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들의 방문 (창42:1-38)
본문
우리들이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경우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조그마한 가게를 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처음 생각을 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일이 잘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고 있는 데 바로 옆에 동일한 업종의 가게가 생긴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운전을 하는 중 갑자기 옆에 차선에 있던 차가 끼여들기를 해서 사고가 날 뻔하였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사고를 면하긴 했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가슴이 뛰고 머리까지 쭈삣쭈삣 서는 것을 느낍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교회에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성도가 등록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이 사람에게 고조되더니 나는 그만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그 사람은 내가 그 동안 해 놓았던 일들에 대해서 그것은 옳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은 방법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을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악을 선으로 이럴 때 성경은 우리들이 해야 할 반응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고 롬 12:17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 반응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로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오른편 뺨 을 칠 때 왼 편 뺨을 대는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고 무능한 자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 아갈 수 있는 가고 반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지 어떻게 우리들이 그런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이라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른 뺨을 칠 때 왼편 뺨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악을 악으 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값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 삶의 도리이며 우리들이 가져야 할 삶의 가치관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악을 선으로이 긴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함께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을 다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요셉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 떻게 요셉을 다루어 가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두 가지의 극한 상황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인간 이하의 삶이었습니다. 종살이, 옥살이 등을 통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을 만나게 하십니다. 요셉은 이런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킵니다. 물론 요셉이 자신 에게 주어진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경험했던 또 다른 극한 상황 하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 명예, 권력을 한꺼번에 소유한 일이었 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또 다른 시험꺼리였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것만 시험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자신을 지키기 어렵지만 부하고 평안할 때 자신을 지키기가 더 욱더 힘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다윗의 피난 시절입 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난 다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도망을 다닐 때는 철저하게 자신을 지킵니다. 심지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망자의 신세에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처지로 바꿔지자 그만 죄된 길을 걷습니다. 그 렇게도 고귀하고 순결하게 지키던 신앙이 부요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셉이 가난 하고 힘들었을 때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 보다 부, 명예, 권력을 얻고난 다음 자신을 지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킵니다. 이렇게 요셉은 두 가지의 극한 상황을 맛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부할 때도 가난할 때도 자신을 지킬 줄 아는 멋진 신 앙인 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 의 찬사가 요셉에게 돌려진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 평생 이런 찬사를 한 번쯤 들을 수 있을까 하 면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앙의 어떤 별명을 얻고 싶습니까 여러분 들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 힘들 때나 평안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찬사가 돌려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는 최고의 찬사가 말입니다. 이렇게 훈련 된 요셉, 이제 드디어 꿈을 이루기 위한 완벽한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이제 요셉은 그의 형님들 과 부모님을 만나는 일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형님들은 원수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 입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피를 나눈 형제임도 불고하고 자신을 매몰차게 팔아버린 형님 들. 아마 물어뜯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원수 같은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만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요셉은 이런 원수 같은 형님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요 이제 이 장면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근을 통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때에 야곱이
그렇다면 이 때는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 렇습니다. 41장 56, 57절에서 밝히고 있는 때를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기근이 온 지면을 덮을 때, 각국 백성들이 식량을 구하려 애굽으로 몰려들 때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다시 이 구절에서 요셉의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무엇을 사용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기근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요셉의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근이 왜 요셉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되죠 그렇습니다. 바로 요셉의 형님들과 그의 부모를 만나게 하 시기 위해서 기근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온 지면에 기근이 임한다는 것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고향인 가나안과 애굽은 제법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고 서로 기후 조건도 다른 곳 이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애굽과 가나안이 동시에 기근이 든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온 지면에 기근이 임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이 기근은 누 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의 형님들과 부모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세상 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재앙이나, 우연이 일 어난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일은 요셉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 하 나 우연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들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런 관점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움직임이나 우주의 변화 이 모든 것들이 실은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며 손짓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일들을 그 냥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죠. 애굽에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는 때에 드디어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얼마 만입니까 일반적으로 이 때 요셉의 나이를 약 40세 가량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약 몇 년 만 이죠 야곱이 17세에 집을 떠났으니 약 23년 만입니다. 이 23년 동안 야곱의 가족은 요셉을 빼 놓고 성경에서 자 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다시 등장을 합니다. 자 이렇게 오랜만에 등장한 야곱이 무엇이라 이 야기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 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이들을 채근합니다. 왜 관망만 하늬냐고요.
