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온누리에 (창1:26-31)
본문
미국의 20대 대통령을 지냈던 제임스 아브라함 갓휠드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한 이야기는 참으로 소중한 교훈과 깊은 감동을 우리에게 줍니다. '갓필드가 국 민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사회시간에 선생님은 '너희들은 이 다음에 커서 무엇 이 될래'라고 저들의 장래의 소망과 꿈을 물었습니다. 그 때 여러 아이들이 다투 어 손을 들면서 자기 나름의 바램을 말했습니다. 커서 장군이 되겠다는 남자아 이도 있었고, 명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여자 아이도 있었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남자 아이, 간호원이 되겠다는 여자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만 히 보니깐 갓필드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아필드야, 너는 이 다음에 커서 무 엇이 되겠니' 그랬더니 그 가아필드의 대답이 '예, 선생님. 저는 이 다음에 커 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금방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런 바보 녀석, 우리가 다 사람인데 또 사람이 돼 저 녀석 좀 모자라는거 아 니야' 친구들의 조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얼굴은 달랐습니다. 선생님의 입가엔 그런 조롱섞인 웃음이 아닌 대견하다는듯한 흐뭇 한 웃음이 띠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다가 선생님의 얼굴을 보더 니 한 아이, 두 아이 웃음을 그쳤습니다.
1, 2분 사이에 교실 안은 조용해졌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가아필드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우리 귀에 들려왔던 말 중에 하나가 '인간 상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번번히 제기할 정도로 믿 기지 않는 일들, 있어서는 안될 사건들이 빈번했던 그런 한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해를 평가할 때 늘 빠지지 않는 문구가 바로 '인륜이 무너졌던 한해'라는 것입니다. 그런 1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가장 마음 쓰이는 부 분이 바로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은 무엇이고 삶은 무엇 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동기회 송년모임이 있어서 서울엘 갔었습니다. 여러 목사들이 함 께 모여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동문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우리'를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 해를 '우리'로서 살아왔 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우리'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살고 있거나 아니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 고 있지는 않습니까." 듣고 보니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 질 문은 한 해를 보내는 송년의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서 살아가는게 아니라 돈이나 명예나 학위를 살고 있거나, 그런 것을 목표삼아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면서 그 물음들을 곰곰히 되씹 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서 정말 지난 한 해동안 나의 삶이 그러지 않았노라고 자신있게 머리를 내저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알게 모 르게 '껍데기 인생'을 살아갈 때가 많은 것입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물음을 잊어버린데 있다'고 어느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자기 정체를 밝히지 못함으로써, 무엇이 참된 실존인지를 알지 못 함으로써 사람은 잘못된 자기 정체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자기인양 여겨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허황된 삶, 이지러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모르는 것은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아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를 잘못가짐에서 세상은 자꾸만 망가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무엇으로 살았습니까 또 이 한해를 무엇 으로 살아가시렵니까 돈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일로 살아가시렵니까 그런 것 들로 살아가는 자기가 자기가 아님을 우리는 이 새해 벽두에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델피의 아폴로 신전 문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 새 겨져 있습니다. 이 문구를 자기성찰의 뜻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 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자기를 앎으로써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되고 자기 자신을 모름으로써 숱한 악과 도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온갖 사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들은 모두 자기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자기 이해는 자신을 문제로 서 파악하는 데서부터 싹틉니다. 자신을 비판적인 눈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것 입니다. 자기 이해를 갖는 인생이냐, 자기 이해를 상실한 인생이냐에 따라서 인간은 엄청나게 다른 현실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여느 피조물과 달리 만들어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맨 마지막에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하나님 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결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다른 피조물을 만들 때와는 달리 천상회의와 결의를 통해서 인간창조는 계획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창세기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과 다른 인간에 대해서 역사는 항상 찬양과 조소라는 상반 된 평가를 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하늘의 걸작품'이라고 찬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을 '자연의 유일한 실패작'이라고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그 둘 사이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위대한 위인일 수 도 있고,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한해동안 실감했었습니다.
