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사람 요셉 (창39:1-20)
본문
우리는 지난 시간 요셉이 팔려가기까지 섭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운명 에 처한 요셉을 팔려가게 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요셉을 죽이고자 벼르는 형들로부터 요셉을 보호하시기 위해 르우벤의 마음을 움직이시기도 하셨습니다. 물 없는 웅덩이를 준비하 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때 마침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을 만나게 도 하셨으며, 또 유다의 마음을 움직여 요셉을 팔 아버리자는 제안을 하게도 하셨습니다. 결국 이런 하나님의 섭리로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역사 하 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멋지게 역사 하시다니 하면서 감 탄을 하지만 팔려 가는 요 셉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면 감탄을 자아낼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원 망스럽고 답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운명이 바뀌어진 요셉 사실 요셉이 이렇게 팔려갔다는 것은 요셉의 운명이 바뀐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 었습니다. 팔리기 전 요셉 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 한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아버 지로부터 장자로 인정받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행운아 였습니다. 비록 열 한 번째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아버지는 공개적으로 그를 장자로 인정을 했고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요셉, 그의 미래는 참으로 밝고 촉망받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이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사랑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신세가 된 것이었죠. 늘 팔려 다니는 사람이었더 라면 이 일이 그리 서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대해 기대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지 난번에는 참 운이 없었어, 하필이면 그런 집에 팔려갈게 뭐람, 이번에는 좀 괜찮은 주인을 만날 수 있겠지. 하면 서 나름대로 소망도 가져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팔려 가는 일 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 니 이 일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미리 생각을 하 고 그 일을 맞이하면 그래 도 마음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 덜 당황하게 되지만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일을 만 나면 당황스럽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팔려 가는 이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두려움, 낭패감, 당혹 스러움 등이 뒤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이런 요셉이 이제 애굽의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기에 이 릅니다.
함께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신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신세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제 그는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촉망받는 젊은이에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제도 중에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제도가 바로 이 노예제도입니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을 하는 것 이죠.
그렇다면 요셉이 노예 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그렇습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 시작했 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의 가장 밑바닥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 이하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을 향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자가 되었 다고요. 어떻게 이 일이 가 능한 일입니까 인간으로서 최하의 삶도 아닌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요셉을 향해서 형통하다니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뭔가 잘 못 알고 있나 싶어서 형통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됨 이라고 설명을 해 놓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셉이 뜻 대로 잘 되었습니까 아니 죠. 오히려 비참한 인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을 향해 형통했다고 소 개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형통이라는 말이 잘 못 번역이 되었나 싶어서 원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본문이 번역하고 있는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찰레아흐 라는 단어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번성하다. 성공하다는 의미를 지니 고 있었습니다. 형통이라는 말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성공한 사람입니까 오히려 쫄딱 망한 사람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좋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성공한 사람, 형통한 사람으로 표현을 해 놓고 있습니다. 제 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 목사님 요셉이 비록 종으로 팔려 왔지만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모든 것을 다 관리하게 되었잖아요. 다른 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성공이지 않습니까 라고요. 글쎄요. 그게 과연 성공이라 표현 을 해도 좋은 이야기입니까 종이긴 종인데 그 중에서 제일 신임을 받는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성공이지 않느냐 글 쎄요, 그게 성공이라면 저 희 집에 오셔서 종살이를 한번 해 보십시오. 제가 다 맡겨 드릴 테니까요. 그것은 결코 성공한 일이 아닙니다. 원 래 종이었던 사람이 이 정도 올라간다면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가문을 이끌어갈 촉망받는 사람이 다른 집의 그것도 외국까지 팔려가서 종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된 것이 먼저입니까 형통 하다 고 불려 진 것이 먼저 입니까 그렇습니다. 형통 하다고 불려진 것이 먼저 입니다. 즉,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기 이전에 성경은 이미 그를 향해서 형통한 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을 드리면 노예로 삶을 살 고 있는 요셉을 향해 형통한 자 성공한 자 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어 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2절 말씀은 형통함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2절을 읽습니다. 자 이 구절은 왜 요셉이 형통한자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함 께 하셨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하다는 말을 어떻게 정리 할 수 있 을까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종종 형통함을 모든 일들이 잘 되는 것쯤으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늘 1등을 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늘 돈벌이가 잘되어야 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부흥이 되어야 되고 하는 식으로 형통함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형통함이란 이런 것과 관련 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아니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계속해서 소득 이 올라가고 하는 일 마다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다면 그것은 형통함이 아닙니다. 