그렇다면 왜 야곱의 아들들은 이 일에 대해서 관망만 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찔림입니까 그렇습니다. 동생을 애굽으로 판 사실 때문에 찔림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는 일을 망설인 것입니다. 행여나 애굽에 갔다가 동생 요셉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과거에 우리들이 저지른 일들 이 다 들통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20년이 넘도록 이들의 기억 속에는 요셉이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근이 다시 요셉을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이 이들의 양심 을 자극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알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이 언젠 가는 우리들의 양심에 호소하며 괴롭힌다는 것을요. 종종 지은 죄를 시간이 지나면 해결을 하겠지 하고 덮어두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잠깐 잊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것들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해결을 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그 문제를 해결을 해야 합니다. 종종 죄를 짖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 해결을 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사람 들과 관계가 된 죄라 한다면 사람 앞에서도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제사를 드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 합니까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해서 충분한 배상을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 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을 드린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회개는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먼저 사람과의 관계를 청산하 고 하나님께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해결하지 않은 죄악이 있다면 속히 처리하십시오. 요셉의 형님들을 보십시오. 20년이 넘도록 까마득히 잊혀진 일들이지만 애굽이야기가 나오니까 다시 움찔 하지 않습니까 세월 속에 묻어두려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도 깨끗이 해결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요셉의 형님들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여러분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 겠습니까 이들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생각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팔려갔던 요셉에 대 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동생도 이 길로 팔려 갔겠지 , 요셉이 이 길로 팔려 갈 때 얼마나 고통스러 웠을까 하는 것들이 이들의 양심에 호소를 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노예 상인들이라도 만나면 혹 그곳에 요셉은 없을까 기웃기웃 거렸을 것입니다. 혹 노예들이 나와 일을 하고 있으면 그곳에 요셉은 없을까 하면서 가슴 조이 며 길을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 지은 사람의 삶입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죠. 제가 중학교를 다닐 때 성적이 좋지 않아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장롱 깊 숙이 성적표를 숨겨둔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든 지요. 행여나 나 없는 사이에 어머니가 그곳을 뒤져보 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불안감 때문에 밖에 나가 놀지도 못했습니다. 잠깐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도 시선이 제일 먼저 그것으로 갑니다. 어쩌다가 그것이 흩어려져 있기라도 하면 행여나 들통이 났을까봐 가슴을 조였습니다. 집 안에서 놀 때도 어머니가 그곳에 가까지 접근이라도 하시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그해 방학은 그렇게 지 냈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성적표를 내 놓고 꾸지람을 듣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데 방학이 거의 다 끝나가도록 긴장과 불안으로 지냈습니다. 결국 학교 갈 때가 다 되어서 끄집어 내 놓아야 했 습니다. 그 때의 그 후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불안과 초조함 이것이 요셉의 형님들이 애 굽을 가면서 느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죄를 짖고 해결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사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있다면 고백하십시오. 내어놓으십시오. 그리고 참 자유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을 만난 형님들 이렇게 애굽을 방문한 요셉의 형님들은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요셉을 만납니다.
함께 6,7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이들을 직접 만난 것은 이례적입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애굽의 고위 관리가 이방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이런 일을 처리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셉 이 이들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요셉은 이미 자신의 형님들이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이러저러한 사람이 오면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하라고 신하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형님들을 만나 면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도 이미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오늘 본문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일들은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형님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요셉이 취한 자세는 어떤 자세입니까 7절에 보면, 예, 모른척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엄한 소리로 어디서 왔느냐 고 호통을 칩니다.
