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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의 표 (수5:9-15,고후5:16-21,눅15:1-3)

본문

본문은 길갈에서 유월절 축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의 굴러갔다 의 히브리 단어 의미는 어원이 같은 길갈 에서부터 왔습니다. 본래 길갈이란 단어의 의미는 둥굴다 입니다. 길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비난을 굴러가게 했습니다. 할례의식은 상징적으로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에 대한 비난을 굴러가게 했습니다. 할례가 거룩한 유월절 의식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으로 계약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는 것을 나타내 주는 외적인 육적의 표식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례가 성찬에 참여하는 조건이 되는 기독교 예식과 병행됩니다. 할례와 세례는 둘 다 과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동을 통해 가능하게 했던 자유를 회상시키는 것입니다. 길갈과 여리고 평지라는 두 지역 이름이 주는 느낌은 풍성한 것입니다. 여리고 평지는 성소 밖의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무교병과 곡식은 땅의 소산물이나 그것들은 거룩한 땅의 첫 소산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적절하게 이루는 첫 요소입니다. 반면에 반유목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농부가 되고, 이 변화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 히 같은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만나를 내려주신 일이 그 나라 그 땅 자체의 소산 물에 의해 살아갈 수 있을 때 자동적으로 중단도어진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방황 할 때 만나를 내려 주신 기적이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그 봄의 첫 수학을 거둔 큰 기적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대한 기적이 끊임없이 새롭게 경험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거민들의 신들과의 혼합주의(syncretism) 에 빠지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자연 숭배나 그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6-21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 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 느니라 (고후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 라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뷴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첫 부분은 14-17절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주목하고 있고, 두번째는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서 6장 2절로 화해의 긴박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 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바울은 이제 더이상 인간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주목하려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17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셔서 새롭게 하셨습니다. 19절의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나님은 성육신의 메시지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그의 동료들을 그리스도를 위대한 대사로 간주했습니다. 21절은 경구적 속성을 가진 절인데, 하나님은 죄를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게 하심으로 죄가 되게 하셔 서, 바로 그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논리적 설명으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간절한 역설 적인 설명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3,11-32 (눅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 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양의비유, 드라크마 비유, 탕자의비 유 본문의 비유를 두고 최근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방탕한 아들 의 비유인가, 기다리는 아버지 에 관한 비유인가, 아니면 아버 지의 사랑 의 비유인가 암 본 비유의 가장 중심 요지는 아버지의 상랑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비유의 중심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옛날 바벨론과 가나안 문확에서와 로터 스 수트라와 헬라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하나 단연 독특학 은혜로운 것입니다. 1-3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그리고 대적하여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과들 앞에서 이 비유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간들은 우리에게 28절에서 보는 대로 화가나서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큰 아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눅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이 비유의 구조를 가만히 보면 두 부분으로 대조시켜 볼 수 있는데,
1).방탕한 둘째 아들에 초점이 모아지는 11-14절이고, 2).형에 관한 25-32입니다. (눅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 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 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방탕한 들째 아들의 모습에 우리는 부정적인 느낌을 받는데, 이는 그가 마치 자기 아버지가 이미 죽은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칠고, 더럽고 경명할 만한 방탕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아들에게서도 우리는 또한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데, 그는 돌아온 동생을 자기 동생으로 부르는 것 대신 당신의 아들 이라 부르며, 자기 라버지의 아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 율법주의자였는지 모르지만 사랑이 없었 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둘째 아들이 드러난 죄인이라면, 큰 아들은 숨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의 경우를 나타내 주는 두 부분에서 한결같은 것은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죄인(둘째 아들, 또는 잃었던 양이나 동전)이 회개하게 되고, 아버지와 종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1.땅의 소산, 계약의 표
1).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의 모든 비난이 굴러갔다 라는 뜻 을 가진 길갈에서 유월절을 축하하게 했습니다.
2).하나님은 계약 성취의 표로 이스라엘을 지탱시켰던 만나 대신에 그 땅의 소산을 제공하셨습니다.
3).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제공해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도록 하십니다.
2.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1).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십니다.
2).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역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셨던 그를 우리를 위해 죄 있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3.방탕한 아들과 큰 아들 이 비유의 핵심은 사랑하는 아버지 에 있는데, 흔히 방탕한 아들이 기쁜 잔치를 열어주기 위해 기다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 너무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아들에 대한 성명도 거의 간과되다시피 했습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큰아들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마치 회개하면서 아버지의 집을 찾은 방탕한 아들과 마찬가지로 방탕한 아들은 우리의 빛을 용서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큰아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한 것같이 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용서하지 않았고 자기 죄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교만과 이기성과 그리고 우상숭배를 미워하고 우리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 며, 주의 영으로 주와 함께 거하는 곳으로 우리를 돌이키소서, 우리로 하여금 목이 곧고 자기 의로 가득 차 있게 하지 마시고 겸손히 낮추며 주의 사랑 안에서 감사할 줄 아는 자녀 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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