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넘어서 (창37:5-11,50:15-21)
본문
창세기가 모두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의 14장이 요셉의 이야기로 할애되 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12장이고, 야곱의 이야기가 10장인데 비해 그 분량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미루어 요셉의 이야기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야곱은 설교에 자주 등장하여 도 요셉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주일학교 시간에 듣는 재 미있는 연속 동화로만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요셉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고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는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오랫동안 아기를 못 낳다가 얻은 귀 한 아들로 야곱이 다른 형제들보다 특히 요셉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를 시기한 형 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제들이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을 꾸고 이를 형제에게 이야기하므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들에 나간 형들을 찾아갔다가 애급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애급으로 팔려 간 요셉은 친위대장인 보디발 장군의 집에 가서 일을 잘하여 신용을 얻었으 나 그를 좋아하는 부인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옥에서 여 러 해를 지내던 요셉은 다른 사람들이 해몽하지 못한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해 줌 으로 일약 애급의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애급과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양식이 떨어진 야곱의 아들이 애급으로 양식을 사러 오게 되었고 여기서 자기들 이 팔아 버렸던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들이 요셉을 두려워하였으나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음을 깨달은 요셉의 너그러움으로 형들은 그들의 염려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그대로 우리 삶의 한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 족속을 향한 원대한 꿈을 가졌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 라함이 가졌던 꿈과 같습니다. 즉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복을 얻고 그가 온 세계의 아비가 된다는 꿈이 그것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로 말미암 아 온 세계가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일생도 그 족속을 구원하는 하나의 구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 애급에 팔려 가 갖은 고난을 겪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고난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요셉으로 말미암아 그 족속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좀 더 구체적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구원이 선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의 모형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요셉의 생애 속에서 우리의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꿈을 지니자 먼저 요셉 하면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그는 꿈꾸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환상(vision)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족속의 우두머리가 되는 꿈을 두 차례나 꾸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들판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자기 가 묶은 곡식 단이 가운데 우뚝 서자 형들이 묶은 곡신단들이 둘러서서 절을 하 였다는 꿈이고, 또한번은 하늘의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있었는데 그 별들이 모 두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이었습니다. 그가 꾼 꿈은 어떤 권력의 자리에 오 르겠다는 꿈이 아니라 그 족속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이스 라엘 민족의 역사는 꿈꾸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이 가졌던 원대한 꿈으로 시작해서 예언자들의 꿈으로 연결되어 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쩌면 이루지 못할 허황한 꿈을 좇아 방황한 허무한 역 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한번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꿈을 기록하여 성서로 간직하면서 그 꿈의 실현을 줄기차게 기다리면서 고난의 역사를 헤쳐 온 민족입니다. 이제 그 꿈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새 이스라엘 민족인 크리스천들에게 인계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그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잘 알면서도 완전케 될 날을 기다리며, 역사를 통하여 이 땅위에 낙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 있는 자들이라고 비웃고는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 꿈을 비 신화화시키고 현실화시키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이 꿈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을 믿은 형제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 꿈은 너 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은 너무 거창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허황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꿈은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제시되었고 그이 제자들의 복음의 역사를 통하여 증명 된 꿈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꿈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이 세대가 악할수록 더욱 이 꿈을 깊이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그 원대한 꿈은 필요 한 것입니다. 작가 게오르규는 꿈이란 돛단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꿈은, 돛이 바다 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돛단배를 거들어 주듯이, 우리의 삶을 도와 전진케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돛이 배의 동력과 크기에 비해 너무 클 경우엔 난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갖되 자신의 힘과 자신의 무게와 자신의 가치에 비례하여 합당한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의 경우 꿈이 너무 커서 파선되기보다는 꿈이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성령님의 바람이 불었지만 이것을 받을 꿈의 돛이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안동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큼직한 꿈의 돛을 높이 달고 성령님의 바람을 맞이할 때 속도 있게 자유와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 하여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는 '성장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정하고 내적으로는 성서 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신앙을 성장시키고, 외적으로는 교회당 건축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큰 선교 적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낡은 배를 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긴 항해에 파선되지 않고 목표한 곳에 무사히 도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배를 새로 건조하고 거기에 알맞는 큰 꿈의 돛을 달고 선교의 긴 항 해를 위하여 출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우리의 힘과 뜻을 모으 고 열심히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살자