공 부를 잘 해서 서울대학을 수석으로 입학을 하고 수석으로 졸업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 면 그것은 형통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형통함은 이런 것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비록 1 등을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는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사업 이 잘되지 않는다 하더라 도 그의 삶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는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을 형통한 사람으로 보 시겠습니까 형통치 않는 사람으로 보시겠습니까 바울을 세상 적인 가치관으로 본다면 그는 분명 형통치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들 은 그가 당한 일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수없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위험에 처한 적도 여러번 이었습니다. 심지는 먹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을 할 정 도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 해서 어떻게 형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헐벗고 굶주렸던 사람 을, 향해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든 사람을 향해 어떻게 형통한 자라 말할 수 있 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안 에서는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기에는 실패자 같 고 형통치 못한 사람 같지 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형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형통에 대한 오해 오늘날 우리들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형통을 너무 환경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형통을 환경적인 문제로 봐야 한다면 대기업의 재벌들만큼이나 형통한 사람 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신문을 보니 정주영씨가 세계 9위의 갑부에 올라 있더군요. 그가 가진 재산이 62억 달 러라 하더군요. 글쎄요, 저는 62억달러가 얼마나 되는 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형통한 자 입니까 어떻습니까 정주영씨의 62억과 여러분들이 신앙과 바꾸시겠습니까 저는 그 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준다고 해도 저의 신앙과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형통 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세계 9위의 재벌이 아니라 세계 1위의 재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 시지 않으면 그는 형통한 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환경적인 어떤 것으로 형통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 셨느냐 함께 하시지 않으셨느냐 에 따라 형통함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도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고 바울도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형통을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 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속화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형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보다 세상 적인 성공을 더 좋아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 적인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들을 팽개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적인 형 통을 위해서 성경적인 형통 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잘못된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않으 면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 같지만 소망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이 성도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한 교회는 개혁될 수 없습니다. 개혁되지 못하는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과연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지 않는가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를 개 혁하십시오. 세상 적인 형통 보다 성경적인 형통을 추구하십시오. 세상의 부요함 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일이 더 많은 관심을 갖 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심이 드러남 이런 요셉의 삶은 남 다른 것이었습니다.
함께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구절이 우리들에 게 말하고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의 형통함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에 대해서 집주인인 보디발 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보디발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입니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서 무엇 을 발견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 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신앙인 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는 그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에 이릅니다. 요셉의 이런 삶은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주변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 잘하는 예수쟁이로 평가받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으로 평가 를 받는 것은 다르다는 것 을요.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단 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 정도 로 평가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종종 우리 사랑하는교회 성도들은 주변 이웃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고 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참 서울의 모 교회가 성도들 을 바르게 훈련을 한다고 소문이 날 때 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교회가 얼마나 성도들을 잘 훈련하는가에 대해 서 한 참 떠들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교회를 소개 해 달라고 하기에 그 교회가 얼마나 성도들을 잘 훈련하는가에 대해서 이야 기하면서 추천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정색을 하고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은 그 교회 다니는 집사를 한 분 알고 있는데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집사를 그렇게 밖에 훈련을 하 지 못하는 교회인데 어떻 게 그 교회에 갈 수 있겠는가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 성도들은 밖에 나가서 어떤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를 종종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성도로 인정되고 있습니까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이 계시는 직장이나 사시는 주변에 가서 이 사람은 우리 사랑하는교회에서 양육하 고 있는 성도라고 자신 있 게 말해도 괜찮을 만한 삶을 사시고 계십니까 유혹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도 유혹은 어 김없이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혹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 도 유혹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는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 아가는 동안 얼마든지 유혹 을 받을 수 있습니다. 종종 유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고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는 자체만을 가지고 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유혹에 빠지 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유혹을 받고난 후 그 유혹에 빠져 버린다면 그것은 심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나 에게 유혹이 있다고 하더라 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혹 그 자체로 낙망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요셉에게다가 왔던 유혹은 어떤 유혹이었을까요
7절을 함께 읽습니다. 어떤 유혹이 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인의 처가 요셉을 유혹한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성경이 기록 하고 있는 삼대 미남 중에 한 사람입니다.