또 9절을 보십시다.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누명을 씌웁니다. 어떤 누명이죠 예, 이 땅을 정탐하러 왔다는 죄 목을 뒤지어 씌웁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렇게 형님들인 줄 알면서 자신을 알리지도 않고 정탐꾼이라는 누명까지 씌우고 있을까요 혹 여러분 중에는 원수 같은 형님들이니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골탕을 좀 먹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을 하 실 지 모르겠습니다. 언 듯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누명을 씌우는 일이나 형님들을 감옥에 넣는 일이 다 그러 해 보입니다. 또 요셉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머나먼 이국 땅에 노예로 팔리기까지 다 형님들 때 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한데는 그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백과 용서를 위하여
그렇다면 요셉의 깊은 생각은 무엇일까요 요셉과 형님들 사이에는 해결할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형님들이 요셉을 판 일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를 해야 하고 형님들 입장에서 보면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약 이 문제가 제대롭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항상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품 고 살아야 하니까요. 형님들은 형님들대로 동생 요셉의 눈치만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혹 동생 요셉이 원수를 갚 기 위해서 칼을 빼 들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것이며 동생 요셉은 내 형님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잘 못을 깨달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이런 오해 속에서 생활을 한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얼마나 불편하고 서먹서먹한 관계입니까 하기야 요즘 우리 같으면 그래도 안그런척 하고 살아갔을 터이지만 요 셉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요셉은 서로 순수하지 않게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그런 척 하고 만나는 일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간에 문제가 되는 것을 해결하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게 형님 제가 총리가 됐오 하고 등장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님들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당연히 잘못 했다고 말하겠지요. 왜죠 그렇습니다. 요셉의 권위에 눌려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종 부모들이 자식을 교육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부모라고 하는 권위를 내세워서 자녀를 항복하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나는 네 부모고 너는 내 자식이니 잘못했다고 말 해라 그렇지 않으면 혼내줄테다 하는 식입니다. 잘못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쉽게 자녀로부터 잘못했어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른 교육방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 마음에는 부모에 대한 불신감만 쌓여 갈 뿐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 과 대화를 해야 한다 하도 말들을 하니까 이런 부모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불러 놓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이는 늘 부모가 대화로 문제를 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잘 끄집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도 실 은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내 놓을 만한 준비 과정이 필요한 것이죠. 그런데 다짜고짜 부 모가 이야기를 하지고 하니까 자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버럭 화를 내면서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하는데 왜 너는 그 모양이냐 하고 화를 내버립니다. 이것 역시 부모의 권위를 내 세우는 일입니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게도 대화를 할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잘 준비가 되면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렇게 대화로 문제를 풀어 가면 시간은 좀 걸리지만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아이들이 반응을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이 갑자기 형님들 나 여기 있소 하고 나타나 면 요셉의 권위 때문에 요셉아 용서해라 하고 눈물을 글썽일 터이지만 이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형님들을 위해서 스스로 깨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고 참고 인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세심한 배려를 살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속히 드러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형님들 자 나를 보시오 내 가 어떻소,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만 나는 이렇게 성공을 했오 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형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참아온 것이 아닙니까 또 긍정 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그 동안 얼마나 보고싶은 형제들이었습니까 23년만에 만나는 혈육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감추고 이렇게 하는데는 형님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 때문입니다. 서로의 만남이 아무런 거리낌 없기를 위해서요.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누명을 씌우고
그렇다면 요셉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에서 요셉이 이들을 보고 정탐꾼이라 이야기하자 형님들이 무엇이라 대답을 합니까
11절을 보십시다. 요셉은 12절에서 계속해서 아니라 말합니다. 그랬더니 13절에서 형님들은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예, 다시 자신들이 한 가족임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이 정탐꾼이라고 누명을 씌우자 이들은 왜 자신들은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가족을 모두 정탐꾼으로 보내어 여차하면 모두 죽게 하지는 않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탐꾼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계속해서 자 신들이 한 가족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막냇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은 점을 들어 정탐꾼임을 기정 사실로 만들면서 저들을 감옥에 쳐 넣고 있습니다. 3일 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들은 이 곳에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상대방과 똑 같은 처지가 되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 지 않습니까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부모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이들을 키워 보니까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부모님에게 여러모로 죄송하고 송구스럽더군요. 이렇듯 사람은 그 일을 당해 봐야 상 대방이 그 일을 당했을 때 어떠했을까를 이해하게 됩니다. 요셉의 형님들도 이제 요셉의 처지가 되어 감옥에 갇 히게 됩니다. 얼마동안 입니까 그렇습니다. 3일간입니다. 이 3일간 이들이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 은 동생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요셉은 그 때 앞이 얼마나 캄캄했을까 그 때 우리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 렀지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을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 왠지 서글퍼집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고 요셉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드렸으 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꼭 이렇게 자신도 그 일을 당해 보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런 일을 당해 보지 않고서도 미리 생각해 보고 미리 판단해서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입장에서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일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옥살이 아무튼 삼일만에 요셉은 형님들을 끄집어내어 한 사람을 볼모로 잡고 나머지 사람들을 돌려보내어 동생 베냐 민은 데리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이 명령을 들은 형님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이런 일들 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를 시작합니다.