그럼 사람이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한해를 자기자신에 대 한 분명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한 해의 삶이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면 촛점이 잘 맞은 사진은 선명하지만 촛점이 맞지않은 사람은 흐릿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알고 걷는 이 한해와 자기를 모 르고 걷는 이 한해는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가 기 억해야할 사실은 인간 창조는 굉장히 진지한 작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인간창조는 하나님의 다부진 결의를 통해서 이제까지의 모든 창조 사업보다 더욱 의미깊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우리가 사람 을 만들자!"는 하나님의 결의와, '남자와 여자의 창조'라는, '마지막 날 마지막 순 간의 창조사역'은 종전의 그 어떤 창조사역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열성적인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의 경우들은 그냥 '있어라', '되어 라', '내어라'하고 말씀 한마디로 끝을 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냥 '생겨라'한 게 아니라 '사람을 만들자. 만들어서 이런이런 일을 하게 하자'하고 생각하신 다음 하나님께서 지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먼저 사람을 지어내야겠다는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 뜻이란 앞으로 사람이 생겨나서 해야 할 '일'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가 할 '일'이 먼저 마련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바로 사람의 특별 함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일을 부여받았습니다. '특별히 너는 이런이런 일 을 해야 한다'라고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사람이기에 해야 만 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냥 먹고 자고 결혼하고 자식낳고 하는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노릇을 해야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 요한 것은 그 '일'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마련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 이 해야할 일이 있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까 하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형상'이라는 말은 모조품, 또는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형상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 우상으로 쓰였 다고 하면서 좋은 단어가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여기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권'을 말합니다. 세상의 왕들이 그들이 몸소 행차할 수 없는 지방에다가는 그들의 통치권에 대한 상징으로서 자기 자신의 초상을 세우곤 했는데 인간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초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귀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모습 을 가지고 지상에 세워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보존하고 강화하도 록 촉구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창조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의미를 줍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 긴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은 전적으 로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손에 위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이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먼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말 하자면 인간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말을 걸고 또 하나님 앞에서 머 리를 숙여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이란 바로 이 일입니다. 우리는 '일'하면 사업, 장사, 공부, 직장출근만을 생각합니다만은 그건 진짜 '일' 이 아닙니다. 진짜 일은 바로 이것,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의 여러분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여기 서 일회적으로 끝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의 일상 속에 잇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이것 을 상실해 버리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대면하는 데에서만이 인간은 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마주 서 있지 않은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하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규정짓는 표현입니다. '형상'이라는 단어가 '그림자'라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가까이에 서 그분과 교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 본연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다스려 가야할 책임과 특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비추는 것으로 실체와 닮은꼴입니다. 실체를 왜곡시켜 비 추는 그림자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림자는 실체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에게 부여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스리게 하자"하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당신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스 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 이러한 놀라운 은총을 부여받고 인간은 태어났고 다스림에 필요한 모든 여건들을 부여받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만물의 영장으로 서의 인간의 자긍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통치권이 타락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통치권이 타락되면 폭군도 나올 수 있고 노예도 나올 수 있습니다. 다스 리라는 말은 곧 책임을 지라는 말과도 같은데 다스리는 자는 그가 누리는 자유 만큼 그가 가진 의무가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는 뜻은 사랑과 질서와 조화를 의미합니다. 관심과 보호와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잡아먹고 죽이고 없애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결코 땅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을 때 어떤 사태가 야기되었습니까 저의 어린시절의 추억이 서려있는 고향 영동지방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옵니다. 한번 왔다 하면 키가 넘을 정도로 많이 옵니다. 그렇게 폭설이 내리면 산에 사는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어 동리로 모여듭니다. 노류, 토끼, 꿩 등등이 내려오 면 사람들은 올무를 놓아 동물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눈만 오면 동물들 이 배고파 동리로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마구 사냥을 하곤 했습니다. 저도 거기 에 섞여서 토끼를 쫑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외국영화를 보는데 거기에 영 다른 장면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온 어느날 온 동네 사람 들이 나와서 동물들이 굶지 않게 눈 위에다 신문지를 깔고 많은 먹이를 놓아주 며 멀리서 즐겁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바로 저거구 나' 싶었습니다. '저게 진짜 사람의 모습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짐승들이 먹 을게 없어 동리로 내려오면 저들처럼 먹을 것을 좀 나누어 주는 것이 원칙이지, 그것을 기회로 그 짐승들을 잡아먹겠다는 발상은 너무도 고약한 것 아닙니까 다스리라는 것은 굶으면 먹이라는 뜻이고 보호하고 사랑하라는 뜻인데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자기 배만을 채우는 왜곡된 인간상,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 다 적용됩니다.