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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1)-소명 (창12:1)

본문

우리가 본토 친척을 떠나 먼 땅으로 가는 것은 참 꿈에 부풀 일일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에 가서 살게 됐다고 하면 참 꿈에 부풀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람의 경우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향 땅을 떠나라고 명령하시 므로 갈대아 우르로 부터 떠나 하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하란 땅에서 어느 정 도 좋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민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 니었습니다. 외국에 이민을 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고독감을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좋게 선대할 때는 그래도 좀 견딜만 하지만 민족차별 이나 인종의 차별을 당하고 보면 정말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것도 국내에서 사는 우리들도 타향에 조금만 가서 살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서러운 타향살이면 그런 노래까지 나 오겠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타향 땅에서 살기가 어렵고 서러운데 아브라함 당시에는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그 먼 옛날 본토와 친척을 떠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목 민족이기 때문에 초장이 확보되어야 가축을 기를 수 있는데 그 장소를 옮기는 것은 생존의 터전을 잃는 것입니다. 2절: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을 번창하도록 하기 위한 것만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 라함에게 떠나라고(그 죄악된 땅으로 부터 구별시키시려고) 명령하시고 이어서 하 나의 약속을 부가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있는 데 아브라함이 분명히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심에 순종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하고 단 순하게 생각을 해서 그저 복받는 비결을 배우는 정도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앞 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아브라함 자신을 번창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브라 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시도록 그 터전을 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계획)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 개인의 이름이 창 대케 되리라는 것보다는 아브라함의 이름에서 세상의 구원이 시작되게 했으므로 그 이름을 유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친히 복의 근원이 아니라 그가 복의 시작, 출발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구속을 이루시는 복을 주시는 시작이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 졌으므로 그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아브라 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인간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처음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나도 아브라함처럼 행하면 복의 근원이 되어서 세상의 부요를 실컷 누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리 신 복은 세상의 부요와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구원을 말합니다. 온 족속이 아브라 함에게서 시작되는 복으로 인해서 복(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3절: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하신지라 말에는 상당한 효력이 있습니다. 말에는 씨가 있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은 뭐 별로 말에 대한 축복과 저주를 대단치 않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분 명히 말에는 어떤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가운데 말에 대한 축복과 저주의 파급효과를 아시고 그에 대한 통제도 하시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장차 세상 구속을 위한 구주가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출생될 것인데 구속주가 오실 터전이 만일 저주를 받아 그 저주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훼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에 따 른 효력까지도 통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뜻만을 전달하고 받고 하는 정도 뿐만이 아니라 말에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를 하면 실제로 그 저주가 이루 어지므로 축복을 하면 그 축복이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 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말에 대한 저주와 축복의 효과에서도 아브라함을 지키셨 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말 만의 축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명절에는 서로 축복하는 것이 인사로 되어 있을 정도로 축복문화가 이루어 져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저주받는 일은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노력했고 그로 말미 암아 어느정도 이 사회가 바르게 유지되는 역할도 했습니다. 어쨌든 말이란 그에 따른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도 아브 라함을 붙드셨는데 그것은 온 땅의 구속주가 오실 터전이 바르게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동맹을 맺고 언약을 체결하게 되면 두 임금은 서로의 적에 대해서 공동으로 대적을 하고 서로 우정의 관계를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적은 나(하나님)의 적이고 아브라함의 친구는 나(하나님)의 친구이다 하는 뜻입니다. 즉,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아브라함의 적대자일 것인데 그는 하나님과 적대하는 관계에 서게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의 구속의 길에 봉사자로 선택하여 세 우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아브라함과 친구일 것이므 로 하나님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도 역시 아브라함이 받는 복을 함께 받아 누릴 것입니다. 4절: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 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왔던 여정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번 순종하는 것으로(갈대에 우르에서 떠난 것 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지속적인 순종을 믿음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5절: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여기서 얻은 사람들이란 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돈으로 산 종 들과 자기 집에서 출생한 종들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서 얼마동안 체류하면서 상당한 소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란에서 