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벧엘과 헤브론으로 돌아옴 (창35:1)
본문
야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돌아온 이후로 10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이 에서 를 피하여 도망갈 때 벧엘에서 행했던 서원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28:20 이하). 그렇지만 그는 돌아오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것을 회상하였고 (31:13), 역시 세겜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기는 하였습니다(33:20). 이제 그는 벧엘로 돌아가 거기에 그가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1 절). 이 명령은 그로 하여금 등한시 되었던 일을 수행하도록 고무시킵니다. ' 즉, 그의 아내들의 우유부단한 생각을 묵인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오랫동안 간과했던 이상한 신들을 그의 집으로부터 제거하며 또한 그가 고통의 때에 행하였던 맹세를 하나님께 지키도록 고무시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집 사람(2-3절) 즉,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 그리고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 즉, 그의 남종과 여종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 을 바꾸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역시 "이방 신상" 즉, 라헬의 드라빔(31:19)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 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던 모든 우상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 습니다. 우상을 파묻은 것은 우상의 오염으로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는 표식 이었고, 이 하나님께로의 결정된 전환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겜을 떠날 때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렵게 하신고로" 즉, 초자연적으로 두렵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성(5절)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벧엘에 안전하게 도착 한 후에 야곱은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는 데,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을 기 억하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리브라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고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되었는데 그 이후로부터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곡함의 상수리'라고 불리웠는데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녀를 영구히 기 념했던 것은 그녀가 야곱의 집에서 신실하고 높이 평가된 종이었음을 증거 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제단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맹세를 이행한 후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에게 또 다시(28장을 언급함) 그가 30년 전에 그가 그곳으로 여행할 때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꿈 속에서였고 지금은 낮에 가견적인 형태로 나타 나셨습니다. 이전의 하나님의 출현은 야곱에게 이국 땅에서의 신적인 보호 와 그의 집으로의 귀환을 그를 구원의 축복을 지닌 자로 불러내었다는 사실 에 근거하여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성취하셨으며 따라서 야곱은 그의 맹세를 이행하였습니다. 이것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가 이미 32:28에서 그에게 부여하셨던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확증하셨으 며 또한 그것과 더불어 수 많은 후손을 가질 것과 가나안을 소유하게 하시 리라는 약속을 확증하셨는데 그 약속은 형식과 본체에 관한 한 창17:6, 8로 거슬러 올라가 지적하며 또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의 출생 과 그가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먼 미래에까지 확장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그에게 보증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 은 임산하여 심히 신고합니다. 산파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녀를 위로 합니다.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이 말은 요셉이 태어 났을 때 그녀가 표현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녀는 죽어갈 즈음에 그를 베노니 즉,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나 야 곱은 아랍어에 의해 유지된 "냐민"이란 단어의 의미를 따라 베냐민, 아마도 행운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때의 자신의 고통이 이제 12숫자를 채운 이 아들의 출생에 의해 보상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는 라헬을 에브랏 즉, 베들레헴(떡집)으로 가는 길에 장사하고 라헬의 묘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들이 진행하는 동안 야곱은 믹달 에델 다른 편에 자기의 장막을 쳤는 데, 그곳에서 르우벤은 그 서모인 빌하와 통간합니다. 이 사실은 49:4을 준 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그것을 들었다는 간략한 기사로 여기에 암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재산이라고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났었 지만, 이제는 12아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와같이 그는 신실하신 언약 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헤브론에 있는 그 의 아버지의 장막에 그가 도착한 기사는 그의 12아들들의 관련된 어머니를 따라 배열된 아들들의 목록보다 나중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이 목록은 비록 12번째 아들인 베냐민이 밧단아람에서 태어나지 않고 돌아오는 여행 중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니라"는 주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 즉, 기럇아르바나 헤브론 곁에 있는 마므 레의 상수리나무에 도착한 것은 거기에 이삭의 상속자로 남기 위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기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돌아온 것과는 경우가 틀립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더불어 이삭의 생애의 역 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여기서 이삭의 생애는 조금 더 남아 있지만 실제적 으로는 야곱의 그의 12아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이삭의 주요 생애는 끝난 것이 되어버립니다. 