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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공경 (출20:12,엡6:1-4)

본문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 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 계로 양육하라(엡 6:1-4) 효효는 백행백행의 근본근본이라던가. 인간이면 누구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지사, 효에 대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거나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효를 강조해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현상은 어디에서 비 롯되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인간의 죄악성에서 기 인한다. 오죽하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므로 효를 해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야 겨우 한 번 마음을 고쳐먹고 효를 해보려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다. 그러다가는 여 전히 예전의 불효하던 자리로 돌 아간다. 그러한 것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여기서 무엇이 효를 다하는 것인가하는 물음도 남아있지만 효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효이다. 저렇게 하는 것이 효이다. 그래서 입신 양명립신양명을 통해서 효를 실천하려고도 하고 부모공양 을 잘 하므로 효를 이루어 보려고도 한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효를 행하는 행위의 모습이 여러 양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것도 십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 부모를 공 경하라 `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이렇게 상식 적인 것이 상식 적으로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새삼 효를 강조하 고 있는 것인지, 아니 면 성경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며 이를 따져보자.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 든 안 믿든, 성경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효에 대한 가르침을 꾸준히 그리고 끊임없이 받아왔다. 유치원 선생님부터 학교 담임선생님의 가 르침, 교장선생님의 훈화, 웃어른들의 교훈, 이 모든 사회환경 등은 너무나도 당연한 부모공경을 권유와 강요로 일 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개선되어 온 것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는 더 욱 가족 구성원들간의 문화 적, 사회적 갈등만 야기되고 있고 효는 자취를 감 추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한 교훈이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사회 전반적인 풍 토가 갈수록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있고 이기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 사 회의 조직은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개인의 선함이 그대로 표출되고 고 취 되도록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는 귀가 따갑도록 듣던 말씀을 종교단체를 통해서도 계속 들어오 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뿐이며 도대 체 나아질 기 미가 없기 때문에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 실이다. 그러기에 이쯤해서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 이 말 하는 부모공경이 유치원 선생님들이 말하고 있는 정도의 차원으 로 밖에 해석 할 수 없는가. 그러한 것을 새삼스레 강조해서 말하지 않 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구동성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성경은 윤리도덕을 말 하는 책이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윤리와 도덕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는 자가당착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럼에도 도무지 그러한 모 순점을 느끼거나 갈 등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버이 주일만 되면 효를 강조하고 행사를 한다. 물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요 금수가 아니라면 당연히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안타 까워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 이 단순히 그러한 차원에서 머물고 있겠느냐하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부모공경은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하자. 기독교문화에 익숙해 있지 않은 사람도 십계명 정도는 들어서 대충 안다. 언 급되어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제 오계명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 부모를 공경 하라` 이다. 그것은 제 오계명이면서도 땅에 속한 첫 계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 이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언급한 말씀에 근거 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 수하리라(엡 6:1-3). 에서 첫 계명이라는 말씀이 언급된다. 사실 일상적으로 생각하면 오계명이 어떻게 첫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가고 물 음을 갖을 수 있다. 그러한 물음에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반사적으로, 그것은 1계명에서 4계 명까지는 하늘에 속한 계명이요, 5계명에서부터 10계명까지는 땅에 속 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땅에 속한 계명 중에서 첫계명이지 않는가고 답한다. 일 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는 지는 몰라도 어디 까지나 철저히 육신적인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답변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 가지는 인식의 영역과 언 어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다양한 언어 의 동원 때문에 10개의 분류형 태로 진술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 제 1계명은 이것이다`는 식으로 진 술된 것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편의상 분류 한 분류체계에 불 과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그런 식의 분류체계가 아 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만 첫 계명일 뿐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첫 계명은 무엇인가.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 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 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 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 의 강령이니라(마 22:34-38). 여기서 크고
첫째되는 계명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 있다. 예수께서 처음 계명 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서수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 크고` 라는 표현이 함께 언급되고 있듯이 `첫째` 라는 의미는 중요 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 으뜸` 되는 중요한 계명 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다라는 의미에서 `첫째` 라는 표현을 쓰고 있 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둘째는 그보다 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말로 언 급을 하자면 그렇게 말해 볼 수 있음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와 바울의 시각이 서로 다른 가 하는 점이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모순성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바는 땅에 속한 첫 계명이다라고 해명하려 한다. 문제는 그럴듯한 변 명이 도리어 성경을 성경으로 보증해 주고 그 의미 를 강화시켜 주기보다는 도 리어 훼손시킨다는 점이다. 윤리와 도덕적 차원으로 말씀이 환원되어 버린다는 점이 큰 문제이다. 이 둘은 서로 상충되는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 서 부부 와 가정에 대한말씀을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일상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교회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바울의 이렇게 뛰어난 진리에 대한 진술방식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5장에 이어 서 언급되고 있는 6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땅 위의 그림자로 천상의 세계에 관한 비밀을 진술하고 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의 첫 계명과 바울의 첫 계명이 견해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리어 상호 주석적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에베소서의 본문이 살펴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부 모를 공 경해야 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땅에서 장수한다는 축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땅 장수 90세를 살면 장수인가. 120세를 사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요절 이 아닌 가.