그 아버지 데라가 죽고난 후 아브라함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향하여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나이가 칠십 오 세라고 특별히 언급한 것으로 봐서 아직까지도 아브라함 에게 자식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 함에게 주실 자식은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서 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 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인 것을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6절: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안주하지를 못하고 통과하여 지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은 꽤 먼 길을 여행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한 곳 에 정착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실려고 그러한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안정되고 확실한 처소 를 주시기 전에 모든 땅을 쏘다니는 방랑자로서 수많은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발 하나 붙일 수 있는 조금의 땅도 허락하시지 않 고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 약속이 얼마나 믿기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더욱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도 록(자아부정) 단련받기 위하여 광야를 유리하며 방황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곳은 죄악이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 가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가벼운 시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런 시련과 단련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보다 나은 소망을 사모하 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훨씬 유익한 결과였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 들로 부터 환대와 친절을 받았더라면 그곳에서 귀빈으로 지내는 동안 다른 더 나 은 소망은 전혀 바라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고난이나 환란은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멀지않 은 장래에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멸망을 당할 때에 아브라함을 그곳의 주인으로 만드실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아브라함은 편히 쉴 곳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원한 안식처인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땅에서의 고통을 통 해서 장래의 영광된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땅 위에서의 기업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보다 나은 하늘나라를 소망하도록 그 눈이 열 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거룩한 믿음의 눈이 열리기 를 바랍니다. 그래서 땅에서의 즐거움 보다는 장차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즐거움 을 위하여 살기를 바랍니다.
7절-9절: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 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라함의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레 상수리에서 벧엘 남쪽으로 옮겨서 광 야로 갔다가 광야에서 너무 힘들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 함이 순종할 때에 한가지 약속을 주심으로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렀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심으로 아브라함이 앞으로 가야할 길을 기쁨을 가지고 갈 수 있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뒤 에 버린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제까지나 외롭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 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큰 민족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의 아비 친척 집을 떠나 하란에 거하였을 때 버려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아 브라함은 세상에서 버려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으로 힘을 얻은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자기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버리 고 떠나는 것은 고통이 되는 것이 틀림 없었지만 하여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 령을 따라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동시에 자 기의 생애와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역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었습니다. 이 예수는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철저하게 아버지께 복종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한 영이 아브라함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와 함께 떠난 유일한 친척은 그의 조카 롯(아브라함 의 형인 하란의 아들이었던)이었습니다. 왜 롯이 자기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가기 를 결정하였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 라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면을 보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의 고상한 진취적 정신에 매력을 느껴 앞으로 닥쳐올 일들 이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떠 난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성경은 후일에 가서 아브라함과 롯 사이 의 어려운 관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거주를 옮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가나안 땅에는 불경건한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거주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하란을 떠났을 때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또 앞으 로도 자녀를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사래가 정말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완전한 다른 방법으로 약속을 이루어 주실까요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절하고 타락하였는데 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불신앙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경건성을 나타냈고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만족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곳에 오래도록 정착하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계속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형편 을 봐서는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한 성취의 기미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 은 믿음의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객이 되어 네게브 사막을 바라보는 변방에서 얼마동안을 지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땅을 약속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서 러운 나그네였습니다(23:4).