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지는 십자가 (막15:21-22)
본문
훈련을 잘 받은 개는 며칠을 굶긴 다음에 맛있는 소고기 덩어리를 던져줘도 주인이 먹으라고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먹지 않습니다. 이런 개는 아주 비쌉니다. 중동 지역에서 아주 비싼 말은 우리 돈으로 수 십 억원도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말이냐 하면 며칠씩 물 한 방울 안 마시고 사막 길을 달려온 뒤에 물가에 갖다놔도 물을 안 마시고 주인의 허락만 떨어지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말은 겨우 몇 백 만원 고기값 밖에 안나가지만 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절제하는데 길들여진 말은 수 십 억원도 더 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가치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들은 더욱 육신의 욕망과 육신의 본능과 이기심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날마다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해야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장 24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요사이 청소년들이 제멋대로 총질하고, 제멋대로 술 마시고, 마약하고, 음란한지 아십니까 제멋대로 하게 버려 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이나 육신의 이기심이나 육신의 이해타산을 따르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해야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장 5-8절) 기독교는 금욕주의나 이원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무조건 악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절제가 있는 엄숙주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감정 기분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행동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하셨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리도전서 9장 25-27)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고린도전서 15장 31절) 단언해서 말한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달콤한 것만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마귀에게 속는 생활이요 타락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은 내 감정 기분에 맞지 않고 이해타산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1. 억지로 진 십자가 본문에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지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는데도 하나님이 그와 그의 자손이 축복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바울이 교계의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는 가운데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했는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가 나옵니다. 대부분의 주경가들이 구레네 시몬의 아들로 믿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하는 말은 구원받은 성도란 뜻이 아니라 "탁월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중요한 인물로 여길 만큼 탁월한 존재가 되는 축복을 받았고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사도 바울이 "곧 내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귀한 존재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원해서나 기쁨으로 진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졌는데도 그의 온 가정과 자손들이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 기쁨으로 해야 원칙이고 또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일을 하는데 기분이 안 내키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안 해야 되느냐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원하는 마음도 없고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타락하거나 마귀의 사람이 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억지로 십자가를 질 때가 더 많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했는데 베드로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했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을 따라 사는 생활은 육신의 정욕이나 감정과 배치되므로 사실 기쁨으로 일할 때 보다 억지로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2.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드리는 일 사탄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나가고 예배드리는 일을 몹시 싫어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기분 내킬 때만 교회에 나오고 예배 드린다면 백이면 백 다 마귀에게 속아넘어가고 결국 타락하고 맙니다. 더욱이 육신을 즐겁게 하는 생활을 위주로 한다면 주일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58장 13-14절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로다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주일날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육신의 소욕을 좇는 길을 가지 아니하고 억지로라도 주일을 지키며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영을 좇아 사는 성도의 생활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삼일 저녁에 그날 따라 삼일예배에 가기가 몹시 싫은 것을 억지로 발길을 옮겨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한 작은 모라비안 교회에 참석했는데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마틴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어 내려갈 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회심하는 체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수요일 저녁에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고 감리교회의 창시자가 되었지 교회에 가기 싫다고 안 갔으면 이런 엄청난 사건이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 그때야말로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3. 헌금생활에서 가장 좋은 헌금 방법은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고 기쁨으로 하는 것이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고 기쁨으로 드릴 마음도 없고 자원하는 마음도 안 생긴다고 안 해야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드릴 때 마음도 정성도 하나님께 가기 때문에 마귀는 몹시 싫어하고 헌금하는 것을 적극 방해합니다. 성신의 감동을 받아서 감사헌금이나 십일조 혹은 건축헌금 작정했다가도 갑자기 인색한 마음이 들면서 하기 싫어 질 때가 있습니다. 