6절 하반 절을 볼 까요 성경에 보면 이렇 게 극찬을 하고 있는 사람이 3명 있습니다. 누구인 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요셉, 그리고 다윗, 압살롬입니다. 이 세 사람 외에는 성경이 이렇게 극찬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요셉의 외모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 은 이제 행정력 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 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비록 보잘 것 없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이 여인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요셉에게 눈짓을 하면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이 요셉에게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이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젊은 요셉
첫째로는 그의 젊음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 요셉의 나이를 27세 정도로 추측을 합니다. 일 반적으로 이정도의 나이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성에 게 관심이 제일 많았을 것 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1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할 것이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본다면 청년이 행실을 깨끗케 하기가 무 척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든 이 시절에는 여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에게 보 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이 없어도 자신을 지키기 어려운 나이인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는 먼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외로운 요셉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의 처지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될 이 즈음 요셉의 마음속에 가장 많이 와 닫는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외로움이란 단어일 것입니다. 어디를 둘 러보아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애굽에서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이나, 비오는 날이면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을 것입니다. 이미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또 살아 계신 아버 지에 대한 그리움 이 때때로 그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요셉에게 여인의 유혹은 넘어가지 않을래야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요셉 이것만이 아닙니다. 혼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것이 외로움과 더불어서 또한 편으 로는 자유 함을 주지 않습 니까 한국에서는 그렇게 말쑥하고 경건하게 보이던 목사님들도 외국에서 얼마동안 생활을 하면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기르고 청바지도 입고 다닌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죠 그렇습니다. 자유 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역시 이 런 자유 함을 만끽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술을 먹고 길바닥에 드러누운들 그를 말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가 잘 못된 길로 들어선 들 그를 나무라고 야단 칠 가족이 있습니까 그의 주변에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상황 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이 여인이 유혹을 한 것입니다. 날마다 유혹 받는 요셉 요셉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가 힘든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다.
10절에 있는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날마다 유혹을 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여기서 말하는 날마다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제법 많은 날들을 매일처럼 요셉을 유혹을 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사 실 한 두 번 거절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 거절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 두번 유혹을 받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계속되면 계속 될수록 엉뚱한 생각이 꼬 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를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단호하게 거절을 하다가도 뒤돌아 서서 수많은 상상력을 동원 하여 함께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래 다음에 유혹을 하면 못이기는 척 넘어가지 뭐 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이 날마다 라는 말이 유혹을 받는 사람의 입 장에서 보면 얼마나 고통스 럽고 번뇌 스러운 단어인지 모릅니다. 요셉의 대처 이런 상황가운데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렇다면 요셉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 할 까요
함께 8,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에서 이 상황을 대처하는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는 단호함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 가 동침을 하자고 하자 마 자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얼마나 단호 한 자세입니까 헛점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유혹은 끝나지 않 습니다. 10절은 이 여인의 유혹이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지를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는 말로 대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반 응을 보십시오. 무엇이라 기록을 하고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듣지도 아니하여 동침하 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있 지도 아니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있는 자리에는 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볼일이 아니면 주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단호함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틈이 들어갈 곳이 없어 보입니다. 요셉에게서 이런 단호함을 배워야 할 것 같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처음에는 단호하지만 못이기는 듯이 자 신을 내어 맏기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단호했고 끝까지 단호했습니다. 어느정도로 단호했습니 까 그렇습니다. 감옥에 가기까지 단호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단의 유혹이 있을 때 이렇게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체면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단호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해서 상대방의 체면 때문에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유혹인데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단호하게 자르십시오. 그것이 우리들 을 유혹에서 지키는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워 유 혹인줄 알면서도 들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하고의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합니 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 어져도 좋고 인간관계는 깨어지면 안된단 말입니까 좀 인간관계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 것이 사단의 유혹이라 생각이 되면 단호하게 자르십시오.