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 (창22:1-14)
본문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히브리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사람이다.-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모습과 행동을 볼 수 있다. 그 행동은 어떠한 모습인가 결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혼생활은 다 성공할 수 없다. 장사도, 사업도 누구나 하지만 누구나 그 일에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겠지만 믿음의 생활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누구나 다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본문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1)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 왜 믿느냐
2) 문제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났느냐 어떻게 할 것이냐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확신에 찬 걸음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느냐 그 약속을 믿고 있느냐 그 약속을 따라 사느냐 메시야가 오시기 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었다. 그 제사는 제사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속죄하며 헌신과 봉사를 드리는 번제/ 레1:3-17-하나님께 충성과 감사를 드리는 소제 /레 2:1제사드리는 당사자와 하나님과의 평화와 친교를 위하여 화목제/레3:1-17-지은 죄를 배상하는 속죄제/ 레 4:1-5:13-속건제 / 레 5:14
그런데 이러한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랐다. 흠 없는 송아지나 비둘기,밀가루나 기름이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다시 이러한 짐승의 피를 흘려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 같은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게 하셨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어떠한 제사인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I. 아브라함은 예배자의 자세를 보여 준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말하여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믿음의 조상은 잘 다듬어 진 머릿돌과도 같다. 그는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수없는 시험을 통과하여야 한다. 모난 돌을 다듬어 머릿돌이 되게 하듯, 껍질을 벗기는 이 아픔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의 껍질을 벗겼다. 자식 사랑과 아내 사랑의 껍질을 벗기는 시련을 통과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예배자로 선택하였을 때 그가 취한 태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는 한 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이번만은 피하게 해 달라거나 제발 내년으로 미루게 해 달라거나, 그 많은 족장 중에 왜 하필 나에게 그러한 엄청난 제사의 주역을 맡게 하였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 실천에 옮기는 일 만 하였다. .+ 아브라함에게 뼈를 깎는듯한 번민과 고통이 왜 없었겠는가 100 살에 겨우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로 밤마다 잠 못 이루며 고통을 되씹게 하였을 것이다. 아마 남 모르게 아들 이삭과 함께 도주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이겼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 내 마음이 심히 괴롭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기억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피 눈물을 흘리시면서 "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서신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이러한 번민의 기도가 선행되는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가면서 번민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모리아 산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서도 번민의 기도를 드리지 아니하였다. 아브라함은 출발 직전에 준비를 완료한 다음에는 거침 없이 일어나 걸어갔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한가 여러분 중에 번민을 하다가 이곳에 오신 분이 있는가 아직도 그 번민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앉아 계신 분이 있는가 지금 여기 앉아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다면 그 제사는 크게 잘 못 된 것이다. 그런 것은 예배를 드리러 오기 전에 이미 끝이 나 버렸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 예배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신 말씀처럼 " 알았다.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섬기는 줄 알았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자기의 소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음성이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제사요, 산 제사인 것이다.