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통해서 우리가 할 일은 봉사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그것을 기회로 자기 주머니 를 가득 채우려 하지 않습니까 기업도 어떻게든 이윤이 많이 남으면 되는 것이 고, 장사도 어쨋든 내 배가 불러야 되는 것이고, 공복의 자리인 공무원조차도 한탕 버는 기회로 자기 자리를 이해하다보니 사회가 엉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자 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 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런 인간 본연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능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 해서 우리의 생명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잃어버 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해 사람이기 위해서,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와의 더욱 깊은 관계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만이 생명을 누리는 것에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 를 모은 '탈무드'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 도 이 구절이 나옵니다만은 "한 사람을 구원한 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한 것이 다"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어째서 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고 묻고 이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파멸시킨 것은 모든 사람을 파멸시킨 것과 같고 한 사람을 구원한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한 것과 같다는 점 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만이 생명을 누리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인간 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곧 타락의 첫 표징이었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런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서 세계는 망가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도 인간은 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 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분의 정원인 이 지구를 잘 가꾸도록 위임받은 정원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 임과 의무를 다 해야합니다. 이 지구가 더 이상 인간의 욕심이 난무하는 착취와 파괴의 장소가 되게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다스 리는 그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세계'였다고 31절은 증거합니다. 이 것은 전적으로 완벽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 까. 올 한해는 무엇보다 '생명'에 집중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물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에만 관심하지 마 시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살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해 서 생명을 온누리에 심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란 말을 전하는 심부 름꾼이다. 그런데 그 전해야 할 말을 잊어버린 심부름꾼이다." 옆집에 옮겨주어 야할 말도 까맣게 까먹고 말았고 그럼으로서 자기 할일도 잊어버린 존재가 바로 현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잊어버린 것을 되살려 이 동 터 오는 새해를 맞 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엿새동안 창조된 것 그 어떤 것들보다 더 높 은 질의 존재였습니다. 오늘 이 주일은 바로 그런 도약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 신 은총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님의 날을 통해서 동물적 삶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 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인생인가를 아는 자기 이해에서 이 한해는 더욱 뚜렷하고 의미깊은 나날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잊고 사는 많은 인생들에게 저들이 잊고 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자인데도 양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수리인데도 닭인줄 알고 사는 인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들 속에 생명을 심어가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온누리에 심어가는 우리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온누리에 펼쳐 가는 우리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보전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이 시대에 구미영락교회의 한 지체였 음을 뿌듯해 할 수 있는 그런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져오는 이 한해되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얼굴은 달랐습니다. 선생님의 입가엔 그런 조롱섞인 웃음이 아닌 대견하다는듯한 흐뭇 한 웃음이 띠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다가 선생님의 얼굴을 보더 니 한 아이, 두 아이 웃음을 그쳤습니다.
1, 2분 사이에 교실 안은 조용해졌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가아필드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우리 귀에 들려왔던 말 중에 하나가 '인간 상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번번히 제기할 정도로 믿 기지 않는 일들, 있어서는 안될 사건들이 빈번했던 그런 한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해를 평가할 때 늘 빠지지 않는 문구가 바로 '인륜이 무너졌던 한해'라는 것입니다. 그런 1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가장 마음 쓰이는 부 분이 바로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은 무엇이고 삶은 무엇 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동기회 송년모임이 있어서 서울엘 갔었습니다. 여러 목사들이 함 께 모여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동문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우리'를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 해를 '우리'로서 살아왔 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우리'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살고 있거나 아니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 고 있지는 않습니까." 듣고 보니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 질 문은 한 해를 보내는 송년의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서 살아가는게 아니라 돈이나 명예나 학위를 살고 있거나, 그런 것을 목표삼아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면서 그 물음들을 곰곰히 되씹 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서 정말 지난 한 해동안 나의 삶이 그러지 않았노라고 자신있게 머리를 내저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알게 모 르게 '껍데기 인생'을 살아갈 때가 많은 것입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물음을 잊어버린데 있다'고 어느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자기 정체를 밝히지 못함으로써, 무엇이 참된 실존인지를 알지 못 함으로써 사람은 잘못된 자기 정체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자기인양 여겨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허황된 삶, 이지러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모르는 것은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아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를 잘못가짐에서 세상은 자꾸만 망가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무엇으로 살았습니까 또 이 한해를 무엇 으로 살아가시렵니까 돈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일로 살아가시렵니까 그런 것 들로 살아가는 자기가 자기가 아님을 우리는 이 새해 벽두에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델피의 아폴로 신전 문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 새 겨져 있습니다. 