에서와 야곱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아버지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악수하지 만 그 이후로 그들의 발길은 돌려지고 더 이상 만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에서도 역시 신적인 약속을 받았고(25:23), 또한 그의 종족의 역사가 이미 아버지의 축복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서로 얽혀져 있으므로 그가 민족으로 성장하는 기사가 창세기 제시되고 있고, '에돔'은 에서 후손의 민족적 대명사가 됩니다. 에서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상속에서 제 외됨을 보이기 위하여 창세기의 일정한 계획에 의하여 야곱의 역사보다 먼저 나온 것이요, 다음 장에 나오는 야곱의 역사에 대한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역사 그 실체와 특징(37:-50:) 이삭의 역사는 그의 아들들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문을 세운 것에 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 이국땅에 있었으 며 아직 그의 분깃의 당연한 소유물을 인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는 그의 아버지의 장막으로 돌아와 가족의 재산을 인수하는 것에서 시 작할 뿐이며 또한 그가 세운 가문의 족장으로서의 그의 생애의 역사만을 포 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생애의 이 기간에 그의 아들들, 특별히 요셉 과 유다가 전면에 나타나 있고 따라서 "요셉은 다음에 나오는 역사의 원동 력적인 원리로서 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위해 그 가문의 우두머리와 중심점으로 계속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야곱이 애굽으로 이거한 것을 전후하여 그가 가나안에 거주한 시기(37-45장)와 고센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시기(46-50장)로 구분됩니다. '첫번째 시기'는 애굽으로 그가 이민가는 것을 예비하고 결국에 그렇게 된 사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길은 직접적으로는 요셉이 팔리운 것(37장) 에 의해, 간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부르심을 위험에 처하게 했던 유 다와 가나안으로부터 잠시동안 이거할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그 길은 오셉 의 애굽에서의 놀라운 출세 즉, 그가 노예와 감옥 생활로부터 전 애굽을 다 스리는 통치자로 승진된 사실에 의해 열립니다(39-4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민은 가나안에서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생겼는데, 그 기근은 야곱의 아들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떠나게 했고 또한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죽은 줄로 알고 슬퍼했던 아들을 찾도록 했고, 요 셉에게는 그의 가족을 애굽으로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42-45장).
'두번째 시기'는 야곱이 애굽으로 이민가서 고센땅에 머문 것으로 시작하 고 있습니다(46:-47:27). 그것은 야곱의 마지막 해, 가나안에 자기를 묻어 줄 것을 마지막으로 유언하는 것(47:28-31), 요셉의 아들들을 그의 양자로 삼은 것, 그의 열 두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포함하고 있으며(49장), 또한 그의 장사와 요셉의 죽음까지 포괄되고 있습니다(50장). 그런데 만일 우리가 족장 야곱의 역사의 이 시기와 이전의 그것들 즉, 이 삭과 아브라함의 그것과를 비교한다면, 그것은 신적인 계시가 없다는 점에 서 그것들과는 다릅니다. 사실상 야곱이 가족의 분깃을 인수하기 위해 간 때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그가 전체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갈 준비를 했을 때 약속된 땅의 경계에 있는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이 꿈 속에 나타나신 일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의 조상의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후 손이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증가될 것과 그들이 가나안으로 귀환하게 될 것 을 약속하십니다(46:2-4). 이 사실은 신적인 현현의 끝이 이미 이르렀으며 열 두 아들로 된 야곱의 집에 약속된 국가의 발전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으며 또한 그 선택된 가족이 한 민족으로 성장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그 과정을 위해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가 필요하였지만 적어도 한 민족으로의 이 성장이 그 자 연적인 과정을 취하는 한 특별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쉽사리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은 방해를 받지 않았 으며 오히려 애굽으로 이거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족장들에게 그들의 나그네 생활의 땅으로 지정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후손에게 그들이 한 민족을 이룬 후에 소유하게 될 것이 약속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 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나타 나 이국 땅에서 그를 보호할 것을 약속하시고 그의 약속을 성취시키실 것을 확증하지 않으셨다면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은 특별히 아브라함이 이미 여호와께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므로(15:13-16)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 하실 방법에 관하여 이 이상 더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창세기의 이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하나님의 명칭의 사용은 이와같이 야곱-이스라엘에 대해 시작하고 있는 사건의 특징과 완전히 조화가 됩니다. 즉, 37장(요셉이 팔림)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 반면에 38장과 39장에서 우리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9번, 그리고 엘로힘은 단 한 번(39:9) 찾아 볼 수 있으며 그것도 여호와가 허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였다는 사실에 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40:1 이후에 여호와라는 명칭은 단지 40-50장에서 단 한 번(49:18) 나타날 뿐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반면에 엘로힘은 18번, 그리고 하엘로힘은 7번 사용되는데, 이는 "너희 하나님"(43:23) 또는 "그의 또는 너희 아비의 하나님"(46:1,3)과 같은 표현들을 언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호와나 엘로힘 또는 하엘로힘의 숫자적인 비율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한 어려운 수수께끼가 계속적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명칭 들이 사용된 방법을 살펴볼 때 우리는 38장과 39장에서 기자가 하나님을 9 번 언급하고 그를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40-50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밖의 각 경우에서 그것은 언제나 관련된 사람들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즉, 바로(41:38-39) 또는 요셉과 그의 형제(40:8, 1:16,51,52 등 엘로힘; 그리고 41:25,28,32 등 하엘로힘) 또는 야곱(48:11,20,21, 엘로힘).