둘째로, 요셉의 생애 속에서 크게 교훈 받을 점은 그의 성실성입니다. 그가 특히 역경을 당하였을 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성실한 믿음 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의 꿈과는 동떨어지게 애급의 노예로 지내게 되었을 때 그는 낙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곧 신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 모함을 받고 그가 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또한 그 곳에서 성실하였기에 모든 사람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가진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환경 아래서나 그는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였을 뿐입니다. 바로 여 기에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 뿐 입니다. 우리는 원대한 꿈을 가질수록 현실은 그와 반비례해서 언제나 악조건이기 마련 입니다. 때로는 그 악조건과 환경을 탓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일상 생활에 성실하지 못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때가 와도, 모든 조건이 호전되어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조건으로 자기의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 속 에서 성실하게 자기 책임을 감당하는 진실된 인간만이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 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문제된 것은 바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성실 때문에 먼저 계약은 파괴되고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직할 정 도로 자기의 믿음을 성실하게 지켜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더라도 그는 너무나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이었고 너 무나 세상 물정을 등진 사람이었고,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뜻에 성실한 복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 실한 복종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죽어야 되었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서 구원이 가 능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자유와 정의를 혹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거나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 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 갈 때 마침내 꿈이 실현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땅에 서 성실하지 못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성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 의식을 갖자
셋째로 요셉의 위대한 점은 그가 역사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 셉의 아버지 야곱이 애급에서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한 형들이 그 앞에 나아 와 용서를 빌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창 50:19-20) 그렇습니다. 그가 총리 대신이 되어 자기 족속을 구하였다 해서 그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역사를 이룩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일 수가 없 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 역사에 동참할 뿐입니다. 요셉은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거나 그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려하지 않았고 오히 려 겸손히 자기의 위치를 깨달았고 그것이 하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룩해 가는 과 정이라고 생각하므로 역사를 올바로 파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자기를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곳에 있습니다. 많은 정치 가들이 바로 이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지나치게 그들 자신을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한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자기 역사의 위치를 올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 엘은 그의 역사적 사명을 새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에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역사적인 안목을 갖지 못한 채 그의 권력을 남용했더라면 성서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 되지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넓은 안목을 갖고 역사 를 바로 파악하므로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사로운 일에 휘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한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잡다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거기에 사로 잡히지 않고 보다 넓은 시야로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안목을 가질 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지는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를 알았기에 자기를 달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구원의 역사의 흐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오늘의 고난과 역경을 또한 극 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경을 뚫고 나가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새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도 역사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알 때 그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역사의 중심이 아닙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교회를 노아의 방주로 생각할 때 교회는 그의 사명을 올바로 수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만 탄 후 문이 닫혀 버리는 노아의 방주가 곧 교회의 참된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는 기관일 뿐입니다. 교회는 이 역사의 의미를 이 시대에 알려줄 선교 적인 사명만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과 그 역사에 우리가 동참하여 그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시켜 나가고 있다는 사 실입니다. 우리는 1978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바다 위에 우리의 신앙의 배를 띄우면서 먼저 희망의 돛을 높이 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바람을 안고 자유와 평화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 나갑시다. 