그렇다면 120을 살면 장수인가.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그러면 33세를 산 예수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예수는 장 수한 분이 아닌가. 그는 오늘도 뭇 사람들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 은가. 사람들은 장수의 복 복조차도 철저히 육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 려 한다. 진정한 장수는 영생이 아 닌가. 물론 그 영생이라는 것도 좀 더 깊이있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점 이 많이 있지만… 한 가지 더 문제를 제기하고 넘어가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성경에 다음 과 같은 말씀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 나 아 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 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 부모를 공경하라` 와 ` 부모를 버린 자가 영생을 받으리라`는 말씀 을 어떻 게 보아야 하는가. 부모를 버리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 가. 기독교는 혼 돈만을 조장하는 종교인가. 이러한 말씀들의 상관관계 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 다는 말인가.
모세의 법은 어떠한가. `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 으리라` 하였다(출 20:12). 그래서 인간들은 혼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대 로 부모 공경은 하여야 하겠는데 한 편에서는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상충될 때가 있다. 그러한 때에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고 고안한 종교적 묘안이 있다. 그것이 고르반 이라는 제도 이다. 고르반이라 함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본래 ` 바 쳐진 예물` 혹은 ` 제물` 의 의미를 갖는다. 신약에서 ` 헌물` 과 ` 헌금` 등으로 이해 되어 사용된 것 같다. 혹은 ` 금고`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마땅히 부모에게 드려서 공경 해야할 것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부득이 부모를 공경하지 못했노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잘못 이 아니고 정당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럴때 부모에게 고르반 이라는 말을 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르반 제도는 하나님께 드렸으니 할 일을 한 것이요 더이상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즉 부모에게 하지 못한 것의 면책사유 가 되는 제도 인 셈이다. 예수는 이같은 것이 인간의 유전으로 하나님 의 말씀을 폐하고 있 다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한 다고 말씀하신다(막 7:8-13 ). 이러한 모든 행위는 온통 혼돈스러움으 로 일관되어 있고 껍데기만 있는 셈 이다. 그리고 입술로만 존경하는 대표적인 형태이다. ` 부모를 공경하라` 와 동시에 ` 부모를 버리는 자가 영생을 얻으리라 ` 고 하 고 있으니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그 것은 서로 연관이 되는 말씀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 라 달라지는 말씀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부모공경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이 옳 게 이해 되고 각자에게 드러난다면 앞의 말씀들은 갈등이나 부조화를 낳는 것이 아니 라는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동시에 그 러한 삶이 살아질 수 있 을 터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예수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 우선 나의 아버지부와 어머 니모는 누구인가 아버지 요한복음 8장의 기사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8절 이하를 보자.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 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 께서 대답하시 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8-19).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은 명백하다. 곧 `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 지도 알았으리라` 가 그 까닭이다. 예수는 자신을 알지 못하면 아버지 를 알 수 없 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식했다. 목수 요셉이 여기 서 아버 지로 등장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물론 성경을 읽는 이들이 이 곳에서 목수 요 셉을 떠 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곳을 지나 치고 나면, 어느덧 ` 부모공경` 에 대한 생각을 하기만 하면 목수 요 셉을 관련짓고 있는 사고방식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도 역시 예수 의 말씀대로 `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요 8:23)는 말씀이 밝혀준다. 아래서 났고 세상에 속하였으매 당연히 생각이 세상 에 머물러 있을 밖에.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 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 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 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 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 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 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 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 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 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니리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37-42) . 비록 말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아버지요, 한분 뿐이신 하나님이 자신 들의 아 버지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이미 마귀에게서 난 행위 를 하고 있으니 그들의 아브라함, 그리고 그들의 한분 뿐이신 하나님은 곧 그들의 아비인 마 귀인 셈이다.