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에 있어서는 찬바람이 생생 나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로 인해 피해를 보아도 좋습니다. 요셉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유 혹을 거절하면 사단은 우리 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피해를 감수한다 하더라도 단호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취 할 바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자세는 자신을 믿고 맏겨준 보디발 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과의 신의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떠나가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 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사람에게도 본분을 다했습니다. 몰론 그 사람 이 신앙에 배치된 일을 요 구했을 때는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의를 깨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자세였습니다. 세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 셉의 입장을 잘 살펴보십시 오. 요셉이 하나님 앞에 있는지 없는지 상관할 사람이 지금 요셉 주변에 있습니까 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지 살지 않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셉은 지금 자 신의 처지에 대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을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수 없 다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이억만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그곳도 하나님 앞인 줄 알고 자신을 지킵니다.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모 습입니까 종종 많은 성도들이 주일 신자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주일은 거룩한 신자 같은데 평상시는 그렇지 않 습니다. 또 예배당신자도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거룩하고 신실한 신자 같은 데 평상시에는 개차반인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요셉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죠. 요셉은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우리들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 중 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인간으로서 겪을 수 없는 그 런 일을 겪고 있다 할지라 도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나를 잊지 않으시고 거기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도 함께 하신 증거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서머나 교회의 교부였던 폴리갑에 대해서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폴 리갑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서 가이사가 주라는 고백을 하도록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를 거부하였 죠. 결국 그는 투기장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마지막 기회가 다시 주어 졌습니다. 로마 총독은 폴리갑을 향해 지금 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맹세코 너를 놓아주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의연하게 내 가 86년 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왔는데 그는 나를 한 번도 배반하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 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총독은 다시 폴리갑을 회 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대는 헛수고를 하고 있소,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모 른 척 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두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잠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총독은 당황함과 분노를 누르고 다시 한번 협박과 회유를 하였습니다. 그대의 운명은 내 손아귀에 있다. 그대가 그 결심을 돌이키지 않으면 준비해둔 사나운 짐승을 풀어 너를 찢게 할 줄을 알 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으니 이제는 화형에 처하겠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독을 향하여 단호하기 그대는 한 시간 정도면 타다가 꺼져버릴 불로써 나를 위협하고 있으나 악인을 위하여 예비된 장차 올 심판과 형벌의 예비된 불은 모르고 있소, 뭘 주저하시오 원하는 대로 곧 시행하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불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폴리갑 처럼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순간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내가 그렇게 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이런 요셉 그가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20절에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보 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통한 사람일까요 왜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함 께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열망하는 사람, 어떤 희 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 그가 바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 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형통한 사람이겠습니까 누가 요셉과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요셉이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사랑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신세가 된 것이었죠. 늘 팔려 다니는 사람이었더 라면 이 일이 그리 서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대해 기대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지 난번에는 참 운이 없었어, 하필이면 그런 집에 팔려갈게 뭐람, 이번에는 좀 괜찮은 주인을 만날 수 있겠지. 하면 서 나름대로 소망도 가져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팔려 가는 일 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 니 이 일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미리 생각을 하 고 그 일을 맞이하면 그래 도 마음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 덜 당황하게 되지만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일을 만 나면 당황스럽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팔려 가는 이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두려움, 낭패감, 당혹 스러움 등이 뒤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이런 요셉이 이제 애굽의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기에 이 릅니다.
함께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신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신세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제 그는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촉망받는 젊은이에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제도 중에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제도가 바로 이 노예제도입니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을 하는 것 이죠.
