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의 의미 (사9:1-7,눅2:21-39)
본문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이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시한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예수의 부활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두고 이 땅위에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으로 살아가도록 성령님으로 항상 역사하고 있다. 오늘 주일은 대림절 4째주이다. 대림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이 땅 에 오심을 준비한다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나는 날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으로 기다림의 의미 를 포함한다. 그래서 특히나 대림절 4주에는 상록수 나무가지로 4개의 초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신앙을 상징하기도 한다. 대림절, 대강절, 대강림절은 오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초는 희 생, 빛을 상징한다. 예수 이전 700년 전에 이사야는 "한 아기가 목자처럼 우리를 돌볼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미가는 "베들레헴에 나신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실제로 목자들에게 첫번 크리스마스가 전해졌었고, 동 방박사도 시골 베들레헴까지 찾아 아기에게 경배하였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는 지식이 바로 산지식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리고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요즘 병고침을 보 고 믿는 상황이 우리의 주변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신학적이론이 우리 의 신앙 밑바닥에 깔려있어야 한다. 동방박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기독교는 믿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부르면 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 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년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 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 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그러나 그리스도 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 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촛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 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 를 마굿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 고 복음은 오심이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 니라(눅2:12)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인류의 구주이시다.
Martin Luther는 강보와 구유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대로 오셨지만 감추인 모양으로 계시 되셨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과 참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남루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만 보고 인류의 구세주는 발견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죄 인처럼 돌아가신 분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지금도 이런 모양으 로 오신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면서 정녕 기다리던 메시야가 정말 오실때는 영접하지 못하고 실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는 그래서 세상을 지으신 이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1:2) 내가 주릴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 을 때 너희가 그를 돌보았나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예수는 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소 이렇게 오셨고 또 이런 사람을 찾아 가시고 이런 모양으로 오신다. 만남의 기쁨은 기 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축하 소동 속에서 조용히 숨어서 오시는 주님을 찾아 만나는 뜻 깊 은 구주 탄일을 맞자. 냉냉한 천대나 저버림을 당한 어린 소자 하나에 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는 감추인 모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 림만이 오직 구주탄일을 맞는 최선의 길이다.
실제로 목자들에게 첫번 크리스마스가 전해졌었고, 동 방박사도 시골 베들레헴까지 찾아 아기에게 경배하였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는 지식이 바로 산지식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리고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요즘 병고침을 보 고 믿는 상황이 우리의 주변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신학적이론이 우리 의 신앙 밑바닥에 깔려있어야 한다. 동방박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기독교는 믿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부르면 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 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년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 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 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그러나 그리스도 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 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촛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 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 를 마굿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 고 복음은 오심이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 니라(눅2:12)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인류의 구주이시다.
Martin Luther는 강보와 구유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대로 오셨지만 감추인 모양으로 계시 되셨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과 참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남루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만 보고 인류의 구세주는 발견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죄 인처럼 돌아가신 분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지금도 이런 모양으 로 오신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면서 정녕 기다리던 메시야가 정말 오실때는 영접하지 못하고 실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는 그래서 세상을 지으신 이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1:2) 내가 주릴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 을 때 너희가 그를 돌보았나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예수는 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소 이렇게 오셨고 또 이런 사람을 찾아 가시고 이런 모양으로 오신다. 만남의 기쁨은 기 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축하 소동 속에서 조용히 숨어서 오시는 주님을 찾아 만나는 뜻 깊 은 구주 탄일을 맞자. 냉냉한 천대나 저버림을 당한 어린 소자 하나에 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는 감추인 모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 림만이 오직 구주탄일을 맞는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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