그러므로 입에서 아브라함을 말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한 다고 해서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이 그 들의 아버지라는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아버지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느냐 하는 논쟁의 차원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 고 있다. 적어 도 그런차원 이상에서 너희가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누가 과연 너희의 아버지 냐를 언급하고 있다. 러므로 ` 부모를 공경하라` 가 육신에 속한 부모를 말하느냐 아니면 하늘에 속한 부모를 말하느냐를 따지는 오늘의 주제는 참으로 한심한 노릇임에 틀림 없다. 그것이 이론적으로 하늘의 부모라는 사실이 판명 된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으 로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이 론만 갖게 될 터이니, 우리의 앞이 더욱 캄캄하며 우리의 하는 짓이 참으로 쓸데 없는 것이다. 각자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를 먼저 생각 해 볼 일이다. 나는 지금 소속이 어디인가. 나는 누구로부터 난 자인가. 입만 벌리면 ` 하나님 아버지!` 하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에게 난 자인가.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 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 함은 하나님께 속하 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 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 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 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 지 아니하리라 (요 8:45-51). 예수께서 아버지를 공경하는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진리를 말 하고 계 신 예수의 모습, 그리고 그 진리가 거절되고 그 말씀이 유대인 들 속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 한다. 그럼에도 그 들과 계속하여 말씀하 고 계신 예수. 귀신들린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를 공경함이라고 말씀하 고 계시지 않는가. 아버지를 공경하려면 예배당에 가서 거룩한 예배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상 식이 아닌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불 행히도 예수의 부모공경은 그러한 식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 와 내게 영광 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 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 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 8:54-5
5). 무엇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 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 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 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 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 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 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 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19-23).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면 그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은 바로 이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버지 께서 죽은 자를 살리 시는 것과 같이 아들 또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한다. 아들을 공경하는 일 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을까.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 에 이르지 아 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 대로 아니겠는가.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을 받았는가. 살리심을 받았다면 그 후에 계속되고 있는 아들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공경한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 귀하게 여긴다, 가치를 둔다`는 말 이다. 진리를 진리로 들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땅의 것에 가치를 둔다. 하늘의 것에는 도무지 무관심이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도리어 귀신 이 들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 기장이 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 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 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말 1:6).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 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말 2:10).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의 뜻은 ` 근원자, 시작자` 의 의미를 가진다. 진흙으로 토기를 빚으시는 ` 토기장이` 인 셈이요, 궁극적 원인자이다. 어머니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땅에 있는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엇인지 어렴풋 이나마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 하늘에 속한 아버지 와 어머니에게서도 동일하다. 나를 있게 한 이는 아버지요 나를 낳아주신 분 은 어머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버지만으로도 어머니 만으로도 아니다. 그래서 ` 부` 와 ` 모` 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우리가 어떻게 공경할 것인 가. 예수는 자주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에 대하여는 바울 이 우리에게 결정적인 주석을 주고 있다. 갈라디아 4장 21절 이후의 말씀이다 .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 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 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 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 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 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 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 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갈 4:21-27). 육체와 약속, 두 언약, 두 여자, 땅에 있는 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 살렘이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나셨다. 이삭 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태어났다.
육신을 따라서는 계집 종에 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이삭은 오로지 약속으 로 태어났다. 사사 시대의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미로 자신에 대하여 기술한다(삿 5:7).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 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 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 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0-22). 제자들 자신이 어느덧 해산을 준비하는 여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니고 데모와 의 대화에서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나는 것을 말한다. 현재 땅에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난 자요, 육체를 따라난 계집종의 자녀로 있다면 위 로부터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물과 성령님으로 나지 않으 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고 하지 않는가. 약속의말씀으로,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의 어머니는 무엇을 말하는 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이시다. 약속의 말씀은 육체를 따라서가 아 닌 언약의 말씀이다. 이 언약의 말씀은 우리의 모태요 어머니 의 자궁이다. 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탯 줄을 통하여 영양분을 공급받고 성숙한 생명으로 자란다. 