마귀가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의 사람은 억지로라도 육신의 생각을 꽉 누르고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하는 것만은 못하지만 억지로 라도 헌금하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와 달리 외국에 나가서 집회할 때는 거의 매일 밤 헌금대를 돌립니다. 보통 1불 짜리 어쩌다 5불 짜리를 합니다. 그런데 강사라고 헌금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보기 싫기 때문에 저나 제 아내는 꼭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10불, 20불 짜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어떤 때는 100불 짜리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육신의 생각으로는 아까울 때가 있지마는 사실 억지로라도 욕심을 누르고 100불 짜리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부부가 헌금한 것 제하고 나면 사례비도 별로 남는 것이 없고 고생하는 우리 교회 출신 목회자나 선교사를 만나서 몇백 불씩 나눠 주다보면 가져간 돈을 쓰고 와야 합니다. 누구는 돈 아까운 줄 모릅니까 억지로라도 바칠 때 바치고 줄 때 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축복이 오고 체험을 하고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만 헌금하고 부담 없이 헌금 생활하면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칠 때 기분 좋아서 콧노래 부르면서 모리아 산에 가서 독자를 장작더미에 올려놨겠습니까 억지로 육신의 인정, 애정을 억누르고 바쳤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감탄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엄청나게 축복해 주시고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억지로 라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편상 도저히 십일조 할 수 없을 때 억지로 라도 십일조 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복을 주나 아니 주나 시험해 보라"고 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기 싫어도 아까워도 억지로라도 드려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그 가정과 그 후손이 복을 받은 것 같이 억지로 라도 헌금을 하는 습관을 가질 때 믿음이 자라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4 억지로 하는 기도 가장 좋은 신앙은 TV 연속극 보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더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기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 기도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육신의 기분을 맞추느라고 이불을 걷어차지 못하고 쿨쿨 잠만 자면 결코 영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아무리 똑똑하고 힘센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우습게 봅니다. 얕잡아 봅니다.
반면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사람이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무서워 벌벌 떱니다. 기도가 막혀서 기도가 안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때는 벌떡 일어서야 될까요 아닙니다. 기도 막힌 것은 기도로 뚫어야 합니다. 그 말은 억지로 라도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 시간을 채워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기도를 중노동이라고 했습니다. 대체로 육신은 기도하기 싫어합니다. 힘들어합니다. 더욱이 입으로 소리내서 기도하기는 싫을 때가 많습니다. 마귀는 유행가 부르고 싸우느라고 소리지르는 것은 아주 좋아 하지만 기도의 소리를 내는 것은 아주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억지로 라도 입을 벌리고 억지로 라도 소리지를 때 성령님의 불이 떨어지고 온갖 체험을 하게 됩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듯이 신앙생활, 영을 따르는 생활에는 억지로 해야 될 때가 많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에도, 헌금하는 일에도, 봉사하는 일에도, 기도하는 데에도 억지로라도 꼭 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요사이 청소년들이 제멋대로 총질하고, 제멋대로 술 마시고, 마약하고, 음란한지 아십니까 제멋대로 하게 버려 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이나 육신의 이기심이나 육신의 이해타산을 따르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해야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장 5-8절) 기독교는 금욕주의나 이원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무조건 악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절제가 있는 엄숙주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감정 기분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행동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하셨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리도전서 9장 25-27)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고린도전서 15장 31절) 단언해서 말한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달콤한 것만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마귀에게 속는 생활이요 타락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은 내 감정 기분에 맞지 않고 이해타산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1. 억지로 진 십자가 본문에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지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는데도 하나님이 그와 그의 자손이 축복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바울이 교계의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는 가운데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했는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가 나옵니다. 대부분의 주경가들이 구레네 시몬의 아들로 믿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하는 말은 구원받은 성도란 뜻이 아니라 "탁월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중요한 인물로 여길 만큼 탁월한 존재가 되는 축복을 받았고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사도 바울이 "곧 내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귀한 존재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원해서나 기쁨으로 진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졌는데도 그의 온 가정과 자손들이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 기쁨으로 해야 원칙이고 또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일을 하는데 기분이 안 내키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안 해야 되느냐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원하는 마음도 없고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타락하거나 마귀의 사람이 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억지로 십자가를 질 때가 더 많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했는데 베드로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했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을 따라 사는 생활은 육신의 정욕이나 감정과 배치되므로 사실 기쁨으로 일할 때 보다 억지로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2.