그렇다면 요셉이 노예 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그렇습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 시작했 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의 가장 밑바닥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 이하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을 향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자가 되었 다고요. 어떻게 이 일이 가 능한 일입니까 인간으로서 최하의 삶도 아닌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요셉을 향해서 형통하다니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뭔가 잘 못 알고 있나 싶어서 형통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됨 이라고 설명을 해 놓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셉이 뜻 대로 잘 되었습니까 아니 죠. 오히려 비참한 인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을 향해 형통했다고 소 개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형통이라는 말이 잘 못 번역이 되었나 싶어서 원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본문이 번역하고 있는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찰레아흐 라는 단어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번성하다. 성공하다는 의미를 지니 고 있었습니다. 형통이라는 말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성공한 사람입니까 오히려 쫄딱 망한 사람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좋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성공한 사람, 형통한 사람으로 표현을 해 놓고 있습니다. 제 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 목사님 요셉이 비록 종으로 팔려 왔지만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모든 것을 다 관리하게 되었잖아요. 다른 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성공이지 않습니까 라고요. 글쎄요. 그게 과연 성공이라 표현 을 해도 좋은 이야기입니까 종이긴 종인데 그 중에서 제일 신임을 받는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성공이지 않느냐 글 쎄요, 그게 성공이라면 저 희 집에 오셔서 종살이를 한번 해 보십시오. 제가 다 맡겨 드릴 테니까요. 그것은 결코 성공한 일이 아닙니다. 원 래 종이었던 사람이 이 정도 올라간다면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가문을 이끌어갈 촉망받는 사람이 다른 집의 그것도 외국까지 팔려가서 종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된 것이 먼저입니까 형통 하다 고 불려 진 것이 먼저 입니까 그렇습니다. 형통 하다고 불려진 것이 먼저 입니다. 즉,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기 이전에 성경은 이미 그를 향해서 형통한 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을 드리면 노예로 삶을 살 고 있는 요셉을 향해 형통한 자 성공한 자 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어 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2절 말씀은 형통함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2절을 읽습니다. 자 이 구절은 왜 요셉이 형통한자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함 께 하셨기 때문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하다는 말을 어떻게 정리 할 수 있 을까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종종 형통함을 모든 일들이 잘 되는 것쯤으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늘 1등을 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늘 돈벌이가 잘되어야 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부흥이 되어야 되고 하는 식으로 형통함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형통함이란 이런 것과 관련 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아니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계속해서 소득 이 올라가고 하는 일 마다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다면 그것은 형통함이 아닙니다. 공 부를 잘 해서 서울대학을 수석으로 입학을 하고 수석으로 졸업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 면 그것은 형통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형통함은 이런 것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비록 1 등을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는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사업 이 잘되지 않는다 하더라 도 그의 삶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는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을 형통한 사람으로 보 시겠습니까 형통치 않는 사람으로 보시겠습니까 바울을 세상 적인 가치관으로 본다면 그는 분명 형통치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들 은 그가 당한 일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수없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위험에 처한 적도 여러번 이었습니다. 심지는 먹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을 할 정 도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 해서 어떻게 형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헐벗고 굶주렸던 사람 을, 향해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든 사람을 향해 어떻게 형통한 자라 말할 수 있 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안 에서는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기에는 실패자 같 고 형통치 못한 사람 같지 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형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형통에 대한 오해 오늘날 우리들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형통을 너무 환경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형통을 환경적인 문제로 봐야 한다면 대기업의 재벌들만큼이나 형통한 사람 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신문을 보니 정주영씨가 세계 9위의 갑부에 올라 있더군요. 그가 가진 재산이 62억 달 러라 하더군요. 글쎄요, 저는 62억달러가 얼마나 되는 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형통한 자 입니까 어떻습니까 정주영씨의 62억과 여러분들이 신앙과 바꾸시겠습니까 저는 그 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준다고 해도 저의 신앙과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형통 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세계 9위의 재벌이 아니라 세계 1위의 재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 시지 않으면 그는 형통한 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환경적인 어떤 것으로 형통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 셨느냐 함께 하시지 않으셨느냐 에 따라 형통함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도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고 바울도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형통을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 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속화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형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보다 세상 적인 성공을 더 좋아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 적인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들을 팽개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적인 형 통을 위해서 성경적인 형통 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잘못된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않으 면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 같지만 소망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이 성도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한 교회는 개혁될 수 없습니다. 개혁되지 못하는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과연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지 않는가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를 개 혁하십시오. 세상 적인 형통 보다 성경적인 형통을 추구하십시오. 세상의 부요함 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일이 더 많은 관심을 갖 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심이 드러남 이런 요셉의 삶은 남 다른 것이었습니다.