II. 이삭이라고 하는 제물 이삭이 모리아 산으로 향하여 가면서 아버지에게 던진 질문을 여러분은 기억 할 것이다. "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 잠시 후에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어 제단에 올려졌을 때에 이삭은 아버지가 왜 제물 / 어린 양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를 알았다. 그러나 이삭은 발버둥치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생각하여 보자. 이삭은 곧 자기 자신이다. 이삭을 묶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묶는 것과 같은 것, 그것은 고통이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묶이울 때 몸부림이라도 치며 아버지 이럴 수가 . 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허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말없이 묶었고 말없이 묶였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묶여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그것들을 묶을 때에 어떠한 마음으로 묶어야 할 것인가 나에게 있는 육적인 쾌락, 육신의 정욕들이 과연 묶이웠는가 혈기가 살아 있지는 않은가 이기주의, 그리고 하나님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 하는 자기를 완전히 결박하였는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단단히 묶어 버렸는가 이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완전히 결박하여 십자가와 함께 소멸하어 버렸을 때 그 때 그 제물은 비로소 제물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형식적으로 묶어 놓은 것은 고난과 시련이 오면 도망간다. 마음이 아프고 고통 스러우면 바친 제물을 도로 거두어 버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노여움만 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제물된 자기 자신을 가리켜 "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힌 것" (로마 6:6) 이라고 말하였다. 갈 5:26 에는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 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다. 결박되지 않은 제물은 언제든지 살아 도망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제물, 자신의 부정을 가리우느라 애쓰고, 자기의 어떤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제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오늘 우리의 제사를 냉엄하게 생각해 보자. 나의 영적인 제사,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제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제사인가 하나님을 위한 제물이라면, 이삭과 같이 결박되어 제단에 올져진 제물인가
III.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제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화급하게 말씀 하셨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무엇인가 이삭인가 과연 이삭인가 돈으로 계산한다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제사는 제물로 표현 된 이삭이 아니었다. 엄청난 금액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부자들을 도우실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이다. 드리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가를 하나님은 보시는 것이다. 이 산에서나 저 산에서나 자기의 소욕을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전하여 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제물을 대신 할 것을 미리 준비하여 두신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한 마리 수양을 준비하여 두셨다. 여러분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만큼이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으로 지켜 주시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 여호와 이레 ' 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없고, 또 드린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찾아 볼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기는 하지만 감격도 없고 환희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00 원을 투자하여 놓고도 한 주간을 희망가운데 사는데 . 하물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고 어떻게 일평생을 소망 가운데 살 수가 없겠는가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을 살아 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가득한 사람이다. 고향 땅 하란을 떠날 때에도 그렇지만 조카 롯과 헤어질 때에도 롯으로 먼저 땅을 택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사는 자에게 손해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은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지극히 고통 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에 유익을 주시던 하나님이 결코 자신에게 손해를 주시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고,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반드시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시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고 명하신 것도 그 자신이 아브라함의 산 제사를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마음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따라 행동할 때 비로소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시간 시간 마다 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리며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본문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1)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 왜 믿느냐
2) 문제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났느냐 어떻게 할 것이냐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확신에 찬 걸음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느냐 그 약속을 믿고 있느냐 그 약속을 따라 사느냐 메시야가 오시기 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었다. 그 제사는 제사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속죄하며 헌신과 봉사를 드리는 번제/ 레1:3-17-하나님께 충성과 감사를 드리는 소제 /레 2:1제사드리는 당사자와 하나님과의 평화와 친교를 위하여 화목제/레3:1-17-지은 죄를 배상하는 속죄제/ 레 4:1-5:13-속건제 / 레 5:14
그런데 이러한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랐다. 흠 없는 송아지나 비둘기,밀가루나 기름이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다시 이러한 짐승의 피를 흘려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 같은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게 하셨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어떠한 제사인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I. 아브라함은 예배자의 자세를 보여 준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말하여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믿음의 조상은 잘 다듬어 진 머릿돌과도 같다. 그는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수없는 시험을 통과하여야 한다. 모난 돌을 다듬어 머릿돌이 되게 하듯, 껍질을 벗기는 이 아픔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의 껍질을 벗겼다. 자식 사랑과 아내 사랑의 껍질을 벗기는 시련을 통과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예배자로 선택하였을 때 그가 취한 태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는 한 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이번만은 피하게 해 달라거나 제발 내년으로 미루게 해 달라거나, 그 많은 족장 중에 왜 하필 나에게 그러한 엄청난 제사의 주역을 맡게 하였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 실천에 옮기는 일 만 하였다. .+ 아브라함에게 뼈를 깎는듯한 번민과 고통이 왜 없었겠는가 100 살에 겨우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로 밤마다 잠 못 이루며 고통을 되씹게 하였을 것이다. 아마 남 모르게 아들 이삭과 함께 도주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이겼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 내 마음이 심히 괴롭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기억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피 눈물을 흘리시면서 "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서신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이러한 번민의 기도가 선행되는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가면서 번민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모리아 산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서도 번민의 기도를 드리지 아니하였다. 아브라함은 출발 직전에 준비를 완료한 다음에는 거침 없이 일어나 걸어갔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한가 여러분 중에 번민을 하다가 이곳에 오신 분이 있는가 아직도 그 번민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앉아 계신 분이 있는가 지금 여기 앉아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다면 그 제사는 크게 잘 못 된 것이다. 그런 것은 예배를 드리러 오기 전에 이미 끝이 나 버렸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 예배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신 말씀처럼 " 알았다. 이제야 네가 나 하나님을 섬기는 줄 알았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자기의 소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음성이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제사요, 산 제사인 것이다.
