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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은사를 사모함 (고전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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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가깝게는 은사로 인해서 분열된 것이기 때문에 그 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분열과 손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편으로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분열이 되었고, 또 음행(淫行)으로 교회를 손상시키게 되었습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다가 세상의 판단거리가 되 었습니다. 그리고 결혼과 이혼의 문제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로 또 분열이 되게 되었습니다. 또 권위의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애 찬의 문제로 서로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심지어는 은사들 때문에도 분열 이 났습니다. 은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니까 그것 자체 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마저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분열을 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시끄러운 문제가 생겼는가 이것은 생명이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 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육신과 사탄과 세상이 아직 처리 되지 않아서,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 습니다. 세상 문제, 육신 문제로만 분열된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통해서라도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미숙함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일로 분열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하나님 문제로 분열되었다면, 예수냐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로 분열되었다면 이것은 신성하고 좋은 것 가지 고 분열이 되었는 것이지요,. 또 성경을 가지고 분열이 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성경 때문에 분열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에 속한 문제이든 지 아니면 영에 속한 문제이든지, 또는 성서의 문제든지 아니면 비성서적인 문제든지, 율법의 문제든지 아니면 자유의 문제든지 어떤 것이든 분열이 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개한테는 이것을 주나 저것을 주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수준이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것을 줘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에게 춥다고 방석을 깔아 주면 좋은 방석 깔아 주었다고 더 아끼거나 나쁜 방석 깔아 주었다고 시시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었다고 해도 자기 수준으로 받기 때문에 결국은 다 물어뜯고 말아 버립니다. 개가 그 수준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비단을 깔아 주나 면을 깔아 주나 나일론 천을 깔아 주나 맨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은 무엇을 줘도 자기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에 분열할 수밖에 없고 분쟁 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교회를 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잘 배우거나 교양을 쌓아서 고쳐 보려고 하는 것이 교육(敎 育)입니다. 아무리 고쳐 보려고 해도 본성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교육받은 개 나 받지 않은 개나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교육받은 개나 교육받지 않은 개 가 다른 것 같지만 본성이 같기 때문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대학생 아담이 나 고등학생 아담이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으로 입학하면 아담으로 졸업하는 것 이지 그리스도로 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교회는 비록 아담으로 입학해 도 그리스도로 졸업하게 되니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학위를 받고 나 와도 아담은 그대로 아담이니까 사람자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결국 생명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라도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바로 '생명의 미숙(未熟)'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같이 생각하고 어린아이 처럼 살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서는 내가 어린아이 일을 버렸다.' 그렇게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장난감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가장 큰 문젯거리 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오락기를 살 수 있나, 이것이 심각하고도 중요한 관 심거리입니다. 그러나 크게 되면 자기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고 시시하게 됩니다. 오직 성장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안되고 교육을 해도 안됩니다. 오락기는 좋지 않다, 무가치하다고 아무리 말해 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빨리 자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그러면 빨리 중학생이 되어야 하고, 중학생이 그러면 빨리 고등학생이 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아무리 억제 한다고 해도 자기 속에는 이해가 되질 않기 때문에, 설령 어떤 환경 때문에 못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서 무익한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못하 게 되었다는 것이지 자기 속에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교육에 의해서 분열의 문제나 손상의 문제를 억제하 고 있다고 하더라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지 본성상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 니기 때문에 결국은 자라나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성장하는 것밖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일을 버리려면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어린아이 일을 버리게 되지 그렇지 않고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 아담을 처리하고 그리스도로 바꾸기를 원하고 계시고, 어린아이를 장성시 켜서 어른이 되게 하려 하십니다. 교회는 적어도 그것이 아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니까 이것을 아담이라고 볼 수는 없고 생명의 미숙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이 미숙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하는 사람은 방언하는 사람과 분열되고, 방언 하는 사람은 병 고치는 사람과 분열되고, 이렇게 모두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하나인데 지체가 많지 않느냐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가 아 니냐 그런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체가 여러 가지이지만 몸은 하나다. 오늘날도 우리가 기독교적인 상황을 보면 다 필요한 것일 줄도 모르는데 꼭 자기 것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정통인가를 찾고 있고, 어떤 것이 완전한 것인가를 찾고들 있습니다. 손만 있다고 완전하겠습니까 팔만 있 다고 완전하겠습니까 손 하나가 아무리 온전하게 있다고 해도 다른 지체가 병 들어 있다면 그 사람은 병신인 것입니다. 발이 차범근처럼 좋은 발이라 해도 팔 이 병신이면 병신인 것입니다. 발만 유명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정통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그것이 과연 정통인가를 묻습니다. 정통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볼 때는 그것이 지체 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은 손인데 어느 것은 발일 수도 있고, 어느 것은 발인데 어느 것은 손일 수도 있는데 사람은 자기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아집에 빠져 있습니다.
