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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적극적인 구속 (엡1:7-10)

본문

오늘은 본문 중에서도 7절의 구속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6절까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목표가 얼마나 높고 영광된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이어서, 7절에서는 그러한 어마어마한 축복들이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하는 대목을 다루게 됩니다. 어떤 과정과 어떤 방법으로 그 놀라운 경지에 까지 다다르게 하시는가 하는 대목을 다루는 겁니다. 이에대한 해답으로 성경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했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다른 뜻으로 보면, 구원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거나 애써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많이 오해되어 있음을 간혹 느낍니다. 이게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납니까 ‘아니, 저런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런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합니까’ 또는 ‘저 사람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 아닙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 속에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 찍혀 정해져 있거나,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전제가 깔려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다시말해 구원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사실 구원이 가능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인생은 구원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말할때 항상, 우리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우리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본론> 우리가 가장 많이 오해되는 것중에 하나가 산상설교일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화평한 자, 이런 것들은 전부 영적으로 거듭나야 가능한 것들이지,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고 구원받은 것을 전제로하여 신앙의 요구를 합니다. 엄밀히 말해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신앙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신자로서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을 행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는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아예 지옥갈 사람이요, 저 사람은 천국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도덕성이 뛰어나면 천국을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은 복음적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옥가는 착한 사람이 있고, 천국가는 악당이 있습니다!’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는 예수를 믿느냐 안믿느냐에 다렸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셨느냐 허락하지 않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그가 착했느냐 악당이었느냐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착하면 얼마나 착합니까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은혜입니다. 구속이란 말은 ‘속전을 주고 구출한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종은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그 종을 주인에게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할려면 돈을 주고 그 사람을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속이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구속이란 그가 지금 처해있는 곳에서 그냥 꺼낼 수는 없고 그를 꺼내기 위한 무슨 대가를 지불해야만 되는 처지에 있는데 그 댓가를 지불하고 거냈습니다. (고전6:19-20)“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뭐라고 합니까 값으로 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산 셈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6:37-39)“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런데 이렇게 그 댓가를 지불하고 꺼냈을 때는 이미 새로운 목표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냥 생각도 없이 꺼집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제 구원받았고, 선택받았으니, 천국은 확복된 것이고, 세상에서 좀 즐기고 재미 보다가 쉬엄시엄 가면 되겠구나! 하면서 계산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죽음의 자리에서 꺼집어 내 놓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가야할 거룩한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받을 것입니다. 가야할 방향을 듣고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면 됩니까 물론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자의 미련한 것은 채찍으로 벗겨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예수 믿고난 이후의 생애에 그토옥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텐데요 뭐!’ 하면서 입앞에 떠올려 준 밥도 안먹습니다. 이때 보통 어떻게 해야 먹습니까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면 먹습니다. 그러면 얼른 먹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고난 이후에는 우리가 먹고 마셔서 양육 받아야 할 방향을 빨리 못잡으면, 고달프게 되어서라도 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군대 입대했을때, 첫시간에 교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트기는 왜 빠른가’ 그래서, 한 훈련병이 ‘제트 엔진은 프로펠라 엔진에 비해서 어쩌고 저쩌고.’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교관은 피식 웃으면서, ‘웃기지 마시라!’고 한 다음, 정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트기는 꽁무니에 불이 붙어서 빠르다! 제군들도 이제 곧 제트기가 될 것이다!’ 하면서, 엉덩이를 사정없이 냅다 걷어 차는데, 안빨라지는 용사가 없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이 강대상 속으로 다 들어가라고 해도 다 들어갑니다.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에서 나태하고 고집을 부릴때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간섭하셨던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늘 확인되어 져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이래서 이제 우리 구원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갑니까
(롬8:18-23)“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분명히 여기서 우리의 구속의 방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우리 몸이 변화되는 데까지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그 과정에 시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완성을 향한 시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엄청난 신분으로 바뀌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 자녀답게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시련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겪는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구속의 완성을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고전1: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여기서 사용한 구속이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의로와 진다거나,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으로 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속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완성된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속은 분명히 죄사함 정도는 아닙니다. 구속은 죄사함보다 훨씬 더 큰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말하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씀 속에는 구속의 시작과 완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작에서부터 완성까지 전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요, 거룩의 문제요, 하나님과 화목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그러면, ‘아니, 어디 당신 내가 거짓말 하는것 봤어!’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이런 식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죄란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관계를 맺게되면 귾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며, 가장 깊은 자리에까지 가는것이 구속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렸을때, 여러가지 부수적인 결과들이 생깁니다. 이때 사람들이 이 근본적인 문제로 해결하지 않고 부수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므로 스스로 모순과 함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정신 이상자로 입원한 환자들을 퇴원시켜도 좋은가, 안좋은가를 판정내리기 위한 여러가지 판정 방법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이렇답니다. 환자를 수도 꼭지가 많이 달린 공동 세면장에다 데려다 놓고 모든 수도 꼭지를 다 열어 물이 나오게 한 다음, 걸레를 주면서 물을 다 닦아 내라고 한답니다. 그럴때 걸레로 열심히 물을 닦으면 그 사람은 아직더 있어야 되고 수도꼭지를 전부 잠그는 사람은 퇴원해도 되는 사람이랍니다. 간단한 문제이지만 아직 퇴원할 단계가 안된 사람은 그것을 풀지 못한답니다.
