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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자 (겔47:1-5)

본문

겔40:-46:까지는 성전의 측량과 함께 새로운 율법이 제시되고, 47:-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축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강을 이루고 나아가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 황무하고 죽어 있던 땅들이 기름진 땅으로 변하는 이 물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복을 의미합니다. 이 풍성한 복은 구약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각각 다르게 임하십니다. 때로는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나 각기 다르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지속적이고도 발전적인 성장을 향해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또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나 자신이 어느 수준에와 있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부족한 점을 확인하고 채울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수준을 알았다면 다음은, 더 깊은 은혜를 받기 위해 간절히 찾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은혜의 수준을 알고자 하며, 또 내가 받아야 할 더 큰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로 임할까요
1) 하나님의 은혜는 성전으로 임합니다. 여기서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 하시는 곳이며, 또 문지방이란 성전의 현관문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입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성전에 임하셨으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속함과 깨끗함을 입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우리는 깨끗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재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심령은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 가운데서 우리에게 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그리스도께 나와야 합니다. 몸만 가지고 나오면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깨끗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또 심령에 성령님을 바로 모신 자는 날마다 자신을 살펴 허물과 죄를 씻고 회개하는 자 입니다.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령님의 물로서 깨끗하게 씻어야 우리 몸이 깨끗한 성전이 됩니다. 만일 회개치 않은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며, 근심하시게 되며, 성령님께서 근심하시면 우리는 성전의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은혜를 받으려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성전답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이 성전다워지는 것은 곧 정결함과 거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속에 우리가 흠뻑 젖을 때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소성케 되고, 자라나게 되고, 시원한 생수와 같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수의 은혜는 구원받은 자만이 받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부어 주시는 축복은 아니라, 오직 정결하며 거룩할 때 임하는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희생과 겸손이 있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희생의 제단으로 흐릅니다. 제단은 희생의 제물이 있는 곳입니다. 이 제단은 우리 죄를 위하여 살과 피와 생명까지 희생 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단입니다. 이천 년전 골고다 언덕에서 드려진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속죄 제단입니다.(히9:14) 이 예수그리스도의 속죄가 있는 곳에는 진정한 용서와 정결히 있습니다. 참 거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는 겸손한 곳인 남쪽으로 흐릅니다. 남쪽은 북쪽 아래에 있습니다. 남쪽은 낮은 곳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릅니다. 낮은 곳은 겸손한 자가 서있는 위치입니다. 이것은 겸손한 사람만이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역사 하는 복음은 교만한 심령과, 높은데 마음을 두고 있는 자에게는 흐르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하여 낮아진 심령에 흘러 넘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대적 하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며 그의 편이 되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단계로 나누어집니까 천사는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성전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생수를 따라 줄로 재기 시작했습니다. 일천척을 재고 에스겔을 건너가게 하니 물이 발목에 올랐고, 또 같은 방법으로 일천척을 측량하고 물을 건너게 하니 물이 무릎에 올라 왔습니다. 또다시 같은 방법으로 일천척을 측량하여 건너게 하니 물이 허리에 올라왔고, 다시 한번 더 일천척을 측량하여 물을 건너게 하니 헤엄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줄이란 자 또는 척도를 말합니다. 이 말은 구약의 '카도쉬'<거룩하다>와 신약의 '캐논'<척도,자> 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천척씩 재어 본다는 것은 상세히 재어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은혜의 네 단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1) 발목에 오르는 것 같이 은혜를 조금 맛본 단계입니다. 발목에 잠기는 은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 처음으로 은혜를 체험해 봄으로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단계입니다. 은혜 받는 것이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이 맛을 알기 전에는 성전 문턱만 밟을 뿐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시계추 같이 기계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교회에 나오던 신자였으나, 은혜를 받고 나면 적어도 타의에 의한 출석하는 수준을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은혜가 교회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교회 출석을 고의적으로 기피하지 않게 됩니다.(은혜 받은 새 신자가 잘빠지지 않음-내 신앙과 같이 신앙이 성숙해졌다 하지 말라) 아직도 죄의 성품인 내 뜻이 많이 살아 움직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져 있는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입니다. 말씀 대로 살아 보려고 시도해 보지만 할 때마다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은혜는 받아서 알게 되었지만 아직 받은 은혜대로 살아가기 위한 능력은 너무도 미약하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험과 유혹 아래서 쉽게 은혜를 잃어버립니다.-그러나 성령님의 생수를 받고 나면 복음으로 심령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격이 변화되고, 언어생활이 변하고,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새롭게 바뀌어야 합니다. 죽었던 심령에 새 생명의 기운이 들어왔으니 변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고 더 높은 은혜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와 싸워 빈번히 넘어지더라도 은혜받은 성도는 더 깊은 은혜의 단계로 들어가야만 이기고 승리하는 능력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무릎에 오르는 것 같이 시원한 은혜를 맛본 단계입니다. 은혜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은혜의 맛만 본 상태의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은혜를 맛보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뻐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고 은혜가 있는 자리에는 항상 앞장서서 참석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신앙 생활해 나가는 성도는 희망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또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무릎에 닿은 생명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의 능력과 중요성을 깨닫고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합니다. 나의 사정과 소원들을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에 가난이 부유함으로 질병이 강건함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변화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뜻인 죄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이 자주 부딪히는 갈등을 갖게 된다.(주여!