21,22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 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문제가 없을 때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 못되었다 말씀하셔도 잘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옳다고 고개를 바 짝 세웁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터지면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말입니다. 그 래도 이것은 그나마 낳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얻어 맞아도 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의 형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자신들이 지은 지난 일들을 죄악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들이 몇 년 동안 이 일을 감추어 두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23년 동안 이 일을 감추어 두고 있 었습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자신들이 지은 일들에 대해 서 다시 평가하기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렇습니다. 죄악으로 평가를 합니다. 23년 동안 마음 깊숙 이 감추어 두고 살던 이 일이 애굽에 기근이 들자 양심이 움직이기 시작을 하더니 감옥살이를 하면서 곤란한 일 을 당하면서 활성화가 되어서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감정을 누르고 요셉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울고 맙니다. 함께 이 장면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24절입니다. 물론 요셉이 여기서 자신을 드러 내놓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요셉은 자신을 감춥니다. 욀까요 그것은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더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 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한 고백에 따른 실제적인 삶이 확인하는 일입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잠시의 감정으 로 어떤 것들을 고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고백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고백이든지 그 고백에는 삶이 따라와야 합니다. 지금 이들이 한 이 고백은 곤란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감정이 고무되어 한 이야 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한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이들의 삶을 좀더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었 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님들이 한 고백을 듣고도 나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셉의 자세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을 악으로 갚지 않은 자세도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형님들의 죄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가면서 형님들을 돕고 있는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원수 같은 형님들이 아닙 니까 감옥에 쳐 넣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님들이 죄를 스스 로 처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서로 거리낌이 없는 가족 이 되기 위해 진정한 용서와 진정한 고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요셉은 형님들을 세심하게 돕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서 본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원수 같 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원수 같은 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미운 감정을 그대로 지닌 체 만나지는 않습니까 원수 같은 생각을 그대로 둔체 서로 악수를 하고 웃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이 요셉처럼 원수 같은 사람, 미운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나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기 위한 수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땀흘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시렵 니까 하나님께서도 원수 같은 우리들을 받아들이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 놓으셨습니다. 그렇 다면 우리들도 우리들이 보기 싫은 사람, 원수 같은 사람, 얄미운 사람,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은 여러분들도 하나님께는 원수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하셔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단지 우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서로 용납하고 세워가면서요. 이를 위해 노력해 보십시다. 이를 위해 수고의 땀을 흘려 보십시다. 이 를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오늘 본문에는 악을 선으로이 긴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함께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을 다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요셉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 떻게 요셉을 다루어 가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두 가지의 극한 상황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인간 이하의 삶이었습니다. 종살이, 옥살이 등을 통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을 만나게 하십니다. 요셉은 이런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킵니다. 물론 요셉이 자신 에게 주어진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경험했던 또 다른 극한 상황 하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 명예, 권력을 한꺼번에 소유한 일이었 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또 다른 시험꺼리였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것만 시험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자신을 지키기 어렵지만 부하고 평안할 때 자신을 지키기가 더 욱더 힘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다윗의 피난 시절입 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난 다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도망을 다닐 때는 철저하게 자신을 지킵니다. 심지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망자의 신세에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처지로 바꿔지자 그만 죄된 길을 걷습니다. 그 렇게도 고귀하고 순결하게 지키던 신앙이 부요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셉이 가난 하고 힘들었을 때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 보다 부, 명예, 권력을 얻고난 다음 자신을 지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킵니다. 이렇게 요셉은 두 가지의 극한 상황을 맛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부할 때도 가난할 때도 자신을 지킬 줄 아는 멋진 신 앙인 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 의 찬사가 요셉에게 돌려진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 평생 이런 찬사를 한 번쯤 들을 수 있을까 하 면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앙의 어떤 별명을 얻고 싶습니까 여러분 들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 힘들 때나 평안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찬사가 돌려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는 최고의 찬사가 말입니다. 이렇게 훈련 된 요셉, 이제 드디어 꿈을 이루기 위한 완벽한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이제 요셉은 그의 형님들 과 부모님을 만나는 일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형님들은 원수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 입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피를 나눈 형제임도 불고하고 자신을 매몰차게 팔아버린 형님 들. 아마 물어뜯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원수 같은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만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요셉은 이런 원수 같은 형님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요 이제 이 장면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근을 통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때에 야곱이