물론 이 방법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고, 증세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번은 아주 재미있었던 일화가 있었는데, 한번은 환자들끼리 서로 대화하고 있는데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대화를 하고 있던 도중에 ‘이사람 미쳤나 봐!’ 그랬답니다. 이 소리를 들은 간호원들이 막 웃었답니다. 미친 사람하고 이야기 하면서 이 사람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미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인 끊겨서 생긴 이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보지 못하고 서로가 쳐다보고 ‘이 사람 미쳤나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때문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행복하지 않고 많은 불행한 죄악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구약 성경은 철저하리 만큼 증명해 놓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타나는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범죄와 살인죄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겁니다. 적어도 구약도 신약처럼 좋은 말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좋은 말씀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구약은 참으로 철저하도록 좋은 기록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가장 기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좋아야 할 것들이 ‘썩어 버리더라!’는 기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첫 살인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형제입니다. 형제가 살인을 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것고 어머니와 짜고 속입니다.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야곱이 또한 자기 아들들에게 속습니다. 아들들이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팔아 먹습니다. 그리고 구약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첩과 관계한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며느리하고 관계를 갖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일어나도 사회면에 톱 기사로 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들에게 계속 썩는 죄악이 나온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살인을 하지 않았다, 특별히 누구를 속이거나 불의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지혜와 방법과 원리를 받아내지 않으면 안되도록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살면 당장 누가 원수로 돌아서느냐 하면 세상이 여러분 앞에 원수로 섭니다. 그래서 전부 그것이 무서워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얻어내야 하는 방법과 원리들을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이 실패하는 이유중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여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을 놓치면 신자는 불행해집니다. 이 구속의 축복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구원이 무엇만 못하느냐 하면, 우리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것보다 못한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것이냐를 놓치면, ‘두통이나 좀 낫게 해주시지, 그까짓 구원 같은 것을 뭘 주시려고 그래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신자가 감사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바로 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하여 거룩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서 점점 대접을 못받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길을 가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서 죄를 지적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케 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듯이,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심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자구 지적합니다. 저들이 죄인이며 회개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사랑을 말하면 환영을 받을텐데, 처음부터 죄를 지적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막다른 골목에다 몰아 넣으신 다음에 어느 곳에 가서도 해결받을 수 없고, 오직 주 앞에 돌아와야 만이 해결된다는 방법을 쓰십니다. 심판하라는 뜻이 아니라, 회개케하기 위하여 지적해야 됩니다. 치료하기 위하여 진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할때, 십자가가 죄를 지적하는 것을 빼놓고 사랑만 논한다면 기독교는 자기 기반을 잃습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길 가다가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때리라고 대주고 맞고서 조용히 돌아 오겠습니까 그래서 온 천지에 계속 두들겨 맞는 신자들로 가득차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저는,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주어 맞고난 다음에, 그래서 상처가 났다면 조용히 진단서를 끊어다가 내밀 것입니다. 왼뺨까지 돌려대라는 것은 그 일로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지, 당연한 요구마저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진단서를 끊어서 내미는 것이 복수라면 하지 말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감당치 못할 치료비에 관한 것이라면 정당한 요구인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부당하다고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사회 질서입니다. 이것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무정부상태의 혼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국가라는 보편적 일반 은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법도 없고, 기준도 없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용해준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질서입니다.
무질서에는 의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무질서는 혼란만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죄를 지적하는 것을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쳐 나가라는 겁니다. 학교에서 왜 시험을 보는 걸까요 내가 어디에 약한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답이 틀리면, 공부를 못한다!고 싸잡아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못한다! 나는 특히 산수의 나눗셈을 못한다!’라는 식으로 내가 약한 지점이 어딘가를 확인케 하기 위해서 시험이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부분에 대한 죄책감을 찔러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강해야 됩니다. 내가 남 앞에 교만합니까 심판을 잘합니까 헐뜯는 이야기를 잘합니까 그러면 이런 문제에 대하여 계속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개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계속 은혜받아 가면서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해 나가면서 신앙 양심에 찔려서 훈련되고, 성도들끼리 부딪쳐서 극복함으로 훈련되고, 고쳐졌던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보십시요. 그러한 과정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찔리는 것이 싫어서 피신하고 도망다닙니다.
그래서 큰 교회 신자들이 많이 하는 말 중에 ‘교회를 깊이 알면 골치아파! 모른 것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부는 하면 할수록 귀챦아! 관둬버려! 그러면 얼마나 편한지 알아’하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만일 여러분 자녀들이 ‘아빠, 학교는 가면 뭘해요 얼마나 골치아픈데 비싼 돈 쓰가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제부터 학교 안갈래요! 그게 효자예요!’그런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상으로는 너무도 떳떳이 그런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골치 아프니 관두자!’ 그리고 무엇이나 하자고요 ‘주일날 예배나 드리고 헌금이나 하자!’고 합니다. 그래놓고서 마음 속으로 ‘하나님, 난 헌금 했어요! 돈은 안떼 먹었어요!’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거집입니까 한 걸음도 주님과 가까와 지는 길로는 들어선 적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유치한 수준을 벗어 버립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과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항상 받으려고 하는 어린 아이 심리를 이제 벗어버립시다. 대접받고 인정 받지 못하면 속상한 마음을 벗고, 바깥을 내다 봅시다. 저 바깥에 방황하는 저 영혼들의 실상을 보십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말씀운동 기도운동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변화시킵시다. 이러한 사명자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지금 현장에서는 일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갈급한 심령들이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장에 즐비하게 늘려 있는 저 문둥병자, 앉은뱅이, 중풍병자, 소경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도와 주고, 어떻게 이들을 살려야 될 것인지 가슴에 이들의 심령들을 안고, 몸부림치는 절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간절히 찾으시는 자는 이같은 일군이요, 사명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하는 성숙한 구속받은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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