II. 이삭이라고 하는 제물 이삭이 모리아 산으로 향하여 가면서 아버지에게 던진 질문을 여러분은 기억 할 것이다. "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 잠시 후에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어 제단에 올려졌을 때에 이삭은 아버지가 왜 제물 / 어린 양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를 알았다. 그러나 이삭은 발버둥치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생각하여 보자. 이삭은 곧 자기 자신이다. 이삭을 묶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묶는 것과 같은 것, 그것은 고통이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묶이울 때 몸부림이라도 치며 아버지 이럴 수가 . 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허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말없이 묶었고 말없이 묶였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묶여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그것들을 묶을 때에 어떠한 마음으로 묶어야 할 것인가 나에게 있는 육적인 쾌락, 육신의 정욕들이 과연 묶이웠는가 혈기가 살아 있지는 않은가 이기주의, 그리고 하나님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 하는 자기를 완전히 결박하였는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단단히 묶어 버렸는가 이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완전히 결박하여 십자가와 함께 소멸하어 버렸을 때 그 때 그 제물은 비로소 제물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형식적으로 묶어 놓은 것은 고난과 시련이 오면 도망간다. 마음이 아프고 고통 스러우면 바친 제물을 도로 거두어 버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노여움만 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제물된 자기 자신을 가리켜 "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힌 것" (로마 6:6) 이라고 말하였다. 갈 5:26 에는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 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다. 결박되지 않은 제물은 언제든지 살아 도망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제물, 자신의 부정을 가리우느라 애쓰고, 자기의 어떤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제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오늘 우리의 제사를 냉엄하게 생각해 보자. 나의 영적인 제사,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제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제사인가 하나님을 위한 제물이라면, 이삭과 같이 결박되어 제단에 올져진 제물인가
III.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제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화급하게 말씀 하셨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무엇인가 이삭인가 과연 이삭인가 돈으로 계산한다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제사는 제물로 표현 된 이삭이 아니었다. 엄청난 금액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부자들을 도우실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이다. 드리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가를 하나님은 보시는 것이다. 이 산에서나 저 산에서나 자기의 소욕을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전하여 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제물을 대신 할 것을 미리 준비하여 두신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한 마리 수양을 준비하여 두셨다. 여러분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만큼이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으로 지켜 주시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 여호와 이레 ' 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없고, 또 드린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찾아 볼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기는 하지만 감격도 없고 환희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00 원을 투자하여 놓고도 한 주간을 희망가운데 사는데 . 하물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고 어떻게 일평생을 소망 가운데 살 수가 없겠는가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을 살아 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가득한 사람이다. 고향 땅 하란을 떠날 때에도 그렇지만 조카 롯과 헤어질 때에도 롯으로 먼저 땅을 택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사는 자에게 손해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은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지극히 고통 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에 유익을 주시던 하나님이 결코 자신에게 손해를 주시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고,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반드시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시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고 명하신 것도 그 자신이 아브라함의 산 제사를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마음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따라 행동할 때 비로소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시간 시간 마다 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리며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