그렇다면 이 때는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 렇습니다. 41장 56, 57절에서 밝히고 있는 때를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기근이 온 지면을 덮을 때, 각국 백성들이 식량을 구하려 애굽으로 몰려들 때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다시 이 구절에서 요셉의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무엇을 사용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기근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요셉의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근이 왜 요셉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되죠 그렇습니다. 바로 요셉의 형님들과 그의 부모를 만나게 하 시기 위해서 기근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온 지면에 기근이 임한다는 것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고향인 가나안과 애굽은 제법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고 서로 기후 조건도 다른 곳 이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애굽과 가나안이 동시에 기근이 든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온 지면에 기근이 임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이 기근은 누 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의 형님들과 부모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세상 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재앙이나, 우연이 일 어난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일은 요셉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 하 나 우연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들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런 관점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움직임이나 우주의 변화 이 모든 것들이 실은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며 손짓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일들을 그 냥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죠. 애굽에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는 때에 드디어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얼마 만입니까 일반적으로 이 때 요셉의 나이를 약 40세 가량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약 몇 년 만 이죠 야곱이 17세에 집을 떠났으니 약 23년 만입니다. 이 23년 동안 야곱의 가족은 요셉을 빼 놓고 성경에서 자 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다시 등장을 합니다. 자 이렇게 오랜만에 등장한 야곱이 무엇이라 이 야기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 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이들을 채근합니다. 왜 관망만 하늬냐고요.
그렇다면 왜 야곱의 아들들은 이 일에 대해서 관망만 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찔림입니까 그렇습니다. 동생을 애굽으로 판 사실 때문에 찔림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는 일을 망설인 것입니다. 행여나 애굽에 갔다가 동생 요셉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과거에 우리들이 저지른 일들 이 다 들통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20년이 넘도록 이들의 기억 속에는 요셉이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근이 다시 요셉을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이 이들의 양심 을 자극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알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이 언젠 가는 우리들의 양심에 호소하며 괴롭힌다는 것을요. 종종 지은 죄를 시간이 지나면 해결을 하겠지 하고 덮어두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잠깐 잊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것들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해결을 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그 문제를 해결을 해야 합니다. 종종 죄를 짖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 해결을 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사람 들과 관계가 된 죄라 한다면 사람 앞에서도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제사를 드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 합니까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해서 충분한 배상을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 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을 드린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회개는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먼저 사람과의 관계를 청산하 고 하나님께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해결하지 않은 죄악이 있다면 속히 처리하십시오. 요셉의 형님들을 보십시오. 20년이 넘도록 까마득히 잊혀진 일들이지만 애굽이야기가 나오니까 다시 움찔 하지 않습니까 세월 속에 묻어두려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도 깨끗이 해결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요셉의 형님들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여러분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 겠습니까 이들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생각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팔려갔던 요셉에 대 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동생도 이 길로 팔려 갔겠지 , 요셉이 이 길로 팔려 갈 때 얼마나 고통스러 웠을까 하는 것들이 이들의 양심에 호소를 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노예 상인들이라도 만나면 혹 그곳에 요셉은 없을까 기웃기웃 거렸을 것입니다. 혹 노예들이 나와 일을 하고 있으면 그곳에 요셉은 없을까 하면서 가슴 조이 며 길을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 지은 사람의 삶입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죠. 제가 중학교를 다닐 때 성적이 좋지 않아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장롱 깊 숙이 성적표를 숨겨둔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든 지요. 행여나 나 없는 사이에 어머니가 그곳을 뒤져보 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불안감 때문에 밖에 나가 놀지도 못했습니다. 잠깐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도 시선이 제일 먼저 그것으로 갑니다. 어쩌다가 그것이 흩어려져 있기라도 하면 행여나 들통이 났을까봐 가슴을 조였습니다. 집 안에서 놀 때도 어머니가 그곳에 가까지 접근이라도 하시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그해 방학은 그렇게 지 냈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성적표를 내 놓고 꾸지람을 듣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데 방학이 거의 다 끝나가도록 긴장과 불안으로 지냈습니다. 결국 학교 갈 때가 다 되어서 끄집어 내 놓아야 했 습니다. 그 때의 그 후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불안과 초조함 이것이 요셉의 형님들이 애 굽을 가면서 느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죄를 짖고 해결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사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있다면 고백하십시오. 내어놓으십시오. 그리고 참 자유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을 만난 형님들 이렇게 애굽을 방문한 요셉의 형님들은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요셉을 만납니다.
