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덤불 (창3:16-19)
본문
창3;15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저주의 말씀이다. 그러면서도 뱀과함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에게 은혜의 길을 예비하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말씀이었다. 오는 주일이 성례주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살찢어 주시고 피 흘려 주심을 기념하면서 떡과 잔을 나누는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이미 이 길을 에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예비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에서 십자가 지시고 죽으심으로 완성이 되었던 것이다.
1,여자에게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일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4절에서 뱀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분명 "저주"를 말씀하셨는데 뱀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여자인 하와에게 저주 없이 말씀하신다. 그 첫째가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심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분명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잉태라는 말씀은 생명의 연장인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죽을 수 박에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영원한 죽음에서는 해방이 되 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는 죽고 없어지나 나를 통한 새로운 생명의 연장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한 생명을 잉태키 위하여는 크게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고통"이란 단어가 아주 흥미롭다. 이 고통이란 단어는 "나무"를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마라히면 이 고통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대가로 주어지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수고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다. 이 말은 나무의 열매만 따 먹지 않았다면 수고로이 자식을 낳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자식 새기 낳을 때 사람만큼 더 분답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산짐승 들짐승 날짐승 집짐승 세째는 남편을 사모하면서 살게 되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은 잘 아는대로 남편에게 단 한마디도 의논도 하지 않고 뱀의 지시를 따랐던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는 뱀의 지시같은 것을 따르지 못하게 하시려고 주종관계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했다. 물론 이 말씀은 학대와 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게서 신체의 모든 구조를 달리 하셨던 것은 보호와 인도 그리고 책임을 지게 끔 만드셨던 것이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남편의 다스림을 받기는커녕 지배하는 여자가 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기처가, 공처가, 진처가. 그래서 지배력을 앓은 남편도 많다. 에덴 동산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하와가 선악과를 먹다가 남편에게 준 이유가 무었일까 돕는 배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또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편에게 실과를 줌으로 지배력을 가질려고 했음이 아닐까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사실상 역사이래로 지금까지 여자들이 노예같은 위치에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챤 남편들이라면 그렇치가 않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다. 그 분이 우리들의 남편이 되는 것이다. 신랑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남김 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2,남자에게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치신 하나님은 다음 아담에게로 향했다. 여기 17절에서 주목할 것은 16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말슴을 하셨는가 하와인가 아니다. 여자였다.
그런데 17절은 왜 남자에게라고 하지 않고 "아담"에게라고 하시고 있는가이다. 물론 차세기 3장에 사용된 남자라는 말은 다 아담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17절의 아담 앞에는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관사가 없다는 것은 한 남자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이는 여자의 잘못된 말을 들음으로 인한 남자의 위치의 전락인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려야하는 위치가 흔들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담의 행동은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아담은 하나님게서 특별히 금하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반대인 여자의 말을 더 들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었던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 때문이었다. 또 아담도 그 큭별한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자의 말을 듣고 나무의 실과를 먹고난 후로는 임무 수행에 변화가 생기 기 시작한 것이다. 즐거움이 아니고 고통과 수고로운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종신토록 . 여러분은 여러분의 책임을 어떤 자세로 감당하고 있는가 주의 일 교회 일 가장 일
3,자연에게 18-19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컹귀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내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저주를 받아아 하는데 아담으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다. 땅 ! 얼마나 소중한 땅인가 인간이 무었으로 만들어 졌는가 토양은 인간의 질료인 것이다. 즉 토양에서 나온 이름이 아담인 것이다. 그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곧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가시덤불과 엉컹귀를 내게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걸작품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뱀의 말을 들음으로 인하여 가시덤불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모든 인간들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시덤불과 같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인간이 회개하면서 산다는 것은 가시투성인 장미 꽃에서 향내나는 백합화로 변화되고 있다는 말고 같은 것이다. 인류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시었던 예수께서 최후에 그의 머리에 쓰셨던 것이 무었인가 "가시면류과"을 왜 쓰셔야 했는가 자기를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오신 예수의 머리에 끝까지 가시면류관을 역거서 쉬웠던 게 누군가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가 어떤 향내가 진동하고 하고 있는가 정말 백합화의 향내를 내고 있는가 바람이 불수록 역경이 심할 수록 더 향내가 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우리들의 본래의 위치를 바로 찾아 가자.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본래의 목적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자. 나에게 부여하신 주님의 일이 부담이 아니라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느껴질 때까지 작은 일부터 충성하자.