때로는 이 항해의 길에 폭풍이 몰아쳐 우리의 희망의 돛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성실함과 인내의 노를 저어 나아갈 때 폭풍우는 개이고 다시 밝은 태양이 찬란하게 우리의 앞길에 빛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항해의 길에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향해서 나아가던 방향을 잃고 헤매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고 방향을 바로 잡아 키를 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길잡이가 될 것이며 항해 지침서 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손에서 성경을 놓지 말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대 로 우리 생의 방향을 조정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틀림없이 모든 역경을 뚫고 우리가 목표한 해안에 도달하여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제들이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을 꾸고 이를 형제에게 이야기하므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들에 나간 형들을 찾아갔다가 애급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애급으로 팔려 간 요셉은 친위대장인 보디발 장군의 집에 가서 일을 잘하여 신용을 얻었으 나 그를 좋아하는 부인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옥에서 여 러 해를 지내던 요셉은 다른 사람들이 해몽하지 못한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해 줌 으로 일약 애급의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애급과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양식이 떨어진 야곱의 아들이 애급으로 양식을 사러 오게 되었고 여기서 자기들 이 팔아 버렸던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들이 요셉을 두려워하였으나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음을 깨달은 요셉의 너그러움으로 형들은 그들의 염려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그대로 우리 삶의 한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 족속을 향한 원대한 꿈을 가졌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 라함이 가졌던 꿈과 같습니다. 즉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복을 얻고 그가 온 세계의 아비가 된다는 꿈이 그것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로 말미암 아 온 세계가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일생도 그 족속을 구원하는 하나의 구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 애급에 팔려 가 갖은 고난을 겪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고난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요셉으로 말미암아 그 족속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좀 더 구체적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구원이 선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의 모형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요셉의 생애 속에서 우리의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꿈을 지니자 먼저 요셉 하면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그는 꿈꾸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환상(vision)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족속의 우두머리가 되는 꿈을 두 차례나 꾸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들판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자기 가 묶은 곡식 단이 가운데 우뚝 서자 형들이 묶은 곡신단들이 둘러서서 절을 하 였다는 꿈이고, 또한번은 하늘의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있었는데 그 별들이 모 두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이었습니다. 그가 꾼 꿈은 어떤 권력의 자리에 오 르겠다는 꿈이 아니라 그 족속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이스 라엘 민족의 역사는 꿈꾸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이 가졌던 원대한 꿈으로 시작해서 예언자들의 꿈으로 연결되어 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쩌면 이루지 못할 허황한 꿈을 좇아 방황한 허무한 역 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한번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꿈을 기록하여 성서로 간직하면서 그 꿈의 실현을 줄기차게 기다리면서 고난의 역사를 헤쳐 온 민족입니다. 이제 그 꿈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새 이스라엘 민족인 크리스천들에게 인계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그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잘 알면서도 완전케 될 날을 기다리며, 역사를 통하여 이 땅위에 낙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 있는 자들이라고 비웃고는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 꿈을 비 신화화시키고 현실화시키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이 꿈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을 믿은 형제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 꿈은 너 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은 너무 거창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허황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꿈은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제시되었고 그이 제자들의 복음의 역사를 통하여 증명 된 꿈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꿈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이 세대가 악할수록 더욱 이 꿈을 깊이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그 원대한 꿈은 필요 한 것입니다. 작가 게오르규는 꿈이란 돛단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꿈은, 돛이 바다 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돛단배를 거들어 주듯이, 우리의 삶을 도와 전진케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돛이 배의 동력과 크기에 비해 너무 클 경우엔 난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갖되 자신의 힘과 자신의 무게와 자신의 가치에 비례하여 합당한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의 경우 꿈이 너무 커서 파선되기보다는 꿈이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성령님의 바람이 불었지만 이것을 받을 꿈의 돛이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안동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큼직한 꿈의 돛을 높이 달고 성령님의 바람을 맞이할 때 속도 있게 자유와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 하여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는 '성장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정하고 내적으로는 성서 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신앙을 성장시키고, 외적으로는 교회당 건축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큰 선교 적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낡은 배를 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긴 항해에 파선되지 않고 목표한 곳에 무사히 도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배를 새로 건조하고 거기에 알맞는 큰 꿈의 돛을 달고 선교의 긴 항 해를 위하여 출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우리의 힘과 뜻을 모으 고 열심히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살자