함께 6,7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이들을 직접 만난 것은 이례적입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애굽의 고위 관리가 이방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이런 일을 처리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셉 이 이들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요셉은 이미 자신의 형님들이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이러저러한 사람이 오면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하라고 신하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형님들을 만나 면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도 이미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오늘 본문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일들은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형님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요셉이 취한 자세는 어떤 자세입니까 7절에 보면, 예, 모른척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엄한 소리로 어디서 왔느냐 고 호통을 칩니다.
또 9절을 보십시다.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누명을 씌웁니다. 어떤 누명이죠 예, 이 땅을 정탐하러 왔다는 죄 목을 뒤지어 씌웁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렇게 형님들인 줄 알면서 자신을 알리지도 않고 정탐꾼이라는 누명까지 씌우고 있을까요 혹 여러분 중에는 원수 같은 형님들이니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골탕을 좀 먹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을 하 실 지 모르겠습니다. 언 듯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누명을 씌우는 일이나 형님들을 감옥에 넣는 일이 다 그러 해 보입니다. 또 요셉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머나먼 이국 땅에 노예로 팔리기까지 다 형님들 때 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한데는 그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백과 용서를 위하여
그렇다면 요셉의 깊은 생각은 무엇일까요 요셉과 형님들 사이에는 해결할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형님들이 요셉을 판 일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를 해야 하고 형님들 입장에서 보면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약 이 문제가 제대롭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항상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품 고 살아야 하니까요. 형님들은 형님들대로 동생 요셉의 눈치만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혹 동생 요셉이 원수를 갚 기 위해서 칼을 빼 들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것이며 동생 요셉은 내 형님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잘 못을 깨달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이런 오해 속에서 생활을 한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얼마나 불편하고 서먹서먹한 관계입니까 하기야 요즘 우리 같으면 그래도 안그런척 하고 살아갔을 터이지만 요 셉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요셉은 서로 순수하지 않게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그런 척 하고 만나는 일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간에 문제가 되는 것을 해결하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게 형님 제가 총리가 됐오 하고 등장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님들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당연히 잘못 했다고 말하겠지요. 왜죠 그렇습니다. 요셉의 권위에 눌려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종 부모들이 자식을 교육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부모라고 하는 권위를 내세워서 자녀를 항복하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나는 네 부모고 너는 내 자식이니 잘못했다고 말 해라 그렇지 않으면 혼내줄테다 하는 식입니다. 잘못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쉽게 자녀로부터 잘못했어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른 교육방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 마음에는 부모에 대한 불신감만 쌓여 갈 뿐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 과 대화를 해야 한다 하도 말들을 하니까 이런 부모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불러 놓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이는 늘 부모가 대화로 문제를 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잘 끄집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도 실 은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내 놓을 만한 준비 과정이 필요한 것이죠. 그런데 다짜고짜 부 모가 이야기를 하지고 하니까 자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버럭 화를 내면서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하는데 왜 너는 그 모양이냐 하고 화를 내버립니다. 이것 역시 부모의 권위를 내 세우는 일입니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게도 대화를 할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잘 준비가 되면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렇게 대화로 문제를 풀어 가면 시간은 좀 걸리지만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아이들이 반응을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이 갑자기 형님들 나 여기 있소 하고 나타나 면 요셉의 권위 때문에 요셉아 용서해라 하고 눈물을 글썽일 터이지만 이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형님들을 위해서 스스로 깨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고 참고 인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세심한 배려를 살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속히 드러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형님들 자 나를 보시오 내 가 어떻소,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만 나는 이렇게 성공을 했오 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형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참아온 것이 아닙니까 또 긍정 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그 동안 얼마나 보고싶은 형제들이었습니까 23년만에 만나는 혈육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감추고 이렇게 하는데는 형님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 때문입니다. 서로의 만남이 아무런 거리낌 없기를 위해서요.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누명을 씌우고
그렇다면 요셉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에서 요셉이 이들을 보고 정탐꾼이라 이야기하자 형님들이 무엇이라 대답을 합니까
