입니다. 그러나 개방적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전혀 북한 실정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 도, 아니 어쩌면 우리들 스스로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 게 되면 적대감이 감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적대감을 증대시킨다는 것은 정권 유지에 있 어 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가능하면 그 적대감을 조장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알 것은, 우리는 우리의 적들을 신학화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적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적들이라고 가정을 한다는 말입니다. 일차 대전을 일으 켰 던 독일의 병사들은 그들의 혁대 버클 위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새겼습니다. 알라 신을 같이 믿는 이란과 이락크는 서로 그 알라신이 자기네들과 함께 한다고 믿으며 끝없는 전쟁 을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이 대한민국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기도 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의 적들과 하나님의 적들을 동일시하는 많은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시 139:21-22)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이 모두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 수 르와 애급을 불러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깨닫게 하 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적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하나님의 적들이라고 우리 자신들에게 확신시키려고 할 때 그 근거가 대단히 빈약할 수밖 에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확신시키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북한이 우리의 적인데, 이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다 부셔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 의 적이기도 하다고 말을 하지만, 그 성경적인 근거는 빈약합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에게 주시는 채찍이라고 답변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의 도구들일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결국 문제는 우리 자신들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적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악이,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탐욕이 원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죄인 됨이 바로 우리로 원수관계에 놓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적, 우리에게 가장 큰 손해를 입히는 자를 내쫓고 싶어 한 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내쫓고 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보 다 더 파괴적인 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죄를 모 르는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원수는 없습니다. 나를 때리고 괴롭히는 자가 있어도 울뿐이지 미 워 하거나 원수로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어린이의 심정으로 십자가에 달리셔 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자 기가 돌보아야 할 양 떼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원수를 만들어 내는 모든 차별을 극복하시고 하나되 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차별을 조장하고 적을 만들어내는 악을 소멸하셨기에 이제 그 리 스도 안에서는 다시는 원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일 뿐입니다. 그것은 물론 믿는 사람 끼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까지도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고 해서 그 원수에게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 사랑 하라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 사랑을 하여도 상대편은 여전히 미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상태 로 계속해서 나를 원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 께서 주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건전한 정신을 주십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 충만한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인자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원수로가 아니라 내가 사랑 해 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악을 제하시므로 말미암 아 우리로 상대방을 어떤 가식과 탈을 쓴 인간이 아닌 순수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인 인간 으로 보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사랑 을 해도 여전히 우리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극악한 무리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에 대한 심판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 야 만 됩니다. 그들의 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저들을 사랑으로 만날 의 무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들을 좀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들을 비인격 화 시키던 과거의 생각에서 탈피하여 저들을 인간으로, 같은 동포로, 같은 형제로 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통일의 노력은 현재로는 상대방을 설득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설득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 자신 속에서 적대감을 뽑아 버리고 대신에 사랑 을 집어넣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통일의 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원수나 적은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적대적인 관계로 치 닫 고 있는 이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에게 미워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움과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용기로 오늘의 두꺼운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하겠습니다. 북녘 땅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와 함께 있는 이 땅의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교회들이 먼저 그릇된 적대감을 해소하고 사랑의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의 운 동에 언제나 앞장 서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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