그런데 역사가가 38장과 39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9번 언급하고 있고 40-50장에서는 단지 두 번만을 언급하고 있는 상황은 마지막 열 한 장에서 이것에 대해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던 역사의 실체(본질)에 의해 설 명됩니다. 그러나 그가 38-39장에서와 같이 40-50장에서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고 46:1에서 "그의 (야곱의) 아비 이삭의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그후 직접적으로 엘로힘(2절)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는 야곱이 그의 아비에게 나타나셨고, 이삭이 제단을 쌓았던 하나님께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렸으 며, 그 후에 이 하나님(엘로힘)이 그에게 꿈 속에 나타나 그의 조상들의 약 속 등을새롭게 하셨으므로 "그의 아비의 하나님"이란 완곡법의 단순한 이름 이 여호와보다 더 적합하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행했던 것과 경험했던 것과 그의 아버지가 거기에서경험했던 것 사이의 내면적(본질적)인 연관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여호와라는 명칭의 완곡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도 그가 자기 아들들을 두번째로 애굽으로 보내면서 한 축복(43:14)과 요셉의 아들들을 양자로 삼으면서 한 축복(48:3)에서 엘 샤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 고 있으며, 또한 요셉의 아들들(48:15)과 요셉 그 자신(49:24-25)에게 대한 그의 축복에서 여호와라는 명칭에 대한 수사학적인 완곡법을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그에게(35:11-12) 뿐만 아니라 그의 아비 아브 라함과 이삭에게(17:1과 28:3) 엘 샤다이로 나타내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전능자, "그를 돌보시는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목자와 반 석"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이 규정된 이야기들에서 여기에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들은 의문의 여지없 이 단순한 명칭인 여호와보다는 더욱 의의가 있고 또한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48:11, 20, 21에서 여호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엘로힘에 대해서만 언급할 때 11절과 21절에서 공통적이고 말하자면 판에 박은듯한 말을 포함하고 있는 그 말들 자체에서부터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오직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어디든지 49:18이 입증하는대로 이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명칭은 41:38-39에 서의 바로의 말과 요셉이 죄수(40:8)와 바로에게 한 말(41:16,25,28,32), 그가 자신을 소개한 그의 형제들과의 대화(42:18, 43:29), 또한 유다가 애 굽의 알지 못하는 국무총리인 요셉에게 호소하는 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44:16). 그 사이에 요셉의 형제들도 역시 서로간에 엘로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42:28).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아들들의 탄생을 오직 엘로힘의 선물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41:51,52, 48:9), 그가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드 러내는 엄숙한 순간에 단지 엘로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5절). 그리고 그는 임종시에도 말하기를, "나는 죽으나 엘로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 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50:24-2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단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요셉 은 그의 형제들과 같이 그의 생애의 놀라운 변화들에서 여호와의 방법을 분 명히 분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비록 그들이 애굽의 알지 못하는 통치자 앞에 이끌려온 것이 요셉에 대해 저지른 죄로 인하여 하나님 께로부터 공평한 형벌을 받는 것임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들의 형제를 팔아 버림으로써 엘로힘(사람들의 창조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범 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에 대해 범 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형제를 팔았을 뿐만 아 니라 그들의 형제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되고 주어진 후 손의 한 지체를 선택된 가족의 고제에서 내어던져 버렸고 또한 구원의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에 대하여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의 이러한 국면은 아직도 그들에게서 감춰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여호와에 대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요셉은 그 의 생애의 놀라운 과정을 그의 가족을 보존하고 구조하기 위한 신적인 계획 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이 특히 마지막 소원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이후에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냄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 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출세에 있어서 언약의 하나님의 특별한 임용을 깨닫 고 그것을 여호와의 은혜스러운 역사로 묘사케 할만큼 여호와의 방법에 대 한 통찰력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내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명칭이 없어진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전의 은혜의 계시들과 행동들이 여호와(이 명칭은 언약의 하나님의 이 명칭에 대신하여 사 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더욱 적합합니다)의 