11절을 보십시다. 요셉은 12절에서 계속해서 아니라 말합니다. 그랬더니 13절에서 형님들은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예, 다시 자신들이 한 가족임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이 정탐꾼이라고 누명을 씌우자 이들은 왜 자신들은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가족을 모두 정탐꾼으로 보내어 여차하면 모두 죽게 하지는 않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탐꾼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계속해서 자 신들이 한 가족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막냇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은 점을 들어 정탐꾼임을 기정 사실로 만들면서 저들을 감옥에 쳐 넣고 있습니다. 3일 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들은 이 곳에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상대방과 똑 같은 처지가 되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 지 않습니까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부모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이들을 키워 보니까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부모님에게 여러모로 죄송하고 송구스럽더군요. 이렇듯 사람은 그 일을 당해 봐야 상 대방이 그 일을 당했을 때 어떠했을까를 이해하게 됩니다. 요셉의 형님들도 이제 요셉의 처지가 되어 감옥에 갇 히게 됩니다. 얼마동안 입니까 그렇습니다. 3일간입니다. 이 3일간 이들이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 은 동생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요셉은 그 때 앞이 얼마나 캄캄했을까 그 때 우리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 렀지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을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 왠지 서글퍼집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고 요셉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드렸으 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꼭 이렇게 자신도 그 일을 당해 보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런 일을 당해 보지 않고서도 미리 생각해 보고 미리 판단해서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입장에서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일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옥살이 아무튼 삼일만에 요셉은 형님들을 끄집어내어 한 사람을 볼모로 잡고 나머지 사람들을 돌려보내어 동생 베냐 민은 데리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이 명령을 들은 형님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이런 일들 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를 시작합니다.
21,22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 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문제가 없을 때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 못되었다 말씀하셔도 잘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옳다고 고개를 바 짝 세웁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터지면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말입니다. 그 래도 이것은 그나마 낳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얻어 맞아도 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의 형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자신들이 지은 지난 일들을 죄악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들이 몇 년 동안 이 일을 감추어 두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23년 동안 이 일을 감추어 두고 있 었습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자신들이 지은 일들에 대해 서 다시 평가하기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렇습니다. 죄악으로 평가를 합니다. 23년 동안 마음 깊숙 이 감추어 두고 살던 이 일이 애굽에 기근이 들자 양심이 움직이기 시작을 하더니 감옥살이를 하면서 곤란한 일 을 당하면서 활성화가 되어서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감정을 누르고 요셉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울고 맙니다. 함께 이 장면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24절입니다. 물론 요셉이 여기서 자신을 드러 내놓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요셉은 자신을 감춥니다. 욀까요 그것은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더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 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한 고백에 따른 실제적인 삶이 확인하는 일입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잠시의 감정으 로 어떤 것들을 고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고백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고백이든지 그 고백에는 삶이 따라와야 합니다. 지금 이들이 한 이 고백은 곤란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감정이 고무되어 한 이야 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한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이들의 삶을 좀더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었 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님들이 한 고백을 듣고도 나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셉의 자세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을 악으로 갚지 않은 자세도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형님들의 죄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가면서 형님들을 돕고 있는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원수 같은 형님들이 아닙 니까 감옥에 쳐 넣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님들이 죄를 스스 로 처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서로 거리낌이 없는 가족 이 되기 위해 진정한 용서와 진정한 고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요셉은 형님들을 세심하게 돕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서 본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원수 같 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원수 같은 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미운 감정을 그대로 지닌 체 만나지는 않습니까 원수 같은 생각을 그대로 둔체 서로 악수를 하고 웃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이 요셉처럼 원수 같은 사람, 미운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나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기 위한 수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땀흘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시렵 니까 하나님께서도 원수 같은 우리들을 받아들이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 놓으셨습니다. 그렇 다면 우리들도 우리들이 보기 싫은 사람, 원수 같은 사람, 얄미운 사람,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은 여러분들도 하나님께는 원수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하셔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단지 우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서로 용납하고 세워가면서요. 이를 위해 노력해 보십시다. 이를 위해 수고의 땀을 흘려 보십시다. 이 를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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