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드리는 일 사탄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나가고 예배드리는 일을 몹시 싫어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기분 내킬 때만 교회에 나오고 예배 드린다면 백이면 백 다 마귀에게 속아넘어가고 결국 타락하고 맙니다. 더욱이 육신을 즐겁게 하는 생활을 위주로 한다면 주일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58장 13-14절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로다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주일날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육신의 소욕을 좇는 길을 가지 아니하고 억지로라도 주일을 지키며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영을 좇아 사는 성도의 생활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삼일 저녁에 그날 따라 삼일예배에 가기가 몹시 싫은 것을 억지로 발길을 옮겨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한 작은 모라비안 교회에 참석했는데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마틴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어 내려갈 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회심하는 체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수요일 저녁에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고 감리교회의 창시자가 되었지 교회에 가기 싫다고 안 갔으면 이런 엄청난 사건이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 그때야말로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3. 헌금생활에서 가장 좋은 헌금 방법은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고 기쁨으로 하는 것이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고 기쁨으로 드릴 마음도 없고 자원하는 마음도 안 생긴다고 안 해야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드릴 때 마음도 정성도 하나님께 가기 때문에 마귀는 몹시 싫어하고 헌금하는 것을 적극 방해합니다. 성신의 감동을 받아서 감사헌금이나 십일조 혹은 건축헌금 작정했다가도 갑자기 인색한 마음이 들면서 하기 싫어 질 때가 있습니다. 마귀가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의 사람은 억지로라도 육신의 생각을 꽉 누르고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하는 것만은 못하지만 억지로 라도 헌금하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와 달리 외국에 나가서 집회할 때는 거의 매일 밤 헌금대를 돌립니다. 보통 1불 짜리 어쩌다 5불 짜리를 합니다. 그런데 강사라고 헌금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보기 싫기 때문에 저나 제 아내는 꼭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10불, 20불 짜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어떤 때는 100불 짜리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육신의 생각으로는 아까울 때가 있지마는 사실 억지로라도 욕심을 누르고 100불 짜리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부부가 헌금한 것 제하고 나면 사례비도 별로 남는 것이 없고 고생하는 우리 교회 출신 목회자나 선교사를 만나서 몇백 불씩 나눠 주다보면 가져간 돈을 쓰고 와야 합니다. 누구는 돈 아까운 줄 모릅니까 억지로라도 바칠 때 바치고 줄 때 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축복이 오고 체험을 하고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만 헌금하고 부담 없이 헌금 생활하면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칠 때 기분 좋아서 콧노래 부르면서 모리아 산에 가서 독자를 장작더미에 올려놨겠습니까 억지로 육신의 인정, 애정을 억누르고 바쳤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감탄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엄청나게 축복해 주시고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억지로 라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편상 도저히 십일조 할 수 없을 때 억지로 라도 십일조 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복을 주나 아니 주나 시험해 보라"고 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기 싫어도 아까워도 억지로라도 드려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그 가정과 그 후손이 복을 받은 것 같이 억지로 라도 헌금을 하는 습관을 가질 때 믿음이 자라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4 억지로 하는 기도 가장 좋은 신앙은 TV 연속극 보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더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기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 기도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육신의 기분을 맞추느라고 이불을 걷어차지 못하고 쿨쿨 잠만 자면 결코 영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아무리 똑똑하고 힘센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우습게 봅니다. 얕잡아 봅니다.
반면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사람이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무서워 벌벌 떱니다. 기도가 막혀서 기도가 안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때는 벌떡 일어서야 될까요 아닙니다. 기도 막힌 것은 기도로 뚫어야 합니다. 그 말은 억지로 라도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 시간을 채워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기도를 중노동이라고 했습니다. 대체로 육신은 기도하기 싫어합니다. 힘들어합니다. 더욱이 입으로 소리내서 기도하기는 싫을 때가 많습니다. 마귀는 유행가 부르고 싸우느라고 소리지르는 것은 아주 좋아 하지만 기도의 소리를 내는 것은 아주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억지로 라도 입을 벌리고 억지로 라도 소리지를 때 성령님의 불이 떨어지고 온갖 체험을 하게 됩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듯이 신앙생활, 영을 따르는 생활에는 억지로 해야 될 때가 많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에도, 헌금하는 일에도, 봉사하는 일에도, 기도하는 데에도 억지로라도 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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