개념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법을 생기게 하였다는 사실로부터, 또한 부분적으로는 요셉을 포함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의 과정에서 언약의 하나님의 구원의 인도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을 여호와의 역사로 묘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통찰력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끝났다는 사실과 밀 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비록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가문을 보존하고 그의 구원의 계획들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도구로 선택함을 받기는 했지만 맨 처음 시기에 그의 아버지의 집의 교제로부터 구별되었으 며 또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다니엘 이 그후 갈대아 궁전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환상 또는 계시로 뒷 받침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요셉을 세 족장과 동일한 수준에 둘 수 없으며 또한 "족장 생활이 가장 고귀한 번성기가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즉, 그에게서 족장 생활의 전체 의미가 종합되고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약 세대 전체의 완전한 번성기와 유일한 완성을 볼 수 있다는 진술을 앞부분이 관련되는 한 정확하고 성경적인 것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동일한 방식으 로서의 구원의 매개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전체 가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애굽 인들에게 있어서도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에게나 이스라엘 가 문에게 구원 즉, 영적인 도움이나 교훈을 가져다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야곱의 축복에서 지상에 있는 것들에서의 장자의 가장 풍성한 분깃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유다를 통하여 민족들에게 전달되게 되어 있었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함이 없이 요셉의 역사를 "비천에서 고귀로, 노예에 서 자유로,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여호와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로에 대한 한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시 이스라엘의 역 사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역사의 한 전형이 되는 한 요셉의 생애를, 모 든 세기에 걸친 신앙하는 주석가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애의 한 전형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전형적인 특성들을 구원의 지식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표론적 (typological)인 경박함에 유혹되어서는 안되며, 요셉이나 그의 출세가 선 지자나 그리스도 또는 그의 사도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전형-예를들면 이 스라엘을 애굽으로 또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는 것(호 11:1; 비교 마 2:15)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는 그밖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있어서 동일한 방법의 어떤 것-으로 표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집 사람(2-3절) 즉,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 그리고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 즉, 그의 남종과 여종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 을 바꾸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역시 "이방 신상" 즉, 라헬의 드라빔(31:19)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 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던 모든 우상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 습니다. 우상을 파묻은 것은 우상의 오염으로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는 표식 이었고, 이 하나님께로의 결정된 전환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겜을 떠날 때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렵게 하신고로" 즉, 초자연적으로 두렵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성(5절)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벧엘에 안전하게 도착 한 후에 야곱은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는 데,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을 기 억하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리브라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고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되었는데 그 이후로부터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곡함의 상수리'라고 불리웠는데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녀를 영구히 기 념했던 것은 그녀가 야곱의 집에서 신실하고 높이 평가된 종이었음을 증거 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제단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맹세를 이행한 후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에게 또 다시(28장을 언급함) 그가 30년 전에 그가 그곳으로 여행할 때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꿈 속에서였고 지금은 낮에 가견적인 형태로 나타 나셨습니다. 이전의 하나님의 출현은 야곱에게 이국 땅에서의 신적인 보호 와 그의 집으로의 귀환을 그를 구원의 축복을 지닌 자로 불러내었다는 사실 에 근거하여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성취하셨으며 따라서 야곱은 그의 맹세를 이행하였습니다. 