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사는 생활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안합니까 이국 땅에서라고 할지라도 여러 핏줄이 함께 모여 있으면 그래도 서 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살 수 있을 터인데, 자식도 없는 늙은 부부와 조카 하나가 이렇게 허전하게 살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소유한 종들과 짐승들은 겨우 생활을 꾸려나갈 만한 정도였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은 너무 엄위로 우셔서 그분의 명령과 약속을 감히 외면할 수 없었지만 그 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익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믿음 있는 아브라함으로서도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조금이라도 있었기에 그 생활을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에게 가나안 그 큰 땅이 주어지려면 이미 어떤 구체적 인 일이 진행되어야 할 터인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초라함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큰 흉년이 계속되어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이럴 때는 그 땅에 얹혀 사는 나그네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고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법입니다. 인심이 흉흉해지고 법과 도덕이 힘을 쓰지 못해 강도와 도적이 들끓게 되기 때문입니다. 농경지에 사는 가나안 원주민들은 식량을 비축할 수도 아낄 수도 있지만 유목 민인 아브라함은 당장 식량을 구하고 싶어도 파는 사람도 없거니와, 오히려 생명 을 부지하는 것을 염려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집 없고 직장이 없어 춥고 배고픈 것처럼 서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처절한 삶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생생하지 만 현실은 더욱 실현 불가능하게 되어 갔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 반을 닦기는커녕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절망의 색깔만 더욱 짙어갔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 땅을 포기하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우기 돌아온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천혜의 비옥한 고향 땅과 도시를 떠날 때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중에 아들 이삭이 신부를 맞게 될 때 도,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처녀와 결혼을 못하는 한이 있어도, 결코 다시 그 땅 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종에게 엄히 명령했습니다(24:8). 상황이 아무리 절박 해도 그는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의 친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지금이라도 다 포기해 버리고 돌아가는 것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당연하고 지혜로 운 일일 것입니다. 또한 고향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낫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땅에서 불안해 하며 얹혀 사는 것은 누구도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것 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과 같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나 안의 도시들은 가까운 애굽의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비옥한 애굽은 고대의 세계를 먹여 살리는 식량 창고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보다 더 낯선 곳이었습니다. 애굽인들에게는 먼 데 사람 즉, 이방의 나그네인 것입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은 생소하고 낯선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 문명과 군사력이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 아 만큼이나 화려하고 강한 곳, 그 부유함이 다함이 없는 곳으로 아브라함은 내려 갔습니다. 큰 나라 곧 많은 후손과 큰 영토를 약속받은 선택된 왕인 아브라함이, 여호와 종교의 선지자요 제사장인 그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기근 때문에 초라하 고 비루한 모습으로 가나안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이제 더이상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잠시 기근을 피하러 갈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절 망적인 상황을 결코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이 열렬히 숭배를 받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주 생소한 나라로 단지 생명의 보존을 위해 더 큰 부담을 안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까이 이르러가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볼수록 근심이 커갔습니다. 그래도 한 단위의 부족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애굽의 관리들 에게 나아가 정식으로 예를 갖추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 땅에 잠시 머물 수 있도록 청원하여야 할 터인데, 너무 아름답고 예쁜 아내 때문에 큰 문제와 부딪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야 유목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성과 도시에서 멀리 떠나 천막 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의 아내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이 없었지만 이제 애굽에서는 도시의 붐비는 곳에서 겨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절세의 미녀 아내 사래가 감추어질 수 없었고 그 일로 인하여 당할 큰 고난이 예상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20:11) 이곳에서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인 자기가 도대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관습대로라면 나그네의, 이 방인의 생명과 소유는 그 사회에서 법적인 정당한 권리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의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이스라엘에는 이 경험 때문에 나그네에 대하여 지극히 관대하게 대우하는 법이 주어지고 있습니다(출22:21). 