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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 (롬8:18)

본문

I. 로마서의 중심은 복음입니다. 영감의 기록인 로마서의 중심은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그 복음은 1 능력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2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나, 기계나, 어떤 자연이나, 동물의 능력이나, 법칙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빈센트(Vincent)는 말하기를 ‘복음은 하나님의 힘, 그 자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인의 힘은 지식에 있었습니다. 로마인의 힘은 권력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힘은 이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복음의 능력에 있습니다. 3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도덕적 차원이나, 사상적 차원이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원 정도가 아니라 죄에서의 구원, 영원한 저주와 형벌에서의 해방, 영생과 천국을 가리킨 것입니다.
4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연구하라, 생각하라, 사색하라, 실험하라 하지 않습니다. ‘믿으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5 그리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하였습니다(to every one the bilieth). 복음은 모든 죄인 된 인류를 상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에서 시작하고(영접), 믿음으로 진행하고(성화), 믿음으로 성취한다(영화)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의 초점은 로마서의 중심이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복음은 죄인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 18절로 3장 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유대인도 죄인이요, 이방인도 죄인이요, 모든 인류도 함께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인일 동안 죄인 구원의 소식은 ‘복음’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복음은 이신칭의의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21절로 5장 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칭의의 복음입니다. 세 번째, 로마서는 성화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6장 1절로 8장 1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죄가 없는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인입니다.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로마서는 영화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 18절로 3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장면은 그리스도인의 최후 승리를 노래하는 ‘영화에의 개가’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로 31절에 나타난 부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받을 영화로운 미래의 극치 상태에 대하여 ‘대망’하고 있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받을 영화로운 구원의 극치를 전 우주가 대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Ⅱ. 영화에의 대망(待望)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생각컨대(λογζομαι)하는 말은 ‘계산하다’ ‘목록을 작성하다’는 말인데, 단순한 것이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것, 구체적으로 확신된 것을 말하고 있는 뜻입니다. ‘현재의 고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란 말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 현재의 고난은 8장 19절로 27절에 나타난 탄식하는 모습이고, 장차의 영광은 8장 28절로 39절에 나타난 최후 승리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고난이란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금세적 고난의 삶을 가리킵니다(마7:13, 14).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란 예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약속된 기업으로서의 영생과, 축복의 보상들로 충만해 버릴 영화로운 세계의 삶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영감 속에서 이 두 세계는 전혀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현재와 미래’ ‘금세와 내세’ ‘이 세상과 저 세상’ ‘땅과 하늘’ ‘육계(肉界)와 영계(靈界)’ ‘유한 세계와 무한의 영원한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손으로 지은 집, 흙으로 지은 집과 하늘에 있는 집’ 등은 실로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 일시적인 것에 비해 장차 누릴 영광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잠깐동안의 이 세상 나그네 여로에 비해, 장차 이를 본향의 정착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영화에의 대망’입니다. ‘보이는 잠깐동안의 현재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미래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없어질 것에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움직임의 ‘내용’ ‘느낌’ ‘흐름’이 바로 ‘대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대망의 정도가 표현하기를 8장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8장 23절에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라고 하였습니다.