이것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가 이미 32:28에서 그에게 부여하셨던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확증하셨으 며 또한 그것과 더불어 수 많은 후손을 가질 것과 가나안을 소유하게 하시 리라는 약속을 확증하셨는데 그 약속은 형식과 본체에 관한 한 창17:6, 8로 거슬러 올라가 지적하며 또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의 출생 과 그가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먼 미래에까지 확장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그에게 보증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 은 임산하여 심히 신고합니다. 산파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녀를 위로 합니다.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이 말은 요셉이 태어 났을 때 그녀가 표현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녀는 죽어갈 즈음에 그를 베노니 즉,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나 야 곱은 아랍어에 의해 유지된 "냐민"이란 단어의 의미를 따라 베냐민, 아마도 행운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때의 자신의 고통이 이제 12숫자를 채운 이 아들의 출생에 의해 보상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는 라헬을 에브랏 즉, 베들레헴(떡집)으로 가는 길에 장사하고 라헬의 묘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들이 진행하는 동안 야곱은 믹달 에델 다른 편에 자기의 장막을 쳤는 데, 그곳에서 르우벤은 그 서모인 빌하와 통간합니다. 이 사실은 49:4을 준 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그것을 들었다는 간략한 기사로 여기에 암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재산이라고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났었 지만, 이제는 12아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와같이 그는 신실하신 언약 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헤브론에 있는 그 의 아버지의 장막에 그가 도착한 기사는 그의 12아들들의 관련된 어머니를 따라 배열된 아들들의 목록보다 나중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이 목록은 비록 12번째 아들인 베냐민이 밧단아람에서 태어나지 않고 돌아오는 여행 중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니라"는 주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 즉, 기럇아르바나 헤브론 곁에 있는 마므 레의 상수리나무에 도착한 것은 거기에 이삭의 상속자로 남기 위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기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돌아온 것과는 경우가 틀립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더불어 이삭의 생애의 역 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여기서 이삭의 생애는 조금 더 남아 있지만 실제적 으로는 야곱의 그의 12아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이삭의 주요 생애는 끝난 것이 되어버립니다. 에서와 야곱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아버지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악수하지 만 그 이후로 그들의 발길은 돌려지고 더 이상 만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에서도 역시 신적인 약속을 받았고(25:23), 또한 그의 종족의 역사가 이미 아버지의 축복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서로 얽혀져 있으므로 그가 민족으로 성장하는 기사가 창세기 제시되고 있고, '에돔'은 에서 후손의 민족적 대명사가 됩니다. 에서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약속에 대한 상속에서 제 외됨을 보이기 위하여 창세기의 일정한 계획에 의하여 야곱의 역사보다 먼저 나온 것이요, 다음 장에 나오는 야곱의 역사에 대한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역사 그 실체와 특징(37:-50:) 이삭의 역사는 그의 아들들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문을 세운 것에 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 이국땅에 있었으 며 아직 그의 분깃의 당연한 소유물을 인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는 그의 아버지의 장막으로 돌아와 가족의 재산을 인수하는 것에서 시 작할 뿐이며 또한 그가 세운 가문의 족장으로서의 그의 생애의 역사만을 포 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생애의 이 기간에 그의 아들들, 특별히 요셉 과 유다가 전면에 나타나 있고 따라서 "요셉은 다음에 나오는 역사의 원동 력적인 원리로서 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위해 그 가문의 우두머리와 중심점으로 계속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야곱이 애굽으로 이거한 것을 전후하여 그가 가나안에 거주한 시기(37-45장)와 고센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시기(46-50장)로 구분됩니다. '첫번째 시기'는 애굽으로 그가 이민가는 것을 예비하고 결국에 그렇게 된 사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길은 직접적으로는 요셉이 팔리운 것(37장) 에 의해, 간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부르심을 위험에 처하게 했던 유 다와 가나안으로부터 잠시동안 이거할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그 길은 오셉 의 애굽에서의 놀라운 출세 즉, 그가 노예와 감옥 생활로부터 전 애굽을 다 스리는 통치자로 승진된 사실에 의해 열립니다(39-4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민은 가나안에서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생겼는데, 그 기근은 야곱의 아들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떠나게 했고 또한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죽은 줄로 알고 슬퍼했던 아들을 찾도록 했고, 요 셉에게는 그의 가족을 애굽으로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42-45장).