그리고 하나의 독립체가 되기위해 태로부터 분리되고 성숙한 개체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되며 자라게 된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바울은 어떤 자의 역할을 하는가. 어떻게 보면 그는 마 치 어머니와 방불한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 하여 열심으 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 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 4:17-19). 여기서 바울은 부모된 심정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거기서도 어미 된 심정 으로 ` 나의 자녀들아`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저 아라비아 시 내산이 아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도 아니다. 오직 위 에 있는 예루살렘의 어 떠함이다. 진리와 하나된 자요,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이다. 그는 경수가 끊어지고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자였으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은 자인 자유자이다. 그는 곧 사라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옳게 알 수 있으려면 예루살렘에 대한 깨달음이 있 어야 한다.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지이다. 모든 가치의 중심지요, 순 례자의 발걸음 이 끊이지 않는 안식과 쉼이 있는 곳이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요, 율법 이 선포되고 생명이 공급되는 생수의 공급처이다. 어미의 젖줄인 셈이며 모든 인간이 흠모하고 찾고있는 하나님 나라 의 중심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인하여 자신을 지 탱하여 나가고, 삶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며 살 만한 이유와 열심을 내게 되는 동기들을 얻게 된다. 희열과 기쁨의 근원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가치가 모두 모여있는 삶의 집약체가 예루살 렘이다. 그러 한 가치의 집약체에 의해서 젖을 공급받고 양육받고 있으니, 그 가 곧 어머니가 아니겠는가. 모든 인간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서 있으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전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중동전쟁은 그 예루살렘의 껍데기를 탈환하기 투쟁이다. 그러나 유대민족과 아랍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치 열한 전쟁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 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이 시내산 예루살렘이 있는가 하면 위에 속한 예루 살렘이 있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바로 시내산 예루살렘에 대하여 곳곳 에서 탄식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그 예루살렘으로는 참된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다만 이스마엘의 어미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너는 나를 잊어버리고, 헛 된 것을 믿었다. 그래서 내가 너의 치마를 얼굴까 지 들어 올려서, 너의 수치가 드러나도록 하겠다. 너는 음란하 게 소리를 지르 며 간음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하였다. 나는 언덕과 들 녘에서, 네가 저지른 역겨운 일들을 보았다. 부정한 예루살렘아, 너에 게 화가 미칠 것이다.
언제까지 네가 그렇게 지내려느냐(렘 13:26-27).-표준새번역-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땅에 있는 예 루살렘이 지나간 곳이다. 예수께서 헐어버리고 새로 건축한 곳이다. 자신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건축해가는 곳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아들의 자유와 가치가 새 롭게 전개되는 곳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 도 다 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로부터 하늘 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 한 것 같더라(계 2 1:1-2). 가정은 아버지만으로,혹은 어머니만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어머니나 아버 지 중 한 분이 계시지 않은 가정을 결손 가정이라 한다. 그만큼 불균형이 생 길 수 밖에 없다. 교회는 결손의 가정이 아닌 부와 모가 함께 계신 곳이다. 그곳에 정상적인 자녀의 양육과 신앙의 자람이 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성취될 수 있다. 인간은 떡만으로 살 수 없고 포도주만으로도 살 수 없다. 떡과 포도주가 겸비되어야 하듯 부모가 함께 계셔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 어떻게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인 예루살렘을 어 떻게 공경할 것인가. 역시 같은 원리가 아니겠는가. 자식을 낳아봐야 비로소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던가. 자식이 부모를 낳을 수는 없는법 이다. 바울이 ` 나 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 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 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를 알기 때문이다.
보라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 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 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 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 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 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덜 사랑을 받겠느냐(고후 12:14-15).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글머리에서 언급하였던 말 에 대하여 생각해 보 고 이 글을 맺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 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 18:29-30). 이 말씀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계집종(하갈)을 어머니 로 모시고 있어서는 여전히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다. 역시 형 제나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맺어진 형제나 부모나 자 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무리 소중하고 고귀하더라도 물과 성령님으 로 거듭나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 라` (요 2:19)고 하신다. 그 어머니와 유대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아버 지를 버리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하갈을 쫓아내지 않으면 새 언약의 어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 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 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 18:29-30)이다.
이같은 원리는 실제로 우리들의 육신적인 경우에도 충분히 성립된다. 즉 육신 적인 부모도 부모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 할 수 없다. 부 모를 버려야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육신적 인 끈끈함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있을 줄로 아는가. 진정한 부모공경 은 그러한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내를 버리지 않으면 아내와 정 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 만 부부 사이의 안정적인 거래만 이 지속될 뿐이며, 상호 욕심을 충족하는 거 래선이 된다. 아내로 아내 되지 못하게 하고 남편으로 남편되지 못하게 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암 세포 역할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부부간의 사랑 이라는 이름으 로 거기에 안주하고 포로가 되기를 좋아한다. 성경은 아내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부모를 공경할 수 없다.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부모가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부모로 하여금 자식에게 노예가 되 어서 자식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기형적인 말년을 맞게 할 따름이다. 그 이 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각각 자신의 분량에서 충실히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이미 분별력을 잃고 있다. 육신 의 관계도 그러하 거늘, 하물며 천상에 있어서 그러한 식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있겠는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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