자기 땅을 떠나는 것은 이렇게 자기의 생명과 아내까지도 잃는 위험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애굽 사람의 눈이 이 품위 있고 아름다운 메소포타미아의 여자를 지나칠리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아브라함은 무엇인가 대책을 미리 세워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원래는 이복 누이였던 점을 생각해서 아 내가 아닌 누이 동생으로 신분을 속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자기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아브라함의 사래에 대한 사랑은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부인이 사랑스러워도 자식을 볼 욕심 때문에 소실을 두기 마련인데 그는 아직까지 아내만 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래도 남자를 사로잡는 특이한 미모와 인품을 지 녔거니와 아브라함도 큰 인내심과 포용력을 지닌 큰 사람입니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를 무지한, 경건함이 없는 야만인들에게 빼앗겨야 한다는 사실 에 그는 얼마나 비통해 했을까요 사래가 얼마나 미인이며, 65세를 넘긴 여자로서 그 미모가 어떻게 남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 아무리 아이를 낳지 않고, 키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내들이 반할만한 아리따움이 60대의 여자에게 있을 수가 있었을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 오늘날처럼 신속하게 늙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 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 아름다움과 품위의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쩌면 아브라함과 사래가 메소포타미아 사람으로, 뛰어난 문명 세계에 살았던 교양인이었고, 그 용모가 특이해서 관심을 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유색인들 속에서 하얀 피부와 파란 눈의 금발 미녀가 군계일학으로 돋보이듯이 말 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 외에도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후궁과 첩들을 두었던 고대의 왕들이 꼭 성적인 필요나 호기심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왕의 위엄과 부를 더하기 위해서, 혹은 왕실과 어떻게든 줄을 대어보려는 귀 족들의 자원에 의해서, 혹은 세력 있는 지방 호족들의 가족을 왕실에 인질로 묶어 두는 정략적 차원에서의 결혼이 많았습니다. 도시국가의 왕들끼리도 서로 평화 협 정을 체결하고 그 유지를 위해 사돈간이 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의 염려대로 사래에게로 이목이 집중하게 되고 그 소식은 바로 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마침내 사래는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게 되고 아브라함 은 바로의 처남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의 사돈이 되었으니 그에 합당한 큰 재물과 대우를 받게 됩니다. 살기 위해서 아내를 내어주고 그 대신 애굽의 최고의 권력자 인 바로에게서 차고 넘치는 재산을 선물 받았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 입니다. 살 궁리만 한 아브라함은 뜻하지 않게 애굽의 왕 앞에 서게 되고 생명 뿐 만 아니라 큰 재산을 얻으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고향과 친족으로 부터 홀로 서게 하셨던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서 인간들이 통상 의지하는 자연의 혜택까지도 의지할 수 없게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이제 남자로서의 더우기 남편으로서의 사랑, 곧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다 내 놓도록 하십니다. 자기 혈족과 자기 영토를 떠난 한 사람이 자연의 재해와 사회의 구조와 질서 앞에 즉 세상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사 오백년 뒤에 세워지는 대 강국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될 아브라함이 지금은 이런 처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를 통해 세워지도록 자기 땅을 떠난 아브라함은 먼저 이런 수치와 모욕, 인간적인 비애를 겪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런 생각을 품게되는 것이 당연할 것 같 습니다. 하나님은 기근이 심해져 갈 때 미리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이 살아갈 방도 를 지시하셨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 어찌 자신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종으로 하여금 그런 생명의 위협과 수치를 당하게 보고만 계신단 말입니까 아마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를 철옹성 같은 바로의 궁으로 들여보내고 큰 재산 을 얻고 돌아와서 슬픔도 기쁨도 아닌 심한 무기력증을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아내가 죽어서 헤어졌다면 이런 비통함은 없었겠지만 다른 남자의 품에 보내 놓고 남자는 살았다고 눈을 뜨고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너무도 생 생하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런 사나운 세상, 아 무 권리로 연고도 없는 땅에서 어떻게 나라를 세우고, 사랑하는 아내도 빼앗긴 주 제에 무슨 아들타령이 나옵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이 처음으로 선사한 것은 이런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음에 두고 잠잠히 견디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으면 자신의 판단으로 그렇게 밖에는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수치를 당하거나 죽는 것이 쉽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지키는 것은 자신이 죽는 일이었습니다. 아내를 내 어주고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남자로서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에 대한 사형 선고입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가슴이 텅 빈 생명 뿐입니다. 아브라함 의 의로운 심령이 갈갈이 찢기고 상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 항변하지 않습니다. 사래도 묵묵히 남편이 지시한 길을 갑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여기서 이제 일은 다 끝났습니다. 하란을 떠날 때에 갈 바 를 알지 못한 그 길의 끝이 바로 여기일까요 절망의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인간은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희망이 아닙니다. 때로는 절망보다 더욱 어두운 회색입니다. 침묵의 시간, 기다리면서도 실은 기다릴 것이 없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 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로는 한 색다른 미모의 여자 때문에 생애에 있어서 가 장 큰 공포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사래의 일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정작 억울한 사람은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해 오던 대로 해봄직한 일을 했 을 뿐인데 그에 대하여 치룬 댓가는 엄청났습니다. 