'두번째 시기'는 야곱이 애굽으로 이민가서 고센땅에 머문 것으로 시작하 고 있습니다(46:-47:27). 그것은 야곱의 마지막 해, 가나안에 자기를 묻어 줄 것을 마지막으로 유언하는 것(47:28-31), 요셉의 아들들을 그의 양자로 삼은 것, 그의 열 두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포함하고 있으며(49장), 또한 그의 장사와 요셉의 죽음까지 포괄되고 있습니다(50장). 그런데 만일 우리가 족장 야곱의 역사의 이 시기와 이전의 그것들 즉, 이 삭과 아브라함의 그것과를 비교한다면, 그것은 신적인 계시가 없다는 점에 서 그것들과는 다릅니다. 사실상 야곱이 가족의 분깃을 인수하기 위해 간 때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그가 전체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갈 준비를 했을 때 약속된 땅의 경계에 있는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이 꿈 속에 나타나신 일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의 조상의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후 손이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증가될 것과 그들이 가나안으로 귀환하게 될 것 을 약속하십니다(46:2-4). 이 사실은 신적인 현현의 끝이 이미 이르렀으며 열 두 아들로 된 야곱의 집에 약속된 국가의 발전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으며 또한 그 선택된 가족이 한 민족으로 성장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그 과정을 위해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가 필요하였지만 적어도 한 민족으로의 이 성장이 그 자 연적인 과정을 취하는 한 특별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쉽사리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은 방해를 받지 않았 으며 오히려 애굽으로 이거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족장들에게 그들의 나그네 생활의 땅으로 지정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후손에게 그들이 한 민족을 이룬 후에 소유하게 될 것이 약속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 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나타 나 이국 땅에서 그를 보호할 것을 약속하시고 그의 약속을 성취시키실 것을 확증하지 않으셨다면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은 특별히 아브라함이 이미 여호와께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므로(15:13-16)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 하실 방법에 관하여 이 이상 더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창세기의 이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하나님의 명칭의 사용은 이와같이 야곱-이스라엘에 대해 시작하고 있는 사건의 특징과 완전히 조화가 됩니다. 즉, 37장(요셉이 팔림)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 반면에 38장과 39장에서 우리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9번, 그리고 엘로힘은 단 한 번(39:9) 찾아 볼 수 있으며 그것도 여호와가 허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였다는 사실에 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40:1 이후에 여호와라는 명칭은 단지 40-50장에서 단 한 번(49:18) 나타날 뿐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반면에 엘로힘은 18번, 그리고 하엘로힘은 7번 사용되는데, 이는 "너희 하나님"(43:23) 또는 "그의 또는 너희 아비의 하나님"(46:1,3)과 같은 표현들을 언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호와나 엘로힘 또는 하엘로힘의 숫자적인 비율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한 어려운 수수께끼가 계속적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명칭 들이 사용된 방법을 살펴볼 때 우리는 38장과 39장에서 기자가 하나님을 9 번 언급하고 그를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40-50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밖의 각 경우에서 그것은 언제나 관련된 사람들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즉, 바로(41:38-39) 또는 요셉과 그의 형제(40:8, 1:16,51,52 등 엘로힘; 그리고 41:25,28,32 등 하엘로힘) 또는 야곱(48:11,20,21, 엘로힘).
그런데 역사가가 38장과 39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9번 언급하고 있고 40-50장에서는 단지 두 번만을 언급하고 있는 상황은 마지막 열 한 장에서 이것에 대해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던 역사의 실체(본질)에 의해 설 명됩니다. 그러나 그가 38-39장에서와 같이 40-50장에서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고 46:1에서 "그의 (야곱의) 아비 이삭의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그후 직접적으로 엘로힘(2절)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는 야곱이 그의 아비에게 나타나셨고, 이삭이 제단을 쌓았던 하나님께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렸으 며, 그 후에 이 하나님(엘로힘)이 그에게 꿈 속에 나타나 그의 조상들의 약 속 등을새롭게 하셨으므로 "그의 아비의 하나님"이란 완곡법의 단순한 이름 이 여호와보다 더 적합하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행했던 것과 경험했던 것과 그의 아버지가 거기에서경험했던 것 사이의 내면적(본질적)인 연관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여호와라는 명칭의 완곡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도 그가 자기 아들들을 두번째로 애굽으로 보내면서 한 축복(43:14)과 요셉의 아들들을 양자로 삼으면서 한 축복(48:3)에서 엘 샤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 고 있으며, 또한 요셉의 아들들(48:15)과 요셉 그 자신(49:24-25)에게 대한 그의 축복에서 여호와라는 명칭에 대한 수사학적인 완곡법을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그에게(35:11-12) 뿐만 아니라 그의 아비 아브 라함과 이삭에게(17:1과 28:3) 엘 샤다이로 나타내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전능자, "그를 돌보시는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목자와 반 석"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이 규정된 이야기들에서 여기에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들은 의문의 여지없 이 단순한 명칭인 여호와보다는 더욱 의의가 있고 또한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48:11, 20, 21에서 여호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엘로힘에 대해서만 언급할 때 11절과 21절에서 공통적이고 말하자면 판에 박은듯한 말을 포함하고 있는 그 말들 자체에서부터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오직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어디든지 49:18이 입증하는대로 이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명칭은 41:38-39에 서의 바로의 말과 요셉이 죄수(40:8)와 바로에게 한 말(41:16,25,28,32), 그가 자신을 소개한 그의 형제들과의 대화(42:18, 43:29), 또한 유다가 애 굽의 알지 못하는 국무총리인 요셉에게 호소하는 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44:16). 