결국 손은 손으로서의 역할이 있고 발은 발로서의 역할 이 있어서 그것은 서로 다르지만 몸을 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주를 위하고 있다. 그리고 근원적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고 있는데 각자 자기에 게 부여받은 은사를 따라서 자기가 몸을 위해서 봉사하면 될 일인데 그것을 가 지고 서로 판단하다 보니까 분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손은 발을 판단하고 발 은 손을 판단하고 그러다 보니 몸이 갈라지게 되었고 찢기우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유일한 교회는 천주교뿐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도 마찬가 지로 '천주교는 사탄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개신교는 개신교 안에서 정통 은 하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자기들만이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미숙한 상태입니다. 생명이 미숙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잘 노는 것 같아도 각자 자기 멋대로 노는 것입니다. 잘 놀아도 연합된 것이 아니고 각자 멋대로 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미숙은 연합 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가 교통이 되질 않고 자기대로 떠들고 노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대로 떠들고 노는 곳이 아니고 생명이 점점 성숙해서 연합해 이 르는 것입니다. 지체는 몸을 위하고 몸은 주를 위한 것이다. 팔은 발이 왜 중요 한가를 알고 발은 왜 팔이 중요한가를 알면서 한 몸안에서 그것이 연합되어서 주님을 위해 가는 것이 성숙해 가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 은 길이다.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인가 그리고 사랑은 왜 더 큰 은사인가 물론 세상에서도 사랑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사랑은 건축(建築)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은사들은 건축하는데는 별로 유익이 없다. 그리고 건축에 유익을 주는 은사라도 사랑만큼 건축에 유익을 주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건축은 연합입니다. 우리가 건물을 짓는 것은 전부 연합하는 것이니 까, 연합하게 하는데는 사랑보다 더 좋은 은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도 중요하고 예언하는 은사도 중요하고 방언 하는 은사도 중요하고, 각기 특색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건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병을 고치는 은사가 있다 해서 교회가 건축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시 말하면 우리가 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발과 손을 연합하 게 하지는 못합니다. 큰 자와 작은 자를 연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잘난 자와 못난 자를 연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어서 미래를 다 알고 남이 모르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교회를 건축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즘의 한국 교회를 보니까 그런 것이 많아요. 아무개 목사님이., 아무개 장로님이, 아무개 권사님이 예언하는 은사가 있다더 라. 하면서 무슨 일만 생기면 물어 보려 갑니다. 이것을 해야 합니까,안해야 합 니까 심지어는 이사를 가야 합니까, 안 가야 합니까 이런 것들도 하나님께 물 어 봐야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다 그랬지요. 이사를 갈려면 어느 날에 가야 하는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일일이 점쟁이한테 물어 보고 갔습니다. 요즘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모든 것을 예언하는 은사 받은 사람에게 물어 보려고 합니다. 대학은 어느 대학을 갈 것이며, 직업은 뭘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찾아가서 예언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 한다고 하면서 행사마다 해야 할 것을 얘기해 주면 하나님은 이 길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하면서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런 풍조가 만연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아서 그런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라서 그런지 잘 모 르겠으나 하여튼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그렇게 하는 사람 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한 은사인줄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해 주고, 미래를 예언해 주는 것이니까 필요한 일인 줄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왜 바울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는가 그것은 교회를 건축하는데 별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알아보고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지 교회를 건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서로 연합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연합시키지도 못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연합시키지도 못하고 선생과 제자를 연합시키는 것도 아 니고 무엇을 연합시키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필요한 일이 되더라도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방언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예언하는 것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몸을 내어 주어 불사르게 하는 순교적인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중 요하지 않습니다. 몸을 세우는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연합하는 데 유익이 되 질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바쳐 순교를 했다면 놀라 운 일이지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연합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유대인 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건축하는 관점에서 사랑은 가장 큰 은사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건축한다고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가장 중 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여러 가지 기능이 있겠지요. 어떤 이는 돈을 잘 벌고, 어떤 이는 살림을 잘 살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서로 엮어지 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기능이 우수하더라도 그것이 가정이 되질 않습니다. 남 편은 유명한 어떤 기능이 있어서 세상에서 알려진 사람이고 아내도 어떤 유명 한 기능이 있어서 세상에 잘 알려진 사람이라도 둘이 만나면 밤낮 싸운다고 한 다면 세상에서는 유익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자리에 가서는 무익합니다. 연합 이 되지 않으니까 무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은사라 했습니다. 은사는 모두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 하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준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서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라 했는데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 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원'은 바로 연합(하나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하나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그 기능들 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원은 연합하는 것이다. 그 기능들도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차범근의 다리는 축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 보통 사람들의 다리는 축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을 위해서 있습니다. 알리의 주먹은 권투를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먹은 권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을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먹을 줄 때는 권투를 하라고 준 것도 아 니고, 누구를 때리라고 준 것도 아니고 몸을 위해서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몸 을 위해서 준 것을 잠깐 다른 것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구선 수의 발이 안되다 하더라도 축구선수의 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몸을 세 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 발이 축구장에서는 유명한 발이지만 내 몸에 돌아와서는 무익하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축구장에 가서 한번 차기만 하 면 골인을 하는 발이다,
그런데 자기 몸을 괴롭게 한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 까. 항상 축구만 차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축구를 하는 것까지라도 자 기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축구장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밤낮 쑤시고 아프고, 온 몸을 괴롭게 한다면 그 발은 차라리 축구를 안하는 것만 못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몸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 은 사 자체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안다면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주나 능력 그 어떤 것도 전부 다 그것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 니고 그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은사도 그것 자체를 위 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을 위해서 있습니다. 몸을 위해서 있는 입장으로 볼 때 사랑은 가장 큰 은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데서도 사랑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회사에 가면 사랑보다 능력이 중요합니다. 기업체에서는 사랑 있는 사람보 다 유능한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몸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유능한 사람 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신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로 연합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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