그 재앙이 무엇인지 성경은 말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20장의 비슷한 경우로 보아 사래의 몸에 손도 대기 전에 급작스러운 변고와 함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실을 알리시고 크게 책망 하셨을 것이니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이며 급히 그 일을 처리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른 바로는 마치 자신은 책임과 잘못이 없고 의로운 양 오히려 아 브라함을 꾸짖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였더라도 남편을 해하고 사래를 취했을 바 로와 그 신하들이 의로운 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큰 재 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0장의 아비멜렉의 경우에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 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복을 얻게 하셨지만 바로의 경우에는 지금까지의 그의 악행으로 보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바로와 대면한 아브라함은 아마 왕의 심각한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를 다시 소환한 이유를 알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의 큰 일을 목도하고 크게 압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가장 극적으로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손 은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는 결정적 인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미 체념하고 포기해 버린 시간, 마지막 기대와 꿈이 다 산산조각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치도 못하는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에게 눈을 고정시켜 나를 중심으로 문제를 파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문제의 근원과 핵 심에서 일을 하시므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일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키 위하여 취한 일련의 행위에는 아브라 함이 아직 그것을 이길만한 믿음의 분량만큼 장성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어디 까지나 인간적인 안목으로 판단하고 취한 행동이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행위는 아 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도록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가 받은 계시의 분량과 아브라함이 그 시대에 받은 계시의 분량을 생각할 때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말씀으로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 시대에 계시가 문자화 되어 책으로 엮어진 것은 아 직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만 아브라함에게 계시를 주셨고 아들과 땅 에 대한 약속을 주셨을 뿐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으로 부터 어떠 한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어 나그네로서 큰 타격을 당하고 있는데 도 하나님으로 부터는 아무런 말씀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답답했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라기 보다는 아 직 그만한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기근을 피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 을 뒤로 하고 애굽에 내려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화된 책으로 성경을 받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음의 올바른 자세를 보이지 못하는 것과 아브라함의 태도와 비교해 볼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돋보이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말씀으로만 계시가 있어도 거기에 순종하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히브리서에 아브라함의 행위가 믿음으로 한 일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의 기근에 대처한 방법은 다분히 육의 방식대 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약속의 씨가 출생할 터전인 사래의 정절이 더 럽혀지게 되는 위기상황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 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위기였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행사와 바로의 악행을 그대 로 방치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그 나라 건설은 지독한 방해를 받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자기의 구원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인간들 의 행사에 간섭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아직 사래를 더럽히 기 전에 바로와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시는 방식으로 사래를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역사로 아브라함의 결혼관계가 보존되었습니다. 결 국 사래는 약속된 자녀와 약속된 백성의 어미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어느날엔 가 구주 예수께서 그 백성 중에서 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아브라함 과 사래의 결혼관계는 파괴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모든 것 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성숙한 신앙을 지녔다면 애굽에 내려갈 때에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 만한 믿음있는 태도를 보일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간 섭하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성숙한 신앙에 이르도록 훈련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간섭에 의해서 사래는 사자의 입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녀는 여자이지만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남편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부 부간의 사랑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져 한낱 부부의 사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동반자(동지)의 관계로 성숙되어 갑니다. 사래는 자 신이 아브라함의 아내로 지켜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데에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를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래는 사랑과 함께 남편을 얻었습니다. 그 두 부부는 애굽의 수치와 절망에서 "임마누 엘"이라는 생명과 복과 힘을 얻어 나왔습니다.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남자로 서의 자존심까지 모두 거두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와 이름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권세있고 부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겨우 연명하기 위해서 초라하게 애굽으로 왔으나 애굽을 나 갈 때는 바로에게서 돌려받은 여자와 바로의 소유를 이끌고 당당하게 나올 수 있 었습니다. 그것도 바로의 왕권이 미치는 지역에 한해서 보호를 받는 당당한 권세 로 애굽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세울 선택자 가 당시 세계제국인 애굽에서 큰 환대를 받게 하시므로 장차 이루실 그 나라의 권세가 무궁함을 잠시 보이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감히 바로의 여자를 취하며 바로의 소유를 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육축과 은금과 종들이 풍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에 대한 댓가는 너무 풍성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감히 바로와 견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 었습니다. 