1,여자에게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일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4절에서 뱀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분명 "저주"를 말씀하셨는데 뱀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여자인 하와에게 저주 없이 말씀하신다. 그 첫째가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심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분명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잉태라는 말씀은 생명의 연장인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죽을 수 박에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영원한 죽음에서는 해방이 되 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는 죽고 없어지나 나를 통한 새로운 생명의 연장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한 생명을 잉태키 위하여는 크게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고통"이란 단어가 아주 흥미롭다. 이 고통이란 단어는 "나무"를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마라히면 이 고통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대가로 주어지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수고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다. 이 말은 나무의 열매만 따 먹지 않았다면 수고로이 자식을 낳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자식 새기 낳을 때 사람만큼 더 분답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산짐승 들짐승 날짐승 집짐승 세째는 남편을 사모하면서 살게 되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은 잘 아는대로 남편에게 단 한마디도 의논도 하지 않고 뱀의 지시를 따랐던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는 뱀의 지시같은 것을 따르지 못하게 하시려고 주종관계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했다. 물론 이 말씀은 학대와 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게서 신체의 모든 구조를 달리 하셨던 것은 보호와 인도 그리고 책임을 지게 끔 만드셨던 것이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남편의 다스림을 받기는커녕 지배하는 여자가 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기처가, 공처가, 진처가. 그래서 지배력을 앓은 남편도 많다. 에덴 동산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하와가 선악과를 먹다가 남편에게 준 이유가 무었일까 돕는 배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또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편에게 실과를 줌으로 지배력을 가질려고 했음이 아닐까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사실상 역사이래로 지금까지 여자들이 노예같은 위치에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챤 남편들이라면 그렇치가 않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다. 그 분이 우리들의 남편이 되는 것이다. 신랑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남김 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2,남자에게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치신 하나님은 다음 아담에게로 향했다. 여기 17절에서 주목할 것은 16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말슴을 하셨는가 하와인가 아니다. 여자였다.
그런데 17절은 왜 남자에게라고 하지 않고 "아담"에게라고 하시고 있는가이다. 물론 차세기 3장에 사용된 남자라는 말은 다 아담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17절의 아담 앞에는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관사가 없다는 것은 한 남자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이는 여자의 잘못된 말을 들음으로 인한 남자의 위치의 전락인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려야하는 위치가 흔들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담의 행동은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아담은 하나님게서 특별히 금하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반대인 여자의 말을 더 들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었던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 때문이었다. 또 아담도 그 큭별한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자의 말을 듣고 나무의 실과를 먹고난 후로는 임무 수행에 변화가 생기 기 시작한 것이다. 즐거움이 아니고 고통과 수고로운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종신토록 . 여러분은 여러분의 책임을 어떤 자세로 감당하고 있는가 주의 일 교회 일 가장 일
3,자연에게 18-19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컹귀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내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저주를 받아아 하는데 아담으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다. 땅 ! 얼마나 소중한 땅인가 인간이 무었으로 만들어 졌는가 토양은 인간의 질료인 것이다. 즉 토양에서 나온 이름이 아담인 것이다. 그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곧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가시덤불과 엉컹귀를 내게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걸작품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뱀의 말을 들음으로 인하여 가시덤불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모든 인간들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시덤불과 같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인간이 회개하면서 산다는 것은 가시투성인 장미 꽃에서 향내나는 백합화로 변화되고 있다는 말고 같은 것이다. 인류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시었던 예수께서 최후에 그의 머리에 쓰셨던 것이 무었인가 "가시면류과"을 왜 쓰셔야 했는가 자기를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오신 예수의 머리에 끝까지 가시면류관을 역거서 쉬웠던 게 누군가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가 어떤 향내가 진동하고 하고 있는가 정말 백합화의 향내를 내고 있는가 바람이 불수록 역경이 심할 수록 더 향내가 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우리들의 본래의 위치를 바로 찾아 가자.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본래의 목적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자. 나에게 부여하신 주님의 일이 부담이 아니라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느껴질 때까지 작은 일부터 충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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