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왜 이렇습니까)-아직도 상당히 많은 옛 성품이 자주 되살아나 말씀대로 살고 노력하려는 뜻을 가로막고 서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되살아나는 옛 성품의 방해와 충돌로 자기 자신의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수많은 기도와 인내, 연단의 훈련 과정을 거쳐가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잘 넘어지고 실패하는 가운데서 쉽게 낙망하고 지치기 쉽습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아픔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동안 스스로 실망하여 의기소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더욱더 온전한 주의 은혜를 사모해야 만이 이 기나긴 연단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허리까지 오르는 상당히 깊은 은혜를 받은 단계입니다. 전에는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길 힘이 적어서 제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었으나, 이제는 말씀과 기도로 연단 받은 후 능력을 받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능력들을 받게 될까요 말씀의 능력을 받습니다.(엡6:14)에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 고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옷을 입을 때 우리와 같은 옷이 아니고 통자루와 비슷한 옷을 입었다. 그 옷은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옷이었는데, 평상시는 물라도 긴급한 일이나 전쟁때에는 옷을 붙들어 메어야 했다. 여기 본문에 옷을 붙들어매는 것을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진실함과 충실함이란 뜻입니다. 진실함과 충실함의 허리띠를 매고란 뜻입니다. 거짓과 허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한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시험이 찾아오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담대히 설 수 있으라는 것입니다. 되살아 나는 옛사람의 성품도 말씀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허리까지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제, 세상을 의지하던 습성이 변하여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생활로 몸에 베여 갑니다. 말씀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매일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는 말씀이 자신의 신앙고백 같이 중요한 말씀이 되어 집니다. 겸손의 능력을 받습니다.(벧전5:5)에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으로(헬,엥콤보사)-옷입다로서 노예들이 주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앞치마를 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전인격을 겸손으로 옷입으라는 뜻입니다. 참된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끕니다.
또 6절에 “겸손하라”는 너희 자신을 겸손하도록 허락하라, 노력하라는 명령형입니다. 오늘날은 자기과시의 시대이며, 자기 P.R 시대입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자기를 내세우고 우쭐대려 합니다. 남보다 조금만 좋은 조건이 있으면 교만해져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연로한 분들에게 겸손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은 계산력이 빠르고 통찰력도 빠르지만, 노인들은 게산도 느리고 행동도 둔해서 모든 면에서 앞서나가지 못하는 것 같으니 교만의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겸손한 사람은 연로한 분앞에서 자신의 교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겸손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몸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처럼 깊은 은혜를 받으면 주님처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섬김의 능력을 받습니다.(요13:4)에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해 허리를 동이신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가 높다고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신 주님은 돌연히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섬김의 모습을 손수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겉옷을 벗었다란 자기의 자존심과 주장을 벗어버렸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할 때도 주장하는 자세에서 몽사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방법과 논리와 생각들을 주장하며, 내뜻을 이루기 위해서 상대를 굴복시켜가며,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사람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섬김의 모습이 없이하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허리에 오르는 은혜의 단계에 들어가면 비로소 남을 섬기는 봉사, 전도하는 봉사, 주님과 다른 사람을 위한 충성된 봉사자가 되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몸된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할 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섬기며 시중드는 자세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는 상당히 큰 시험이 찾아오는 때 이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받은 능력에 비례하여 시험도 크게오는데, 빈틈만 있으면 사단은 여지없이 시험의 쐐기를 박고 넘어뜨리려고 애씁니다. 또 뼈를 깎는 훈련(연단)과 인내의 연단 앞에서 오래 참지 못하고 도리어 낙망과 좌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잠시라도 주의 은혜로 살아가지 않고 육신의 자랑으로 지탱해 보려 한다면 피곤함이 몰려와 쉽게 지쳐 버리게 되어 세상적으로는 참으로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의 눈으로 볼 때에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요, 제정신이 아니게 살아가는 광신자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4) 생명수가 깊어 헤엄쳐야 하는 은혜의 단계입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단계를 말합니다. 물이 얕을 때에는 거치고 부딪치는 것이 많아 넘어지고 쓰러지는 상처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창일한 깊은 은혜의 단계에 오면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오직 믿음, 소망, 사랑의 구속한 주만 보이는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시험이 다가와도 기쁨에 충만 합니다, 누가 나를 몰라줘도-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다가와도-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또 이때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됩니다. 울은 빌1:8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 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이 내심장으로 살아간다면 두렵고 떨리게 되며, 그래서 굴복당할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자신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었고, 마귀에게 종노릇했지만 이제부터는 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원받기 전에는 살인자의 심장을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게 된 후로는 죽은 영혼을 살리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심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됩니다. 엡6:24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 에게 은혜가 있을 찌어다"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변함없이”-불멸의, 썩지아니하는, 변치아니하는 뜻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분에게 돌려드리며,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헤를 주십니다. 은혜의 생수가 가슴위로 창일 하게 받고 있는 자는 환경과 지식과 감정을 초월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나는 어느 은혜의 단계에 이르렀습니까 나의 신앙 정도와 상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문턱만 밟는 신자입니까 은혜가 무엇인지 그 맛을 과연 알고 있습니까 기도하는 신자입니까 능력을 받아 말씀과 겸손으로 봉사하는 신자입니까 깊은 은혜에 잠겨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주님의 뜻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입니까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고 주님은 지금도 권면하십니다. 신앙은 항상 전진뿐입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퇴보가 시작되며, 시험이 순식간에 찾아들고 맙니다. 더 깊은 은혜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며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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