이 문구를 자기성찰의 뜻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 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자기를 앎으로써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되고 자기 자신을 모름으로써 숱한 악과 도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온갖 사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들은 모두 자기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자기 이해는 자신을 문제로 서 파악하는 데서부터 싹틉니다. 자신을 비판적인 눈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것 입니다. 자기 이해를 갖는 인생이냐, 자기 이해를 상실한 인생이냐에 따라서 인간은 엄청나게 다른 현실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여느 피조물과 달리 만들어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맨 마지막에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하나님 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결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다른 피조물을 만들 때와는 달리 천상회의와 결의를 통해서 인간창조는 계획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창세기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과 다른 인간에 대해서 역사는 항상 찬양과 조소라는 상반 된 평가를 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하늘의 걸작품'이라고 찬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을 '자연의 유일한 실패작'이라고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그 둘 사이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위대한 위인일 수 도 있고,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한해동안 실감했었습니다.
그럼 사람이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한해를 자기자신에 대 한 분명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한 해의 삶이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면 촛점이 잘 맞은 사진은 선명하지만 촛점이 맞지않은 사람은 흐릿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알고 걷는 이 한해와 자기를 모 르고 걷는 이 한해는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가 기 억해야할 사실은 인간 창조는 굉장히 진지한 작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인간창조는 하나님의 다부진 결의를 통해서 이제까지의 모든 창조 사업보다 더욱 의미깊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우리가 사람 을 만들자!"는 하나님의 결의와, '남자와 여자의 창조'라는, '마지막 날 마지막 순 간의 창조사역'은 종전의 그 어떤 창조사역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열성적인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의 경우들은 그냥 '있어라', '되어 라', '내어라'하고 말씀 한마디로 끝을 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냥 '생겨라'한 게 아니라 '사람을 만들자. 만들어서 이런이런 일을 하게 하자'하고 생각하신 다음 하나님께서 지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먼저 사람을 지어내야겠다는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 뜻이란 앞으로 사람이 생겨나서 해야 할 '일'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가 할 '일'이 먼저 마련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바로 사람의 특별 함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일을 부여받았습니다. '특별히 너는 이런이런 일 을 해야 한다'라고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사람이기에 해야 만 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냥 먹고 자고 결혼하고 자식낳고 하는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노릇을 해야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 요한 것은 그 '일'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마련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 이 해야할 일이 있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까 하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형상'이라는 말은 모조품, 또는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형상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 우상으로 쓰였 다고 하면서 좋은 단어가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여기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권'을 말합니다. 세상의 왕들이 그들이 몸소 행차할 수 없는 지방에다가는 그들의 통치권에 대한 상징으로서 자기 자신의 초상을 세우곤 했는데 인간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초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귀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모습 을 가지고 지상에 세워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보존하고 강화하도 록 촉구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창조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의미를 줍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 긴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은 전적으 로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손에 위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이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먼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말 하자면 인간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말을 걸고 또 하나님 앞에서 머 리를 숙여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이란 바로 이 일입니다. 우리는 '일'하면 사업, 장사, 공부, 직장출근만을 생각합니다만은 그건 진짜 '일' 이 아닙니다. 진짜 일은 바로 이것,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의 여러분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여기 서 일회적으로 끝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의 일상 속에 잇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이것 을 상실해 버리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대면하는 데에서만이 인간은 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마주 서 있지 않은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하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규정짓는 표현입니다. '형상'이라는 단어가 '그림자'라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가까이에 서 그분과 교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 본연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다스려 가야할 책임과 특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비추는 것으로 실체와 닮은꼴입니다. 