함께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구절이 우리들에 게 말하고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의 형통함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에 대해서 집주인인 보디발 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보디발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입니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서 무엇 을 발견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 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신앙인 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는 그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에 이릅니다. 요셉의 이런 삶은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주변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 잘하는 예수쟁이로 평가받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으로 평가 를 받는 것은 다르다는 것 을요.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단 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 정도 로 평가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종종 우리 사랑하는교회 성도들은 주변 이웃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고 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참 서울의 모 교회가 성도들 을 바르게 훈련을 한다고 소문이 날 때 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교회가 얼마나 성도들을 잘 훈련하는가에 대해 서 한 참 떠들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교회를 소개 해 달라고 하기에 그 교회가 얼마나 성도들을 잘 훈련하는가에 대해서 이야 기하면서 추천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정색을 하고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은 그 교회 다니는 집사를 한 분 알고 있는데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집사를 그렇게 밖에 훈련을 하 지 못하는 교회인데 어떻 게 그 교회에 갈 수 있겠는가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 성도들은 밖에 나가서 어떤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를 종종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성도로 인정되고 있습니까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이 계시는 직장이나 사시는 주변에 가서 이 사람은 우리 사랑하는교회에서 양육하 고 있는 성도라고 자신 있 게 말해도 괜찮을 만한 삶을 사시고 계십니까 유혹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도 유혹은 어 김없이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혹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 도 유혹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는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 아가는 동안 얼마든지 유혹 을 받을 수 있습니다. 종종 유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고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는 자체만을 가지고 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유혹에 빠지 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유혹을 받고난 후 그 유혹에 빠져 버린다면 그것은 심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나 에게 유혹이 있다고 하더라 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혹 그 자체로 낙망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요셉에게다가 왔던 유혹은 어떤 유혹이었을까요
7절을 함께 읽습니다. 어떤 유혹이 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인의 처가 요셉을 유혹한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성경이 기록 하고 있는 삼대 미남 중에 한 사람입니다.
6절 하반 절을 볼 까요 성경에 보면 이렇 게 극찬을 하고 있는 사람이 3명 있습니다. 누구인 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요셉, 그리고 다윗, 압살롬입니다. 이 세 사람 외에는 성경이 이렇게 극찬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요셉의 외모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 은 이제 행정력 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 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비록 보잘 것 없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이 여인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요셉에게 눈짓을 하면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이 요셉에게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이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젊은 요셉
첫째로는 그의 젊음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 요셉의 나이를 27세 정도로 추측을 합니다. 일 반적으로 이정도의 나이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성에 게 관심이 제일 많았을 것 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1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할 것이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본다면 청년이 행실을 깨끗케 하기가 무 척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든 이 시절에는 여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에게 보 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이 없어도 자신을 지키기 어려운 나이인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는 먼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외로운 요셉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의 처지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될 이 즈음 요셉의 마음속에 가장 많이 와 닫는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외로움이란 단어일 것입니다. 어디를 둘 러보아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애굽에서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이나, 비오는 날이면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을 것입니다. 이미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또 살아 계신 아버 지에 대한 그리움 이 때때로 그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요셉에게 여인의 유혹은 넘어가지 않을래야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요셉 이것만이 아닙니다. 혼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것이 외로움과 더불어서 또한 편으 로는 자유 함을 주지 않습 니까 한국에서는 그렇게 말쑥하고 경건하게 보이던 목사님들도 외국에서 얼마동안 생활을 하면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기르고 청바지도 입고 다닌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죠 그렇습니다. 자유 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역시 이 런 자유 함을 만끽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술을 먹고 길바닥에 드러누운들 그를 말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가 잘 못된 길로 들어선 들 그를 나무라고 야단 칠 가족이 있습니까 그의 주변에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상황 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이 여인이 유혹을 한 것입니다. 날마다 유혹 받는 요셉 요셉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가 힘든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다.