그 사이에 요셉의 형제들도 역시 서로간에 엘로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42:28).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아들들의 탄생을 오직 엘로힘의 선물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41:51,52, 48:9), 그가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드 러내는 엄숙한 순간에 단지 엘로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5절). 그리고 그는 임종시에도 말하기를, "나는 죽으나 엘로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 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50:24-2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단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요셉 은 그의 형제들과 같이 그의 생애의 놀라운 변화들에서 여호와의 방법을 분 명히 분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비록 그들이 애굽의 알지 못하는 통치자 앞에 이끌려온 것이 요셉에 대해 저지른 죄로 인하여 하나님 께로부터 공평한 형벌을 받는 것임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들의 형제를 팔아 버림으로써 엘로힘(사람들의 창조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범 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에 대해 범 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형제를 팔았을 뿐만 아 니라 그들의 형제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되고 주어진 후 손의 한 지체를 선택된 가족의 고제에서 내어던져 버렸고 또한 구원의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에 대하여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의 이러한 국면은 아직도 그들에게서 감춰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여호와에 대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요셉은 그 의 생애의 놀라운 과정을 그의 가족을 보존하고 구조하기 위한 신적인 계획 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이 특히 마지막 소원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이후에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냄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 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출세에 있어서 언약의 하나님의 특별한 임용을 깨닫 고 그것을 여호와의 은혜스러운 역사로 묘사케 할만큼 여호와의 방법에 대 한 통찰력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내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명칭이 없어진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전의 은혜의 계시들과 행동들이 여호와(이 명칭은 언약의 하나님의 이 명칭에 대신하여 사 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더욱 적합합니다)의 개념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법을 생기게 하였다는 사실로부터, 또한 부분적으로는 요셉을 포함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의 과정에서 언약의 하나님의 구원의 인도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을 여호와의 역사로 묘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통찰력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끝났다는 사실과 밀 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비록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가문을 보존하고 그의 구원의 계획들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도구로 선택함을 받기는 했지만 맨 처음 시기에 그의 아버지의 집의 교제로부터 구별되었으 며 또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다니엘 이 그후 갈대아 궁전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환상 또는 계시로 뒷 받침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요셉을 세 족장과 동일한 수준에 둘 수 없으며 또한 "족장 생활이 가장 고귀한 번성기가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즉, 그에게서 족장 생활의 전체 의미가 종합되고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약 세대 전체의 완전한 번성기와 유일한 완성을 볼 수 있다는 진술을 앞부분이 관련되는 한 정확하고 성경적인 것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동일한 방식으 로서의 구원의 매개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전체 가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애굽 인들에게 있어서도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에게나 이스라엘 가 문에게 구원 즉, 영적인 도움이나 교훈을 가져다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야곱의 축복에서 지상에 있는 것들에서의 장자의 가장 풍성한 분깃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유다를 통하여 민족들에게 전달되게 되어 있었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함이 없이 요셉의 역사를 "비천에서 고귀로, 노예에 서 자유로,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여호와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로에 대한 한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시 이스라엘의 역 사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역사의 한 전형이 되는 한 요셉의 생애를, 모 든 세기에 걸친 신앙하는 주석가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애의 한 전형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전형적인 특성들을 구원의 지식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표론적 (typological)인 경박함에 유혹되어서는 안되며, 요셉이나 그의 출세가 선 지자나 그리스도 또는 그의 사도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전형-예를들면 이 스라엘을 애굽으로 또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는 것(호 11:1; 비교 마 2:15)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는 그밖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있어서 동일한 방법의 어떤 것-으로 표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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