애굽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그는 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이 상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브라함의 가슴을 가득 채운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으셔도 갖가지 신들의 도움을 받는 애굽의 바로까지 굴복시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대제국의 왕실을 심판하사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하나님, 하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겨우 가나안까지만 오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분을 알고 친숙 히 사귀는 것이 우리의 영생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아브라함은 상당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세상 축복받는 비결로 생각해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내 욕심만 채우는 어리석음만 남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주셨 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하란에서 온 종들만 가지고는 아브라함의 생명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 적성세계 속에 사는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존하기에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많은 재산은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 상당한 힘을 주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생명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기 위해서 많은 관 문을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난했다면 어느 누구든지 쉽게 아브라함 에게 접근해 갈 수가 있었을 터이지만 아브라함의 부요함은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 존하는 데에 상당한 효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보호의 섭리가 없었더라면 아브라함의 생명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보호하시는 손길 이 없었다면 우리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몇번이나 죽을 고비가 있었는데 거기서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들을 보존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서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닌 모든 것들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로 주신 것들이지 내가 사치하고 향락을 누리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계속 되풀이 해서 묵상하 고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기대가 늘 하나님의 것을 대신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애굽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입니까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오히려 악화될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은 더욱 아니지만 그 때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 음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 운 속죄와 부활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령님의 실제적인 사역으로 이미 시작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늘 환난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님의 일이 오래된 일이어서 효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그 효력이 온갖 복된 것들을 베푸시기에 부족할만한 것이어서도 아닙니다. 성령님의 일 하심은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 귀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고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교제할 여유와 틈이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참으로 굳고 무심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상식과 처세술과 의식주의 문제로 우리는 분주합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으로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너무 작고 시시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벗겨 내시고 거두십니다. 그리고 분주하지 않도록 절망하게 하시고 무기력하게 만드십니다. 형통하는 것과 잘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배우면 우리에게는 대부분 교 만과 자긍심만 가득찹니다. 우리의 본성이 누구의 간섭과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 과 지혜로 살아 스스로 만족하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려는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갖 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의 공로로 여겨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일의 영광스러움을 결코 피조물과 함께 나 누어 갖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심이 합당합니다. 특히 범죄한 피조 물의 본성이 늘 하나님의 영광을 탐내어 모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필 연코 자멸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은혜되게 하시려고 그의 종들을 혹심한 고난의 길로 몰아 넣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나타나시거나 설명해 주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 령과 약속을 마음에 묻어두고 그 고난을 마지막까지 다 당하였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이해를 가지고 어떤 환란이라도 능 히 견딜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설명과 지침이 와 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말씀으로 자라기를 거절하는 불신앙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 당할 때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러한 일들을 영웅적으로 이겨냈다고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속으로는 의심이 일어나고 이런 일을 당하는 자신이 미우면서도 믿음이 굉장 한 것처럼 위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역전 드라마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의로운 아브라함이 악한 사회 구조와 질서 속에서 그의 심령 을 얼마나 상하였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길을, 좁고 협착하게 보 이는 길을 묵묵히 갔습니다. 하란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결국 풍성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환란과 고난을 생소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우는 길입니다. 아브람으로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그리스도의 백성 만드시 려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고 간섭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결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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