10절에 있는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날마다 유혹을 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여기서 말하는 날마다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제법 많은 날들을 매일처럼 요셉을 유혹을 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사 실 한 두 번 거절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 거절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 두번 유혹을 받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계속되면 계속 될수록 엉뚱한 생각이 꼬 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를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단호하게 거절을 하다가도 뒤돌아 서서 수많은 상상력을 동원 하여 함께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래 다음에 유혹을 하면 못이기는 척 넘어가지 뭐 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이 날마다 라는 말이 유혹을 받는 사람의 입 장에서 보면 얼마나 고통스 럽고 번뇌 스러운 단어인지 모릅니다. 요셉의 대처 이런 상황가운데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렇다면 요셉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 할 까요
함께 8,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에서 이 상황을 대처하는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는 단호함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 가 동침을 하자고 하자 마 자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얼마나 단호 한 자세입니까 헛점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유혹은 끝나지 않 습니다. 10절은 이 여인의 유혹이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지를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는 말로 대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반 응을 보십시오. 무엇이라 기록을 하고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듣지도 아니하여 동침하 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있 지도 아니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있는 자리에는 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볼일이 아니면 주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단호함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틈이 들어갈 곳이 없어 보입니다. 요셉에게서 이런 단호함을 배워야 할 것 같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처음에는 단호하지만 못이기는 듯이 자 신을 내어 맏기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단호했고 끝까지 단호했습니다. 어느정도로 단호했습니 까 그렇습니다. 감옥에 가기까지 단호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단의 유혹이 있을 때 이렇게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체면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단호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해서 상대방의 체면 때문에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유혹인데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단호하게 자르십시오. 그것이 우리들 을 유혹에서 지키는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워 유 혹인줄 알면서도 들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하고의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합니 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 어져도 좋고 인간관계는 깨어지면 안된단 말입니까 좀 인간관계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 것이 사단의 유혹이라 생각이 되면 단호하게 자르십시오.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에 있어서는 찬바람이 생생 나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로 인해 피해를 보아도 좋습니다. 요셉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유 혹을 거절하면 사단은 우리 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피해를 감수한다 하더라도 단호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취 할 바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자세는 자신을 믿고 맏겨준 보디발 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과의 신의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떠나가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 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사람에게도 본분을 다했습니다. 몰론 그 사람 이 신앙에 배치된 일을 요 구했을 때는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의를 깨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자세였습니다. 세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요셉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 셉의 입장을 잘 살펴보십시 오. 요셉이 하나님 앞에 있는지 없는지 상관할 사람이 지금 요셉 주변에 있습니까 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지 살지 않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셉은 지금 자 신의 처지에 대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을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수 없 다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이억만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그곳도 하나님 앞인 줄 알고 자신을 지킵니다.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모 습입니까 종종 많은 성도들이 주일 신자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주일은 거룩한 신자 같은데 평상시는 그렇지 않 습니다. 또 예배당신자도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거룩하고 신실한 신자 같은 데 평상시에는 개차반인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요셉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죠. 요셉은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우리들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 중 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인간으로서 겪을 수 없는 그 런 일을 겪고 있다 할지라 도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나를 잊지 않으시고 거기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도 함께 하신 증거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서머나 교회의 교부였던 폴리갑에 대해서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폴 리갑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서 가이사가 주라는 고백을 하도록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를 거부하였 죠. 결국 그는 투기장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마지막 기회가 다시 주어 졌습니다. 로마 총독은 폴리갑을 향해 지금 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맹세코 너를 놓아주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의연하게 내 가 86년 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왔는데 그는 나를 한 번도 배반하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 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총독은 다시 폴리갑을 회 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대는 헛수고를 하고 있소,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모 른 척 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두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잠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총독은 당황함과 분노를 누르고 다시 한번 협박과 회유를 하였습니다. 그대의 운명은 내 손아귀에 있다. 그대가 그 결심을 돌이키지 않으면 준비해둔 사나운 짐승을 풀어 너를 찢게 할 줄을 알 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으니 이제는 화형에 처하겠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독을 향하여 단호하기 그대는 한 시간 정도면 타다가 꺼져버릴 불로써 나를 위협하고 있으나 악인을 위하여 예비된 장차 올 심판과 형벌의 예비된 불은 모르고 있소, 뭘 주저하시오 원하는 대로 곧 시행하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불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폴리갑 처럼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순간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내가 그렇게 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이런 요셉 그가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20절에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보 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통한 사람일까요 왜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함 께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열망하는 사람, 어떤 희 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 그가 바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 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형통한 사람이겠습니까 누가 요셉과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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