실체를 왜곡시켜 비 추는 그림자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림자는 실체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에게 부여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스리게 하자"하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당신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스 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 이러한 놀라운 은총을 부여받고 인간은 태어났고 다스림에 필요한 모든 여건들을 부여받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만물의 영장으로 서의 인간의 자긍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통치권이 타락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통치권이 타락되면 폭군도 나올 수 있고 노예도 나올 수 있습니다. 다스 리라는 말은 곧 책임을 지라는 말과도 같은데 다스리는 자는 그가 누리는 자유 만큼 그가 가진 의무가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는 뜻은 사랑과 질서와 조화를 의미합니다. 관심과 보호와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잡아먹고 죽이고 없애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결코 땅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을 때 어떤 사태가 야기되었습니까 저의 어린시절의 추억이 서려있는 고향 영동지방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옵니다. 한번 왔다 하면 키가 넘을 정도로 많이 옵니다. 그렇게 폭설이 내리면 산에 사는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어 동리로 모여듭니다. 노류, 토끼, 꿩 등등이 내려오 면 사람들은 올무를 놓아 동물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눈만 오면 동물들 이 배고파 동리로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마구 사냥을 하곤 했습니다. 저도 거기 에 섞여서 토끼를 쫑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외국영화를 보는데 거기에 영 다른 장면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온 어느날 온 동네 사람 들이 나와서 동물들이 굶지 않게 눈 위에다 신문지를 깔고 많은 먹이를 놓아주 며 멀리서 즐겁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바로 저거구 나' 싶었습니다. '저게 진짜 사람의 모습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짐승들이 먹 을게 없어 동리로 내려오면 저들처럼 먹을 것을 좀 나누어 주는 것이 원칙이지, 그것을 기회로 그 짐승들을 잡아먹겠다는 발상은 너무도 고약한 것 아닙니까 다스리라는 것은 굶으면 먹이라는 뜻이고 보호하고 사랑하라는 뜻인데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자기 배만을 채우는 왜곡된 인간상,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 다 적용됩니다.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통해서 우리가 할 일은 봉사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그것을 기회로 자기 주머니 를 가득 채우려 하지 않습니까 기업도 어떻게든 이윤이 많이 남으면 되는 것이 고, 장사도 어쨋든 내 배가 불러야 되는 것이고, 공복의 자리인 공무원조차도 한탕 버는 기회로 자기 자리를 이해하다보니 사회가 엉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자 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 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런 인간 본연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능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 해서 우리의 생명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잃어버 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해 사람이기 위해서,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와의 더욱 깊은 관계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만이 생명을 누리는 것에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 를 모은 '탈무드'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 도 이 구절이 나옵니다만은 "한 사람을 구원한 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한 것이 다"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어째서 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고 묻고 이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파멸시킨 것은 모든 사람을 파멸시킨 것과 같고 한 사람을 구원한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한 것과 같다는 점 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만이 생명을 누리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인간 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곧 타락의 첫 표징이었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런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서 세계는 망가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도 인간은 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 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분의 정원인 이 지구를 잘 가꾸도록 위임받은 정원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 임과 의무를 다 해야합니다. 이 지구가 더 이상 인간의 욕심이 난무하는 착취와 파괴의 장소가 되게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다스 리는 그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세계'였다고 31절은 증거합니다. 이 것은 전적으로 완벽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 까. 올 한해는 무엇보다 '생명'에 집중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물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에만 관심하지 마 시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살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해 서 생명을 온누리에 심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란 말을 전하는 심부 름꾼이다. 그런데 그 전해야 할 말을 잊어버린 심부름꾼이다." 옆집에 옮겨주어 야할 말도 까맣게 까먹고 말았고 그럼으로서 자기 할일도 잊어버린 존재가 바로 현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잊어버린 것을 되살려 이 동 터 오는 새해를 맞 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엿새동안 창조된 것 그 어떤 것들보다 더 높 은 질의 존재였습니다. 오늘 이 주일은 바로 그런 도약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 신 은총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님의 날을 통해서 동물적 삶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 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인생인가를 아는 자기 이해에서 이 한해는 더욱 뚜렷하고 의미깊은 나날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잊고 사는 많은 인생들에게 저들이 잊고 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자인데도 양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수리인데도 닭인줄 알고 사는 인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들 속에 생명을 심어가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온누리에 심어가는 우리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온누리에 펼쳐 가는 우리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보전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이 시대에 구미영락교회의 한 지체였 음을 뿌듯해 할 수 있는 그런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져오는 이 한해되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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