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세 구절에 꼭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탄식’이라는 단어입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도 탄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도 탄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화의 세계를 기다리는 정도가 ‘탄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탄식’이란 말은 ‘끙끙 앓고 있음’을 뜻합니다. ‘신음을 토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피조물이 끙끙 앓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성령님’이 모두 끙끙 앓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왜그토록 신음을 토하는 내용이 무엇이고 어느 정도인가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끙끙 앓고 있는가 그 내용이 무엇이고, 그 정도가 어떠한가 성령님이 왜 신음을 토하는가 그 내용이 무엇이고 그 정도가 어떠한가 그 신음 소리가 절망적인 성격인가 아니면 소망적인 절규인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피조물의 탄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음 받은 모든 피조세계는 예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믿음의 회복, 미래적 우주 갱신을 내다보고 끙끙 앓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구속’ 곧 부활의 영체를 덧입기 위하여 끙끙 앓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성도들의 연약을 돕기 위하여 성도의 영과 함께 신음을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음(탄식)은 미래지향적 신음이 아닌가 목적적 신음이요, 필연적 신음이 아닌가 마치 해산하는 산모의 신음 앞에 조산(助産)하는 자들이 함께 신음 해주는 신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적어도 이러한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의 영광을 내다보고 대망하는 영화에의 신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 ‘탄식’이란 바로 ‘감탄’의 발로인 것입니다. 문법상으로 감탄사가 있습니다. 아! 오! 으! 야! 아이고! 어허! 등의 표현입니다. 감탄사란 사람이 밖으로 토하는 언어가 마지막 지점에 나타난 혼의 발로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웅변 이상의 신음입니다. 끙끙 앓음입니다. 뜻밖에 죽지 아니해야 될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아니면 죽은 사람이 뜻밖에 살아났을 때,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했을 때, 자식을 잃었을 때, 잃은 자식을 다시 찾았을 때,. 아니면 큰 희망으로 마음이 설렐 때, 가장 큰 일들이 벌어졌을 때 큰 감정에 사로 잡혔을 때, 대 사상이 용출할 때.,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떤 시정(詩情)에 도달했을 때. 신비로운 대자연의 위엄 앞에 섰을 때,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때. 사람들도 말이나 글로 그 마음의 정서를 표현할 길이 없어지고, 막혀버리고 말 때가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이르렀을 때, 인격의 중심부에서 마구 터져 나오는 절제 못할 감정의 폭발이 감탄사인 것입니다. 그 감탄의 정도는 ‘끙끙 앓음’ 바로 ‘신음’ 곧 탄식인 것입니다. 영감 받은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 이 피조세계에 가득찬 ‘신음의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신음은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의 영광을 대망하는 소망의 신음이요, 확신의 신음이었습니다. 그 신음은 창조적 신음이요, 생산적 신음이요, 미래지향적 생명의 신음이었습니다. 앞을 내다보고 기다리는 학수고대의 신음입니다. 이 신음은 단계적이요, 목적적이었습니다. 만물의 신음은 성도의 영화로운 회복을 목적하고 있었습니다. 성도의 신음은 부활의 몸, 영광의 몸, 영생의 몸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 이 몸에서 짐진 것같이 탄식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벗고자 하는 해탈의 세계가 아니라 더 좋고 완전하고 영화로운 영생의 몸을 덧입고자 함입니다(고후5:1-4). 성령님의 신음은 성도가 성화에서 영화를 향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연약을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음과 신음이 함께 어울리는 신음의 합창(chours)입니다. 이 세상 여기에서의 탄식은 저기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영화를 촉진하는 소망의 토(吐)함입니다. 피조물은 밑에서 신자는 가운데서 성령님은 위에서 신음과 신음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 신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성도들의 영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보이는대로의 세상은 복잡합니다. 들리는대로의 세상의 여러 소리 소리들은 참으로 어지럽고 현기증이 납니다. 무질서와 패괴와 혼란과 혼돈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의 결과는 허무요, 절망이요, 어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이 우주 안에 꽉차 있는 또 하나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의 신음이었습니다. 그 신음소리는 엄청난 내용과 의미를 담고 서로 함께 어울려 토하고 목적성 있는 탄식 소리였습니다. 결코 존재하는 피조세계는 사탄과 불신앙의 인생 소리로만 가득찬 장소는 아닙니다. 존재하는 피조세계는 택자 구원 완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곧 대망의 미래를 내다보고, 끙끙 앓고 있는 영의 소리들이 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무죄세계의 출현! 새 하늘과 새 땅이 출현! 새 임금의 통치! 그리고 완전한 극치의 영화의 삶! 영생 세계! 무궁세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이상적 왕국, 통치의 미래를 대망 하는 피조세계와 성도와 성령님이 신음을 토하는 대망(待望)의 세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 이 소리를 듣고, 알고, 느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주도하는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된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예배드리는 이 장소, 이 시간에 이 신음의 소리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곳, 모든 경우에서 신자들은 이 영의 신음 소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대망! 성도들의 대망! 성령님의 대망! 그것은 영화를 향한 탄식(신음)으로 어울려 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음과 신음의 어울림이 하나님이 주장하는 역사의 숨소리어야 합니다. 사실상 이 신음과 신음의 어울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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