둘째로, 요셉의 생애 속에서 크게 교훈 받을 점은 그의 성실성입니다. 그가 특히 역경을 당하였을 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성실한 믿음 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의 꿈과는 동떨어지게 애급의 노예로 지내게 되었을 때 그는 낙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곧 신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 모함을 받고 그가 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또한 그 곳에서 성실하였기에 모든 사람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가진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환경 아래서나 그는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였을 뿐입니다. 바로 여 기에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 뿐 입니다. 우리는 원대한 꿈을 가질수록 현실은 그와 반비례해서 언제나 악조건이기 마련 입니다. 때로는 그 악조건과 환경을 탓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일상 생활에 성실하지 못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때가 와도, 모든 조건이 호전되어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조건으로 자기의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 속 에서 성실하게 자기 책임을 감당하는 진실된 인간만이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 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문제된 것은 바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성실 때문에 먼저 계약은 파괴되고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직할 정 도로 자기의 믿음을 성실하게 지켜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더라도 그는 너무나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이었고 너 무나 세상 물정을 등진 사람이었고,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뜻에 성실한 복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 실한 복종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죽어야 되었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서 구원이 가 능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자유와 정의를 혹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거나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 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 갈 때 마침내 꿈이 실현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땅에 서 성실하지 못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성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 의식을 갖자
셋째로 요셉의 위대한 점은 그가 역사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 셉의 아버지 야곱이 애급에서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한 형들이 그 앞에 나아 와 용서를 빌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창 50:19-20) 그렇습니다. 그가 총리 대신이 되어 자기 족속을 구하였다 해서 그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역사를 이룩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일 수가 없 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 역사에 동참할 뿐입니다. 요셉은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거나 그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려하지 않았고 오히 려 겸손히 자기의 위치를 깨달았고 그것이 하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룩해 가는 과 정이라고 생각하므로 역사를 올바로 파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자기를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곳에 있습니다. 많은 정치 가들이 바로 이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지나치게 그들 자신을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한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자기 역사의 위치를 올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 엘은 그의 역사적 사명을 새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에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역사적인 안목을 갖지 못한 채 그의 권력을 남용했더라면 성서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 되지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넓은 안목을 갖고 역사 를 바로 파악하므로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사로운 일에 휘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한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잡다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거기에 사로 잡히지 않고 보다 넓은 시야로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안목을 가질 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지는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를 알았기에 자기를 달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구원의 역사의 흐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오늘의 고난과 역경을 또한 극 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경을 뚫고 나가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새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도 역사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알 때 그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역사의 중심이 아닙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교회를 노아의 방주로 생각할 때 교회는 그의 사명을 올바로 수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만 탄 후 문이 닫혀 버리는 노아의 방주가 곧 교회의 참된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는 기관일 뿐입니다. 교회는 이 역사의 의미를 이 시대에 알려줄 선교 적인 사명만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과 그 역사에 우리가 동참하여 그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시켜 나가고 있다는 사 실입니다. 우리는 1978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바다 위에 우리의 신앙의 배를 띄우면서 먼저 희망의 돛을 높이 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바람을 안고 자유와 평화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 나갑시다. 때로는 이 항해의 길에 폭풍이 몰아쳐 우리의 희망의 돛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성실함과 인내의 노를 저어 나아갈 때 폭풍우는 개이고 다시 밝은 태양이 찬란하게 우리의 앞길에 빛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항해의 길에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향해서 나아가던 방향을 잃고 헤매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고 방향을 바로 잡아 키를 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길잡이가 될 것이며 항해 지침서 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손에서 성경을 놓지 말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대 로 우리 생의 방향을 조정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틀림없이 모든 역경을 뚫고 우리가 목표한 해안에 도달하여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부르게 될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